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 스몰 부부공동체
손자병법에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태)라는 말이 있다. 참 어려운 병법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리이스의 철인 소크라테스는 "내가 아는 것은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것외는 아는 것이 없다"고, 무지의 지(無知의 知)를 설파했다. 솔직히 나 또한 나 자신에 대하여도 아는 것이 전혀 없다. 예를 들어 오늘 아침에 먹은 음식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내 몸에 필요한 영양을 공급해 주고, 배설로 나오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아는 바가 없기에 내 몸안의 콩팥기능이 현저히 떨어진 후에야, 콩팥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았다. 그동안 나는 주어진 식단에 입맛을 따라 입에 넣고 씹어 삼키고 나면, 그 다음은 뱃속에 있는 기관들이 알아서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하고, 불 필요한 노폐물들은 배설하는 정도로만 알았다. 이처럼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도 모르면서, 어찌 "남을 안다." 말할 수 있겠는가?
소크라테스 당시 그리이스는, 스스로 지식인이라 칭하는 소피스트들(지식쟁이들)이 너무 많아서, 배가 산으로 갈 만큼 혼란스러웠었다. 이 소피스트들은 정론에서 벗어난 무수한 궤변으로, 사회를 더욱 혼탁하게 만들어 민주주의의 위기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소위 중국 춘추시대 뺨칠 정도로 백가쟁명의 시대다.
1960~70년대 소위 권위주의 시대 때, 즉 사시(司試) 합격생들이, 한 해에 겨우 15~30명이 고작이었던 때에, 판검사를 소위 '영감(令監)'이라 불렀던 시절 초임 여검사의 경험담을 읽게 되었다. 초임 검사 때이니 사명감과 엘리트 의식이 얼마나 강했겠는가? 그런데 형사 문제로 조사 받는 사람이, 이 여검사를 향해 계속해서, ‘아가씨’라 호칭을 하더란다. 이 여검사는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이 은근히 자존심이 상해서, “아가씨라뇨!” 라고 버럭 짜증 섞인 한마디를 했겠다. 그러자 곧 바로 조사받는 사람이 “아! 그러면 아줌맙니까?”라고 되받아 치더라는 것이다.
당시로는 대단한 오기(傲氣)였을 것이다. 나이 든 이가 딸 같은 검사 앞에 심문을 받으려니, 맘이 상했을 것이다. 그때 이 여검사는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검사로 보이지 않거나, 딸 같은 검사 앞에서 심문을 받는 것이 무안해서 혹은 챙피해서, ‘검사’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이라면, 역지사지(易之思之)라는 말이 있다. 이해가 잘 안될 때는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호칭이 그게 그리 대수인가? 그러나 그게 대단한가 보다. 내가 보기엔 도토리 키재기로 보이는데 말이다. 우리는 너무 특권의식 또는 엘리트 아님 '우쭐' 의식이 어디서 왔을까? 혹여 우리네 조상들이 천민출신이어서 그 DNA 때문이 아닐까? 지난 1950년대 이전의 서울 모습을, 당시의 그림이나 화면을 통해 보면, 양반이나 평민들이나 모두 다 '도찌니 개찌니'다. 지금은 어떤가? 걸치고 있는 옷이나 상류층들의 자리를 박탈하고 맨 몸둥이로 소치는 외양간에 쑤셔 넣어보라! 매 마찬가지다. 양반들이나 상것들이나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다 똑같지 다를게 뭐가 있는가? 조물주에겐 없었던 것을, 지식계급들이 만들어 낸게 신분사회다.
나는 어릴 때, 조선 후기 순조 11년에 홍경래가 일으킨 농민 혁명을, '홍경래의 난'으로 배웠다.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혁명이 되기도, 난(亂)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홍경래는 시대가 낳은 혁명가로, 평안도 용강사람이다. 용기와 지혜가 출중하고 문재(文才)와 무예에도 능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려때부터 조선때까지 회자된, 지역 폄하논란의 희생양이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그의 후대에게 남긴 훈요십조 (訓要十條)에서, "함경도와 전라도는 그 지역 산세가, 개성 중앙과는 반대로 기울어, 반골이 많으니 중용에 신중하라."했다. 이 훈요십조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게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족쇄가 되어, 지금까지 함경도와 전라도가 반골로 단죄받고 있다.
