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소본능(歸素本能)이란, 원래의 자리(태어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이름이다. 예를 들면, 민물에서 태어난 연어는 알에서 부화되면, 죽은 엄마의 살을 먹고 어느정도 자라게 되면, 엄마 아빠가 살았던 양양한 대양의 바다로 나가, 성어가 되기까지 살다가, 산란의 때가 되면, 자신이 태어난 민물 강으로 돌아 온다. 이를 귀소본능이라한다. 만물들이 태어났다가 사라짐 또한 이와 다를 바 없지 싶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의 귀소본능은, 내가 부정모혈로 이 땅에 잠시 왔다가, 처음 있던 자리 즉 하나님 품으로 돌아감이다. 나또한 이제 왔던 자리로 돌아갈 나이가 되니, 한동안 소식이 없다 싶던 벗에게서 들려오는 소식은, 영락없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는 소식이다. 살아 있을 때에도, 치매이거나 거동이 불편하니 거의 소식이 없다가, 죽은 후에야 기별이 온다. 나는 멀리 있는 친구들 말고도, 침식을 함께하는 요양원에 입소한 아흔 한분의 늙은 친구분들이 또 있다.
지난 6월엔 코로나로 몇 분이 소천 하셨고, 얼마전에도 입소한 노인 한분이 돌아가셔서, 장사를 치르느라고 춘천 화장장에 갔었다. 관(棺)이 전기 화로 속으로 들어가서 40분에서~1시간쯤 지나니까 '소각 완료', 다시 10분쯤 지나니까, '냉각 중'이라는 글자가 켜졌다. '냉각 완료'가 되면 흰 뼛가루가 나오는데, 성인 한 사람 분이 고작 한 되 박 정도다. 직원이 뼛가루를 봉투에 담아서 유족에게 주면, 유족은 미리 준비한 그릇에 뼛가루를 담는 것으로 끝난다. 원통하게 비명 횡사한 경우가 아니면, 옛날처럼 골육지친간에 끈끈한 정이 없어선지, 아님 급변하는 세상따라 사느라고 얼이 빠져선지, 요즘에는 유족들도 별로 울지 않고 맹숭맹숭하다. 상주들 입으로 "우리는 호상(好喪)입니다"라며, 되려 문상객을 위로하는 세상이다. 고인의 뼛가루는, 하얀 분말에 아무런 질량감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뼛가루의 침묵은 무거워서, 적막 속에서 세상과 작별을하고 있다. 금방 있던 사람이 금방 없어졌는데, 뼛가루는 남은 사람들의 슬픔이나 애도와는 아무 관련도 없어 보였고, 이 말도 안되는 생명의 존엄은, 한줌의 재속에 묻혀 버렸다.
죽으면 말 길이 끊어져서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죽음을 전할 수 없고,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죽을 뿐, 죽음을 경험할 수도 없다. 이렇게 화장장에 다녀온 날이면, 삶과 죽음의 무게를 생각하곤 한다. 죽으면 한줌의 재로 남아 저토록 가벼운 것을! 속인들은 육신으로 사는 인생사에, 남은 여생이 후회없길 바랄 뿐이다. 뼛가루 한 되 반은, 인간이 이땅에 와서 마지막 남긴 잔해로, 많지도 적지도 않은 분량이다. 죽음이란, 날이 저물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것이지만, 운다고 세상을 떠난이가 다시 올리가 없다. 뼛가루를 들여다 보며, 삶과 죽음 또한 만났다 헤어지 듯, 산자 역시 반드시 죽는다.(會者定離, 生者必滅). 우리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나면 잠자리에 든다. 알고보면 우리는 매일 삶과 죽음의 예행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부턴가 몸이 날 따라 주지 않고, 몸둥이가 점점 상전이 되어 갈 무렵이면, 얼른 눈치를 채자! 그래서 쓸떼없이 병원에 돈 들이지 말고 떠날 준비를 하자. 질척거리지 말고, 여러사람 힘들게 하지말고 가자. 빌려 온 것 있으면 갚고, 남은 것 있으면 다 주고 가자, 가볍게 죽기 위해서는 미리 정리해 놓을 일이 있다. 내가 살던 방의 서랍과 수납장 책장을 들여다 보았더니, 지금까지 내가 세상살이 하면서 만들어낸 거의 전부가, 세상 떠나 갈 내게는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쓰레기였다. 마치 거름더미속의 굼벵이 처럼, 쓰레기더미 속에서 한 생애가 지나 간 거다. 나는 이제 높은 산에 오를수 없는데 등산화가 무슨 소용인가! 허기사 헌 신발도 버리기는 슬프다. 뒤축이 닳고 찌그러진 신발은, 내 몸뚱이를 싣고 이 세상의 거리를 쏘 다닌, 나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흙으로 돌아갈 뼛가루에게 무슨 연민이 있겠는가. 퇴계 이황은 죽음이 임박하자, "가는 세월을 따라서 사라짐이여! 다시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라는 시문을 남겼고, 임종에 이르러서는 "매화에 물 줘라." 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양승국 변호사가 보내준 글에, 주광일 시인이 쓴 "유형지로부터의 엽서"라는 詩를 음미해 본다. "칠흙같은 어둠속을 홀로 걷는다.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밤 하늘의 은하수는 더욱 또렸해 진다. 홀로 걷는 밤길이 어듭고 고통스러울수록, 이 우주를 창조하신 분의 빛이 나의 앞길을 비추어 주리!" 삶은 무겁고 죽음은 가볍다. 하지만 죽음을 재촉하는 병마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의술의 목표라면 의술은 백전백패다. 의술의 목표는 생명이지, 죽음의 벽을 허무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국종의사처럼, 깨어진 육체를 꿰매어서, 살려내는 의사도 있어야 하지만, 다 살고 임종에이른 사람의 마지막 길을 열어주는 의사도 있어야 한다.
인간의 생명이 인간에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에, 죽음은 손님을 대하듯 맞아들여야지, 극복해야 할 대상은 아닌 것이다. 천하를 통일하고 불로장생하고 싶어, 불로 불사약을 찾던 중국의 "진시황제나", 철권 통치로 영원히 북한을 통치할것 같았던 "김일성", 이들은 모두 불귀의 객이 되었다. 죽음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는 것 3가지가 있다.
a. 사람은 분명히 죽는다.
b. 나 혼자서 죽는다.
c. 아무것도 가지고 갈수 없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모르는 것 3가지가 있다.
a. 언제 죽을지 모른다.
b.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
c.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그래서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태어 날 때에도 천차만별이고, 죽을 때에도 천차 만별이다. 그러나 인간의 평가는, 태어날때 보다 죽을 때에 결정된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갈 땐, 나를 아는 모든 이들이 아쉬워 할 때 나는 웃으며, 주님이 계시는 저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들어 가리라!
종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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