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인구 절벽
오늘이 윤석열정권이 당선된지 1년이 되는 날이란다. 얼마전 KBS 강석훈 기자가, "조선의 大기자 연암"이란 책을 펴냈다. 나는 강석훈기자 와는 일면식도 없지만, 그분과 가교적 역할을 해주신, 양승국 변호사님을 통해서, 그가 쓴 '조선의 大기자 연암'이란 책을 알게 되었다. 강석훈기자가 연암의 '열하일기'를 숙독하고, 연암 박지원(朴趾源)을 大記者라고 표현한 그의 예리한 판단력이 돋보인다. 연암(燕岩)은, 당시 서양문물을 실용에 응용한, 청나라의 실사구시정책을 예리한 눈으로 꿰뚫어 보고, 그 시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열하일기' 를 탐독하고, 이를 대비한 이가, 조선말의 조정에 단 몇사람이라도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강기자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열하일기는 대기자로서의 탁월한 면모와 식견, 그리고 사물을 보는 예리한 판단력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대장정의 르포르 타주다. 르포르타주는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단편적인 보도가 아니라, 특정 주제나 지역 사회를 심층 취재한 기자가, 취재 내용과 식견을 바탕으로, 뉴스와 여러 에피소드 논평 등을, 종합적으로 완성한 기사를 말한다.”
그런데 강기자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연암이 능숙한 대기자의 필치로 열하일기를 썼을 뿐 아니라, 연암 스스로 열하일기에서 자신을 ‘記者’라고 했다는데,당시에는 ‘기자’라는 개념도 없을 때, 1780년(건륭 45년) 8월 1일자의, 열하일기 마지막 부분에서 이런 글이 나온다. “記之者誰 朝鮮朴趾源也” 과연 기자다운 예리한 눈은, 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물론 연암이 오늘날 ‘기자’를 생각하고 쓴 것은 아니고, 단지 ‘이 글을 쓴 자가 누구냐? 조선의 박지원이다.’라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之’를 빼면 ‘記者’가 나오는 것은 맞다. 그런데 강기자가 연암에 대한 글을 쓰게된 계기는, 그가 중국 특파원 시절 '열하일기'를 탐독하며, 연암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하는 진정한 대기자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는데, 그래서 언제고 기자의 시각에서, 연암 박지원을 재 조명하는 책을 쓰리라는 마음을 갖고 있다가, 이번에 책으로 펴내게 된 것이다.
그동안 열하일기'를 다각도로 분석한 글들이 많이 나왔지만, 아마 記者의 관점에서 '열하일기'를 본 것은 姜기자가 처음이지 싶다. 강기자는 '열하일기'에 나오는 연암의 기자 정신을 ① 현장정신, ② 기록 정신, ③ 탐사 정신, ④ 투명성의 정신, ⑤ 불편부당 정신, ⑥ 비판 정신, ⑦ 공공 정신, ⑧ 취재 열정, ⑨ 철저한 취재 준비, ⑩ 사실의 정확성, 이렇게 10가지로 말한다. 그중에 몇 가지만 예로들자면, 지금이야 북경까지 비행기로 가면 금방이지만, 그 시절 한양을 출발하여 북경까지 가는 길은 머나먼 길이다. 가는 여정에 사신들은 숙소에 도착하면, 다음날 여정을 체크하고, 술 한 잔 하거나 잠자기 바빴겠지만, 연암은 시간을 쪼개어 현장을 누비며 기사거리를 찾았다. '열하일기'속에는 ‘연암의 호기심’과, '연암의 현장정신’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연암은 북경에 도착하였을 때, 사절단에게 지급된 식자재 목록도 지루하다싶을 정도로 꼼꼼하게 기록했다. 그리고 만리장성의 고북구(古北口)를 지날 때에, 이를 급히 기록해야 하는데 벼룻 물을 구할 수 없자, 술을 부어 먹을 갈았다. 이렇게 기록한 취재수첩들이 많다 보니, 귀국할 때 다른 일행들은, 두툼한 선물보따리를 가지고 돌아 가는데, 연암은 두툼한 취재수첩 보따리를 가지고 왔다. 당시 연암의 취재수첩 보따리를 보고 일행들은 비웃었을 테지만, 바로 이러한 취재수첩 보따리에서 위대한 '열하일기'가 탄생한 것이다.
