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조선 역사상 최초의 탄핵사건(2) 중종 반정의 본 말.

나는 지난 8월 4일에서~7일 일정으로 같은 노회 변충진목사 내외분의 초대를 받아 김병오 목사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후에 알았지만 같이 간 노회장 김병오 목사가 나의 왕복 비행요금을 모두 대납했다고 한다.  이래 저래 나는 돈 한푼 안들이고 제주도 여행을 한 것이다. 

내가 제주도 비행장에 도착하자 변목사 내외가 마중을 나와 우리를 맞아 주었다. 차를 타고 공항에서 제주 해변도로를 따라 가다가 제주 토속 음식점에서 제주산 갈치조림과 싱싱한 문어와 전복등을 넣고 맛갈나게 졸인 탕에 밥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 해치우고는 끝없이 드넓은 하늘색 보다 더 진한 제주 앞바다 내음에 흠뻑 빠졌다. 이처럼 맛갈나는 해산물로 배를 채우고 나니 싱싱한 제주 해산물이 몽땅 내 입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광활한 제주 앞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멀리 지평선 대양의 바다속으로 서서히 잠기는 석양의 붉은 해를 바라보았다. 인생 말년에 이르러서야 이 경이로운 대자연의 진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떨리었다. 다리가 부편한 내가 지금 제주 해변가에 서서 대자연의 진순무구한 신비를 보게 될 줄이야! 

다시 차를 움직여 조금 지나니 제주 해변에서의 젊은이들이 해변에 모여 한 여름 밤을 음악 한 마당으로 삼복더위를 씻어 내고자 현란한 악기 연주로 해변의 여름밤은 젊은 열기를 더해 점점 더 뜨거워 지고 있었다. 출연한 젊은이들은 악기를 자유자재로 현란하게 튕기며 한 여름 밤의 뜨거운 열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잠시 눈요기를 마친 우리는 이를 뒤로하고 우리 일행은 변충진목사 내외의 안내로 두 분이 칩거하고 있는 집에 도착했다. 어둔 밤 달 빛에 어린 마을의 풍광이 마치 새로운 세상에 온 듯 탁트인 드넓은 뜰은 잘 정돈된 잔디와 야산의 숲과 호수가 하나로 어우러져 있는 골프장이었다. 나는 이때 껏 한번도 골프 장 근처에도 가본적이 없다가 골프장이 사행천처럼 숲을 사이에 두고 펼쳐진 리조 아파트에서 며칠동안 주인 행세를 하게 되었구나 생각하니 친구덕에 이런 날도 다 있구나 싶었다.

제주에서의 첫 밤을 골아 떨어질 줄 알았는데 잠자리가 바뀌어선지 아니면 너무 잠자리가 좋아선지 거의 뜬 눈으로 지새고, 새벽 네시 경에 목욕하고 볼 일보는 사이 변목사 내외는 벌써 뜰앞으로 골프치러 나가고 우리는 두 내외가 온 후에야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제주 관광을 나섰다. 나는 변목사 내외에게 해변 길을 따라서 제주도를 한바퀴 돌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해변가에는 엄청 큰 풍차 십여개가 서 있는데  바닷바람에 도는 것은 두어개 뿐이어서 아쉬었다. 엄청 큰 돈을 들여 깊은 산속이나 바닷가에 수많은 풍차를 만들었는데 일년내내 돌아가는 것은 언제나 한두개에 불과했다.  왜 그럴까? 나는 그게 늘 궁금하다. 

다음 날 해변의 관광도시 제주도를 여름 피서지로 많이들 찾지만, 하지만 사면이 바다인 제주도 역시 아침부터 찌는 듯한 더위는 피할수 없었다. 그럼 피서지란 첨부터 없는 것이다. 하루동안 내내 변목사 내외의 안내를 받아 좋은 곳을 다 다녀봤지만 어딜 가나 덥기는 마찬가지 였다. 제주도 풍광좋은 곳에 와 있다 한들 남쪽하늘 제주 삼복더위가 더 기승을 부리는듯 하다. 겨우 걸을수 있어도 걷기가 불편하니 여행도 다리가 떨릴 때는 동행한 모두를 불편하게 만든다.  명승지를 찾아 열심히 사진도 찍었지만 그것은 허울 뿐 온 종일 두 내외가 밥 먹여가며 관광 안내를 해주는 게 참 피곤할 일이었다. 

