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나를 찾아서

바로 며칠 전 2024년 10월 4일자 강원일보(江源日報) 1면에 "불 꺼진 치안센터 커지는 치안 공백" 이란 '타이틀'을 보았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강원도 내 치안센터 10곳 중 7곳이 상주 근무자가 없는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는 보도다.   

'치안센터'가 유명무실하게 되면 치안공백에 대한 불안 감은 더욱 커질수밖에 없다. 이처럼 치안의 시스템도 의료 시스템도 빨간 불이 켜진지 오래다.  긁어서 부스럼낸다 는 말이 있다. 정부 당국은 감당키 어려운 돌이킬수 없는 엄청난 일들을 저질러 놓고 불감증 환자처럼 속수무책이다. 언제쯤이면 일각이 여삼추 같은 치안과  의료의 불들이 켜질 날이 올까? 나라에서 저지른 우매정책으로  국민들만 고스란히 이 불편을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가? 

현대의 디지탈 첨단 기계보다 더 정확히 회전되어야 할 현대문명한 사회 시스템에서 절대 있어서는 아니 될 일들을 아무런 대책도 없이 저질러서 생긴 의료 공백이 일년이 다 되어 간다. 사전 조율도 없이 엄청난 재난 즉 감당없는 일들을 저질러 놓고 수많은 날 동안 의료시스템이 마비되어 국민들이 격은 이중 삼중의 고통과 인력과 재정을 소모해야 했던가? 

바로 이것이 무능 정치의 표본이다. 아마추어 당국이 하는 일들을 보고 있노라면 대부분 긁어서  부스럼만 키우고 있는 모양새다. 그래서 깔끔하게 풀려야 할 사안들을 번문욕례(繁文縟禮)와 같은 난맥들로 사회를 병들게하고 있어 암담하기만 하다.

며칠 전에 있었던 이야기다.  자신이 일하고 있는 식당에서 소주 여러병을 마치 물마시듯 마시고는 작심한듯 손에 식칼을 들고 잰 걸음으로 달려가 저만치서 아버지 약을 사들고 집으로 귀가하고 있는 십대 소녀를, 그녀와는 일면식도 없는 자가 마치 굶주린 야수가 먹잇감을 보고 달려들듯 손에 들고 나온 식칼로 무참히 살해하였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살인자는 천연덕스럽게 다른 장소로 가서 또 술 주정을 부리고 있는 것을 경찰들이 잡았다고 한다.   

졸지에 아무 이유없이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짐승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이 소녀는 장차 결찰관이 되겠다고 꿈을 키우는 소녀였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전혀 예측할수 없는 '움직이는 흉기'로 돌변한 오늘 이 사회의 발암물질이 되어버린 막가파 인생들에 의해 "오순도순 살아가야 할 상생의 사회"를 전혀 가늠조차 할수 없는 흉악범 들의 돌발로 삽시간에 이 사회가 범죄의 소굴같은 무서운 짐승사회가 되어버려 우리의 가슴을 쓸어 내리게 하고 있다.   

언제부터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비정한 짐승만도 못한 악의 도시가 되어 버렸을까?  이 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정부당국이나 좀비같은 모리배들이 이 사회를 법을 빙자하여 이권에 정신없는 자들이 무차별로 난도질을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 나라에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는 법이 있는가? 국민을 위한 정치는 간곳 없고 마치 당리당략에 함몰된 모리배들이 난무한 막가파사회의 산실이 되어가고 있다. 이 나라 민중들에 의해 발탁된 소위 호민관들은 자기 입지가 확립되면 나라를 바로세우는 일 보다 하나같이 자기들의 소욕대로 정상모리배들이 된다. 저들은 질서정연한 공공사회를 이루어 가려는 간절함이 애시당초 없었기에 이 나라가 자기들 욕망의 독무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지난번 야당에서 국회의원 후보자들을 어떻게 선택했는가? 돌다리를 두드리듯 돌아 볼 일이다.  이것들이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왜 이 나라에는 정의가 살아 숨 쉬는 사회, 진실로 국민이 진심(眞心)을 찾으면 어디서든 찾을수 있는 정치문화의 진인면(眞人面)인 상생의 정치가 없는 것일까? 인간들은 홀로서가 아니라 가족과 사회공동체를 이루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인생들의 심령속에 그어진 공공질서와 사회규범의 약속 선(線)을 따라 홀로서가 아닌 더불어 살아가야 할 사회적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선(線)은 마치 도로 위에 그어진 차선(車線)처럼 서로 지켜야 할 '사회적 약속선(約束線)'이다.  그러함에도 다시는 되돌릴수 없는 전혀 예측할수 없는 돌발사고들이 사람들이 끊임없이 왕래하는 거리 한 복판이나 혹은 대중들이 몰려있는 도심에서 시도 때도 없이 일어 나고 있다. 백주 대낮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시내 복판에서 인간의 생명을 마치 사냥하듯 인면수심(人面獸心)의 흉기로 돌변하여 아무런 가책도 없이 사람의 생명을 무참하게 난도질을 하고 있다. 

