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신령하다는 것은 율법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왔다는 뜻입니다. 율법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신령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중략) 율법이 틀린 것이 아니고, 율법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율법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은 신령하다. 즉 율법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부패성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박윤선, 『로마서 강해』, 247).

(롬 7: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롬 7: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율법은 선한 것이다(롬 7:16). 율법이 선한 것이면, 율법은 유익하다. 율법의 유익성은 어디에 있을까? 단순하게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것인가? 종교개혁파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으로서 역할이지만, 루터, 멜랑톤, 칼빈에게서 명료하게 일치되지 않는다. 칼빈은 율법의 3용법이 부도덕하고 광신적인 자유파들의 오류를 치료하는 해독제라고 했다(For Calvin, the cure for the immoral and enthusiastic libertines is none other than the third use of the law: 권경철, “칼빈이 본 율법의 제3용법: 멜랑흐톤과의 공통점이자 차이점”, 『역사신학 논총』, 31권, 2017년).

필자는 루터와 칼빈 시기의 율법 이해와 18세기 율법 이해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 이유는 기독교로 정교일치의 사회와 기독교 사회가 자유를 인정한 사회에서 국가법의 위치가 현격하게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단순한 믿음 고백이 아니라 국가 통치 문서 즉 헌법 문서였다. 율법과 복음 관계를 논할 때 루터와 칼빈에게 머물러서 그들의 개념을 이해한다고 해도 좋은 방향성을 얻을 수 없다. 칼 바르트는 복음과 율법 관계로 전환하며서 일원론적 사고 체계를 도입시켰다. 신 칼빈주의는 영역주권론을 펼치면서 율법과 복음 관계에서 기독교와 문화 관계로 이해 영역을 확장시켰다. 기독교 속에서 문화가 아닌 문화 속에서 기독교로 가치가 역전되었고, 그 문화 속에서 소멸되는 기독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그 문화 속에서 성장하는 이슬람과 AI(인공지능 시대)를 보아야 한다. 신성로마제국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외부의 적인 이슬람에 대해서 루터파와 교황파가 공동연합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1552년 파사우(Passau)에서 교황파와 루터파 제후는 동등한 자격을 갖는다는 내용에 협정을 체결했다. 파사우 협약은 3년 후 1555년 9월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서 공인되면서 독일에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평화협정 내용의 핵심 문장은 “주민은 그 지방의 영주의 신앙을 따른다(Cuius regio, eius religio)”이다. 유럽은 중세 시대 이후에 발전된 법이 국제법이다. 유럽에서 형성시키고, 뉴잉글랜드에서 아메리카로 독립한 국가에서 새로운 시대의 가치가 종교의 자유이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종교 분쟁은 ‘그들만의 리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종교’는 세계 분쟁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이다.

개신교 진영 안에서 한 테마 ‘율법’을 놓고 논쟁하는 것이 소모적인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질문에 충실하게 답변하는 것도 무익하지는 않다.

박윤선 박사는 롬 7:14-25을 “율법과 인간의 악한 본성 간의 관계”로 정리했다. 즉 율법을 만나면 인간의 악한 본성이 폭로된다는 것이다. 박 박사는 율법이 악한 것이 아니라 나의 비참함이 드러난다고 제시했다. 그리고 로마서 8장에서 “구원의 완전성”이 전개된다. 로마서 8장에서는 “의를 얻은 자가 받은 영생에 대해서”말한다(박윤선: 251). 이 의는 성령이 이루어가시는 것이며, 영생은 견고하고 완전하다고 했다.

(롬 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롬 9: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롬 9: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롬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결코 단순한 문장이 아니다. 사도 베드로의 말씀이 생각난다.

(벧후 3: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벧후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또는 교묘하게

(벧후 3: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믿음에서 난 의”는 정확한데, 그 대상이 “이방인들이 의를 얻음”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행위를 의지”한 불법을 저질렀다. 결국 “그를 믿는 자”로 결론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의’에 대한 논쟁이 아닌, ‘그를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를 믿는’다면 그 안에서 모두가 형제이다. 예수께서는 알곡 안에 있는 가라지를 뽑도록 하지 않았다(마 13:24-30). 그리고 예수 이름을 사칭하는 부류까지 내 버려두라고 하셨다(눅 9:49). 그런데 뒤의 말씀에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라는 조건을 주셨다(눅 9:50).

(눅 9: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눅 9: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사마리아의 마을에서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다

(막 9: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막 9: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막 9: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바울서신을 이해하는 것을 교회사에서 꾸준하게 시도하고 있다. 바울에 대한 새관점까지 등장했고, 지금은 그 관점을 넘어서는 더 새로운 관점이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사도 베드로는 바울서신을 사사로이 풀지말라고 경계시켰다. 그것은 구원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에서는 예수의 가르침과 사도의 가르침의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메이천 박사는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다만 사도의 가르침이 “예수를 믿으라”는 것에는 모두가 일치한 내용이다. 바울서신의 핵심도 “예수를 믿으라”는 내용이다.