제주를 찾아온 사람들마다 어디를 보여 달라 음식은 무엇을 사달라 그 요구들이 바로 내가 한 요구들일 것이었다. 매번 그 요구들을 일일히 들어 주자니 경치좋은 리조트가 그에게 무슨 보탬이 될까? 아마 참 짜증 날 일이었다. 제주 여행을 온 객들은 한번이겠지만 찾아 오는 친지를 맞는 입장에서는 끝도 한도 없어 여간 힘든 일이 아닐것 같다. 제주 맛집도 찾아 주어야 하고 눈도 즐겁게 해주어야 뒷 말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주를 찾은 뜨거운 여름 첫 날을 온 종일 변목사 내외가 날 위해 그토록 세심하게 배려해서 알뜰하게 여행 수발을 해준 덕으로 한 여름 삼복더위를 씻고도 남을 친절을 받았다. 이런 환대가 무엇 때문일까? 내가 존경스러워서도 아닐 것이다!  그럼 내가 돈이 많아도 아닐 것이다!  

아마 그것은 우리나라 그많은 요양원중에 유독 내게 장모님을 모시게한 것은 무엇보다 나를 신뢰할수 있는 인간으로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강원도 말고 타지역에서 오신 분들 대부분이 다 그러하다.  '춘천시'나 '건강보험공단'에 "부모를 모실만한 요양원을 소개해 달라"하면 거의 대부분 '행복이 가득한 집 요양원'을 소개받는다. 바로 이것이 내가 살아 온 이유다. 변충진 장모님이 몇달 전 우리 요양원에 오셔서 아내의 배려로 내가 칩거하고 있는 바로 옆방에 모시고 있기도 하다. 인천에서 서울을 지나 강원도 춘천까지 오신 것은 오로지 나를 믿고 어머님을 내게 모셨을 것이다. 아흔 한 분의 어르신들이 계시지만 나는 내게 오신 분들 모두가 오십보 백보만큼 다 이유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이분들을 편애없이 똑같은 마음으로 배려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양승국 변호사의 부모님을 수년전부터 모셔오다가 아버님은 소천하시고 어머님께서 지금까지 아버님이 계셨던 2층에 계신다. 내가 날 마다는 못 찾아 뵈어도 2~3일에 한번 씩은 찾아 뵙고 있다. 그리고 동료 류일석 목사의 안 사돈 되시는 할머님도 3층에 수년째 계신다. 그외도 참 많다. 젊은이 들과 함께 사는 것보다 늙은이들과 함께 사는 것이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고 그들의 말 동무가 되어주는 것이 내 삶의 진수이기 때문에 내 위주의 이기의 삶은 진작 묻어둔지 오래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제주에 머물고 있는 변충진 목사에게서 초대를 받아 자유의 몸이 되어 3박 4일의 일정으로 지금 가슴이아니라 다리가 떨리는 '팔십' 이 나이에 제주도로 구경을 왔다.  참 믿겨지지 않는 행복이다.  

김병오 목사 말이 "사람들은 내가 대단한 부자"로 알고 있단다. 나는 이런 말을 심심찮게 종종 듣는다.  없다는 것보다 얼마나 큰 축복인가! 비행기를 타고 수천피트의 창공을 날으니 세상 모든 것이 다 내 발 아래에 있구나! 생각하니 그럼 이만하면 부자지 그 이상 바랄게 뭐가 있겠는가!

