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100세의 일기로 미국 코네티컷 자택에서 타계했다는 공식사망발표가 있자, 로이터통신 등이 지난 2023년 11월 2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키신저와 가장 까까이서 오랜 시간을 지낸 한국계 인물은 한국전쟁 고아출신으로 미국 닉슨대통령 시절 백악관 안보비서관을 지낸 스티브 림(임종덕 장로)이다.  

1953년 12월 임종덕은 자신을 입양한 양아버지 화이트 중장과 함께 미국에 도착,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풋싱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임종덕은 하버드대학교에 무난히 입학하였다. 새로 개설된 국제관계학과 학과에 입학하였는데, 이 때 주임교수가 키신저였다. 방학 때 임종덕은 “앞으로 인류 역사와 문화의 중심은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테마를 주제로 하여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이 하바드 대학교 학생 잡지에 게제가 되면서부터 이 논문은 미국의 언론과 정계에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닉슨 대통령의 외교안보 보좌관이었던 키신저는 임종덕의 논문에다 자기의 생각을 첨가해서 “중국이 앞으로 문화 중심이 될 수도 있다”고 썼다. 마침 미국의 뉴스위크가 이 글을 크게 보도했다. 

그리고 임종덕은 <2차대전 후 바이 아메리칸 정책이 아시아에 끼친 영향>이란 졸업 논문으로 하바드대학교 국제관계 정치학 박사가 된다. 1967년 임종덕은 25살의 나이로 군 입대를 해서 4년간 장교 훈련을 받았고, 주일 대사관 무관을 거쳐 월남전에 지원하여 특수부대로 전출을 갔다. 임종덕의 임무는 미군 포로수용소를 습격 미군들을 구출하는 작전을 수행하는 일이었다. 

임종덕 대위는 미군 포로를 구출하러 갔다가 자신이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기적적으로 포로수용소를 탈출했다. 당시 월남전에서 8명의 미군이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에 성공했는데 그중 임종덕 대위가 제1호 탈출이었다. 그 공로로 존손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은성 무공 훈장과 1계급 특진을 받았다.

닉슨이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닉슨은 하버드대학교 키신저 교수를 대통령 안보담당 특별 보좌관으로 임명하고, 장차 중국과의 수교를 위한 극비 연구를 지시했다. 닉슨이 키신저 교수를 보좌관으로 임명한 것은 과거 뉴스위크에 게재되었던 『21세기의 공존 공생』이란 기사를 감명 깊게 읽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기사에서 키신저가 제자인 임종덕 학생의 글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내용을 언급했는데, 닉슨은 당시 임종덕 학생을 만나기를 원했다. 키신저는 며칠 후 임종덕이 월남에서 그린베레 소령으로 근무하는 것을 확인하고 이를 닉슨에게 보고하자 ,닉슨은 즉각 임종덕을 백악관으로 불러 오라고 지시했다. 닉슨은 매우 반가운 표정으로 하바드 대학교 57년도 학생잡지를 임종덕에게 보이면서 여기 당신의 글을 관심 있게 읽었다면서 앞으로 중국이 어떻게 변하겠느냐?고 물었다. 

임종덕은 닉슨 대통령에게 “사상과 이념의 역사는 100년 이상 간 것이 없었다”는 아놀드 토인비 교수에게 들은 강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지금부터(1970년) 앞으로 40년 후에는(2010년) 지금의 중국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것이라면서 이것은 바로 군사력과도 직결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이 만일 공산주의를 포기하면 중국은 세계 문화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임종덕의 말을 다 듣고 난 닉슨 대통령은, 이날 바로 임종덕 소령을 미국 국가안전보장이사회 근무를 명했다. 임종덕은 대통령 특별안보 보좌관인 키신저의 비서 역할을 하면서 중국과의 수교를 위한 업무에 몰두했다. 당시 미국은 중국을 완전 적성국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일체의 교류가 없던 시절이다. 그래서 임종덕은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 바로 탁구 시합을 구상하게 되었다. 때마침 1971년 3월 제31회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가 일본 나고야에서 개최되었다. 임종덕은 이 대회 기간에 미국과 중국과의 탁구 경기를 상호 친선방문 개최를 은밀하게 추진했다. 

때마침 중국의 모택동이 나고야 대회가 끝나는 날인 1971년 4월 6일밤 현지에 있는 중국 대표단에게 미국 탁구선수단 초청을 지시했다. 그리하여 나고야 대회가 끝난후 3개월 만에 미국 탁구선수단이 중국의 공식 초청으로 베이징을 방문했다. 이때부터 임종덕은 중국의 실권자인 주은래와 미국의 키신저를 만나게 하는 물밑 작업을 비밀리에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임종덕은 파키스탄에서 대기중, 중국으로부터 상해로 오라는 비밀연락을 받고 달려갔다. 이 자리에서 키신저와 주은래의 회담 주선이 결정되어 1971년 6월 키신저는 임종덕을 데리고 극비리에 베이징을 방문한다. 키신저와 주은래의 베이징 비밀회담에서 미국과 중국은 서로가 적성국이지만 앞으로 수교를 하자는데 합의하고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일정까지 정했다. 키신저는 귀국길에 우방국인 일본을 방문 일본 수상에게 베이징의 비밀회담 내용을 알렸다. 한편 임종덕은 키신저에게 한국에도 이 사실을 당연히 알리자고 말하자, 키신저는 한국은 임종덕에게 직접 가라고 했다. 자신과 함께 일했던 헨리 키신저 외교안보 보좌관이 미국의 국무장관이 되면서 미, 중 외교관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백악관을 떠나야만 했던 임종덕 대령 

임종덕은 계속해서 닉슨, 포드, 카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백악관 대통령 안보 비서관으로써 세계 각국의 정보를 분석하여 대통령께 보고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한편 임종덕의 백악관 근무에 생각지도 않았던 시련이 다가왔다. 