즉 종교개혁의 이신칭의는 “구주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교회의 가르침이나 교회의 사죄가 아닌 예수를 믿고, 예수께서 사하시는 죄를 믿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 후기에 예수를 믿은 후에 의의 획득 과정에 대해서 사유한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은 구원론이 아니라 인간론의 부분으로 논의가 옮겨졌다. “어떻게 의를 이룰 것인가?”는 “어떻게 해야 의인이 될 것인가?”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후기 개혁파는 의를 이룸에 전가 구조를 배치시켰는데, 새관점학파는 이 구조를 전면 거부했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에게 전가는 구주 예수의 십자가를 드러내는 구도였다. 의가 신자에게 들어오는 것에 대한 구조가 아니다. 종교개혁가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의 전이를 주장하는 오시안더에 대해서 심각하게 경계했다. 그래서 그러한 주장을 표면적으로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주장할 때에 그리스도의 내주를 주장하는 경향이 발생했다. 이러한 구도가 신학에 구체적으로 등장한 것은 칼 바르트로 평가한다. 칼 바르트는 계시를 객관적 현실성과 주관적 현실성으로 나누면서, 객관적 현실성을 이룬 예수의 반복을 성령이 이루는 주관적 현실성의 체계를 구축했다.

기독교 신학에서 “예수를 믿음”으로 점철시키지 않은 신학 구도는 사색적 혹은 행위구원이라고 평가해야 한다. 신자가 믿는 믿음이 아니라, 신자가 믿는 예수이다. 신자일지라도 예수를 자기 능력으로 믿을 수 없다. 오직 성령의 감화로만 이룰 수 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요일 5: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그런데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가치를 무시하지 못한다. 당시 로마 교회에 있는 유대인에 대한 이해이다. 이것은 주의 백성이 이해해야 할 구속사적 흐름이기도 하다. 이 제시가 현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죄악 중 하나는 유대인을 학대한 것이다. 그 학대의 정점에 홀로코스트(Holocaust, 1933~1945)가 있는데, 그 이후로 기독교는 유대인에 대해서 전혀 다르게 가치를 부여했다. 그 결과가 바울의 새관점학파이다. 우리는 이제 유대인을 학대하는 시대가 아닌 유대인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시대에 있다. 17-18세기는 유대인에 대해서 공평하게 평가하려는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성경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 발생하는 문제이다. 계시사적으로 해석하면, 참고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1장(성경)에서는 “계시가 중지되었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유대인의 가치와 이방인의 가치가 동등하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로마서를 보면 유대인의 가치에 우월성 혹은 어떤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할 때에 율법에 대한 이해에 적지 않은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아마도 유대인에게 율법에 대한 가치가 있다면,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율법에 어떤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개연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1세기 로마 교회에 유대인의 가치를 둔 것은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의 부요하심을 드러내는 것이지 유대인에게 십자가 외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롬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롬 10: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 10: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롬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롬 10: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롬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병렬시키면서, 결론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으로 귀결시킨다. 모든 가능성을 개방시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론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 즉 “사도의 가르침”에 있다. 우리는 “사도의 가르침은 예수를 믿으라”로 집중시켰다.

즉 율법이든 믿음이든 무엇이든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에 집중해야 한다.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는 것이 사도의 가르침의 연속인지, 전파하는 자의 양심에 있는지, 아무말 대잔치인지, 결국은 듣는 자가 판단해야 한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계 2-3장). 귀 없는 자는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거치는 돌로 생각할 것이다.

율법이 그리스도를 믿도록 수종하면 복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율법이 율법으로 남게되면 행위가 될 것이다. 율법이 양심을 정죄하며 그리스도께 인도하면 복음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규정하면 교조주의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주의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만 생명이 가능하다. 사람의 방법이나 능력으로 복음은 불가능하다. 주의 자녀는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않아야 하지만 또 남용이나 왜곡하지도 않아야 한다. 그 기준은 예수를 믿도록 정진하며 전파하는 가에 있다고 제언한다. 루터와 칼빈은 순수하게 복음이 선포되는 교회를 지향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성령이 역사하며 그리스도의 통치가 실현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뒤의 율법에는 몽학선생의 기능은 종료되었다. 그러나 율법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율법이 있는데, 주의 자녀는 율법이 아닌 성령으로 율법을 지킨다. 인간 생존의 규범적 기관은 국가이고, 국가와 사회는 법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국가는 법준수를 기준으로 하지만, 기독교는 무엇을 준수하는 것이 아닌 복음이 선포되는 종교이다. 종교개혁은 복음선포를 금지시킨 교회에 복음선포를 회복시킨 것이다. 순수하게 복음이 선포되는 교회에서 주의 이름의 능력과 권세가 가득하길 기대한다.

고경태 목사(주님의교회, 형람서원)
고경태 목사(주님의교회, 형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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