나는 평생 돈을 저축해본 적이 없다. 주머니에 오늘 돈이 들어오면 그날 아님 그 다음 날 다 날아간다. 이것이 주의 종이 되고 난 지금까지의 내 삶이다. 내 호주머니를 비워 두어야 하나님이 채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두 밤 자고 오려했는데 변목사 내외 얘기가 하룻 밤 더 쉬었다 가란다. 여름 손님을 참 고마운 사랑이다. 그럼 내일엔 한라산을 등반하자고 했다. 한라산을 갈 생각만으로도 난 설래어 밤은 깊어가는데 잠은 오지 않았다.  수수만년전 화산 폭발로 제주도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한라산은 그 높이가 2000m 에서 50m가 모자란 제주도의 지붕이다. 산 정상에는 둘레 3km의 대 분화구였던 백록담(白鹿潭)이 있다. 이처럼 한라산은 한반도의 종착지인 제주도를 대표하는 지붕이라서 날이 밝자 바로 변목사 내외의 안내를 받아 한라산으로 향했다. 이침부터 내린 비는 그칠줄을 몰랐다. 1100m까지는 자동차 도로가 한라산 동서남북 사면으로 뚫려있어서 두 갈래 을 따라 올라갔다. 이후부터는 다시 차를 돌려 한라산 반대 방향으로 돌아오니 아니 그렇게 내리던 비가 이곳에서는 흐리기만할 뿐 신기하게도 비가 오지 않았다. 한라산을 80년 만에 처음 찾아 온 나에대한 배려인가?

그래서 나는 내 발걸음이 허용하는 약 200m정도까지 걸어갔다가 다리 힘이 따라주지 않아 이내 되돌아 왔지만, 꿈에 그리던 한라산을 품에 안겨 있다 왔으니 오늘 비로소 한풀이를 한것이다.  비록 처음 본 한라산 자락에 몸을 안겨 본 이 순간! 이제 언제 다시 안겨 볼수 있을까? 제주도 언덕배기에 널부러져 있는 구멍이 숭숭 뚫린 돌들을 보노라면 이번에 첨 본 것임에도 어찌그리 눈에 익을까? 제주도에 가면 어디서든지 볼수 있는 것이 제주 돌담 길이다. 돌 자체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돌담 길을 외겹으로 쌓아도 무너지지 않는다. 돌마다 바람 길이 열려 있기 때문이리라!  화산 폭발로 생성된 크고 작은 이름 모를 섬들이 해안을 따라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다. 

제주도 '주상 절개'가 있는 바닷가에는 철원에 있는 '주상절개'와 다른 점은 딱 하나다. 하나는 육지에서 본 것이고 이번 제주도의 주상절개는 바다에 펼쳐져 있다는 점이다 이 주상절개가 언제 있게 되었을까? 직접 원인이야 화산이 대대적으로 폭발한 후에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번에 제주도 해안을 따라 제주를 일주하면서 보니 제주도에도 이름 모를 크고 작은 여러 섬들이 있었다. 오늘 가 본 곳도 처음엔 모두 하나였던 섬이 오랜 세월동안 바다의 거센 파도에 찢겨져서 크고 작은 섬들을 이루고 있었다. 어느 섬엔 최후 여섯 가구가 살다가 지금은 무인도가 된 곳도 있었다.    

한라산을 뒤로하고 바닷 물에 찢겨지고 거센 풍파에 패여져서 바닷속에 잠기거나 혹은 쪼개지고 바스라져서 숨겨진 억겁의 속살을 그대로 드러 낸 제주 주변의 크고 작은 섬들마다 억겁 풍파의 역사를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제주도엔 엄청 드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음에도 논은 없고 밭만 있는 것이 이채롭다. 이것은 제주도 땅 전체가 구멍 뚫린 화강암으로 되어 있어서일 것이다. 나는 제주에 머문 날 동안 제주도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들을 이번 기회에 새롭게 인식한 비록 내 몸둥이는 저 찢겨진 섬들처럼 다 낡고 헤어졌을지라도 지금 나는 내가 태어나서 자란 내 조국의 남해 바다 땅 끝에 와 있다. 