조선 선조 임진란때 왜구는 신의주까지 밀고 올라갔으나, 전라도는 이순신이 버티고 있어서,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빼앗기지 않았기에, 왜란을 버틸수 있었다. 탱자의 유래도 모르는 위인들이, 함부로 전라도 함경도를 폄하한다. 중국인들이 우리 대한민국을 녹두국(綠荳國)이라 비양댄다. 저들 표현대로 팥알갱이 만한 나라라고 여기는데, 좁은 땅에서 우리끼리 전라도를 이러틋 폄하하고 난도질을 해댄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찢겨져 있는 것도 모자라, 절로 터진 입들이라고, 이렇게 함부로 세치 혀로 폄하해도 되는가?
내가 즐겨쓰는 용어가 있다. "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君 臣臣 父父 子子)"라는 말이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애비는 애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각자 주어진 그 자리에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그게 바로 태평성대다. 그리하면 사회는 저절로, 권력이나 법에의한 상명하복(上命下僕)이 아닌,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인의예지(仁義禮智)즉 하나님의 형상이 피어나는, 꼭 있어야 할 유토피아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사노라면, 듣고 싶은 소리만 듣고, 또 듣기 싫은 소리는 피하고 살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내가 먼저 남을 배려하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되면, 반드시 언젠가는 듣고 싶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 날이 올수 있도록, 말과 행동을 내가 먼저 실천에 옮겨야 하겠다.
주로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칭찬, 사랑, 기쁨, 행복이 담긴 언행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내가 먼저 겸손의 말을 하여, 사람사는 사회다운 사회를 조금씩 만들어 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말이 곧 행동일 수도 있지만, 행동하지 않으면서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하는 것은 이기(利己)다. 할수만 있으면 남의 허물을 들춰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포용해 주는 마음가짐이다. 때문에 부끄러운 모습들은 이제 그만 두자. 모든 악에 대한 저항은 노여움으로가 아닌 사랑으로 하자! 그 행위가 비록 정당할지라도 이성을 잃으면, 정녕 악을 이길수 없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모세의 율법을 따라 정결례를 치르고, 성전에 아기 예수를 하나님께 봉헌하셨을 때, 시므온 할아버지와 안나 할머니는 그렇게 기다리던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된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하나님이여!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아오니, 이는 만인 앞에 예비햐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로소이다! 이제는 말씀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소서!" 또 "아셀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 선지자가 과부 된지 팔십 사년동안,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더니, 마침내 아기 예수를 만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에 구속을 바라는 모든이에게 말하니라" 여러분! 하늘의 주인이신 이가 아기 예수로 말 구유에 오셨어요! "그 어린 주 예수 눌 자리 없어 귀하신 몸이 구유에 있네!"
이 땅에 아기 예수가 왔지만, 예수를 알아보는 이는, 영의 눈이 열린이들 즉 의롭고 신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린자들 뿐이었어요. 이렇게 아기 예수를 보기 위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에, 진실로 영안이 활짝 열려, 아기 예수를 직접 볼 수 있는 영광을 얻게되었던 것이다.
듣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내가 먼저, '듣고 싶은 말'을 하고, 보고 싶은 행동이 있으면 내가 먼저, '보고 싶은 행동'을 보여주자! 마찬가지로, 단순히 주님을 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는, 주님을 만날수 없다. 주님을 만나려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려는 믿음을 지녀야 할 것이다. 이는 동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이를 예수의 맘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에 합당한 행동을 하지도 않으면서, 주님의 나라를 이루겠다는 것, 즉 물질적 가난을 몰아내는 데에, 또는 법치만능주의나 소피스트들처럼 궤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육신적인 찰나의 소욕을 버리고,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데 있다.
