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 칼럼】믿음으로 사는 삶
이제 내 나이 팔순이 되고 계절도 겨울 문턱에 들어서게 되어서인가 문득 오래 전에 작고한 가수 최희준씨가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라고 생전에 '나그네 인생'을 노래 했던 그도 이제 고인이 되었으니 죽어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으련만 그 또한 일회자의 길을 가더니 소식이 없다. 이처럼 누구나 죽음의 강을 건너 가기만 하면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매개 로(路)'가 완전히 끊겨지는가 보다. 혹여 죽의면 우주 밖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내가 20대였을 때 어느 유명 소설가가 모 일간지에 '길' 이라는 연재 소설을 게재한 것을 본 기억이 있다. 어찌 보면 인생은 언제나 길 위에서서 길을 묻고 그리고 길을 찾아 가다가 길 위에서 총총히 명멸되는 것이 인생이지 싶다. '길을 찾는 인생' 어찌 보면 죽는 순간까지 길위에서 길을 찾다가 결국 창조주의 예정된 그 길로 가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를 담고 있는 이 우주의 생성은 얼마 쯤이나 될까? 그 년수가 최소한 10억년 아니 어떤 이는 400억년 이상으로 추측하는 이도 있다. 우라나라 역사를 아무리 늘려도 1만년을 넘지 못하는데 태양계나 우주의 시작이 얼마나 장구할 것일까는 불문가지(不問可知)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성인 영원에 비하면 이 또한 한 경점의 찰라에 불과할 것이다. 이처럼 인생이 뭇 생물들과 다른 것은 오로지 인간만이 우주의 시작과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는데 방점을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당신에게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 자신을 비롯하여 "주어진 삶속에서 갈바를 알지 못하고 육신의 소욕을 쫒아 그 천금같은 세월을 낭비하며 사는 "삶의 진수를 잃어버린 인생들"이 바로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아닐까?
찬송가에 "그 꿈 이루어져 주의 얼굴을 뵈오리라!"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내 삶의 근원이신 주님을 날마다 대하며 살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축복은 없으리라! 그럼 어찌하면 날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수 있을까? 그것은 나의 내면의 소리와 세상의 요란한 소리와 조화를 이루는 삶일 것이다. 인간 내면의 삶의 지혜는 과학과는 반비례 하는 것 같다. 옛날 선인들이 걸었던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 보면 하나같이 유유자적이었다. 원래 두발로 걸어다니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두발로 다니던 옛 선인들은 산천의 자연과 호흡하고 자연을 노래하며 자연과 하나가 되었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가 만들어준 지게를 지고 8km쯤 되는 진안 고닥산 자락까지 산 비탈 길을 넘어 가서 나무를 해서 지게에 짊어지고 다시 그 길로 되짚어 오면 온 몸이 녹초가 되었다. 십대의 어린시절 이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그때 나는 자람마저 정지되어버린 듯 싶었었다. 내 신장이 그나마 170cm정도 자란 것도 선친께서 돌아가신 후 서울로 유학을 온 이후였다. 날마다 지게로 짐을 짊어지는 노동, 그것은 내 키의 자람마저 정지시키는 참 고된 노동이었다. 그러나 나의 선친은 내게 "등에 뿔난(지게) 직업이 등다숩고 편안한 삶이라"고 귀가 따갑도록 말씀하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어릴 땐 싫었지만 인생의 종점에 이른 지금에 이르러서야 선친의 유훈에 고개가 숙여 진다.
우리가 자동차를 일상적으로 타고 다니던 시절이 얼마나 될까? 긴 긴 인류사에 비교해 볼 때 한 순간의 경점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어린시절 시골에서 걸어다닌 것이 몸에 배여선지 서울등 타향살이에서도 차를 타고 다니는 것보다 걷는 것이 더 몸에 익었더랬다. 고려 말 조선 초, 우리 신라 김씨 중시조 수은(岫隱) 할아버지가 강원도 평창 깊은 산속에서 마치 중국 춘추시대의 '백이 숙제'처럼 고려유신 70賢(현)이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항거하여 깊은 산속에 칩거하였다. "충신(忠臣)은 불사이군 (不死二君)"이라 했으니 유학(儒學)의 충효사상이 몸에 배어 있던 시절의 선비정신이다. 나는 그 중시조 묘를 십여년 전 종친회장을 따라 다녀온 적이 있다. 엿날에는 사람 다니는 인도(人道) 가 주류였는데 언제부턴가 도로(道路) 하면 '자동차 길'이다. 이 자동차 길이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는 도심으로 몰려 드는 차들에 비해 차도가 너무 좁아 이젠 도로 위가 아닌 하늘 위를 비행하는 자동차가 곧 상용화 되리라고 한다. 인간들이 하늘을 달리는 비행기를 만들어 창공을 자유자재로 날더니 이젠 우주선을 만들어 저 광활한 우주공간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벌써 우주선이 달에 착륙하여 마침내 직립보행의 인간이 우주를 발로 걸었다. 히말리야의 설산 (雪山)에서 서식하는 '눈 호랑이'가 무서운게 아니라, 전 우주의 정복을 꿈꾸는 인간의 끝없는 야욕과 독선이 무섭다. 인간들이 우주를 정복한다고 해서 행복이 보장되는 것도 수명이 길어지는 것도 아니다. 대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은 이 우주공간에 당신의 형상을 닮은 아담을 만드시고 후에 "사람이 홀로 사는 것이 보기에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빗 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아담에게로 데리고 오시니 아담이 말하기를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이에 아담과 그 아내가 벌거 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얼마나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름다운가!