제주에 머문 끝날 서쪽 하늘 지평선 너머로 붉게 지는 해와 함께 숙소로 돌아와 거실에 설치된 75미리 TV를 켜서 변목사 아들 변요한 탈렌트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를 보았다. 남쪽 바다 외딴 섬 그래서 옛부터 홍어가 많이 서식하는 '흑산도'로 조선 후기의 남인 선비 정약전이 이곳으로 귀양을 와 있는 동안 우리나라 해역에서 나오는 해산물에 대한 자료를 흑산도 태생의 젊은이(변요한 대역)의 도움을 받아 기록하는 과정을 담았다. 또 당시 부패한 관리들의 무수한 수탈 로 백성들의 등골 빼먹는 과정들을 아주 실감나게 연기했다. 그리고 변요한의 맛갈나는 해학적인 연기가 단연 계군일학(鷄群一鶴)처럼 돋보였다. 

2박 3일로 왔다가 변목사님 내외의 후의로 처음 예정보다 하루를 더 지내며 제주도를 한바퀴 휘감고 돌았던 순간 들! 내 팔십 평생에 이런 분수에 넘친 잊지못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준 변목사 내외에게 진정어린 감사를 드린다.

【종그니칼럼】조선 역사상 최초의 탄핵사건(2)  중종 반정의 본 말.

동물들은 육체의 감각과 본능을 따라서만 움직이기 때문에, 시각, 취각, 후각, 촉각, 청각 등 오감기관이 엄청 발달해 있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상 이러한 동물의 본능을 절대 따라갈 수 없음에도, 짐승처럼 육신의 본능을 따라 살려 한다. 인간에게는 하늘의 뜻과, 대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궁극을 깨달을 수 있는, 창조주가 준, 인간 고유의 심령과 자유의지가 있음에도,점점 금수를 닮아 가고 있다. 실로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모든 생물들은 예외없이 땅만 바라보고 살지만, 오로지 인간만은 하늘을 바라보고 직립보행을 하며, "발은 땅에, 머리는 하늘을 보는," 神도 동물도 아닌, 중간자로서의 영적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면 전부를 잃어 버리는,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추락하게 된다. "아담아 네가 어찌하여 먹지 말라한 금단의 열매를 먹었느냐?" "당신이 짝지어준 저 여자가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브야 네가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륜을 잃어버린 인간을 '짐승만도 못한 놈'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를 볼때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 이 세상을 이전투구처럼 어지럽힌 말로를, 역사는 명경처럼 보여주고 있건만, 콩에 눈이 멀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처럼, 세상이 주는 쥐염열매에 죽어간 망령들이 얼마나 많은가!

연산조 당시 성종의 친모이자 조정의 가장 큰 어른이었던 인수대비도, 금수만도 못한 패륜아 연산군의 광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연산군의 생모 폐비윤씨의 죽음에, 인수대비가 깊게 관여한 것을 알게 되자, 왕권을 견고히 하려는 인수대비의 깊은 뜻을 알리없는 연산군은, 할머니의 처소에 들어가, 감히 할마마를 뿔달린 짐승처럼 머리로 들이 받았고, 인수대비가 보호하고 있던 성종의 두 후궁 엄귀인과 정귀인을, 인수대비가 보는 앞에서, 궁궐 뜰로 끌어 내려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허나 생모의 전말을 알기 전까지는, 할마마인 인수대비에게 무척 어렵고 조심스럽게 대하던 연산군이, 갑작스레 금수처럼 돌변한 것은, 그의 에미 윤씨의 종잡을 수 없는 성정을 쏙 빼 닮았기에, 연산군의 광기 와 폭정이, 금수나 정신병자처럼 자행자지 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중종반정

