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사람으로 사는 것

人間은 여러번  다시 태어 난다고 한다. 다시 태어날 때마다 환골탈태로 새롭게 거듭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피조 생명체의 한 부분으로 대 우주안에서 살면서 느낀 것은 "모든 생명들은 실로 신비롭고 지극히 존귀하다"는 것이다. 나는 터밭에서 풀들을 뽑으면서 그 다양한 풀씨들이 어디서 날아와 뽑아도 뽑아도 끝이없이 돋아나는지 그 강인한 생명력에 경외심 마저든다. 자생력이 강한 잡초는 척박한 땅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풀마디마다 뿌리를 내려 수분과 자양분을 공급 받는다. 그리고 풀은 몸 어디서든 부러지고 잘라져 나가도 강인한 생명력을 유지한다. 이처럼 들풀도 주어진 토양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듯이 몸을 움직이는 곤충을 비롯한 야생동물들도 저마다 생존의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나는 수년 전부터 길 고양이와 함께 지내고 있다. 여러 마리의 길 고양이 중 오직 내가 암 코양이하고 소통하면서 이름을 '나비' 라고 지었다. 그 암 코양이가 작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무려 세번째 출산을 했다. 첨엔 세마리 그 다음엔 다섯마리 그리고 두달 전에는 다시 세마리를 낳았는데 또 임신 준비를 하고 있다.  

고양이의 종족 보존 능력이 이처럼 강인한 것을 나는 이제야 알았다. 나비는 내가 터밭에서 밭 일을 하고 있으면 안마를 해달라고 내게 몸을 맡긴다. 그럼 나는 나비 몸 전체를 정성들여 안마를 해준다.  '먹이와 안마' 이것이 나의 나비와의 소통 수단이다. 내가 안마를 해주면 몸을 비비꼴 정도로 좋아한다. 매일 아침 요양원 문을 열 때면, 어미와 새끼들이 사람보다 먼저 나와 나를 반겨준다. 이 시간에 사료를 주기 때문이다. 나비가 첫 새끼를 요양원에서 무려 1km정도 떨어진 산자락에 간벌목을  많이 쌓아둔 곳 틈새에다 새끼를 낳았는데 나는 이를 까마득히 몰랐다  한 달이 훨씬 지나서야 나비가 새끼 세마리를 낳아 가장 어린 새끼는 입에 물고 다른 두 마리는 뒤에 걸리고 요양원으로 돌아 왔다. 애시당초 요양원에서 낳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그것은 내 생각이고 길 고양이로서는 요양원 사람들이 많은 것이 맘에 내키지 않았던가 보다. 길 고양이들은 내가 집을 만들어 주지 않아도 지들이 잘 알아서 요양원 경내의 건물들을 유효적절하게 잘 활용하면서 지내고 있다. 길 고양이들은 야성이 강해서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하며 예속받기를 싫어한다. 
   
길 고양이들은 먹는 것보다 자유로운 활동을 훨씬 더 선호한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식탐(食貪)이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저들의 생존 본능을 보면서 자유권과 생존권은 비단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생물들이 얼핏 먹기위해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육식동물들의 살벌한 생존본능 때문이다. 그래서 나비가 수차례에 걸쳐 새끼들을 낳았지만, 거친 자연환경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몸이 튼튼하게 태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각종 전영병에 노출되어 일찌감치 도태되고 만다는 것을 알았다. 나비가 여러번 새끼들을 출산했지만 살아 남은 새끼는 고작 세마리 뿐이다. 또한 자신들의 활동 영역에 인간의 어떠한 개입도 거부하는 것은 야생 동물들의 생존 본능일 것이다. 그래서 고양이는 몸 전체가 운동신경으로 무장되어 있다. 초식동물의 이빨과 달리 육식동물의 이빨은  바늘처럼 날카롭다

인간은 태생자체가 아니 인간(人間)이란 명칭이 말해주듯 홀로서의 존재가 아닌 더불어 살아야 할 사회적 존재이므로, 사회라는 공동체를 서로 잘 유지 보호하여야 한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인간은 육체의 본능을 따라사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영원을 품은 유일한 '영적 존재' 임과 동시에 더불어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비록 인간은 발은 땅을 딛고 있지만 그러나 가슴은 우주를 품고 머리와 눈은 하늘을 향하여 있는 영적 중간자인 것이다. 함부로 인간 스스로가 진화론을 담론하는 것은 스스로를 비하시키는 어리석음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사회의 풍조가 심상치 않다. 사회의 최소단위인 가족공동체가 해체되어 인륜과 천륜이 무너지면서 사회는 겉잡을 없이 해체되어가고 있다. 법의 최후의 보루인 인간의 양심이 만년설이 녹아 내리듯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고 있다.

