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은 벼는 어찌하여 고개를 숙이게 되고, 많이 아는 사람은 어찌하여 겸손하게 보이게 되는 것일까? 그저 많이 아는 놈이 익은 벼처럼 고개를 숙이며 겸손하게 된다기보단, 많이 안다는 특성때문에 겸손하려는 마음가짐이 없어도 외형적으로 겸손한 마음가짐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고 본다. 이건 마치 익은 벼도 원랜 고개를 뻣뻣히 들려고 하는데 낟알 때문에 어쩔수 없이 고개가 떨어지는 것과 같다. 즉 겸손할 마음은 없는데 많은 지식이 묵직한 낟알 역할을 해서 겉으로 봤을 때 겸손한 마음가짐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많이 알게 된 것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원래 무식한 인간이 아는 척을 하기 쉬운데 그건 이국땅에서 지인을 만나면 반가운 것과도 같은 심리적 이치다. 그렇기에 무식한 인간은 어쩌다가 아는 거 하나 만나면 반가움을 못이겨 버리고 만다. 그 반면 지식인은 지인을 만나도 상대적으로 담담할 수가 있다. 지인 하나 없는 이국땅에서 동포를 만나면 모르는 사람이 아는 척하며 반가워하는 것에 반해 지인 천지인 한국 땅에서 잘 모르는 동포를 만났답시고 반가워할 필요는 하등 없는것과 비슷하다. 어차피 많이 아니까 아는 거 하나 만났다고 나댈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겸손한 마음가짐을 가져서 발생한 것이라 오해할 수 있으나 겸손한 마음과는 다소 다르다.
둘째 : 목표치에 대한 갈증
어떤 빈여백에 색칠 작업을 행하는 경우를 가정하자. 시작할 당시엔 빈 공간에 찍힌 점하나가 몹시도 반갑다.목표치도 없고 알량하게 점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반갑다. 무에서 처음 유를 발견했으니 그러하다. 그 반면 빈공간에 점을 넘어서 어느 정도 축적이 되면 목표치가 생기기 마련이다. 지름이 100m이던 200m던 목표가 생기기 마련이고, 목표는 성취하면 더욱 커지기 쉽다. 그런 이유로 아는게 없는 사람은 목표치도 없기에 있는 알량한 존재가 알량한 존재인지도 모르고 존재 자체에 뿌듯하기 마련이다.
그 반면 어떤 목표치가 있는 자는 목표에 달성 못하는 자신을 채찍질한다. 그렇기에 운동 시작한지 얼마 안된 한달, 삼개월짜리는 있지도 않는 성취를 자랑하느라 사진찍고 포샵하며 자랑질하나, 운동한지 10년정도 되는 사람들은 목표치에 도달 못한 자신을 바라보며 늘 부족하다 여기기 쉽다. 즉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머릿속은 현재 0의 사고방식으로 수학적으로 무한한 뿌듯함을 느낀다.
반면 많이 아는 자들은 미달된 현재/달성할 목표치로 계산해서 달성 못하는 자신을 채찍질하고 이는 외형적으로 겸손한 마음가짐을 가져서 그러한 것으로 보이기 쉽다. 허나 이는 겸손한 마음가짐이라기보단 목표 자체를 높게 잡은 일종의 거만함이 만든 자연스런 결과다. 인위적으로 겸손한 마음을 가진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 : 많이 아는 자의 귀차니즘
얼마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자신의 앎과 다른 것을 발견하면 그 자신의 앎에 위배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일일히 교정시키려 든다. 어차피 아는 것 자체가 별로 없으니 그것에 부딪히는 것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이 아는 자들은 어차피 잘못된 게 많은걸 가정하고 살고 있으므로, 잘못된 것을 일일히 교정해주며 살면 피곤하고 귀찮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많이 아는 자들은 단지 자신이 아는 것에 위배되느냐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교정시키려 하는 대상이 중대하냐 중대하지 않냐를 감안해서 나선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교정시키려 하는 대상이 중대하냐 중대하지 않냐를 기준으로 삼지 못하며, 기사등에 잘못된 사실이 기재되어 있거나 오류를 발견하면 참지 못하고 그것을 교정하려 든다. 그렇기에 많이 아는 자들은 사소한 실수에 관대한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사소한 실수도 지나치지 않는다. 무식한 사람이 사소한 문제로 나대는 건 애초부터 아는 게 얼마 없기에 지식인의 귀차니즘을 모르니 부지런하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 또한 많이 아는 자의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이상의 이유들로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답시고 익지도 않은 벼에게 고개부터 숙일 것을 요구하고 겸손한 마음가짐을 요구하는 것은 헛짓거리일 수 밖에 없다.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건 고개를 숙일려고 마음을 먹다보니 그런 것도 아니고 단지 익다보니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선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 답시고 익지도 않은 새파란 애들에게 '겸손한 마음가짐'과 '고개를 숙일 것'을 요구하는데 이는 철저히 잘못된 것이다. 그 새파란 애송이들에게 강조해야할 것은 '고개숙임'이 아닌 '익음'이 되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벼가 익기 위해선 고개를 쳐드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고개를 들고 성장하다 보면 결실이 있기 마련이고, 그 결실로 인해 자연스레 고개를 떨구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익지도 않은 벼에게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답시고 아직 다 자라지도 못한 벼의 허리를 꺽어 억지로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건, 목표치가 '익음'인지 '고개숙임'인지도 인지하지 못해 발생한 무지의 결과다.
뿐만 아니라 아직 자라지도 못한 벼의 허리를 꺽어버리면 '익음'이라는 결과에 오히려 도달하지도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이렇게 강조한다.'빨리 익을라문 대가리를 최대한 쳐들어서 성장해라.'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결과적인 익음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고, 최종적으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직 자라지도 못한 벼의 허리부터 뿌러트려 숙이게 만드는 짓은 목표가 고개숙임인지 익음인지도 구분 못해 발생한 무지의 소산이다. 이것이 바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에 대한 역설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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