'열하일기'는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보통 여행기는 눈앞에 펼쳐지는 경치와 현지 문화를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하는데, 연암은 그 이면까지 예리하게 분석하였다. 바로 기자의 ‘탐사 정신’이다. 이러한 탐사 정신으로 연암은 황제가 라마승 판첸라마를 극진히 모시는 이유를 분석하여 이렇게 말했다. “황제는 서번(西藩)의 승왕(僧王)을 맞이하여 스승으로 삼고, 황금 전각을 지어 거처하게 하고 있다. 천자는 무엇이 염려스러워서 이런 격에 넘치는 예우를 하는 걸까? 명목은 스승으로 모시면서 기실은, 황금 전각 속에 그를 감금해 두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최대한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기록하고 전해야 한다는 기자 정신이 배어 있다. 모르는 내용을 대충대충 포장하고 넘어가는 ‘적당주의’라는 말이 연암의 사전에는 없었다. '조선의 大기자 연암'을 읽으면서, 연암의 기자 정신을 10가지로 분류하고 설명하는, 강기자의 분석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런가 하면, 강기자는 연암의 취재 기법도, ‘현장 취재 기법’, ‘현상(現象) 취재 기법’, ‘인물 취재 기법’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연암이 자제군관 자격으로 청나라 사신단 일행으로 가면서, 가장 관심을 가진 부분은 '천하의 형세'였다. 그리하여 청나라 주변 정세와 청나라 외교 정책, 청나라의 한족 관리 정책, 청나라의 대조선 정책 등을 탐구하고 분석하였다. 강기자는 이에 대해 "연암은 천하의 형세, 천하의 대세를 살펴 천하의 근심거리를 논하는게 취재의 목적이다"라고 누차 밝혔다. 그러기에 ‘열하일기’는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조선의 앞날을 위하여 천하의 흐름을 살폈던 것이다. 그러기에 연암은 청나라 사람들을 만나면, 이러한 취재를 계속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무래도 민감한 문제가 따르니, 취재하는 사람이나 취재원이나 말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연암은 이러한 때의 취재 기법을 이렇게 밝힌다. “그들의 환심을 사려 한다면, 반드시 대국의 명성과 교화를 곡진하게 찬미함으로써, 먼저 그들의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고, 중국과 조선이 한 몸이나 다름없음을 부지런히 보여주어 혐의를 받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고 한편으론 예법이나 음악의 문제에 뜻을 두어서, 스스로 초연하게 보이도록 하고, 또 한편으로는 역대의 역사 사실을 거론하되, 최근 사정에 대해서는 다그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연암의 말에 강기자는, 아무리 연암이 출중하다고 해도, 언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에, 취재 기법과 ‘취재원 대우’를, 이처럼 정교하고 논리적으로 설파할 수가 있을까 하며 탄복한다. 이렇게 연암의 기자 정신을 분석한 강기자는 에필로그에서, 오늘날 언론이 권력에 동조하고, 편가르기와 편파보도를 한다면서, 기자 정신이 실종된 오늘날의 기자세계를 통렬히 비판한다. 그러면서 연암에게 배우라고 하며, 책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는다. “천하지우(天下之憂)의 고뇌에서 보듯, 연암의 글에는 늘 고뇌가 서려있었던 것은, 관찰과 생각을 늘 깊이 있게 했기때문이다. 연암처럼 생각이 깊어지면 기자가 깊어지고, 기자가 깊어지면 언론이 깊어진다. 언론이 깊어지면 사회가 깊어지고 나라국력이 깊어진다.