요양원에 입소한 노인분들의 말년이 외롭지 않도록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소중한 존재임을 언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요양원에서 종사하고 있는 직원들에게 이를 각인시키는 노력은 먼저 나 스스로가 본을 보이는 자세다. 섬김에 대한 깨달음은 교육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요양 보호사들을 한없이 존중한다.이땅의 수많은  직업을 마다하고 노인들을 수발하겠다고 스스로 요양원을 찾아 온 그들이야 말로 노령사회의 미래다. 홀로서기는 고사하고 공동생활조차 어려울만큼 인지능력이 떨어져 있는 노인분들을 섬기겠다는 그 마음으로 섬기고 있는 이 들을 그대들은 아시는가?  노인분들 중에는 개성이 강해서 통제불능인 분들도 있다.  그러나 알고보면 경계의 본능이다. 그래서 더욱 '인간적인 스킨 쉽' 즉 애정이 담긴 손길이 필요하다. 자녀들도 모시기 힘든 노인들을 모시고 있는 곳이 바로 요양원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분들을 모신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가족들도 헤아려 주시길 바란다. 

요양원에서 종사하는 이들 또한 이 사회의 모든 문화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들이기에 노인들에게 언제나 살갑게만 대하는 천사들은 결단코 아니다. 그래서 노인들과 언제든지 문제가 있을수 있기 마련이다. 가족제도를 비롯해 효의식마저 점점 희미해져 가는 지금 이젠 돈으로도 제도로도 한계상황에 와 있다. 당신 늙어 봤는가? 치매환자를 모셔 봤는가?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아님 봉사요원으로 십인십색의 어르신들을 단 하루라도 자원해서 수발을 해 보셨는가? 요양보호사 구하기가 정말 힘들다. 주방에서 일할 요리사 구하기도 힘들다. 대개 오십대 후반의 아낙네들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다 취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격증이 대개 장롱 서랍에서 잠자고 있다. 자녀들이 집에서 모시는 것이 버겁다 하여 나라에서 요양원 제도를 만들어 부모를 요양원에 모시도록 해서, 있게된 것이 요양원이기에 점점 더  입소 노인들은 차고 넘쳐나고 있다.이것은 무엇을 반증하는가? 첫째 가정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부모를 모시기 어려워서 요양원에 모시고 싶은데, 정작 요양보호사는 날이 갈수록 구하기가 힘들어 지고 있는 것이다. 요양보호사로 요양원 현장에서 일하는 20~40대 는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없다.   

그만큼 어른을 섬기는 마음이 엷어져 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사람 사는 공동체사회가 갈수록 공동체의 본질에서 벗어나 점차 와해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가족공동체 가 무너지면서 그에 뿌리를 둔 모든 사회공동체도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다 홀로서의 모습과 더불어서 의 모습 양면성이 있다. 여기에서 파생된 것이 생존권과 자유권이다. 예전엔 국가권력이 위하적이어서 거의 절대적이었는데, 지금은 사회적 제약보다 개인적 이기주의 내지 찰라적 쾌락이 난무하고 있어 사회성이 점차 허물어 지면서 남이 잘사는 것도 그 꼴을 못보는 성격 장애자들의 불특정 다수를 향한 살상이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는 사회 파괴범들이  인간 사회를 초토화시키는 병든사회로 치달아 가고 있는 것을 목도하면서 이에 대한 대책이 절실한데도 지금 우리는 현상타개에만 급급하고 있다. 현대인류가 우주 정복의 야심찬 욕망에 젖어 있지만, 선결과제는 신개념을 가지고 사회 구조를 근본부터 현실에 맞게 새로 짜야 하지 않을까 싶다.  현대 인류가 야심찬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인 것이다. 바로 알아야 할 것은, 국가권력을 비롯하여 가진자들이 바로 서지 못하고 이기에 흐르게 되면, 모든 사회악들이 우후 죽순처럼 발호하게 될 것은 자명하다.  

【종그니칼럼】 사람으로 사는 것

돌이켜 보니 근자에 몇 년 동안에 내 몸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몸 안의 혈맥이 혈전으로 막혀, 졸지에 급사할 뻔도 했었고(주치의 말), 폐에도 작은 혹이 하나 생겼다 하고, 전립선암이 의심된다 해서 전립선 조직검사도 받았고, 주치의가 또 갑상샘암이 의심된다고 하길래, 검사했더니 물혹이라 괜찮다고 했다. 이제 나이 팔십을 바라보게 되니, 몸 안팎 여기저기서 저승사자들이 자꾸 똬리 를 트는 것 같다.