과연 이것이 소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인간사회가 맞는가? 정의로운 법치국가를 구현하여야 할 자유 대한민국에서 이처럼 어두운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소위 상류층이건 서민사회건 할 것없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본연의 모습이라 할 도리(道理) 마저도 전혀 찾아볼수 없는 약육강식의 짐승사회의 단면을 보는듯 하여 안타깝다.      

현대 대중 사회에서 절대 지켜야 할 약속선(約束線)들이 지구가 서서히 병들어 가듯 인간들의 심신(心身)도 갈수록 피폐해 가고 있다.  며칠전 집권자의 알박이로 ㅇㅇ보증보험에 들어간 자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서야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욕심을 내려놓았다. 이를 보는 일반서민들은 무슨 생각이 들까?  공직의 자리를 그처럼 나눠먹기식으로 낙하산 인사를 해도 되는 것인가? '인사(人事)가 만사'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가? 이는 전형적인 논공행상이요 매관매직이다.  

이처럼 정권이 바뀌고 또 바뀌어도 도찌니 개찌니로 한치 앞을 내다 볼수 없을 만큼 인간의 탈을 쓰고서 부정과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막된 사회가 되어 가고 있어 씁쓸하기만 하다. 인간을 치료해야 할 의사들이 의사 본연의 자리에서 일탈하여 국민들의 생명을 담보로 금년 내내 파업을 자행하고 있어도 당국이건 의사들이건 두 축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입지와 이해득실 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을 뿐이다. 이러한 행동이 과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맡은 공직자로서 그리고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의사들로서 비난받아 마땅하다 공복으로써 혹은 의사로써의 본분은 찾아볼수 없이 전부가 아니면 전무라는 싹쓸이 행위로 일관하려는 것은 어떠한 논리로도 그들의 주장은 설곳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혼돈을 사전에 혹은 최단시일 내에 수습하여야 할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국민의 정부'가 스스로 야기한 이 난맥상을 풀어갈 능력도 없으면서 막연하게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하는 무능을 보고 있노라면 차오르는 분노를 금할수 없다. 사태수습의 실마리가 될 키를 찾지 못하고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저지른 이 어처구니 없는 어리석음으로 수많은 국민들이 속알이를 하고 있다.  도대체 저들에게는 국민들이 뭘로 보일까? 잘 해내리라 하는 기대감보다 국민들의 피로감만 점점 가중 시키고 있는 행정당국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당국은 과연 이제라도 이를 풀어갈 능력이 과연 있을까? 지금 양측을 보면 모두 도찌니 개찌니다. 서로 똑같으니까  천금 같은 시간을 허송하면서 국민을 담보로 천금같은 세월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각 병원마다 의사들은 국민들의 건강보다 각자의 이권에 매몰되어 있는 현실이 서글프다.  국민의 안위를 지키고 있는 국가기관이나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있는 의사들이나 모두 자신의 존재가치를 망각하고 있다. 무능과 자기 유익만 추구하고 있는 병든 사회에서 몸과 맘이 지치고 병들어 가는 것은 힘 없는 민초들 뿐이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이들은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상대방이 먼저 똥이 타서 두 손을 들때까지 마냥 뻐팅기고 있다  오늘의 정치 판도가 마치 미친자 널뛰 듯 도무지 종잡을수 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나라 대통령이 여잔지 남잔지 조차 헷갈릴만큼 이 나라가 미쳐 돌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옛부터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수 없다."는 말처럼 그 어느 시대 보다 인권(人權)과 언로(言路)가 활짝 열려 있어야 할 대명천지 밝은 대한민국이  어느 순간부터 한치 앞을 알수 없는 천야 만야의 무저갱속으로 추락하고 있는 참담한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마음이 쫄대로 쫄아들고 있는 것같다. 하기사 바로 이웃나라 중국인들은 언론 부재의 보이지 않는 서릿발같은 귄력의 눈초리에 인권침탈이 아주 참담한 상황이라고 들었다.   