행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인간의 삶의 진수(眞髓)를 깨닫게 되면 진정한 행복이 보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가 낳은 대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치고 "너는 네 스스로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원초적인 물음에 "나는 누구다."라고 분명하게 말 할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동물들은 오로지 육신 본능의 지배를 받아 살지만 그러나 인간은 육신의 소욕으로부터 얼마 만큼 자유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목적이나 삶의 질이 완전히 달라진다. 물욕이나 세상 명예에 사로 잡혀 한낱 육신의 소욕에 매몰되어 세상의 안목에 젖어 사는 인생들이 대부분이어서 세속에 찌들은 속인들은 이렇한 세상 가치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한다. 나는 며칠전에 소개한 '김우수님'을 이 자리에서 다시한번 되 뇌어 보고자 한다. 2011년 9월 23일 오토바이로 짜장면 배달을 하다 교통 사고로 54세로 숨진 '고 김우수씨'는 생전에 일신의 평안을 찾는 삶은 아예 없었고 오로지 자신이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54세에 교통사고로 숨지는 순간까지 불우한 청소년들의 꿈을 이루는 삶을 위하여 그가 죽을 때까지 모은 '장학기금을 씨앗'으로 그를 기리는 사람들에 의해 그의 이름으로 장학재단이 세워졌다.
그는 애당초 초등학교도 다닌 적이 없었다 고 한다. 가족도 없이 고아로 홀로 살아 온 그의 일생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삶이었다. 그는 혼자 누우면 꽉차는 쪽방에서 살았다. 하지만 그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은 아주 건강하였다. 그는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이 땅에 나같은 불우한 자가 없기를 바래서 불우한 청소년을 위한 장학기금을 죽어서까지 마련했던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을 보시라! 많이 배웠고 좋은 직장에 다니면서도 '나 홀로'를 고집하는 독신주의자들이 많다. 이들 대부분은 결혼을 하더라도 가족 즉 자녀를 갖는 것을 마다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극단적 이기주의가 낳은 풍조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쇠퇴기에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를 비롯한 소피스트들(지식쟁이들)이 '사람이 만물의 척도' 라면서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고 주관적 절대성을 강조하여 그리스 쇠망의 첨병역할을 했던 흑역사가 오늘 이 사회에 그대로 되살아나 이 나라를 혼돈으로 몰아 넣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 이러한 회의론자들 즉 소피스트들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을 때 "너 자신을 바로 알라"며 무지의 지(無知의 知)를 설파한 이가 바로 '소크라테스'다. B.C. 4세기경 아테네는 그리스 학문의 전당이 되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3대 철학자가 그리스 고대 철학을 대성시켰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의 회의론이 젊은이들에게 미치는 해독을 우려하여 무지의 지(無知의 知) 즉 "먼저 너 자신을 알라"며 젊은 세대들에게 사회질서를 유지하는데 절대 필요한 나라의 법과 도덕의 지엄함을 보이기 위해 '악법 또한 법'임을 가르치기 위해 스스로 독배를 마심으로 국법을 엄수한 예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오고 오는 모든 세대들이 세상 흐름의 중심에서서 잘못 가는 세상을 바로 잡고자 온 몸으로 부딛쳤던 그 철인(哲人)들에게 그의 아내들은 하나같이 악처(惡妻)로 불려진다. 소위 칠웅 (七雄)이 할거하던 중국 춘추시대를 풍미한 공자(孔子)의 처(妻) 또한 세계 3대 악처중 한명으로 꼽힌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런 악처를 데리고 살까?" 악처들이 말하길 "순한 사슴을 데려다가 사나운 승냥이로 만든 이가 바로 남편이라는 작자들"이란다.
