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장로교”인데 "장로교 신학“이 아닌 “개혁신학”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장로교”와 “개혁신학”은 포괄 관계일까요? 대등 관계일까요? 개혁신학을 칼빈주의라고 한다면 포괄 관계(개혁신학 안에 있는 장로교 신학)가 될 것이고,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의 신학이라면 대등관계입니다. 우리는 장로교 신학의 장로교의 정점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1646년)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교회를 연속하는 미국 프린스턴 신학(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1812년 설립)를 장로파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1929년 메이천 박사의 기점에서 메이천 박사의 신학을 따르기 때문에 구(舊) 프린스턴과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전통입니다. 현재 프린스턴은 미국장로교(PCUSA)의 신학교로 동성애까지 수용한 장로파 진영입니다. 1560년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수행하였던 개혁 운동은 1700년대에서 자취를 잃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직임명권(Patronage), 교회와 국가 관계에 대한 신학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성직임명에 대한 갈등(서임권 논쟁, Investiture Controversy)은 중세 교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독교 사회의 한 중요한 쟁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1920년대에 토렌스 형제(T. F. Torrence, 1913-2007, James B. Torrance 1923–2003)가 신학을 주도하였는데, 그들은 칼 바르트의 신학을 스코틀랜드에 도입하여 현대신학이 점령하였습니다. 여러 위협되는 신학에서 스코틀랜드 교회는 소수의 교회(스코틀랜드 자유 교회)가 전통 신앙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J.B. 토렌스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칼빈의 영향이 아닌 베자(Théodore de Bèze, 1519-1605)와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의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하였는데, 좋지 않은 분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칼빈(John Calvin, 1509-1564)과 베자의 관계를 불연속성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칼빈과 베자 그리고 후기 개혁파 신학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믿음의 사역자들의 사상에서 불연속성을 부각시키는 것은 좋은 분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스코틀랜드 존 낙스(John Knox, 1513?-1572)의 후예인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은 베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1600년대부터는 개인 신학자보다 학교를 중심으로 운동이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초기 개혁운동은 캠퍼스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잉글랜드의 대표 학교는 옥스포드(1096년 설립)와 캠브리지(1209년 설립)이고, 스코틀랜드의 대표 학교는 세인트 앤드류(1410년 설립), 글래스고(1451년 설립) 대학. 에버딘 대학(1495년 설립), 에딘버러(1582년 설립) 등으로 학교를 중심으로 사역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그 학교에서는 수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고, 글쓰기와 출판 기술로 출판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수 많은 연구 출판물은 길을 찾을 수 없을만큼 많은 양이 되었습니다. 그 많은 저작을 모두 연구해야 알 수 있다는 겸손은 내려놓고, 자기가 인식하는 거점(푯대)를 세워, 인식의 거점을 중심으로 학문하는 이성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장로교의 최고의 거점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장로교의 본거지인 스코틀랜드가 아닌 잉글랜드 런던에서 작성된 문서입니다. 그것은 역사의 아이러니(ironic story)가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신비와 섭리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장로교가 추구하는 언약(약속)에 대한 깊은 이해와 결단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대한 “어떤 질문 혹은 반박”에 대해서 제가 신문에 답변한 것을 다시 정리하면서 소개하면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대한 이해를 세우려고 합니다.