내일의 날씨를 정확히 예측할수는 있어도 오늘을 살아 가고 있는 현대인들이 격고있는 정치는 점차 인면 수심의 레바이단이 되어 가고 있는 국가권력에 대한 불안 심리는 점증하고 있다,  이에대한 역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는 오늘의 사회풍조는 실타래처럼 헝클어져 현대사회의 난맥으로 한치 앞을 내다 볼수 없는 불안심리가 폭발직전에 있어 한줌도 안되는 인간의 속내 조차 불안에 휩싸여 자신을 컨트롤 하여야 할 인간의 마음 조차도 방치된지 오래다. 현대인들의 불안심리가 이처럼 병든 사회로 흘러 예측 불능한 살인 행각들이 문명한 사의 한 복판에서  횡행하는 막가파 사회가 되어버린게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 인구 전망치에 따르면 지금부터 50년 뒤 우리나라는 세계 최악의 늙은 나라 즉 "초고령사회의 선두 주자가 될 것"이란 아주 씁쓸한 전망이 나왔다.  대한민국의 인구가 올해 5200만명인데 48년 뒤에는  3600만 명으로 급격히 감소되어 총 부양비가 올해 42.5명에서 2.8배 늘어나 2072년엔 세계 중위 연령은 39.2세, 한국은 63.4세  총 부양비는 세계 3위가 될 전망이란다. 기대수명은 91.4세까지 늘지만 세계 최저 수준으로 출산율 감소가 더 크게 작용해서란다.   2072년이면 생산 연령인구 100명이 어린이와 노인 118명을 부양해야 된단다. 

통계청은 ‘2022년 기준 장래인구추계를 반영한 세계와 한국의 인구현황 및 전망’ 자료를 발표했다. 먼저 한국 인구는 2022년 5200만명에서 2025년 4700만명, 2072년 3600만명으로 급감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지금 세계 인구는 2022년 81억 6000만명, 2025년 96억9000만명, 2072년 102억2000만명으로 세계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우리 나리나라는 갈수록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그 원인은 저출산이다. 여성 한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합계출산율은 지난해 기준 0.72명으로 세계의 합계 출산율(2.25명)에 비해 턱없이 낮다. 이는 전 세계에서 마카오, 홍콩에 이어 우리나라는 세번째로 낮은 수준이다. 

생산연령인구(15~64세)는 2012년 (73.4%)을 정점으로 감소해 올해 70.2%, 2050년 51.9%, 2072년에는 45.8% 수준으로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고령화는 더욱 깊어만 가고 있다.   한국의 기대수명은 2022년 82.7세에서 2072년이면 91.9세로 세계 최고수준이 된다. 그리고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중은 올해 19.2%에서 2072년 47.7%까지 늘어난다.  생산 가능인구 100명당 부양해야 할 유소년인구와 고령인구의 합을 뜻하는 총부양비율은 올해 42.5명에서 2072년에는 118.5명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올해 전 세계 국가 중 208위에서 2050년 8위, 2072년 3위까지 무서운 속도로 단계가 오른다.

이 기간엔 인구가 늘어나는 아프리카를 제외한 모든 대륙에서 총부양비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지만 유독 한국의 부양비 부담 증가폭이 가장 높다. 세계의 총 부양비는 53.7명에서 62.7명으로 1.2배 늘지만 한국은 2.8배다. 생산연령인구 100명당 고령인구의 비중을 가리키는 노년부양비만 떼놓고 봐도 비슷하다. 한국의 노년부양비는 2024년 27.4명에서 2072년 104.2명으로 3.8배 증가할 전망이다. 

이러한 전망치를 보면서 우리의 미래를 위해 어떠한 준비를 하여야 할까? 우리는 지금 극단적 이기주의인 나 중심에 빠져 공동선을 잃어버린지 오래다.  사회안에서의 나의 역할을 보며  팔을 펴서 지친이들을 일으켜 주는 상생의 가족이 되자!  열린 사회를 위해 미래를 활짝 펴자!  서로를 신뢰하게 되면 우리의 능력은 배가 되고,  서로를 사랑하게 되면 최대의 역사를 이루게 되고,  스스로를 낮추고 보면 저절로 '섬기는 자'가 될 것이다.  - 종그니가

【종그니칼럼】나를 찾아서

내가 젊은 날 청운의 꿈을 갖고 있을 때, 조용한 곳을 찾아,여러 암자와 사찰에서 칩거한 적이 있었다. 어떤 고시생은 비가 내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 방울 소리에도, 여름 날 숲속에서 울어대는 매미 소리에도, 신경을 곤두 세우고 공부가 되니 안되니 하고 푸념하는 이도 보았다. 알고보면 소음은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우리를 심란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연속에 있는 육체적인 욕망의 망상들이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위한 지극히 평화로운 에덴동산에, 어느 날 뱀이 찾아와 이브에게, "하나님이 동산 모든 나무의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아니라 결코 죽지 아니 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같이 될 줄을 아심이라."  무엇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평화로운 에덴 동산에 살면서도, 아담과 이브는 끝없는 호기심에 마음에 분요를 일으켜 스스로 무너지고 만다. 