혼미해지는 기자 정신과, 권력에의 동조화, 편 가르기와 편파보도는 분명 21세기 대한민국 언론계의 천하지우다. 바로 지금 우리가 반드시 척결해야 할 문제로서, 스스로 깊이 고민하여, 그 실상을 정확하게 비추고 극복해서, ‘언론의 도’를 되찾아야 하는 것이, 대기자 연암이 남긴 기자 정신인 것이다. 말똥구리가 알사탕을 굴려서는 안되듯이, 기자가 알사탕을 탐하면 이미 그는 기자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는, 그런 기자 같지 않은 기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처럼 인생에도 나라나에도 언제나 전환의 변곡점(變曲點)이 있다. 조선 후기의 정조(正祖 1752~1800) 가, 재위 23년에 너무도 일찍 서거했는데, "정조때에 일제로부터 역풍을 맞았다면" 하는 아쉬움도 크다. 지금도 정치의 새내기가, 세계 정치의 험난한 파고를 어떻게 돌파할지, 마음이 착잡하기만 하다. 며칠전 나는 극우파로부터 대명천지 밝은 대한민국에서, "일제가 조선 근대화를 이룩했다."하고, "유관순을 도둑년이라 하고", 일제시대때의 위안부도, 조선인 강제 노동도, 모두 날조된 거짓"이라며, 내게 거세게 항의했다. 그 뿐아니라 소녀상을 훼손을해도, 누구 하나 질타하는 이가 없다. 잊었는가? 1945년 8월 일본은 조선을 떠나면서, "100년후에 다시 오리라." 고 했다. 섬뜩하지 아니한가?
종그니가
【종그니칼럼】인구 절벽
나는 '박사마을'이 내가 살고 있는 춘천시 서면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내 고향 전북 임실군의 삼계면 삼계리에도 "박사만 160명 넘게 배출한 마을,"이 또 있단다. 그러나 이러한 박사마을도 농촌의 인구 감소를 억제한다거나 비껴가지는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엇그제 내 바로 아랫 남 동생이, 폐암 말기가 되어 살아 있을때 얼굴이나 한번 더 보려고, 수년만에 당일치기로 고향을 찾아 갔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시골 고향 마을은, 삽이나 괭이등 농기구 만드는 공장은, 겨우 한 두군데 정도 있을 때, 애들 만드는 공장은 집집마다 다 있어서, 시골 마을 동구밖이나 고삿길마다, 어린애들로 가득했었는데, 지금은 칠 팔십 넘은 노인들이 텅 비어 가는 고향 마을을 지키고 있어, 영락없이 쇠락한 요양원처럼 을씨년 스럽기만하였다. 이대로 십년후면 어찌 될까? 가히 인구 절벽현상이 눈 앞에 다가 오고 있다. 해외 인구가 유입되지 않으면, 농사지을 사람이 없다는 말이 현실이었다. 요양원의 손과 발인 직원들 구하기가 어려울 날도 머잖아 보인다. 아니 지금도 무지 어렵다. 그 꼴 보기전에 나도 어서 주님곁으로 가야지.
십 오륙년전에 고향집 동산을 선산으로 만들 양으로, 조부모님과 부모님 산소를 이곳에 모셨었는데, 나는 자식이 없고, 동생 자식들은 모두 객지에서 살고 있는데다, 그들 머리속에 선영산소 벌초란 생각은 아예 없지싶다. 이제 씨족 공동체는 커녕 가족마저 해체되어, 나 홀로 세대가 대세를 이루고 있어, 가족제도 자체가 사라져 가고 있는 지금, 조카놈들이 조상을 돌아 볼 마음이 있겠는가! 조상없이 지들이 어찌 태어났을까마는, 조상을 모르는 세대이니, 이제 주인 없는 괴총 무덤이 될게 뻔하다. 내가 아직 기거동작할 수 있을 때 파서 화장을 해야 할까? 두 조카들에게 물어 보니, 물어본 내가 바보다.
언제부턴가 조상을 중심으로한 온 집안공동체가 한자리에 모여 유대를 다지던, 일가 공동체 의식은 사라지고, 오로지 개인의 이기주의가 팽만한 지금, 산 사람 살기도 버거운데, 죽은 사람들이야 아직 젊은 저들이 받아들일 마음의 공간이 있겠는가! 늙은이의 공허한 욕심일 뿐이다. 이제 이 땅은 오직 내 중심의 산 자만이 있을 곳이지, 죽은 자는 뼈 묻을 곳도 없게 되어버렸다. 설, 추석 한가위, 이젠 시골을 지키고 있는 노인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나면, 성묘객이란 말도, 불원간 다 케케묵은 옛 이야기에 묻힐 뿐이다. 그런데 어디랄 것도 없이 시골은 모두 다 이렇게 공동화 되어 가고 있다.