Q. 장로교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장로교 신학자”가 아닌 “청교도 신학자들”이 만든 문서입니까?

A. 모호한 질문입니다. 확실한 답은 스코틀랜드 장로교에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표준문서를 채택한 것이 법(法)입니다. 장로파 교회는 그 법 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법이 성경에 도리를 합당하게 제시하였다고 합의하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장로파 교회는 사도 베드로께서 고백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움과 다름이 없다고 확신합니다. 로마 카톨릭은 사도 베드로의 고백이 아닌 직분, 위가 아닌 으로 교회가 유지된다고 간주합니다. 오순절주의적 교회는 사도의 능력으로 세워지는 교회를 지향합니다. 개혁된 교회는 사도의 고백, 가르침, 정통 교리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고 확신합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성경, 사도의 가르침, 교부의 고백(정통교리)에 연속성을 갖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1646년에 작성되고 1647년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1648년 잉글랜드 의회에서 채택되었습니다. 신앙문서이기도 하지만 왕국의 법령 문장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입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신앙문장도 되지만 국가법령을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643년 “엄숙한 동맹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은 최초로 세 왕국(아일랜드, 잉글랜드-웨일즈, 스코틀랜드)이 한 믿음으로 한 왕국이 될 수 있다는 상상을 한 계기였을 것입니다. 그 꿈의 계기는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세 왕국은 한 왕국(UK, United Kingdom, 1707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과거 사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상황에 대해서 좀 더 면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교회 역사도 정치, 외교적 상황까지 고려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이해가 명료한 역사 사건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역사에서 형성된 문서(text)가 가장 확실한 이해의 근거입니다. 우리나라 과거 사건에 대한 해석(이해)도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그런데 “해석”과 “문서”는 다릅니다. 조선 시대에 있었다는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일단 왕조실록(선조실록)에 있었다면 논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선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첫째 사료는 왕조실록입니다. 왕조실록에 없는 사료로 주장이기 때문에, 실록 중심 사관을 추구하는 연구자는 그 주장에 대해서 의심을 하게 됩니다. 개인문서는 사적 관점이 개입되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법문서는 상황을 고려하는 것보다 문장 어휘가 우선합니다. 조선 시대의 헌법은 경국대전(經國大典)이고, 왕조의 실록을 편찬하였습니다. 우리는 경국대전이 조선 사회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에 대해서 탐구하지, 조선사회 정황을 연구하여 경국대전을 검토하지 않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국가법 문서입니다. 단순한 종교 회의 문서가 아닙니다. 신앙고백 문서(국가법)는 잉글랜드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1643년에 시작해서 1646년에 완성되었습니다. 그 문서를 세 왕국이 인준하면 한 믿음, 개혁된 신학으로 한 왕국이 될 수 있었습니다. 1647년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채용하였습니다. 1648년 잉글랜드 의회에서 채용하였습니다. 그런데 1649년 잉글랜드 의회에서 찰스 1세를 처형하면서 새로운 반향이 발생하였습니다. 잉글랜드 청교도 진영에서 내분이 발생한 것입니다. 독립파 지도자인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과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을 중심으로 장로파 청교도들을 축출시키고 챨스 1세를 처형하며 신앙고백 문서보다 더 새로운 시대를 추구하였습니다. 1651년 잉글랜드 독립파 크롬웰은 스코틀랜드의 지지로 버티는 찰스 2세를 무력으로 격퇴시키며(우스터 전투) 점령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스코틀랜드 의회의 결정은 무력화되었고, 잉글랜드에서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대한 결정한 의회 결의는 자연스럽게 묵인되었습니다. 잉글랜드 의회를 크롬웰 세력이 장악하였기 때문입니다. 크롬웰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정복해서 잉글랜드로 복속시켜, 세 왕국을 통치하는 Protectorate(호국경)이 되었습니다. 잉글랜드에서 주도권을 차지한 독립파는 크롬웰이 사망한 뒤에 새로운 표준문서인 사보이 선언(1658년)을 작성하였습니다. 잉글랜드 독립파는 신앙의 자유를 강조한 부류이기 때문에, 의화 관련하지 않은 자기 신앙 문서를 작성하였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잉글랜드는 1660년에 찰스 2세로 왕권을 복위시켰습니다. 그래서 청교도 혁명(Puritan Revolution)은 종료되었습니다. 찰스 2세는 왕권신수설을 유지하면서, 잉글랜드에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결의한 의회 결정을 취소시키며, 39개 신조로 전환시켰습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교회에도 적용하려고 하였습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찰스 2세의 결정에 순종하지 않았고, 챨스 2세를 뒤를 이은 제임스 2세 때에는 무자비한 폭압이 진행되었습니다. 그 기간을 킬링타임(killing times, 1670-1688)라고 합니다. 찰스 2세의 뒤를 이은 제임스 2세도 그러하였습니다. 스코틀랜드 언약도를 주도한 지도자는 카메론(Richard Cameron, 1648-1680)은 생커 선언(Sanquhar Declaration, 1680년)을 하며 챨스 2세에게 충성을 거부하면서 순교당하였고, 카메론주의(Cameronians)를 도날드 카길(Donald Cargill, 1627-1681)이 주도하며 무장항쟁을 전개하였습니다. 결국 1668년 명예혁명(名譽革命, Glorious Revolution)으로 잔혹한 탄압도 종료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표준문서를 채택하며, 잉글랜드에 병합되어 국가 종교(39개 신조)와 다른 체계로 총회를 구축하였습니다. 잉글랜드 독립파는 국교회로 편입되어 저교회를 형성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침례파들은 1689년에 “2차 런던신앙고백서”를 작성하면서 국가 종교에서 분리된 체계를 구축하였습니다. 왜 독립파들은 자기들이 작성한 사보이 선언으로 종파를 형성하지 않았는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압제받은 스코틀랜드 교회는 잉글랜드에서 작성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표준문서로 유지한 것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침례파들도 사보이 선언이 아닌 다른 신앙고백서 문장을 작성하였는지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가 세상을 떠난지 4년 뒤인 1795년에 감리교(English Methodism)가 잉글랜드 국교회에서 이탈하여 출범하였습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잉글랜드에서 개척하였습니다. 식민지에 종교적 목적을 갖고 이주한 세력은 분리파 청교도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종파들이 식민지로 이주하여 종교 이상을 실현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장로교 신자들도 식민지로 이주하였는데, 아일랜드 장로교 사역자 프랜시스 매케미(Francis Makermie) 목사의 주도로 식민지 필라델피아에서 장로교 독노회가 1706년에 구성되었고, 1716년에 첫 총회(40개 교회, 17명의 목사, 3,000명의 신자)를 구성하였습니다. 식민지에 형성된 장로교회는 1729년 필라델피아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표준 문서로 채택하였지만, 장로파 사역자들은 청교도적 성향에 친숙한 부류, 스코트랜드-아일리쉬 부류 등 다양한 사역자들의 집합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식민지에서 독립한 미국은 1789년에 미국 장로교회로 교회와 관련한 정부의 의무와 관련한 부분을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서 삭제하고, 교황을 적 그리스도로 규정한 부분 등을 수정하였습니다. 그리고 1903년에 미합중국 장로교회는 칼빈주의를 완화하는 기조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수정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장로파는 1789년에 미국에서 수정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표준문서로 채택하고 있으며, 1903년에 수정한 35개조 문서를 채택한 교단도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장로파에서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기독교장로회는 1972년에 표준문서를 변경하였는데,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12신조를 계승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1904년 인도 장로교회에서 만든 12신조에도 서문에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명기되어 있습니다.

