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격려와 칭찬.
어렸을때 어른의 말씀을 듣고도 잊어버리면 어른의 말을 건성으로 듣는다고 꾸중을 들었다. 지금 나는 무슨 말을 금방 듣고도 잊을때가 다반사다. 그래서 지금 나는 그 꾸중을 마누라로부터 듣고 산다. 팔십이 코앞에 있는 내가 이제와 어릴 때 이야기를 쓴다는게 게면쩍다. 나이 들면 회고적이란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내 어릴때 나의 아버지는 말수도 적으셨고 참 엄하셨다. 내가 경주 金씨 수은공파 집안의 5대 종손이자 장남으로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사십이 넘어서야 아들인 나를 보셨다. 아들 낳기를 바라시다가 아들을 얻었으니 선친의 기쁨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만큼 대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님은 조선 특유의 양반기질로 겉으로는 기쁜 내색이 전혀없으셨다. 내가 세살 쯤 이었을까? 어찌된 까닭으로 내가 사랑채 아버님이 계신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러다 눈을 떠 보니 나를 당신의 무릅 위에 올려 놓고 아주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내 얼굴이 달아지도록 쳐다 보시다가 어린 내눈과 마주치자, 아버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지엄한 표정을 지었다. 네살백이 아들 눈을 피하신 것은 자신의 속내가 드러나서 민망해서 그러신 걸까? 근데 난 왜 네살 때의 그때 일이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걸까? 이래 저래 난 아버지 무릅 위에 앉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말을 배우면서부터 '아빠' '아부지' 이렇게 불러 본 기억도 없다. 언제나 '아버지' 또는 '아버님' 이었다. 나는 는 엄마하고만 잤고 아버지 곁에서 잠을 자본 기억이 별로 없다. 하지만 어렵사리 얻은 나를 향한 당신의 사랑은 어떠셨을까? 겉으로는 대단히 엄격하셨지만 그러나 남을 배려하는 속내가 더할나위없이 깊은 분이셨다. 내가 1946년 생이니까 그땐 무척 배고픈 시절이라, 해만지면 사랑채에는 타향객지로 떠도는 행려객들로 붐볐다. 선친은 언제나 이들과 사랑채에서 항상 침식을 같이 하시므로 그들로부터 이와 벼룩들이 아버님 옷에 옮겨와도 아버지는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 춘궁기 때와 추수때는 아버님은 곡간의 식량을 풀어 어려운 이웃들과 어려움을 함께하셨다. 깊은 얘긴 생략하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이 차가 스무살 정도 되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오십에 접어들어 그리고 엄니는 삼십대에 나를 낳으 셨다. 울 엄만 식사때 외엔 낮엔 잠시도 앉아 쉬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본적이 없다,
또한 울 엄마는 자식들은 물론이고 아버지와도 단 한번도 한상에서 밥을 드신 기억이 내겐 없다. 언제나 엄마 혼자 식사를 하시는데 보통 부엌 부뚜막에서 드셨다. 온 식구가 먹고 남은 밥과 반찬이 엄마 몫이었다.남은 밥이 없으면 숭늉으로 대신했다. 그때 나는 모든 엄마들은 다 그런가보다 했었다. 엄마는 음식을 음미하면서 드신 적이 없다. 엄마는 밥을 맛으로 드신 것이 아니라 일하시기 위해서 드셨다. 그리고 엄마 손은 여니 여자손과 달랐다 작달만한 체구에 비해 손이 엄청 컸다. 그래서 손이 꼭 선 머슴 손이었다. 지금 내 손이 울 엄마 손을 닮아서 무지 크다. 울 엄마는 일 복을 많이 받고 태어나셔서 낮에는 논과 밭에서 아님 부억에서 일하시고, 밤엔 베틀에 앉아 삼베를 짜셨다. 이런 엄마 덕으로 우리 형제간들은 한 여름이면 엄니가 지어준 삼베 옷을 입고 한 여름을 시원하게 보냈다.