그들은 말하길 "우리가 악처라 손까락질 당하는 것은 모두 남편을 잘못만난 탓인데 세상이나 역사는 우리를 악처라고 예단하니 이것이 너무도 억울하다."고 변명한다. 처음부터 악처였을까? 아니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남편이 가정에만 충실해주었으면 좋겠는데 허구헌 날 날마다 사대문 광장으로 가서 쓸데없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알다가도 모를 얘기만 하니까 그게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날 마다 가정에 전혀 보탬이 없는 말로 천금같은 세월을 낭비하고 다니니까 얼마나 꼴보기가 싫었을까? 애들하고 놀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 벌이를 하는 것도 아니어서 어쩔수 없이 몽니를 드러내며 잔소리 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악처는 남편하기에 달린 것이다. 나를 질타하는 아내의 볼멘 소리에 그대는 얼마나 귀를기울이시는가? 눈도 둘이고 귀도 둘이다. "보고 듣는 것은 입보다 두 배로 많이 하고, 입으로 말하는 것은 적게 하라는 조물주의 뜻이 그대로 우리의 얼굴에 심겨져 있다." 요즘 세상은 홀로 사는 이들도 많고, 결혼을 아예 포기한 핵가족 시대라서 그런지 세상을 구원하고 진리의 말씀을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들도 희귀해서 너나 없이 세상풍조를 따라 육신의 소욕으로 가득차 있는듯 하다.
언제부턴가 과학 만능의 사회가 된 편한 세상에서 나 홀로 살고 파서 결혼도 자녀 갖는 것도 마다하고 오로지 나만 나만 잘 살면 되는 나 홀로 세상이 되어 버렸다. 언젠가 마을 길을 산책하는데 어느 아줌마가 포대기에 애를 업고 나와서는 애한테 하는 얘기가 "오냐 오냐 내 새끼" 하길래 "저 나이에 애를 낳은 것도 아닐테고 손자를 업고 나왔나?" 했더니 알고보니 집에서 기르는 개를 업고 나와서 한 말 이었다. 어쩌다가 개를 개새끼라 부르지 않고 사람 새끼가 되었을까? 언제부턴가 가족이 없어지고 나홀로 세대가 되고 부터 대화는 늘 반려동물과 하고, 대답이 없는 TV나 휴대폰을 보면서 혼자만의 삶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만 간다. 사회성이 결여된 세상 바로 이것이 '병든 사회'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라고 갈파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점점 명멸되어 가고 있다. 층간소음도 상대의 배려보다 내 불편이 언제나 먼저다. 이처럼 인내와 배려마저 사라진지 오래다.
지금 당신에게 진정한 멘토는 누구인가? 나의 잘못을 지적하고 질타해 주는 진정한 멘토가 있기라도 하는가? 한치 앞을 볼수 없는 지극히 불안한 국제정세에서 나라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위정자들이 과연 사익이나 안일을 버리고 초아적으로 혼신을 다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나홀로 자란 세대가 국가와 사회의 골격을 이루고 있으니 국제정세는 나날이 화약고를 향하고 있는데 우리는 늘보처럼 언제나 뒷북만 치고 있으니, 마치 우물안 개구리를 보고 있는듯 하여 속이 타들어 간다. 위정자의 가슴속에 모두 모사와 책략만 가득하고 나라를 위한 빈 마음은 어디서도 찾아볼수 없다. 진정 우리의 삶속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나의 나라 사랑이 내 생애 최고의 가치를 만들어 내고, 사회와 나랏 일에 있어 나 스스로를 낮추는 것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위해 내게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내어 줌이다.
【종그니 칼럼】믿음으로 사는 삶
믿음으로 사는 삶에는 이만하면 되었다 하는 다함이란 없다. 오로지 나를 더욱 낮추고, 자신의 부족함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미완(未完)만이 있을 뿐이다. 이만하면 나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있다는 자식치고, 진실로 효도하는 자식 본 적 없고, 혹은 나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과 후회 없이 살아왔다."라고 말하는 사람치고, 그 말대로 살아 온 사람, 지금껏 본 바도 없다.