인간은 운명의 포로가 아니라, 단지 자기 마음의 포로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종소리'가 멀리 멀리 울리도록 하자! <종그니가>
[종그니칼럼] 스몰 부부공동체
나와 스스럼없이 지내고 있는 분이 있다. 그는 한전에 다니는 30대 후반의 외아들을 장가 보내려고 애쓰던 어느날, 아들이 여자친구를 데려와서 한 근심 덜었다 했는데, 그후 아들 여친이 자기와 결혼 전제조건으로, 불임 정관수술을 할수 있느냐는 제안을 받고, 맨봉상태에 빠진 아버지의 심사가 이해가 간다. 이처럼 요즘 젊은이들의 의식이 세상을 너무 앞서가서 숨이차다. 항차 야생동물들도 아무리 살기가 힘들어도 종족본능을 따라 사는데, 저 거친 산야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들도, 창조질서를 따라 씨앗을 맺고 뿌리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인간들이, 결혼을해도 자녀없이 편하게 살자는거다. 이는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다. 이러한 思考가 오늘 젊은이들의 현 주소라하니 맨봉이 된다. 이처럼 언제부턴가 더불어 사는 사회가 아닌, 나만 좋고 나만 편히살면 된다는 이러한 지극히 이기적인 사고(思考)로 인해, 가족공동체 내지 사회공동체 모두가 무너지고 있는데, 어느 누가 있어 가족공동체를 무시하고, 나홀로 엔조이 하려는 이 이기주의자의 '고독사'를 예방 내지 불식시키위해, 어느 공동체 어느 사회의 '안전망 감시 카메라'가 작동될수 있겠는가! 이렇게 가족이 무너지면, 사회공동체도 나라공동체도 모두 다 삽시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처럼 사회의 가장 기본단위인 가족공동체가 함몰된 사회나 국가를 떠올려 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홀로의 세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데, 사회 근간을 이루는 '스몰 공동체'가 무너지면, 과연 누가 있어 무엇으로 사회안전망의 뚫린 구멍을 막을수 있을 것인가! 최선의 사회안전망 구축은, 가족공동체를 구성하는 신혼부부의 자녀 생산능력이 회복되어야, 모든 기능이 되살아 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가족 공동체라는 모판에 아예 새 싹이 없어, 이 공동체가 본래의 정상회로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이에 의존되고 있는 여타 모든 사회공동체들은, 마치 도미노현상처럼 점차 쇠락해지고 말 것이다. 일년 농사인 벼농사도 묘판에서 묘가 자라나야, 드넓은 논에 묘를 심을수 있듯이, 모든 사회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가족이라고하는 사회공동체의 묘판이 건강해야 하는 것이다. 또 우리의 당면문제가 인구 감소인데도, 낙태금지법이 아닌 낙태법이 건전한 가족 공동체를 와해시키는데, 일조하고 있음에도 한치 앞도 못보는 국회는 악법을 만들어 놓고도, 오늘도 마냥 미래없는 오늘에 빠져 있다.
어느 유명한 인문학자는 "하나님없는 세속주의로도 양심, 인권, 자유권, 재산권, 평등권이 보장된 사회라면, 굳이 하나님없이 인간의 능력만으로도, 인간사회는 얼마든지 발전할수 있다." 는 '세속주의의 지론'을 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과연 그럴까요? 오늘 날 유럽 미국등 세계 곳곳에서 전대미문의 코로나 팬더믹으로, 인간 사회가 와해될 정도로 아수라장이 되고 있는 이유가 어디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라공동체를 망각한 이기주의의 극치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인간이기를 포기한 각종 반 사회악들이 독버섯처럼 퍼지고 있다. 또한 개인 이기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사회공동체가 젊은이가 없는 노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모든 분야에서 이를 이끌어 갈 젊은이들이 없어, 바야흐로 사회는 낡아질때로 낡아져, 해체 직전에까지 이르고 있다. 전남 광주의 아파트 붕괴 사건도,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후화가 만들어낸 비극은 아니었을까?. 왜 그럴까? 이는 인류의 사회공동체를 되려 와해시키는, 각종 편의와 편향된 자본주의적 매스컴과, 만능의 휴대폰 기능 등, 모든 문명의 이기적이고 편의주의적인, 공동사회의 일탈행위가, 사회공동체를 와해시키는 부정요소들은 아닐까?
