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한 더위가 내내 계속될 것처럼 기승을 부리더니, 8월이 가고 9월이 되니, 새벽 녘엔 한기를 느낄만큼 무더위가 한풀 꺽였다. 하루만 올 것이라던 비가 무려 사흘을 내렸다. 며칠 전 뿌린 무우 씨앗이 비를 맞고 싹이 나고 있다. 오늘이 9월 3일! 이제 누가 뭐래도 싱그러운 가을이다. 몇해 전 추석을 앞둔 어느 날, 고추잎이 노래지길래, 자양분이 약해선가 싶어 비료를 주어도 달라진 것이 없어 왠가 했더니, 계절이 바뀌어서 그런 것을! 철모르고 사는 삶! 팔십이 낼 모랜데, 언제 쯤 철이 들까? 수박 넝쿨도 참외 넝쿨도 시들해지고, 밭에 심겨진 아로니아 잎새도 단풍되어 떨어진다. 내 삶의 끝자락도 이처럼 멀지 않았음을 계절을 통해 알게 된다. 새벽 찬 이슬이 바람에 실려 낙엽 지는 모습을 보며, 우리도 낙엽처럼 춤추듯 떠날수 있을까? 말년의 우리 인생도 낙엽처럼 화사(華奢)하고 장엄(莊嚴)한 파노라마(panorama) 이었으면 싶다. 봄꽃처럼 싱그러운 젊음보다, 가을 단풍처럼 붉게 물든 노년의 가을 인생이 더 아름다와 보인다.
새벽을 깨우듯 어둠을 뚫고 붉게 떠오르는 아침 태양도 아름답지만, 해 질 녘의 저녁놀은 더 아름답다. ‘삶의 유혹(誘惑)’과 ‘죽음의 공포(恐怖)’, 이 두가지에서 자유롭고자 펼쳐진 것이 신앙이다. 지는 낙엽처럼, 서산에 기우는 일몰처럼, 영원한 안식을 향해 가는 길이, 시공(時空)을 벗어나는 길이다. 지금은 백세시대 라는 말이 실감난다. 내가 있는 요양원에 입소자 아흔 한분 중에, 80세 이상이 대부분이다. 백세를 넘은 분도 무려 열분이 넘는다. 8년 전에 99세에 소천하신 이금석 할머니가 계셨다. 이분은 전두환때에 아웅산에서 산화한, 고 이 범석 외무장관의 누님이다. 이분이 이곳에 살아 계실 때, 다섯 살 난 외 증손녀가 찾아 왔다. 증손녀가 뜬금없이 할머니께 묻는다. "할머니? 할머니는 나이가 맛있어?" 이 느닷없는 질문에 이금석 할머니는, 잔잔히 웃으며 손녀를 꼭 안으면서, "너도 어른이 되면 나이의 맛을 알게 된단다."
내가 오십대 초부터 어르신들을 모시고, 살아온 세월이 엇그제 같은데, 어느덧 나도 일흔 일곱이 되었다. 다른 것은 노력해야 얻을수 있지만, 늙는 것은 기다리지 않아도 세월과 함께 다가 온다. 옛부터 인생칠십 고래희 (人生七十古來稀) 라 했는데, 나도 참 눈치없이 오래 살았지 싶다. 그도 그럴 것이 요로코롬 가만히 있으면 절로 늙어 가니, 늙어 가는 것 보다 쉬운게 어디 있는가? 정말 믿을수 없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다. 정말 믿었는데 시종(始終)이 다른 경우를 격으며 살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 이게 나의 분복인 것을! 세상 것 탐낼게 뭐가 있나. 그 것이 내 주어진 생명을 단 하루도 더하지 못하는 걸. '요양원'이라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막다른 인생 종점에 와 있음에도, 평생을 살아 온 옛 것을 비우지를 못해서, 얼굴에 회한과 아쉬움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들을 본다. 그러나 늙어 가는 것은 여백을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늙음이란 인생이 여물어가는 것이요. 죽음이란, 여문 곡식을 곳간에 들이는 것이다.
