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조선 최초의 탄핵 사건 : 중종반정의 본말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앞에 두고, 못박히시기 전날 밤에도, 감람산에 오르시어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나에게서 이 고난을 물러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려고 이 땅에 오신 에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앞에 두고 하늘 아버지께, 타는 목마름으로 기도하셨다.  '고사성어'에 역래순수(逆來順受)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내게 닥친 환란을 회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말한다. 우리는 불시에 닥친 환란을 억울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고 회피하려 들 때가 많다. 이는 자기 자신의 부족을 성찰할 줄 모르기 때문에 격는 마음의 격랑(擊浪)이다. 이때 자칫 우리는 차분한 마음 즉, 이성(理性)을 잃고 한 순간 감정의 노예가 될 수도 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본연의 심령을 다스릴수 있는 자세를 이름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잘되면 자기 덕,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순전히 무속의 뿌리인 기복신앙에서 나온, 아주 무책임한 말이다.어떤 일이 잘 되면 자기가 잘해서 잘 된 줄로 알고, 부모 형제나 주변의 도움을 받은 이들에게, 고마워할 줄 모르고 안면몰수하는 예를 종종 보게 된다.  그리고 일이 안 풀릴 경우에는, 실패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아 고치려는 사람보다, 많은 사람들은, 부모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로 책임을 전가한다.  이것은 가정이나 회사나 국가 경영에서도,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습관처럼 나 아닌 제 삼자 혹은 상대에게서 찾으려 하기 때문에, 문제가 또 새로운 문제를 낳아, 일이 실타래 처럼 꼬이게 된다. 실패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자성하고, 분골쇄신 하는 맘으로 다시 시작하면, 전화위복의 거울이 되어 반드시 뜻을 이루게 될 것이다. 

오늘 날 대한민국의 국사를 논함에 있어서도,나랏 일의 대부분이 삼권분립으로 되어 있는 것은, 서로를 견제함과 동시에 언제나 상대가 있는 것이므로, 상생의 길을 찾기위해, 이견(異見)속에서 정반합(正反合) 해답의 지혜를 찾기위함인데, 삼권분립의 본래의 취지와는 반대로,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능사로 삼고 있으니, 이러다가 '대한민국號'가, 바다가 아닌 산이나 혹은 깊은 블랙 홀 속으로 빠져들까 두렵다.  전후 좌우를 봐도 정말 싸울 때가 아니다.  與든 野든 아우르는 마음들이 없다.우리가 가는 길엔 언제나 두 길이 있다. "가야 할 길과, 가서는 안될 길"이다. 요즘같은 스피드 시대에는, 순간의 선택이 십년 아니 백년을 결정 짓거나, 자칫 영원한 나락으로 떨어질수도 있다. 이처럼 나랏 일도 사적인 일도, 때론 실패가 성공의 촉매제가 될수도 있지만, 그러나 실패의 책임을 나 아닌 상대 혹은 제 3자에게 돌리려 들면, 끝 없는 수렁속에 빠지고 만다.  

자기가 태어난 가난했던 가정, 흙수저의 부모, 부모의 열등한 DNA 등, 모든 것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면  한이 없다. 옛말에 "마누라가 예뻐보이면 처갓집 말뚝도 좋게 보인다."고 했다.우리는 곧잘 주객(主客)이 전도되어 분별력을 상실할 때가 있다.  일의 중심에 있는 것은 바로 '나'다. 좋은 가문, 좋은 부모, 명문대학은 主가 아닌 客이요 부차적인 것이다. 무엇보다 '나'라는 자신을 잘 관리할 줄 알아야 한다. 인생은 변화무쌍하고, 언제나 가능과 실패의 연속성상 위에 있다. 나는 부모로부터 받은 유산을 다 잃고, 폐결핵 말기까지 이르러 지푸라기 하나 잡을 것이 없었으나, 그 모진 역경을 딛고 살아 여기까지 왔다.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가장 성공한 인물 중의 한사람이 반기문(潘基文) 전 유엔 사무총장이다.  그는 아주 바르고 겸손하게 처신하여, 전 세계인으로 부터 칭송받는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그의 조상은 남의 집 사노(私奴)였단다. 