그리고 내 어렸을 땐 나남 할 것없이 삼(杉) 농사를 많이 지었다. 삼이 다 자라면 삼대를 삶기위해 엄청 큰 가마 솥을 마을 동구밖에 걸어 놓고 삼을 삶는 날엔, 그야말로 온 마을의 가장 큰 행사였다. 삼을 삶은 후엔 삼 껍질을 베끼는게 일이었다. 그때엔 삼잎은 쓰레기가 되어 거름 외엔 아무짝에도 쓸모 없었던 것이, 요즘엔 이 것이 사람을 뇌쇄시키는 마약으 로 이용되고 있다니 놀랍다. 당신이 아무리 바빠도 단 한번도 상 없이 밥을 차려준 적이 없던 엄마!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최고의 예우를 받았던 시절은 엄니가 나를 당신의 가장 귀한 아들로 아시고, 어린 나를 언제나 변함없이 온 정성을 다해 차려주신 '밥 상'이었다. 우리 엄마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언제나 당신의 몸을 사리지 않으셨다. 터밭에 계시는가 하면 마웃들 논에 가 계시고, 부억에 계시는가 하면 산에서 나무를 한 고개 해 오셨다. 발걸음이 얼마나 빨랐던지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다. 그런데 나는 누굴 닮아 이리도 굼띨까? 엄마에 비하면 나는 영락없는 굼벵이다.
미국에서 있었던 실화다. A여인은 어렵게자라 결혼을 했지만 남편은 딸아이 하나를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딸이 자라면서 엇나가기 시작하더니 종내는 가출을 했다.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던 어느 날 엄마는 자기 독 사진을 크게 확대하여 유흥가 뒷골목 벽에 붙쳤다. 엄마의 사진을 보고 오라는 엄마의 눈물겨운 사랑이었다. 유흥가에서 술에 만취된 딸이 엄마의 사진을 보았다 엄마는 범죄와 매춘부의 소굴에다 엄마 자신의 사진을 붙이는 것을 전혀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엄마의 위신이 망가져도, 엄마가 어떠한 수치를 당해도, 내 딸이 죄악의 시궁창에서 엄마에게 돌아오기만 한다면 엄마는 설혹 몸둥이가 만신창이가 된대도 좋다."는 것이 엄마의 맘이었다. 흔히 우리는 부모없이도 얼마든지 살수 있다고 큰 소리치던 철없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의 내가 된 것이 네가 잘나서가 아니라 육안으로 보이는 어버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라!
나는 오늘 아침 부모가 딸 아이를 낳고 생활이 어렵자 그 어린 딸을 시골 친정 엄니에게 맡긴 후 연락도 끊어졌지만, 외할머니는 그 어린 손녀를 애지중지 길렀다. 딸을 친정 엄마에 게 맡긴 것은 자신이 암 말기였기때문이었다. 암으로 세상을 떠난 엄마를 그리워 하며 당시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쓴 한 편의 시가 뒤늦게 알려져 잔잔한 울림을 주고 있다. 주인공은 올해 전북 부안여중 신입생인 '이슬' (13)양, 이슬 양은 지난 해 2학기 연필로 쓴 시 로 전북도교육청이 주최한 글쓰기 공모 전에서 동시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전북교육청이 가정의 달을 맞아 지난 5월 4일 도 교육청 블로그에 이 시를 소개하면서 알려졌다. 당시 심사위원을 맡았던 임미성 익산성당초등학교 교감은 “동시를 처음 읽었을 때 정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사위원 세 명이 작품을 고를 때 만장일치로 가장 좋은 작품 으로 뽑았다. 무엇보다도 일기처럼 써 내려간 아이의 글씨와, 썼다가 지웠다가 한 종이 원본이, 정말 마음에 깊이 남았다”고 말했다.
가장 받고 싶은 상.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짜증 섞인 투정에도, 어김없이 차려지는 당연하게 생각되는 그런 상, 하루에 세 번이나 받을 수 있는 상, 아침상 점심상 저녁상, 받아도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안 해도 되는 그런 상,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때는 왜 못 보았을까? 그 상을 내시던 주름진 엄마의 손을 그때는 왜 잡아주지 못했을까? 왜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을까? 그동안 숨겨놨던 말 이제는 받지 못할 상 앞에 앉아 홀로 되뇌어 봅니다.