임실 땅 '박사마을'도 대세의 흐름을 어찌할 수 없어,명맥마저 끊어져 가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 있을 뿐이란다. '박사골로 불리는 이 마을에선, 지금까지 160명이 넘는 박사가 나왔으니, 가히 박사마을이라 할만하다. 십년전만해도 주민들의 아이디어와 열정 또한 대단해서, 지역에도 '잘사는 농촌'으로 꼽히던 마을이었단다. 불과 몇년전 만 해도 박사라는 별칭과, 각 종 시험 합격을 연결 짓는 상품인 쌀엿과 조청을 만들어, 쏠쏠한 재미를 보았었다지만. 허나 지금은 마을 주민 대부분이 80대 이상으로, 박사 배출은커녕, 전통 쌀엿 계승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단다. 이 마을의 정성화씨는, "전통 기술등 여러 문제들이 누적되어 있지만, 이를 논의 할 젊은 사람이 없다"고 했다.
지역소멸 위기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곳에도 예외 없이 찾아왔다. 조선시대 실학자 다산(茶山)정약용(1762~1836)의 유적지(다산초당)로 잘 알려진 전남 귤동마을 또한 비슷한 이유로 걱정이 많다 이 마을 이장 윤방(55)씨는 "퇴직 후 고향에 내려온 후손들이, 마을 전통을 근근이 이어가고 있다"며, "그렇지만 마을에 젊은이들이 없는 것은, 누대로 이어온 마을이 필경 역사속으로 영영 묻혀버리고 말 것같아 가슴아프다."고 말했다. 공직과 대기업 등에 몸담았다 낙향해 '선비정신’을 실천하는 이들이 그나마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이처럼 한가위를 앞둔 시골 고향마을 분위기가, 해마다 달라져 간다. 햅쌀을 수확하는 가을 들녘엔, 외국인 노동자들 뿐이고, 고향을 찾은 마을 선 후배들이 어울리던 모습 또한 옛이야기로만 회자 된다.
1963년 이후 180명이 넘는 박사를 배출한,춘천시 서면의 내가 몸담고 있는 박사마을도, 거의 모두 칠십이 넘은 늙은이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하기사 2009년에 이곳으로 이사 온 나 또한 일흔 여섯이다. 1963년 이후 올해까지, 184명의 박사를 배출한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박사 마을은, 도심에서 의암호를 가로지르는 다리 건설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다. 교통이 좋아지면 전원생활을 즐기려는 귀농, 귀촌으로 인구가 늘고, 의암호를 비롯한 수려한 경관을 활용한 캠핑, 글램핑장을 찾는 관광객이 늘 것이란 기대에서다.
한때 연간 16명이 학위를 받았던 이 마을 역시, 대부분 늙은이들만 남아 있다. '대통령 빼고 다 나왔다'는 좋은 기운이 서린 곳이라 해도, 고령화는 막아낼 재간이 없어서다. 그나마 춘천은 서울 외곽도시라서 의암호 안의 중도를 관광지로 한창 개발중이고, 또 서면을 잇는 연육교가 들어서게 되면, 상전벽해가 될거라는 기대들을 하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이 곳은, 내가 이사오던 해 상수도가 들어오고, 글림핑장과 파크골프장이 들어 서고, 지방도가 국도로 승격되고, 의암호수위에 유람선이 뜨고, 케이불카가와 의암호 중도에 레고랜드가 들어서고 있어, 혹여 늙은 도시가 젊은 도시로 회춘하지 않을까 싶어 몽상에 빠져 본다. 나는 천혜의 자연 휴양지로 노년의 삶을 이곳에서 유유자적 보낼 수 있게된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고, 그나마 감사할 뿐이다.
종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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