조선 중중(中宗)때, 반석평(潘碩枰: 1472~ 1540)은, 본래 한양 이 참판 댁의 종이었다. 반석평이 어렸을 때, 자기 또래인 주인집 아들 이오성이, 독선생(獨先生)을 모셔놓고, 글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너무 부러웠지만, 자신의 신분으로는 공부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나 멀리서 글 가르치는 소리만 듣고도, 배우는 내용을 다 알았다. 어느 날 이 참판의 다리를 주무르면서, 머릿속으로 글 내용을 생각하다 건성으로 다리를 주물렀다가, 주인 어른의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그때 반석평은 용기를 내어 눈물로 그동안의 사실을 다 털어 놓았다.  이 참판은 반석평의 노비문서를 불살라 신분을 해방시켜, 후손이 없는 친척 집에 양자로 들어가게 해 주었다. 이에 반석평은 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마침내 중종 2년 1507년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는 내외의 여러 벼슬을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어느 날 초헌을 타고 입궐하다가, 길에서 어떤 거지를 발견했다. 알고보니  옛날 자기가 노비로 있던 이 참판의 아들 이오성이었다.  반석평은 임금에게 자신이 본래 노비였는데, 신분을 속였다고 실토하고 처벌해 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주인이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신분을 해방시켜 주었으니, 처벌받을 일은 아니었다.        

그러자 왕은 오히려 그를 가상히 여겨, 주인집 아들 이오성에게도 사옹원(司饔院) 별제(別提)라는 벼슬을 내려주었다. 반석평은 조선 팔도의 감사를 전부 다 역임하였고, 그의 관직이 좌찬성(左贊成)에까지 이르고, 세상을 떠난 뒤에는 장절공(壯節公)이라는 시호까지 받았다.  사무엘하 18장 18절을 보면,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세웠으니, 이는 저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음을 한탄함이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으로 그 비석을 이름하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지금까지 압살롬의 비석이라 일컷더라."는 말씀이 있다. 권력에 눈이 멀어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려다, 되려 전쟁터에서 죽은 압살롬! 그는 자식이 없어 자기 이름이 새겨진 비석세우기 를 좋아했단다.   자기 이름 남기기를 좋아하는 예는 동서고금이 똑같다. 명승지를 가서 보면 영락없이 바위에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압살롬이 마하나임 전투에서 죽자 그곳에 장사 되고, 그가 소장하고 있던 비석이 그의 무덤에 세워졌다. 

프랑스의 과학자 에르메뜨 삐에로띠 (Ermete Pierroti)는 철저한 무신론자로, 그가 팔레스틴을 여행중에 우연히 압살롬의 돌무덤에 도착했을 때, 특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무덤 앞을 지나던 한 여인이, 아이의 손에 돌을 쥐어 주며 갑자기, "무덤을 향해 돌을 던져라!"고 소리쳤다. 이를 목격한 '삐에로띠'가, 그 이유를 여인에게 물었다. 그 여인은, "이 무덤은 아버지 다윗 왕을 죽이고 왕이 되려했던, 아주 못된 압살롬의 무덤으로,지금 내 아이에게 산 교육을 가르치고 있다." 고 했다.  그는 즉시 성경책 을 구입해서 펼쳐 압살롬의 이야기를 읽고 난 후, "성경이야말로 진실로 그분의 역사를 기록한 'History'임을 믿게 되었다. 모든 인류사가 그분 (하나님)의 역사라고 고백했다. 그러기에 성경은 우리의 어둔 마음을 비춰주는 영혼의 거울인 것이다.

【종그니칼럼】조선 최초의 탄핵 사건 : 중종반정의 본말

권신(權臣)에의한 역성(易姓)이 아닌, 단종의 작은  애비 수양이란 자가, 왕권에 눈이 멀어 모양새는 왕위를 선양한 것처럼 꾸몃으나, 실은 피비린내는 찬탈이요 반역이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의 무신이었던 이 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반역을 일으켜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세웠으니, 엄밀히 말하면 새로운 국가 세움의 명분이 빈약하기 이를데 없다. 이리하여 새로운 국가 통치의 틀을 정도전이 명분을 불어 넣었으나, 이를 두고 이방원과 정도전이 크게 다투다 마침내,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하고, 조선 전제왕권을 세웠으니, 이가 바로 조선 제 3대 태종이다. 그는 소위 왕권 중심의 전제 군주국을 확립키위해 무수한 인명을 살륙했다. 이는 훗날 군왕이 어리석으면, 전제군주제도가 어찌 되는가를. 연산군에 의해 똑똑히 보여 주고 있다.