“엄마, 사랑해요”
“엄마, 고마웠어요”
“엄마, 편히 쉬세요”
세상에서 가장 받고 싶은 엄마 상! 이제는 받을 수가 없어요. 이제 제가 엄마에게 상을 차려 드릴게요. 엄마가 좋아했던 반찬들로만 한 가득 담을게요. 하지만 아직도 그리운 엄마의 밥상, 이제 다시는 못 받을 세상에서 가장 받고 싶은 울 엄마 밥상!” 울 엄마! 너무 너무 보고 싶어요!
【종그니칼럼】격려와 칭찬.
사람은 격려와 칭찬으로 성장한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칭찬에는 고래도 춤을 춘다."고 했다. 나는 고래가 춤을 추는 것은 보지 못했지만, 내가 기르는 애완견 초롱이의 재롱을 칭찬해주면 너무너무 좋아한다. 어렸을 때 나는 천재도 준재도 아니었고, 그저 지극히 평범한 농부의 아들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배우고 싶다`는 학구열만은 남달랐다. 늦게 나를 낳은 아버님은 이미 늙으셨기에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졸랐지만, 당신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아신 아버님은 나에게 3년 정도 한문 교육을, (동몽선습에서 명심보감, 소학, 대학, 자치통감)까지 익혔지만 시대에 뒤떨어지고 싶지 않아 향학열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런 나에게 박찬원 초등교 은사님은 내 손을 잡고 가톨릭 성당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나의 대부가 되어 주셨다. 은사님은 1960년대 국가교육시험에 합격, 시골 임실에서 서울 초등교로 전임되어 가셨다. 졸지에 은사님을 잃은 당시의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었다. 은사님은 서울로 오셔서 왕십리에서 삭월세 판잣집 생활을 하시면서도, 그때 열 아홉 살 나를 서울로 올라오게 하셨다.
당시 교사 월급으로 홀어머니와 재학 중인 두 동생이 있어서 서울 생활은 더욱 궁핍하셨지만, 내게 그런 내색을 한적이 한 번도 없었다. 빈손으로 올라와 苦學하려는 내게 끝까지 나의 곁에서 나를 좌절에서 일으켜 주시고 용기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90노구(老軀)가 다 되신 지금도 내게 크고 작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청년처럼 달려와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 주심으로 학문과 신앙의 길목에서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주신 은사님이시다.
사람은 시대와 환경의 대처에 따라 인생의 판도가 수시로 달라진다고 했다. 텃밭의 농작물도 거름을 많이 주고 김을 잘 매주면 쑥쑥 잘 자라듯이 인생도 이와 같다. 폴란드에서 태어난 피아니스트가 꿈인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서 마침내 음대에 들어갈 실력을 갖추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아직 홀로서기가 힘든 소년에게 "얘야. 넌 손가락이 너무 짧고 굵구나. 피아니스트로선 성공하기 어려운 손이다. 피아노 말고 다른 악기로 전공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이구동성으로 소년의 짧고 굵은 손가락을 지적했다. 이 조언에 따라 소년은 여러 다른 악기들에 도전했지만 소년의 음악적 열정을 만족하게 해줄 만한 악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던 부푼 꿈이 절망으로 바뀌는 시간이 계속되던 어느 날, 소년은 한 파티 모임에서 분위기를 돕는 반주자로 피아노를 연주할 기회가 있었다. 연주가 끝나자 한 신사가 소년에게 다가와, "아이야. 너는 피아노에 소질이 있구나. 열심히 공부하면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될 것이다." 신사의 곁에 있던 사람이 소년에게 귀띔해 주기를, "이 분은 아르트루 루빈스타인 선생님이셔, 이분 말씀을 믿어도 돼." 루빈스타인의 격려는 소년의 꺼져가는 꿈에 다시 불을 지폈다. 쇼팽 이후 가장 뛰어난 폴란드 피아니스트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격려를 받았으니,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을 것이다.
