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케케묵고 꾸준히 사회문제로 지목받고 있는 대상은 응당 '교육'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교육보단 경제를 우선순위로 내세우긴 하나, 원자재가 나오지 않아 부가가치생산에 주력해야 하는 한국 특성상, 교육 문제 또한 경제문제에 예속된 문제다. 그런데 한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은, 교육문제를 해결한답시고 어디서부터 문제인지를 속 시원히 밝혀진 바가 없다. 평준화가 문제, 주입식 교육이 문제, 영어교육이 문제 등 여러가지 의견들이 존재하나 분명한 건 교육이 왜 문제인지, 원인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태도는 없다. 원인이 뭔지도 모르고, 알려하지도 않고, 그저 현상만 막으려 드니 내세우는 대안들이 엉성하고 임기응변식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의 교육이 이렇게 이상한 평을 듣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다소 과감할 수 있는 표현으로 말하자면 '무식한 부모'들로부터 교육이 양산되었다고 본다. 이유인 즉, 교육의 구매자는 부모인데, 소비자는 학생이라는 다소 특이한 구조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선뜻 인정하긴 어렵겠지만, 부모들은 대개 무식하다. 부모들이 무식하기에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은 더욱 높아질 수 밖에 없고, 그 자식을 향한 엄청난 교육열은 애초부터 쉽게 알만한 것을 교육하길 원하기보단, 부모들이 모르는 것들을 교육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렇기에 부모가 모르는 것들만 무리하게 주입시키다보니 부모는 석차나 성적위주로 성취도를 평가할 수밖에 없다. 한석봉이는 훈장이 채점한 성적표로 어머니께 욕먹은 게 아니라 글씨자체를 어머니가 떡썰며 평가를 했기에 성적표가 필요없었다. 그러나 현대의 부모는 그렇지 못해 자식의 성취도를 스스로 평가할 수 없게 되고 이런 '무식한 부모'는 석차에 대해 맹목적으로 기대는 풍토를 낳게 되었다. 그로부터 주입식교육, 암기식교육, 효율낮은 교육 등의 문제점들이 연쇄적으로 도출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무식한 부모'가 생성된 원인과 역사적 배경을 비롯 그 파급효과는 무엇일까?

첫째 : 일제시대 때부터 태동된 청소년들의 교육전담화.

한국 성립 이전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시기는 삼국시대도 아니고 조선시대도 아니고 일제 강점기다. 이 일제시대 이후로 대한민국이 건국되다보니 그 당시의 문화와 유산이 많은 부분 오늘날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렇기에 교육이 중시된 시기자체도 일제 강점기 때부터가 시발점이고, 이때부터 잘못끼운 단추는 지금까지도 연역되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일제 강점기 때 교육이 중시된 연유는 2가지 목적에서였다. 하나는 일본이 한국을 효과적으로 등쳐먹기 위해 교육을 시키는 것이었고, 또 한가지 요인은 이 일본의 압박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부강한 국력이 필요로 하고, 이런 부강한 국력을 이루려는 수단이 바로 교육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두가지의 이유로 불리한 여건속에서 무리한 교육이 시작되었고, 교육받는 주체와 소비자의 분리가 발생했다고 본다. 어른들은 독립투쟁이나 삶을 위한 싸움을 하고, 학생들은 책과 싸움을 하는 형국이 이때부터 발생했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한 단추는 그 이후로 쭈욱 연계되었다.

둘째 : 독립이후 암울했던 경제적 상황.

일제시대부터 교육이 강화되었다곤 하나 워낙에 나라가 개차반이었기에 기초교육이 급했고, 해방이후엔 나름 기초교육은 상당히 보급화되어 문맹도 상당히 퇴치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기초교육을 받은 지금의 기성세대들은 그 이후에도 독재정권등 과도기적 어려운 시기를 보내게 된다. 이런 어려운 시기 속에서 자식만큼은 양질의 교육을 시키기 해 자신을 위한 교육은 포기한채, 등골빠지게 일하고 그를 통해 얻은 경제력을 원천으로 자식들의 교육비로 아낌없이 지출하게 된다. 이렇게 해방시절때의 이분된 구조, 즉 어른=노동 애들=교육이라는 구조는 쭈욱 동일하게 내려져 왔다.

셋째 : 무식한 부모를 위한 석차중심의 교육구조.