국립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연산군 일기'에는, "연산군은 원래 시기심이 많고, 모진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질 또한 총명하지 못한 위인이어서, 문리(文理)에 어둡고, 국사처리 능력도 없는 자 였다. 만년에는 더욱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하고, 패악(悖惡)한 나머지 학살을 마음대로 하고, 대신들을 많이 죽여서 대간과 시종 가운데 남아 난 사람이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506년(연산 12년), 연산군(燕山君, 제10대 왕)의 갈수록 도를 더해가는 광기어린 폭정에, 모든 신하와 백성들의 반감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무수한 피의 숙청을 불러온 두 번의 사화(士禍)와, 사치 및 향락으로 세종, 성종 때 이룬 조선의 정치·사회적 치적은 온데 간데 없고, 국가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하극상이 만연하였다. 마침내 정권에서 저만치 물러나 기회를 엿보고 있던  훈구파(勳舊派)들을 중심으로 정변이 일어났다. 역사는 이를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 부른다. 

언제나 그렇듯이 훈구 세력들은, 자신들의 정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반정'(反正)이라는 명분을 내 걸었는데, 이 '반정'은 "그릇된 상태에 있던 것을 바른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즉, "연산군이라는 잘못된 왕을 폐위하고, 새로운 왕(中宗)을 세워 나라를 바로잡으려 한다."는 것이다. 조선 건국당시 경국대전을 편찬한 정도전은, "왕은 존재하나 군림하지않는다." 는 군왕제도는 이방원(태종)에 의해 말살 되고, 왕이 곧 법이 되는 법 초월적 존재로 군림하는, 전제적 유교(儒敎)국가가 된 조선에서, 신하들에 의해 왕이 쫓겨 나가고, 새로운 왕이 즉위 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이고 초법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초법적 정변으로 단행한, 반정에의한 일련의 개혁 정치는 실패하였고, 조선은 권력의 맛을 익히 안 훈구권신들만의 구태(舊態, 앙상레짐)로 회귀하게 되었다. 나는 조선사 최초의 '탄핵'(彈劾) 사건인 이 '중종반정'의 전말을, 두 차례에 걸쳐 되새겨 보고자 한다.

연산군의 친모는 '폐비(廢妃) 윤씨'였다. 폐비 윤씨는 궁녀 출신으로, 성종(成宗, 제9대 왕)의 첫 후궁 이었는데, 후궁은 왕비가 될수 없는것이 원칙이었다. 허나 폐비 윤씨는 구미호와 같은 천박함을 감추고, 애써 검소하고 겸손하게 처신하여, 이를 크게 인정 받아, 마침내 성종비가 될 수 있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성종과 폐비윤씨의 사이는 매우 돈독했다. 하지만 왕비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폐비 윤씨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성종이 다른 후궁들과 함께 하는 것을 시기 질투했고, 이러한 감정을 왕과 신하들 앞에서 여과 없이 표출하였다. 당시 성종은 세인들로부터, '주 요순'(晝 堯舜:낮에는 요순처럼), '야 걸, 주'(夜 桀紂:밤에는 방탕했던 桀,紂왕처럼,)로 불렸다. 이는, 성종이 낮에는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명군인 요임금과 순임금 처럼 국정을 잘 돌봤지만, 밤에는 중국의 대표적인 폭군인 하(夏)나라 최후의 왕 '걸'(傑)과 은나라 최후의 왕 '주'(紂)처럼 여색(女色)을 밝혔다는 것이다.

아무튼 시간이 갈수록 이에 대한 폐비윤씨의 질투와 시기심은 도를 더해갔는데, 실록에 따르면 성종은 이와 관련해 말하길, "폐비 윤씨는 짐(성종)을 온화한 얼굴로 대한 적이 없다. 내 발자취를 없애겠다. 고 까지 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처럼 폐비 윤씨는 시기와 질투가, 넘어서는 안될 선을 크게 넘어서, 급기야 폐비윤씨에게 불행한 결말을 가져다 주는 중대한 사건을 자초하고 말았다. 어느 날 폐비윤씨가 왕의 여색 문제로 성종에게 앙탈을 부리면서, 손톱으로 성종의 얼굴에 생채기를 내고 만 것이다. 왕의 얼굴인 '용안'(龍顔)에 상처를 냈다는 것 자체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중죄'였다.