이후 소년은 하루에 일곱 시간씩 피아노에 매달려 연습을 했다. 1875년에 폴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 유학을 거쳐 마침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1909년에는 다시 폴란드로 복귀하여 모교인 바르샤바 음악원의 원장을 역임하게 되었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Ignacy Jan Paderewski)"이다.
1892년. 파데레프스키가 무명의 젊은 시절 피아니스트로 활약할 때, 스탠퍼드 대학에 다니던 두 학생이 어려운 학생들의 학자금 마련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 파데레프스키를 초청해 자선 연주회를 2천 달러의 출연료를 약속하고 공연을 했으나 공연 수익금이 1600달러밖에 모이질 않았다. 학생들은 파데레프스키에게 우선 1,600달러를 보내고 나머지 400달러는 나중에 갚겠다고 양해를 구하자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파데레프스키는 어려운 고학생들이 학자금에 보태도록 하라며, 1600달러 마저 학생들에게 돌려보냈다.
그리고 27년의 세월이 흘렀다.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터졌다. 당시 폴란드는 독일과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3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민족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었던 파데레프스키는 전쟁이 터지자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폴란드의 자유를 요청했다.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1918년 폴란드는 완전히 독립을 이루어 폴란드 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폴란드 공화국의 초대 총리는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가 선출되었다. 빨간 머리 소년, 손가락이 짧고 굵어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조롱받던 바로 그 소년이 자라, 폴란드 초대 수상이 된 것이다.
1차 대전의 후유증으로 폴란드는 극심한 식량난에 부딪혀 수많은 난민이 발생하였다. 전쟁으로 초토화된 토지에서는 곡식도 자라지 않아 가뭄까지 겹치면서 식량난은 더욱 극심해졌다. 굶주림에 지친 국민은 `무능한 총리`라는 비난이 여기저기서 거세게 일어났다. 총리 파데레프스키는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음에도, 이를 타개하지 못해 결국 사퇴를 결심하기에 되었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폴란드에 갑자기 2백만 톤이나 되는 엄청난 식량이 도착한 것이다. 미 연방식량구호국에서 보낸 것이다. 식량과 함께 도착한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27년 전에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늦게 마나 당신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어 다행입니다.”
파데레프스키는 27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편지를 읽어가던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스탠퍼드 대학의 두 청년이 떠오른 것이다. 당시 그들은 1,600달러의 기금을 돌려받으며 훗날 꼭 이 은혜를 보답하겠다 약속했었다. 27년 만에 그 약속을 지킨 것이다. 스탠퍼드 대학생 중 한 사람은 훗날 미국의 31대 대통령이 된 하버드 클라크 후보였다. 후보는 이 당시 미국의 연방 식량 구호국장이었다. 소년은 자라 청년이 되고 청년은 자라 어른이 된다. 언제까지나 빨간 머리 소년으로 있을 것 같은 손가락이 짧고 굵었던 아이는 한 나라의 총리로 성장하고 폴란드를 굶주림에서 구출했다. 학자금으로 곤란을 겪었던 대학생은 훗날 식량 구호 국장을 거쳐 위대한 지도자로 성장했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격려를 생각해본다. 그의 진지한 조언과 격려가 없었다면, 과연 폴란드의 미래는 어땠을까? 한쪽에서는 손가락이 굵고 짧은 사실을 지적하며, 아이의 장래를 가로막는 이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너는 피아노에 소질이 있구나 칭찬해주는 격려의 큰 스승이 있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반드시 스파크가 일어나는 만남이 있다. 그런 만남은 한 나라를 굶주림에서 구하기도 하고 한 아이의 인생을 우뚝 세워주기도 한다. 칭찬이나 격려의 힘은 이토록 위대하다.
한 줄기 빗방울이 모여 실개천이 되고, 실개천이 합물하여 강을 이룬다. 이 강물이 온 대지를 촉촉이 적시며 만물을 살려내는 젖줄이 되어 대해로 흘러들고 그리고 다시 비구름이 되어 마른 대지를 적신다. 이처럼 대자연도 서로 합하여 대지를 살려내듯 나 홀로 인생은 없다. 꿈은 칭찬과 격려의 양분을 먹고 자란다.
<저작권자 © 리폼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