좀 더 좋은 질문이라면 “스코틀랜드 교회는 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채택했을까요?” 왜 미국 장로파는 계속해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가지고 있을까요? 왜 장로파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삭제하지 않을까요? 이런 질문이 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일 것입니다. 동성애를 수용하는 부류에서 매우 엄격한 근본주의 부류의 장로파 교회에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부정하는 교회는 한 곳도 없습니다. 다만 다른 내용으로 수정한 경우도 있고, 다른 문서로 대체하였지만 존중한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칼빈파 중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세일치 문서(Three Forms of Unity)를 표준문서로 합니다. 장로파인 우리는 네덜란드 개혁교회를 형제로 생각합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표준문서가 서로 같지 않기 때문에 다르다고 인식하지 않습니다. 또한 루터파의 일치신조(Formula of Concord, 1577년) , 스위스의 헬베틱 신조(Second Helvetic Confession, 1675년) 등도 합당한 교리 체계로 수용합니다. 그러나 장로파가 네덜란드 개혁파, 루터파, 스위스 교회와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같은 장로파이지만 미국 장로파와 한국 장로파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또한 한국에 있는 200여개 장로교단도 각각 동일하지 않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이름은 같지만 내용이 같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수정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도 “수정한”을 사용하지 않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라고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영문을 번역하는 내용에서도 일치하지 않기도 합니다.

혹자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청교도 신학자들에 의해서 작성되었다고 부정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잉글랜드 사역자와 의회 의원들이 참여하여 작성한 것이기 때문이 타당한 분석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부정하겠다는 것은 바람직한 자세가 아닙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장로파의 근원은 스코틀랜드 교회가 결정한 법, 정통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는 왜 잉글랜드에서 작성된 문서를 표준 문서로 채택하였습니다. 미국 장로 교회도 스코틀랜드 교회의 결정을 따라서 표준 문서로 채택하였습니다. 한국 장로 교회는 인도 장로회가 규정한 표준 문서(12신조)를 채택하였습니다. 그리고 1963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에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표준문서로 편입시켰습니다. 왜 그 문서를 채택하였을까요?