이 사건으로 조정은 벌집을 건드리듯 발칵 뒤집혔다. 특히  인수대비(仁粹大妃)는 성종을 직접 불러 왕비를 폐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다른 대신들은 처음엔 추후 세자(世子)가 될  사람의 친모라는 이유로 좌고 우면하며, '폐비'문제에 엉거주춤 하다가, 인수대비의 단호한 의지와 성종의 결단에 끌려 찬성했다. 결국 폐비윤씨는 궁궐에서 쫓겨나, 폐 서인(廢 庶人)이 되어 사가에 머물게 되었다. 1482년, 연산군이 7살이 되던 해, 세자 책봉 논의와 폐비윤씨의 복권(復權) 주장도 있었지만, 인수대비의 준엄한 반대로 복권은 무산됐다. 그런데 그 해 여름에 전국에 기근이 들자, 대신들은 폐비윤씨가 혹여 굶어 죽을 것 등을 우려해, 성종에게 별궁 안치를 청했다.  옛 정이 아직 조금은 남아 있던 성종은, 은밀히 내관 '안중경'을 보내, 폐비윤씨의 동정(動靜)을 살피게 했는데, 그러나 사전에 인수대비에게 밀명(密命)을 받은 안중경은, 폐비윤씨가 반성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고 보고하자, 마침내 성종은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린다.

이후 성종은 연산의 이 열살이 될 무렵, 추후 연산의 등극을 생각해서, 그동안 방치해 왔던 폐비 윤씨의 묘를 관리케 하였다. 이윽고 연산이 성종의 뒤를이어 왕위를 이어 받은 후, 적어도 몇해 동안은 폐비 윤씨의 죽음에 대해 아직 모르고 있었다. 연산군은 즉위 초에는 별다른 문제 없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국정이 운영되었다. 연산군 때에는 그동안의 농업진흥 정책 등에 힘입어, 산업구조상의 변화가 발생했다. 우선 지방 장시(場市)가 크게 확대됐고, 수리시설 및 시비법 개선에 따른 연작상경(連作常耕)의 집약적 농업기술의 발달과 구매력이 증대돼, 전국적인 유통 경제망이 형성됐다. 또한 중국과의 사무역이 증가했고, 국내 은광업이 눈에 띄게 발달했다. 성종 때의 태평성대 분위기가 아직 남아 있었고, 성종이 중용한 사림(士林) 세력들이 국정의 중심에 있는 동안은, 국가 질서가 유지되고 있었다. 사림은 태종이 세운 절대왕정이 아닌, 성리학(性理學)적 질서와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표방하였기 때문이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은 먹을 것이 있다."는 말처럼, 연산의 재위 약 3년째가 되면서부터 조금씩 먹구름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연산군은 이 시기를 전후해 폐비윤씨의 사건을 처음으로 인지하게 되는데, 실록에 따르면, "왕이 비로소 윤씨가 죄로 인해 폐위되어 죽은 줄을 알고, 수라(水剌)를 들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에 연산군은 폐비윤씨의 신주와 사당을 세우고 왕비로 추숭(追崇)하는 의식을 거행하려고 했지만. 사림 세력이 중심이 된 대간(臺諫)들은, 성종의 유언을 이유로 반대했다. 연산군은 굴하지 않고 성종의 3년상(喪)이 끝난 직후, 폐비윤씨의 묘를 격상하는 작업을 강행했다. 이러면서 연산군과 사림 세력 간에 갈등의 골이 깊어졌는데,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훈구파가 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이 갈등에 불을 질렀다. 훈구파는 조선 초기 세조(世祖, 제 7대 왕)의 왕위찬탈을 도와, 공신들이 된 세력들을 말한다. 그러나 훈구파의 권세는 이후 성종 때에 사림 세력이 득세(得勢)하면서 실권을 잃었다.