이 즈음 나라는 와상환자의 욕창처럼 곪을대로 곪아 터져서, 나라는 꼴이 아니었다. 연산군에 대한 반감이 극도에 달했고, 미치광이 연산군을 타도하려는 분기가 온 나라에 가득했다. 이들 중 가장 큰 반감을 갖고 기민하게 움직였던 사람은 박원종이었다. 그는 연산군이 겁탈해 자결한 월산대군 부인 박씨의 친 동생으로, 과거 성종 때에는 부승지(副承旨)에 올랐으며, 연산군 때에는 도총관(都摠管)을 역임하고 있었다. 박원종은 친 누나의 원수를 갚고, 연산군의 폭정을 멈추고 단죄할 것을 결심한 후, 훈구파 계열인 재상 성희안, 유순정 등과 손잡고, 세력을 규합하였다.

이들은 마침내 거사일을 확정했고, 반정후의 왕으로 자순대비 윤씨의 소생인 진성대군을 추대하기로 했다. 거사의 명분은 '반정(反正)', 그릇된 나라를 올바른 나라 제자리로 되돌려 놓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반정을 하겠다면서,왜 하필 사림파가 아닌 '훈구파'냐 하는 것으로, 출발부터가 반정의 명분이 미약한 거사 였다.

박원종 등은 우선 영의정과 좌우 삼정승에게 은밀히 거사 계획을 흘렸는데, 영의정 유순과 우의정 김수동은 찬성했지만, 연산군의 처남이자 진성대군의 장인이었던 좌의정 신수근은, "거사보다 좀 더 참고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면서 찬성하지 않았다.

이에 박원종 등은 계획이 발설될 것을 염려해 거사를 앞당겼고, 1506년 9월 2일 밤에 군자감부정 신윤무, 군기시첨정 박영문, 전 수원부사 장정 등과 일단의 무사들을 훈련원에 소집한 후, 이들을 거느리고 창덕궁으로 진격했다. 반정군이 진격하는 동안 백성들이 호응했고, 궁궐 안팎의 저항은 그리 크지 않았다. 반정군은 궁궐로 무난하게 진입한 후 연산군의 최 측근이었던 임사홍, 김효선 등과, 반정에 반대했던 좌의정 신수근과 신수영 형제를 차례로 척살하였다.

이후 궁궐을 완전히 장악한 반정군은, 자순대비를 찾아가 반정 소식을 알렸고, 연산군을 폐위하고 차기 왕으로 진성대군을 추대한다는 교지(敎旨)를 내려줄 것을 청했다. 자순대비는 처음엔 사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 이를 허락하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다.

한편, 들 짐승처럼 안하무인으로 날뛰던 연산군은, 구테타 진압군이 목을 죄어 와도, 임금을 위해 칼을 뽑는 자가 없었다. 고립무원이 된 연산군은, 이미 얼이 빠진 상태로 군왕의 위엄은커녕 삼복 더위 만난 강아지처럼 넋을 잃은 몰골로, 순순히 최후를 받아 들였다.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내 죄가 중대하여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나를 좋을 대로 처분하라며, 이내 시녀를 시켜 옥새를 내어다 주게 하였다." 그리고 바로 내전문으로 나와 땅에 엎드려서는 "내가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음에도, 임금이랍시고 구차한 몸이 죽지 않게 되었구나!"라고 전해진다.

반정이 성공한 당일 진성대군의 나이 이제 겨우 19세로, 근정전(勤政殿)에서 중종으로 즉위했고, 폐위된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간 후, 1506년 11월에 병사했다. 연산군은 광해군(光海君, 제15대 왕)과 더불어 조선 시대의 폐주(廢主)가 되었고, 왕실 족보인 '선원계보'(璿源系譜)에, 묘호 및 능호도 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되는, 세습 왕조의 무소불위의 왕권이 만들어 낸, 앙상레짐의 비운이라 할 것이다.