꽃이 아름다우나, 그 아름다움을 버려야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처녀가 아름답지만, 이를 버려야 ‘자녀’를 낳아 세상에서 가장 강한 어머니가 될 수 있듯이, 죽음이란 바로 ‘버림’의 끝인 것이다. 성취의 청춘도 아름답지만, 버림의 노년은 더욱 아름다와야 한다. 어찌보면 주먹을 쥐고 태어나는 것은, 삶에 대한 애착이요, 손바닥을 펴고 죽는 것은, 모든 것으로 부터의 비움이다. 옛날 알렉산더 제왕이 서른셋에 죽을 때, 그의 관 양옆으로 구멍을 내어, 두 손이 관 밖으로 나오게 했다. 백성들에게 빈손으로 가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였다. 이처럼 생의 가장 큰 가르침은 죽음이다. 죽음이 인생의 이치를 깨우쳐 준다. 집지양개(執之兩個), 방즉우주(放則宇宙)이란, 두 손으로움켜보았자 두 개뿐이지만, 그걸 놓으면 우주가 내 것이란 말이다. 노련(老練)이란 단어는 늙으면 노련하다는 뜻이다. 오랜 세월의 경륜에서 오는 노하우(know-how)를 이름이다.
노인은 노련한 경험의 결정체다. 술을 마셔도 젊은이처럼 속수무책으로 마시지 않는다. 그리하여 부도옹(不倒翁)이란 별명이 붙은 것이다. 노인이 되면 언행이 무겁고 품격이 고상해진다. ‘점잖다.라는 말을 풀어 쓰면 ‘젊지 않다.'는 말이다. 젊은이의 잘못을 보고도 잘 나무라지 않음은,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러한 시절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점잖음은 중후한 인생의 완결이자, 노인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노인이 되면 자연 생각이 많아진다. 그러다 보니 했던 말을 또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일념통천(一念通天)의 지혜의 샘물이다. ‘늙은이'란 세상이 급 템포로 변해도, ‘늘 그 자리에 있는 이’란 말이다.
흔히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청춘이라는 말이 있는데, 마음마저 육신과 똑같이 늙었다고 생각하면, 삶이 위축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평균연령이 급격히 늘어, 온 세상이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옛날엔 60을 환갑(還甲) 이라 했는데, 여기에 맞춘 정년퇴직은 새로운 삶의 전환이므로, 인생 새 단장 (remodeling)이 필요하다. 내 남은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 바로, 오늘이기 때문이다. 영리하고 재주가 있는 사람을 일러 총명(聰明)하다고 하는데, 聰은 귀가 밝다는 뜻이며, 명(明) 은 눈이 밝다는 뜻이다. 늙으면 모든 기능이 저하되지만, 그러나 쑥떡 같이 얘기해도 찰떡 같이 듣는 훈련을 평생 해온 그들이라 괜찮다.
아름다움의 끝은 죽음이다. 벌써 9월이다. 단풍잎이 소슬바람에 느닷없이 똑 떨어지듯이, 그렇게 죽는 것이 오복의 하나인 고종명(考終命)이다. 죽고 사는 것이 달려 있는 매우 위태한 고비를 일러, 사생관두(死生關頭)라 하는데, 그래서 사관(死關) 이란 죽음의 관문(關門)을 말한다. 낙엽 지듯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 고종명이다. 밥맛을 잃으면 죽는다. 이 가을 날 나뭇잎이 단풍되어 지듯 엇그제 기승을 부리던 한 여름 더위가 어느 한순간에 가을이 성큼 다가오듯, 하룻 길도 밝음에서 어둠으로 바뀌 듯, 삶과 죽음 또한 분명하다. 하나님의 품에 다가 가는 것은, 아름다움으로 채우기위한 비움이다. 사유(思惟)에서의 자유로움이 바로 죽음이다. 이 대자연의 자유 속에서 늙어가는 즐거움을 그대는 아시는가?
종그니가
<저작권자 © 리폼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