우리는 만인이 오가는 저자거리에서도, 분심(分心)에서 자신을 지킬수 있고, 에덴동산에서도 이처럼 자신을 잃어버릴수도 있다. 알고보면, 지옥과 천당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평상심을 잃지 않는가?  이번 추석 날 밤에 조선 TV를 보니, 명창 송가인이 열창을 하고 있길래, 푹 빠져있는데, 마누라가 목욕을 하고 들어오더니만, 사정없이  질타한다. "목사님이 그 많은 기독교 방송 놔두고, 왜 하필 세상 가요에 얼이 빠져 있느냐? 지금 제 정신이냐?"는 눈빛으로 나무란다. 소위 "주의 종은 세상 잣대와는 관계없이, 언제 어느 때나 자신의 위치를 앓지 않아야 하고, 주의 종이면, 마땅히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한다. 

사하라 사막에서 12년 동안 살면서, ‘사막에서의 편지’라는 책으로 유명한, 카를로 케레토 (1910~ 1988)라는 은둔자가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어느 날 돌연 교수직을 사직하고 사하라 사막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세상과 연결 고리를 모두 끊고, 하루의 모든 일과를 오로지 기도의 시간으로 채워, 오랜 시간 기도하면서, 짬짜미 그 지역 유목민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며 지냈다. 그가 먹는 음식은, 그가 기른 염소에게서 직접 짠 염소 젖이 전부였다. 이렇게 은둔자로 최선을 다해 살던 그가,  어느 날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 고향을 가게 되었는데, 그는 어머니의 삶을 새롭게 보고 새삼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그것은 세상을 등지고 은둔자로 사는 자신보다, 어머니의 삶의 모습이 훨씬 더 현실에 다가 온 거룩하고 진솔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가족과 자신을 필요로하는 이웃을 돌보느라 기도하는 시간조차 많이 낼 수가 없었고, 당신 혼자만의 시간 조차도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이처럼 제약된 환경 에서도, 자신을 몸을 사리지 않고 사랑의 화신처럼 사랑을 실천 하셨다. 즉, 세상 등지고 사하라 사막에서 12년을 보낸 자신보다, 어머님의 삶이 훨씬 더 거룩하셨던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거룩한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시려고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과 삶으로 온전히 하나가 되었을 때에만 누릴수 있는 축복이다. 거룩함의 본체가 사랑이기때문에, 우리의 삶 전체가 사랑으로 한 덩어리가 될때, 비로소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의 거룩함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내 삶의 현장에서, 나를 나 되게 만들어 주는 예수그리스도로의 삶의 진수가 모습을 드러내는 현장인 것이다. 지난 날 카도릭에서 "내 탓이요."운동이 있었다. 우리는 걸핏하면 나 아닌남의 탓이나, 누구의 탓으로, 떠 넘길 때가 많다.  누구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요,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주님의 제자 도마가 주님께 여쭙는다. "주여 내게 하나님을 보여주십시요!"  주님이 말씀 말씀하시길 "나를 본자는 이미 하나님을 보았거늘 어찌 하나님을 보이라 하느냐?" 

누구때문에 혹은 무엇때문에 자신이 거룩해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 고 엄중하게 이르신다.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의 종은, 소리 없이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자를 치유한 뒤에도, 적대자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세상에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그 나라의 주인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주님의 모든 말씀은, 일상의 삶속에서 이루어 진다.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만남을 통해, 그리고 특별한 일을 통해서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거나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6, 25전란때의 얘기다. 인민군이 물밀듯 쳐들어와 교회를 급습했다. 인민군들은 주일  날 모인 교인들을 밖으로 내 보내면서, 출입문 바닥에 예수님 사진을 펴놓고, 침을 뱉고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겠다고 하자, 대부분 침을 뱉고 밟고 지나갔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늙은 권사 한사람은,침에 얼룩진 여수님 사진을 보자, 사진을 집어들고 울면서 손으로 침을 닦아냈다. 인민군 대장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인으로, 전쟁터로 나가는 아들에게, "예수쟁이를 죽이지 말라." 신신당부했었기에, 손등으로 예수님사진을 닦은 할머니를 제외하고, 모두 총살 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참과 거짓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이름이다. 그것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혼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우리의 일상의 삶 안에서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가는 저 인생 길 너머에는, 아름다운 피안이 있다. 그러나 그 피안을 보려면, 반드시 저 언덕을 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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