내가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체득한 소회는, 어른이 되어서도 보이는 부모에게 심히 불효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는 믿음은 참이 아니다. 왜? 눈에 보이는 부모가, 바로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말씀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그 이전과 이후의 인생관 가치관 등 삶의 자세가 확연히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진수를 맛보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미 나의 삶 속에 들어와, 나와 한 살이 되어버린 잘못된 습관과 언어들이, 하나님을 만남으로 제동이 걸리게 된다. 맛깔스러운 수박을 두 손에 들고, 수박 겉만 핥고서는 수박의 참맛을 맛볼 수 없다. 수박을 팍 쪼개서, 한입 가득 입에 넣고 씹어봐야, 수박의 참맛을 알 수 있듯이, 신앙도 그러하다.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보다, 재물보다,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향한 참믿음을 맛보아 알게 할 수 있을까!"쳤다. 당신의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인가? 당신의 자녀에게, 혹은 우리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 참믿음을 물려 주고 싶은, 믿음의 진수를 맛보았는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 주관으로 사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주님 손에 맡기는 임마누엘로 산다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 재산은 물론이고 열 자녀와, 건강까지 잃어버린 욥은, 몸담고 있던 집마저 다 타버린 잿더미 위에 앉아 기도하기를, 내가 모태에서 맨몸으로 태어 났던 즉, 또한 맨몸으로 돌아갈지라 나에게 생명을 주신이도 하나님이 씨요, 주신 것을 거두어 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오니, 하나님께서 찬송을 받으실지라.“
그가 이 큰 환란을 모두 통과한 후에,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벅찬 감동으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내가 연단을 받은 후에 순금 되어 나오리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믿음의 진수인가! 나에게 있어서 언제나 한결같이, 가장 큰 삶의 중심은, 주의 종으로서 주의 길을 따르는 삶이다. 오늘도 나는 `겸허한 믿음`이 나와 한 살, 한 몸이 될 때까지, 부단한 기도와 주님을 닮아가려는 거룩함을 향한 절제가, 항상 몸에 배도록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창세기 12장 1절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의 나이 칠십오 세 때에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말씀이 임했을 때, 그는 지금까지 살아 온 자신의 모든 꿈을 묻어버리고, 갈 바를 하나님께 맡긴 채, 이 말씀 앞에 그대로 순종하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보여줄 땅이 어디인가? 이는 곧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이라는 것이리라! 나를 이 땅에 보내신 자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는 것, 바로 이것이 믿음이다. 그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어느 한곳에 머무름이 없이, 오로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일생 하늘나라를 장차 자신이 돌아갈 영원한 본향으로 바라보며 살았다.
이처럼 삶이란 `인생의 집`을 짓는 것과 같다.
그는 백 세가 되어서야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은 후, 그의 온 마음속에 하나님은 감춰지고, 백 세에 얻은 아들 이삭만 보이게 되었다. 하나님보다 우선순위에 두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랬을까? 이 육신의 본능적 원하는 바를 뛰어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리아 산에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서야, 비로소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었다. 이같이 우리의 삶 속에는 언제나 나의 믿음을 달아보는, 연단의 모리아산이 있어야 한다.
흔히 우리는 나 스스로에 대하여 잘못된 선입관이 있다. "나의 몸뚱이와 나의 생명과 삶의 선택권은 바로 나다."라는 착각이다. 우리가 주어진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니 잠시 후의 일에 대하여도, 모른 채로 산다.
바로 어제 춘천 무지개 동산(요양원) 원장이 나무에 올라 톱으로 나무를 자르다가 낙상해서 숨졌다. 우리는 평생을 살면서 삶의 주인은 `나`인 것처럼 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제 먹은 음식이, 어떤 여과 과정을 거쳐 오늘 아침 똥오줌으로 배설되었는지도, 또 내 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전혀 모른 채로, 그저 막연히 `나`라는 의식 속에 살고 있다. 내 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잠시 후에 있을 일도 전혀 모른 채로 살면서 참으로 무엇을 안다고 할 것이 있겠는가?
물론 예측 가능한 일도 있지만, 우리의 예측을 훨씬 뛰어넘는 일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소위 나에 대하여 주인의식을 가지려면, 내가 왜 이 시대에 어떻게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가를 앓는 것, 그게 바로 소명 의식이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이 땅에 보내신 이를 만나야 할 것이다.
내가 필요한 물건을 사려면 시장을 찾아가야 하듯이, 내 인생의 정체성을 알려면 우주 삼라만상을 펴시고 나를 보내신 이를 반드시 만나야 한다. 수많은 만남 중에 이 만남이 선행되어야, 인생의 오고 감과 모든 만남과 삶의 진수를 알게 되리라!
내 삶을 나누며 살자! 말씀을 나눔같이, 나의 삶 전부를 나누며 살다 가자! 말씀이라는 생수의 강이 흐름 같이, 갈데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남같이, 먼저 하나님을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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