사림 세력은 스승 김종직의 주장을 기반으로 훈구파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세조의 왕위 찬탈'을 격하(格下)했고, 단종의 정통성을 공개적으로 내세웠다. 연산군은 사림 세력의 폐비윤씨에 대한 태도와, 자신의 할아버지인 세조 격하 움직임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런 가운데 1498년 훈구파의 일원이었던 유자광과 이극돈은 사관들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사초(史草)에서 김종직이 작성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발견해 연산군에게 보고했다. 조의제문은 1457년에 문신·학자였던 김종직이 단종을 죽인 세조를, 의제를 죽인 항우(項羽)에 비유하며 세조를 은근히 비난한 문서였다. 이를 통해 확실한 명분을 확보한 연산군은, 눈엣가시였던 사림 세력을 대거 숙청(肅淸)하기 시작했다. 역사는 이를 '무오사화'(戊午士禍)라고 부른다. 조선 시대 첫 사화였던 무오사화는 매우 잔인하게 진행됐다. 심지어 김종직은 이미 죽었지만, 묘가 파헤쳐져 목이 잘리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기도 했다.

무오사화를 통해 사림 세력을 거의 몰아낸 연산군은, 왕권의 위력을 새삼 절감했다. 자신감이 오른 연산군은 훈구파와도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다. 연산군은 자신의 향락 등에 사용하기 위해 훈구파 등으로부터 세금을 거둬 상당한 반발을 불렀다. 이런 가운데 임사홍에게 폐비윤씨와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을 접수한 연산군은 이를 빌미로 폐비윤씨의 사사와 관련된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등 훈구파 재상들을 대거 숙청했다. 이것이 1504년에 발생한 '갑자사화'(甲子士禍)다. 갑자사화는 그 숙청의 규모 면에서 무오사화를 능가했는데, 비단 훈구파 뿐만이 아닌 나머지 사림 세력도 모조리 숙청됐고 피해자의 자녀와 가족, 동족까지 연좌(緣坐)되기에 이르렀다.

광기어린 절대권력의 폭거로 두 차례의 사화를 격은 연산군의 견제 세력은 사실상 사라졌다. 연산군은 권력을 독점했고, 더 이상 거칠 것이 없는 광기(狂氣)를 표출한다.  평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서슴없이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고, 매일 연회를 열어 주색(酒色)을 탐했다.
특히, 궁궐 안으로 수많은 기생들을 들여왔는데, 이들을 흥청(興淸), 계평(繼平), 속홍(續紅) 등으로 나눠 불렀다. 여기서 왕과 잠자리를 가진 자는 천과흥청(天科興淸), 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신 자는 지과흥청(地科興淸)이라고 했다. 대신들에게는 홍준체찰사(紅駿體察使)란 칭호를 부여한 후 서울과 지방 공천(公賤)의 처첩 및 창기 등을 색출해 각 원(院)에 나눠서 두게 했다. 아울러 성균관을 흥청들과의 놀이터로 사용했고, 서울 동북쪽 100리를 금표로 지정해 사냥터를 조성하기도 했다. 이 같은 연산군의 향락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면서 국가의 재정은 악화됐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이 됐다.

연산군의 광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종실(宗室) 여인이나 사대부의 부인들도 연산군은 갖은 수를 써가며 취했다. 특히 성종의 친형이자 연산군의 백부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겁탈(劫奪)하기도 했는데, 이후 박씨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자결하고 말았다. 박씨 겁탈 사건은 추후 중종반정의 직접적인 도화선(導火線)으로 작용했다. 또한 연산군은 자신을 비난하는 자는 온갖 고문을 가해 죽였다. 당시 연산군이 행했던 형벌을 보면 '포락'(凉烙, 단근질 하기), '착흉'(嫂胸, 가슴 뽀개기), '촌참'(寸斬, 토막토막 자르기), '쇄골표풍'(碎骨瓢風,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이 있었다. 실제 연산군 면전에서 대놓고 간언(諫言)했던 환관 김처선은 이와 같은 형벌을 당한 후 숨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이 곧 국가요 국법이다." 라고 하는 절대왕정에서 이렇게 어리석은 자가 왕이 된다면 그 나라가 어찌 될까를 연산군이 우리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역사의 가르침을 반면교사로 삼지 못하고, 언제나 똑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은, 상대방의 소리에는 귀를 막고, 내 주장만 앞세우는, 이땅에 만면한 이기주의 때문이다. 이땅에 교회가 서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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