즉 카터 대통령이 주한 미지상군을 4, 5년 사이에 완전 철수하겠다고 발표하자 주한 미군사령부 참모장 싱글러버 소장이 기자회견에서 철군 반대를 주장했다. 싱글러버 장군은 1977년 5월 17일자 워싱턴포스트지와의 대담에서 “지난 1년간의 집중적인 정보 활동결과 북한의 군사력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데도 철군 결정자들은 북한의 군사력에 대해, 2, 3년 전 낡은 정보에 근거를 두고 철군을 하려고 한다.”라고 하면서 카터의 철군 계획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즉 카터 대통령이 주한미군 지상군을 4,5년 사이에 완전 철수하겠다고 발표하자 주한 미군 사령부 참모장 싱글러버 소장이 기자회견에서 철군 반대를 주장했다. 싱글러버 장군은 1977년 5월 17일자 워싱턴포스트지와의 대담에서 “지난 1년간의 집중적인 정보 활동결과 북한의 군사력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데도 철군 결정자들은 북한의 군사력에 대해, 2,3년 전 낡은 정보에 근거를 두고 철군을 하려고 한다.”라고 하면서 카터의 철군 계획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이상과 같은 워싱턴포스트지와의 대담 기사가 나간 지 이틀 뒤, 즉 5월 19일 카터 대통령은 크게 분개하여 싱글러버 장군을 즉각 소환하라고 브라운 국방장관에게 명령했다. 즉 미군의 최고 통수권자인 자신에게 철군 반대에 대해 직접 보고 하라고 했다. 싱글러버 장군은 당시 군사정전위원회 UN군 측 수석대표에 주한 미군 사령부 참모장 등 서열에서는 제3인자의 위치였다. 미국 대통령이 해외 주둔 미군 장성을 소환한 것은 1951년 6.25 전쟁 때 트루만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을 소환한 이래 처음 있는 일 이었다. 

임종덕은 당시 카터 대통령과 싱글러버 장군과의 대담 내용은 밝힐 수 없다고 했다. 한편 카터 대통령은 싱글러버 장군을 주한미군참모장 직에서 해임시킨 뒤 어느 날 임종덕을 불러 “당신의 조국이란 입장을 떠나서 나의 철군 계획과 한반도 정책에 대해 말해 보시고”라고 질문을 했다. 임종덕은 평소의 생각대로 말했다. 즉 4만 여명의 주한 미군이 있으므로 북한이 전쟁도발을 하지 못하며 대신 한국은 경제부흥과 더불어 미국이 바라는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했음을 강조했다고 한다. 한편 임종덕이 카터에게 정면으로 강력하게 제시한 사례가 있었는데 이것이 그가 백악관을 떠나야 할 계기가 되었다. 

즉 국가안전보장 이사회에서 카터 대통령은 과거 월남전에서 도망친 도망병들을 전부 사면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에 아무도 반대 의견을 내지 못하자 임종덕은 카터의 사면 지시를 반대한다고 했다. 즉 자신이 월남전 참전용사로서 전투 중에 자기만 살겠다고 무기를 버리고 도망을 친 장병에게 대통령이 사면을 한다면 앞으로 전쟁터에서 누가 미국을 위해 생명 바쳐 전투를 하겠느냐고 말했다.  

임종덕의 반대 의견을 듣던 카터의 심기가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때 임종덕은 대령에서 장군 진급을 불과 두 달 앞두고 있었는데, 자신도 앞서 싱글러버 장군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을 느꼈다. 임종덕은 사사건건 대통령에게 결례가 되는 처신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자진해서 대통령에게 대통령 안보비서관 직에서 다른 군부대 전근을 건의 했다. 그리하여 임종덕은 미국의 어느 예비군 부대의 심리전과 창설 임무를 받고 백악관을 나섰다. 정든 백악관을 나올 때 그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 보면서 그의 발길은 교회로 향하고 있었다. 텅빈 교회안에서 그는 모처럼 하나님께 긴 시간의 감사 기도를 할 수 있었다. 임종덕은 1986년 육군대령으로 예편하면서 LA 동양선교교회 장로 장립을 받았다.

(이 외교비사는 20여년 전부터 임종덕 장로에게서 수없이 들은 이야기를 필자가 정리한 것 중의 일부이다. 백악관을 나온 이후 임종덕 장로는 여러번 키신저와 조우했다. 그 이후 이야기는 다음을 기약한다.)

                                   지구촌을 좌지우지한 인물 키신져
                                   지구촌을 좌지우지한 인물 키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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