표준 문서가 없는 교단은 허위 교회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트렌트 공회의 문서와 2차 바티칸 공회의 문서와 교황무류주의가 표준 문서일 것입니다. 사도신경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는 침례파에도 표준문서가 있습니다. 표준문서가 없는 교회를 무교회주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451년 칼케돈 신경까지를 합당한 문서로 인정하며, 성경에 근거한 신앙 체계를 확립하였습니다. 개혁된 교회는 성경(복음선포)과 역사적 신앙(성경해석과 신학)을 함께 추구합니다.

우리는 무율법주의(반율법주의) 이해를 훈련하고 있는데, 교회법과 신앙의 자유에서 역사적 신앙에 좀 더 무관하게 성경을 개인이 해석하여 거룩한 생활 혹은 성령의 권위를 증진하는 성향이 무율법주의 성향입니다. 역사적 신앙, 현재 교회 체계에 치우치는 성향은 신율법주의입니다. 장로파 신앙은 반율법주의도 신율법주의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잉글랜드 교회나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유사한 논쟁을 피하지 못하였습니다. 장로파 신앙은 합당하게 성경을 해석하여 수행되는 복음 선포와 성령으로 주 예수를 높이는 방편으로 수행합니다. 성경대로 어찌되었든지 주 예수 이름이 높여지며 주 예수의 다스림이 교회와 세상에 실현되는 방편을 도모합니다. 주 예수의 엄위에 왕의 영향력이 침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모든 논란에서 판단할 문서가 표준문서입니다. 16세기 이후에 형성된 분파들은 자기 표준문서가 있기 때문에 표준문서에서 먼저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장로파로서 이룬 각 교단들도 자기 표준문서에 의해서 사역자와 신학자의 신학을 검증할 수 있습니다.

모든 교단은 표준문서 위에 공동체를 형성시킵니다. 교단의 “표준문서”를 다른말로 하면 “신앙고백서”라고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 종파에 속해야 하는데, 장로파 교단일지라도 표준문서가 엄밀하게 같지 않기 때문에 면밀한 확인이 필요합니다. 우리시대에는 “WCC 가입과 반대”에서 큰 변별이 될 수 있기도 할 것입니다. 교단의 신앙고백서는 그 교단에 속한 나의 신앙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장로파 사역자는 자기 교단의 표준 문서에 서약하였습니다. “장로파” 이전에 스코틀랜드 교회의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된 명칭은 “언약도”였습니다. 그 서약(국민언약, 1638년)에 근거하여 왕과 전투하였고, 그 서약 때문에 모욕적인 탄압에서 순교당하면서 교회를 지켰습니다. 서약(법)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장로파 사역자나 신자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서약을 피하려는 경향도 있으며, 서약은 하지만 뒤에 문서에 메이지 않도록 하는 암묵적 합의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장로파 그리스도인은 약속한 것을 지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참고. WCF 22장 합법적 맹세와 서원).

모든 기독교 신자는 자기 표준문서를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표준문서가 정통신학과 연속성을 갖는지를 평가하는 것이 중요한 신학 능력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불변성을 견지하기 때문에 성경, 정통신학 그리고 표준문서의 역사적이고 신학적 일관성 유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진리의 가변성(상대성)을 채택하는 진영에서는 현재 교회를 중심으로 표준문서를 변화시킵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진리의 불변성, 승천하신 주 예수를 믿는 사역자들이 작성한 문서입니다.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은 주 예수의 엄위를 위협하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며 생명을 다하여 교회를 지켰습니다. 프랑스 위그노는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박해를 받아 교회 기반이 거의 상실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언약도는 잉글랜드 국교회(왕)에게 박해를 받았지만 교회를 지켰고, 그 유산이 미국 장로파로 한국 장로파로 연속되어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이 지킨 믿음의 합당한 유산을 지키며, 변하지 않는 진리로 교회를 세웁니다(딤전 3:15).

고경태 목사(주님의교회, 형람서원)
고경태 목사(주님의교회, 형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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