개혁의 실패

중종반정 이후 박원종 등 반정 세력은, 이른바 '공신'(功臣) 세력이 되어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작스레 떠밀려 왕위에 오른 중종은, 이들 노회한 공신 세력에게 휘둘리기 십상이 었다. 물론 공신 세력은 연산군 때의 여러 잘못들을 바로 잡고자한 것도 있지만 그러나 막상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보니, 권력을 손에 쥐는 순간 권력이라는 마력의 블랙 홀에 쏙 빠져 들어, 또 다시 어리석은 선왕들이 저지른, 부패와 전횡(專橫)을 일삼아, 하늘이 준 반정의 절호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에게서 염증을 느낀 중종은, 이들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색깔을 갖춘 개혁 정치를 하기를 원했지만, 그러나 때를 놓쳐 이미 반정의 동력을 다 잃어갈 무렵, 사림파의 명맥을 이어 온 '조광조'(趙光祖)를 등용 하였다. 중종 개혁 정치의 요체는, 유교적 왕도정치의 구현이었는데, 조광조의 도학(道學)정치론이, 이에 부합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중종의 후원을 받은 조광조는, 언로(言路)를 확충하기 위해, 대간의 위상을 강화했고, 향촌의 자치 규약인 '향약'(鄕約)을 실시해, 백성을 유교적 윤리로 교화코자 하였다. 또한 과거 제도를 대신해 천거 제도인 '현량과'(賢良科)를 도입, 인재 등용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결과적으로 사림들이 중앙 정계에 적극 진출하는 발판이 됐다. 이후 조광조는 국가적인 도교 제사를 주관하는 관청인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했고, 대간을 앞세워 반정공신 중 공이 없으면서 공신의 지위를 얻은 76명에 대한 위훈(偉勳)을 바로잡아 관철시켰다.

하지만, 조광조의 이 같은 과감하고 급진적인 개혁 정책은 보수 훈구파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연산군 이전부터 나타난 훈구파와 사림 간의 갈등이 재연되는 모습이었다. 더 큰 문제는 중종의 우유부단한 성품에 있었다. 당초 개혁 정치를 목표로 한 중종에게서 서서히 이에 대한 의지가 퇴색되고, 중종은 조광조의 개혁 정책과 및 군주의 자질 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등에 염증을 느꼈다.

조광조 및 사림에게서 중종의 신임이 멀어져 가고 있음을 직감한 훈구파는, 조광조 등 사림파가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며 탄핵을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조광조 및 사림 세력들의 몰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이 발생했다. 궁궐 후원에서 '주초위왕'라는 글씨의 형태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이 발견됐는데, 여기서 '주초'란 조(趙)를 파자(破字)한 것으로 '조씨가 왕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훈구파였던 남곤이 사전에 나뭇잎에 꿀로 글씨를 써서 공작(工作)한 일이었지만, 이를 빌미로, 개혁의지를 잃어버린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것이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이다.

기묘사화 이후 조광조는 물론 중종의 개혁 정치는 용두사미로 돌아갔다. 무엇보다 우유부단한 용군(庸君)이었던 중종이, 스스로 이 같은 실패를 자초한 것이었다. 이후 조정에는 다시 훈구권신들이 득세하게 됐고, 중종 말기부터 인종, 명종 등에 이르기까지, 그칠줄 모르는 무수한 권력 다툼이 이어져, 내치에 실패한 조선은, 이전투구의 대 혼란에 빠져, 결국 내우 외환을 만들어, 임진왜란의 빌미를 자초하였다.

한반도는 둘로 쪼개져, 북은 공산주의를 표방하고, 인민민주주의를 국시로 내걸고서, '조선'이란 군왕제의 호칭을 쓰고 있는 복고체제다. 그리고 세습 3대를 이어 오고 있다. 이처럼 남과 북은 역사의 깊은 안목이 없이, 오로지 권력에 함몰된 자들에의해, 모든 국난을 자초한 이 역사의 가르침에서, 작금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살며, 나라의 미래를 열어 가야 할 우리가, 진실로 깨달아야 할 점은 무엇인가?

 

<저작권자 © 리폼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리폼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