이렇게 개인적 이기주의가 팽배한 병든사회가 만들어 낸 1인 가구의 증가와, 지구촌 사회의 전반에 만연된 코로나 팬더믹상태에 빠진 사회전반을 들여다 보면, 고독사 문제는 갈수록 사회 이슈의 당면 과제로 떠오를 가능성이 매우 크다. 통계청에 따르면, 1인 가구의 비율은, 2016년 539만여 명(전체 가구 대비 27.9%)에서, 2020년 664만여 명(31.7%)으로 급증했다. 또한 홀로 살다가 위기 상황에 봉착했을 때, 막상 서빙해줄 이가 없는 사람의 비율을 의미하는 '사회적 고립도' 또한, 2019년 27.7%에서 2021년 34.1%로 널뛰듯 크게 증가하고 있다. 가정이 짐이 되어 홀로 살면서 혼밥을 싫어하는 모순, 응당 감내해야하는 고독을 즐겨야 하는데, 인간은 태생적으로 사회적 존재 이기에 홀로 감당할수 없어 고독사가 있는 것이다.
5년간 혼자 살고 있는 20대 이모씨는 "아파서 누워 있다 보면, '갑자기 병세가 악화돼 죽는다고 해도 아무도 모르겠구나' 싶을 때도 있다"며, "끼니도 배달을 시키거나 인스턴트 식품으로 때우니까, 요즘은 만나는 사람이 배달기사 뿐이다."고 실토했다. 사는게 이게 아니다 싶으면 돌이켜야 하는데도, 마냥 이기와 타성에 젖어있다.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는 이모(60)씨는, "매주 등산도 가고 요가도 다녀 보지만, 위급 상황이 발생했을때 지근거리에서 '도와줄 사람'이 없는 건 사실"이라고만 할 뿐, 나 홀로에서 가정으로의 돌이킴이 없다. "(비수급자여서) 주민센터 도움도 못 받고 있기 때문에 종종 두려움이 엄습할 때가 있다"고 현재를 진단하면서도, 현재의 벽을 깨지못하는 어리석음을 보게된다. 어서 빨리 가족공동체를 만들어, 서로 삶을 노래할 이웃을 만드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는 순간이, 내가 몸담고 있는 나라와 사회를 살리는 상생의 길임을 깨달았으면 싶다.
사회복지 전문가들은 고독사의 사각지대를 줄이기 위해서는, 소득 기준에 얽매이지 말고 나홀로세대가 사회복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복지 체계의 토대가 선행되어야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서비스는 소득과 상관없이 필요하다."며 "이를 위해서는 사회복지사 인력 확충과 공공·민간서비스의 연계망 구축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런 복지정책은 언발에 오줌누기로 일시적인 대응책은 될지 모르나,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다. 또 다른 시각은, '이웃공동체의 활성화'로 사회적 고립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주변에 있는 이웃들이 고독사 위험이 높은 1인 가구를 사회 공동체로 끌어들일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견해다. "혼자 사는 이들이 주민과 함께 이야기하거나 소일거리를 할 수 있는 일종의 '사랑방 같은 사회적 공간'이나, 혼밥 대신 같이 식사할 수 있는, 공동 생활공간을 마련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는 의견이다.
'우리집이 곧 골목 복지관' '친구 모임방'이 고독사를 막는다. 고독사 위험군은 도처에서 늘어나고 있는데, 세상을 보는 균형감각을 잃어버리고, 오로지 나만 아는 이기적 인생이 되면, 사회전체가 힘들어진다. 비수급자라고 다 고독한거 아니다. 내성적이거나 성격장애가 있거나, 아님 돈에 인색해서 못 돌아 다니고, 그러다 보니 친구가 없고, 친구가 없으니 고독한 것이다. 진짜 문제는 대화의 부족 혹은 단절이다. 그들에게 정기적으로 대화를 나눌수 있는 한사람만 있었어도 죽음을 어느정도 막을수 있었을텐데 안타깝다. 이는 정부나 지자체의 복지공무원들이 해결할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틀에박힌 대화나 획일적인 도움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뿐이다. 오히려 열집 건너 하나씩 있는 교회시설을 활용해서, 정기적인 대화모임을 활성화시킨다면, 공동체가 주는 울림이 클것이다. 모든 악의 뿌리의 근본은 다름아닌 바로 내 중심의 이기주의에서 오기때문에, 교회의 문을 활짝 열고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보여주는 사랑의 공동체를 통하여, 가족공동체로 귀결시키는 매개체가 된다면, 부부공동체의 소중함과 자녀가 태어나면, 새 생명의 요람인 가족공동체의 소중함도 알게되고, 더 나아가 사회공동체의 소중함도 깨닫게되는, 일거양득의 살아있는 교육의 장이 될 것이다. 종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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