인생의 무대에 옳은지 팔십이 다 되었으니, 이 나이에 여기저기서 신음이 나는 것은 당연하고, 이제 `욕심부리지 말고 다 내려놓고 순리를 따라 살라`는, 나를 지으신 이의 메시지요, 늙은 내 몸뚱이가 내게 보내는 신호다. 더 이 땅의 것에 연연하지 말고, 별세를 바라보며 준비하라고! 머물고 물러남, 곧 진퇴를 아는 눈치가 좀 있으라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무대의 출연 배우들이 바람 잘 날 없는 인생살이를 아주 사실적으로 연출한다. 인생살이에는 잠시도 방심할 수 없는 위험들이, 때론 몸 안에서 혹은 몸 밖에서, 금시초문처럼 일어난다. 십 수년 전 친구 주원석 변호사가 생활이 좀 먹고살 만할 때, 전립선암이 그를 괴롭히더니, 결국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십여 년 동안 치열하게 사시(司試) 준비하더니, 최고령자로 합격하여 생활이 안정되는가 싶었는데, 인생의 무대를 너무 빨리 떠나버렸다. 생각이 여기서 멈추어 버리면, 인생무상밖에 길이 없다. 그러나 진정한 삶의 진수는, 눈에 보이는 외형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어떤 집사님이 나에게 갑상샘암으로 많이 힘들다고 하면서 기도를 부탁하기로, “아니 갑상샘암은 암도 아니라 할 만큼 간단한 수술로도 치유된다고 하던데 많이 불편하신가요?" 그리고, 최근에는 그런 수술조차 권장하지 않는다는 말도 들은 기억이 나서, “그래도 갑상샘 암이라서 불행 중 참 다행이네요." 했더니, 그 집사님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자신의 암은 갑상샘암 중에서도 1%에 해당하는 매우 위험한 것이라"라고 주치의가 말했단다. 그러면서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전이가 되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했단다. 이는 나도 첨 듣는 이야기라 그래서 알아보니 정말로 그런 암이 있었다.

癌(암)은 漢文이라는 문자가 있기 전부터 인류와 같이해 온 질환이지 싶다. 癌이란 글자는, 病+品+山 으로 이루어진 글자다. 즉" 음식(品)을 마치 山처럼 게걸스럽게 먹어서 생긴 病이란 뜻"이 담겨 있다.일리(一理) 있는 얘기이긴 하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암의 안전지대는 누구에게도 없다.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수억 조의 세포가 쉼 없이 생성소멸을 반복하면서, 현재의 내가 생로병사의 과정을 넘나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암은 우리 몸 안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의 몸 밖에 있는 `암적 존재`는 사회 각 분야에 깊숙이 박혀 있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사회는, 여러 가지 위험 요소들이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사회악들이 우리의 삶을 항상 불안케 하고 있다. 대자연의 순리를 따라, 생성소멸되는 것이야, 따를 수밖에 없지만, 사람의 악행으로 일어난 재앙들은, 요즘 코로나의 팬데믹처럼 사회악들이 곳곳에서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불안을 유발하는 사회악들을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인간에겐 과연 없는 것인가? 그냥 허탈하게 가장 좋은 처방이나 약은, `그러려니` 하고 사는 것밖에는 없는 것인가? 근본부터 바뀌어야 한다. 이 땅의 처리하자는 천재도, 법리 자도, 어떤 경세가도 아니다. 나를 다스릴 줄 아는 자라야 한다.

혹 `감행도(感,幸,操.)"를 아시나요? "모든 일에 감사하고, 언제나 행복해하고, 조심하자."라는 뜻이다. 뭐니 뭐니해도 내게 주어진 삶을 살면서, 몸과 맘이 건강하게 사는 것만큼 복된 삶은 없다. 기적이란? 숨 쉬고, 먹고, 자고, 배설 잘하고, 무탈하게 하루를 지내면, 그게 바로 기적이다. 행복이란? 늙어서도 아픈데 없이 지내면, 그게 바로 행복이다.

노년의 축복이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오순도순 살면 그게 바로 축복이다. 늙어서의 건강한 하루하루가, 늙은이에겐 하늘이 준 더할 나위 없는 생명의 연금이다. 그러기에 천국은, 감사하는 자만이 가는 곳이고, 바로 여기서 천국을 누릴 때 얻어지는 축복이다. 세상이 주는 지식의 오류에 빠지지 말고, 인생을 넓고 높게 바라보며 살자!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모든 것을 내게 생명 주신 그분에게 맡기고, 그러려니 하고 살자!

 

<저작권자 © 리폼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리폼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