부모들은 항상 교육의 대상에서 자기자신을 배제하며 자식만을 교육대상으로 삼은채 노동에 주력했고, 자식들에겐 보다 나은 교육을 위해 경제적인 노력만을 행했다. 그렇기에 일제시대때의 부모들은 기초교육부터 미비했으나 그 후손들은 기초교육은 다 받을수 있게 되었고, 또 그 다음세대들은 자신들에게 부족한 고등교육을 후손들에게 행하게 되다보니 늘 기성세대는 후손들보다 앎에서 뒤떨어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교육은 교육대상인 학생들에 맞춰서 행해지기보단, 요금부담자인 부모들의 욕구에 맞춰 자식들에게 행해질 수밖에 없었다. 부모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것 이상의 앎을 자식들에게 가르치려다보니 부모들 스스로의 눈으론 자식들의 교육상태를 판가름 할 수 없는 필연적인 무지속에 놓여지게 된다. 그러다보니 나오게 된게 성적과 석차중심의 교육이다. 부모와 자식간의 대화를 통해 앎의 성취도와 교육의 정도를 가늠할수 없으니 ,석차와 성적이라는 잣대로만 교육의 성취도를 가늠할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지한 부모가 자식교육의 성과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성적이다보니 교육은 응당 성적중심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었고, 무지한 부모가 비용부담의 역할만 하는 행태 속에선 필연히 발생할 수 밖에 없는 현상이었다.

넷째 : 성적과 석차중심의 교육이 낳은 기형적 교육.

그렇게 부차적인 성적과 석차가 우선기준이 되는 기형적 교육문화가 도래해 버렸다. 교육은 응당 앎을 위한 것인데, 오히려 앎이 배제된 성적과 석차중심으로 흘러갔다. 이에 등장한 것이 객관식 일변도의 시험이다. 객관식은 그 판별이 명확하고 공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객관식 시험은 평가방법은 공정하되, 명확한 앎이 아닌 흐릿한 앎으로 해결할수 있는 본질적 난점이 있고, 객관식 시험위주의 교육방식은 명확한 앎의 심화를 위한 것이 아닌 흐릿한 앎의 양적 확대에만 기여하는데 커다란 문제가 있다.

시험이란 것도 본래 목적은 잘못된 앎을 '교정'하는데 그 의의와 목적이 있다. 그러나 주객이 전도되어버려 시험의 본래적 의미는 퇴색되었다. 즉 흐릿한 1회성 앎만이 중시되는 기형적 교육풍토를 낳게 된 것이다. 시험을 망치면 잘 모른채 지나갔던 과정을 다시 복습하는게 아닌 앞으로 나올 시험에 대한 대비에 주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석차는 필연적으로 상대평가다. 상대평가인 석차를 잘받기 위해선 응당기준이 '앎'이 아닌 '남들'이 될 수밖에 없고, 남들보다 서로가 나아지기위해 노력하다보니 필연적으로 '양'의 확장을 불러일으켰다. 중요한 것을 깊이, 확실히 아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방대한 양을 흐릿하게 많이 아는 게 중요한 교육행태가 나와버렸다는 것이다. 기준을 남들에 맞춰 양을 확대하고 확대하게 되었으니 응당 조기교육과 양적 확대로 갈수밖에 없고, 이는 필연적으로 사교육을 부를 수밖에 없다. 상대평가인 석차의 향상을 위해 남들을 기준으로 남들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두려는 경쟁 속에서 승리를 하기 위해선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투입을 늘려야 했기 때문이다.

다섯째 : 기형적 교육이 낳은 면죄부

교육의 양적 확대는 필연적으로 학창시기를 고통의 시기로 인도하였다. 교육은 점점 조기교육으로 행해지고, 많은 양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나오게 된 것이 특기없는 평균적 인간이다. 교육이 잘하는 것을 더 잘하게 하는 역활을 수행지 못하고 대신 못하는 것, 내게 없는 평균적 고득점을 획득하는 인간육성에 앞장서게 되었다. 잘하는 것, 흥미있는 것에 주력하는 것이 아닌 약하고, 재미없는 공부를 시키는 환경을 조성했으니 교육은 당연 괴로울수 밖에 없다. 평균으로 성적을 내고, 성적위주의 교육이 조성되니, 응당 평균점수를 위해선 못하는 것, 싫고 점수를 못내는 것에 더 많은 시간소비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학창생활은 괴롭고, 이런 배움의 시간이 가장 중요시 되는 기간은 '고등학생'기간이 되어버렸으며, 대학간판이라는 현대판 카스트제도의 품종구분이 결정되므로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 대학 이후에야 비로소 '학문에 대한 면죄부'가 주어진다. 물론 대학생활에도 나름 열심히 해야하긴 하나 고딩때만큼 치열하게 요구되진 않는다. 이미 대학간판으로 어느정도 갈림길이 나와버렸으니 상대적으로 덜 치열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고3기간을 넘어서는 학문에 대한 괴로움은 상대적으로 덜하게 되고 그 이후론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학문에서 손을 떼게 된다.

여섯째 : 악순환

특기와 장점을 살리는 교육이 아닌 양적 확대에 따른 평균점수 위주의 학업이 되다보니 학생만 괴롭다. 그렇다고 부모들 또한 편한 것은 아니다. 등골 휘는 사교육비의 지출을 감당하기 위해선 응당 부모 또한 괴로울 수밖에 없다. 학생들은 약한 부분위주로 공부하다보니 공부가 괴롭고, 부모는 그런 자식을 뒷받침 하기위해 경제적으로 괴롭다. 그렇기에 학문은 평생 꾸준히 해야 하는것이 아닌 고3 시기까지 무리하게 머리에 쑤셔넣고 고3이 지나면 학문에 대한 면죄부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 학문에 대해 면죄부를 받은 학생들은 장차 부모가 되어 학문에 손을 땐채 교육비용의 제공자는 부모, 교육받는 대상은 그 후손이라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전해져오는 분리된 구조를 쭈욱 이어갔다는 것이다.

이런 연쇄적인 구조적인 특성들로 인해 교육은 앎을 위한 것이 아닌 성적을 위한 도구가 되어버렸고, 그로 인한 부작용은 말할 나위 없이 크다. 지출되는 교육비에 비해 성과가 미미하다는 것이다. 한국에 영어가 중요시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이유는 한국인들이 영어를 잘못하고, 잘하기가 어렵다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잘하는 것은 '분별력'이 없기에, 누구나 잘 못할만한 것을 도구삼아 석차를 용이하게 매기는 도구를 필요로 하는데 그게 바로 영어다. 그렇게 영어에 대한 투자는 엄청나나 실상 한국의 영어능력은 형편없다. 애초에 잘 못할만할 것으로 상대평가를 하려니 발생할 수 밖에 없는 현상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현상이 영어에서만 나타는게 아니라 학문 전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제 부모는 노동, 자식은 학습이라는 구조적 분리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예전에야 기초교육, 고등교육을 국민 누구나 알수 없었기에 누군가는 노동에 전념하는 무지한 부모가 있을수 밖에 없었으나 이제 우리 세대들은 고등교육까지 대부분 마친 세대다. 일제시대때의 부모는 기초교육을 못받아 자식들에게 기초교육을 행했고, 개발독재시대 때의 부모는 기초교육만 받고 고등교육을 못받아 자식들에게 고등교육을 행했다. 이제 현 시대 부모들은 고등교육을 받았되, 조기영어교육이 없어서 자식에게 조기영어교육을 시키고 있다. 무식한 부모와 그보다 나은 자식이라는 구조가 쭈욱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교육비를 담당하는 부모와 버거울 정도로의 많은 양을 주입받는 자식은 서로가 고통스럽다. 또 명확한 앎이 아닌 공정한 석차를 위한 객관식 시험위주의 교육이다보니 흐릿한 시험통과용 1회성앎만을 겨우 주입할수 있게 되었다. 그로써 교육자체의 효과 또한 별볼일 없게 되었다. 교육이 논제로섬 게임이 아닌 철저한 제로섬 게임형식으로 치닫고 있다.

이제 이런 악순환적 고리인 무식한 부모와 더 나은 교육받은 자식이란 구조를 깰때가 왔다. 이유인 즉 고등교육 이상은 어린 나이에 일시적으로 축적하는 것이 아닌 나이를 먹어가며 서서히 스스로 축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식한 부모가 되지 않으려면 자식의 성취도를 '석차'에 의존해 파악할 필요가 없다. 자식들이 배우 는것은 부모가 모르는 것이 아닌 부모가 알고 있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석봉의 어머니가 성적표 없어도 한석봉의 성취도를 가늠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무식한 부모가 되어 자신은 학문의 면죄부를 얻고 경제적 지원만을 자식에게 아끼지 않는 풍토가 이룬 것은 주입식교육, 석차목적의 교육, 효율떨어지는 교육 등의 부작용 뿐이다. 이제 자식에 대한 교육열을 스스로에게 돌리고, 어린나이에는 어린나이에 알만한 것들 위주로 분별력 있게 교육시키며 학문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애들만 무리하게 공부시키려 할게 아니라 모든 계층이 무리 없이 흥미를 잃지 않고 꾸준한 정진이 필요하다. 고등학교의 교육은 '기초'라서 중요한 것이고, 그것을 기초로 계속적으로 갈고 닦고 나가야 결실이 있을터인데, 고등학교를 종결시점으로 잡아버리니 교육량이 무리해지고 결실도 없을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학문의 결실은 이론과 책인데,교육열에 비해 한국자체적인 이론과 책은 생산되지 않고 앞서나가는 분야도 없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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