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기생충
【종그니칼럼】과유불급(過猶不及).

내가 서울 용산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이니까 1983년도 쯤이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친구를 마중나갔다가 용산역 공중화장실에서 일을 보는데, 화장실 벽면에 쓰인 낙서에 내 눈이 화살처럼 꼬쳤다.

"걸레는 아무리 깨끗이 빨아도 걸레다. 모든 젊은 여성들이여 걸레가 되지 않토록 주의하라!"

이 말이 어언 사십년이 지난 지금도 마치 어제 본듯이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비단결처럼 곱게 살아야 할까?  아님 걸레 처럼 살아야 할까?  걸레는 더러운 곳을 자신의 온 몸으로 닦아 내고 정작 자신은 온갖 오물을 뒤집어 쓰는 것이 걸레다.

원래 중국 청나라는 야만(野蠻) 만주족으로 누르하치가 일어나 명(明) 을 멸하고(1616년),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했다가 1636년 다시 국호를 청(淸)이라 했다. 조선은 이미 지는 해가 되어버린 비단같은 明을 붇들고 발흥한 걸레같은 야만족 淸을 멀리하려다 결국 仁祖 재위 15년 (16 37년)에 경기도 광주 한강 연안 삼전도(三田渡)에 나아가  청태종 발아래 코가 땅에 닿토록 길게 엎드려 굴복했다. 인조가 누구인가?  광해가 明보다 발흥하는 淸을 가까이한다는 이유로 반정을 일으켜 광해를 몰아내고 왕이 되었으나 그댓가를 지금 톡톡히 받게된 것이다. 이 치욕의 현장인 삼전도(三田渡; 오늘의 송파)에 청(淸)은 수강단 (受降壇)을 세웠다. 

仁祖가 입은 옷은 찬란한 비단 옷이었으리라! 그러나 역사는 입고 있는 옷이나 앉아 있는 옥좌로 평하지 않는다. 국제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못한 척화론이 가져 온 삼전도의 수모는, 조선의 역사에서 온갖 오물을 뒤집어 쓴 걸레보다 더한 대치욕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조선은 청(淸)으로부터 해마다 처녀를 조공으로 바치는 치욕을 당하고도, 외유내강 의 내실을 찾기보다 오로지 당파싸움에만 골몰하고 있을 때, 이웃 일본은 봉건제도를 완전히 타파 환골탈태하고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대대적인 서구화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것이 소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다. 이때 봉건제도의 잔존세력인 골칫거리였던 사무라이들을 조선에 투입하여, 소위 정한론 (征韓論)의 서곡을 연것이 청일전쟁이다. 세계사는 임진왜란을 '제1차 중일전쟁'이라 하고, 고종 때의 청일전쟁을 '제2차 중일전쟁'이라한다.

이것이 열강에게 걸레처럼 갈기 갈기 찢겨진 약소국의 설움이다.  이로써 일본제국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요동반도를 획득하고 마침내 만주침략의 발판을 확보하게되자, 일본의 발흥에 불안을 느낀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 들인 삼국간섭으로, 일본은 힘에 밀려 요동반도를 러시아에게 내어 주었다.  이를 기회로  러시아가 점차 조선에 군림하자 이에 불안을 느낀 일본은, 사무라이들을 경복궁 옥호루에 난입시켜 명성황후를 돌아가며 윤간한 후 난도질을하여 시해 하였으니, 아! 대한제국이 주어진 천금같은 세월들을 사색당파의 진흙탕 쌈박질로 탕진하고, 마침내 야수와 같은 열강들의 발에 무참히 짓밟혀 만신창이의 걸레같은 나라가 되고 만 것이다.

‘비단’은 그 희소성 때문에 귀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물건은 아니다.  그러나 ‘걸레’는 신분을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새벽 예배를 마치고 나면 걸례로 방청소를 한다.  그때 걸레는 방안의 온갖 오물을 뒤집어 쓰지만 방은 깨끗해진다. 사람중엔 자기 몸을 사리지 않고 가족이나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있다. 예를 들어 몇달 전 우리 요양원에 위생원으로 있던 분이 몸을 사리지 않고 요양원 안팍을 청소하며 어르신들의 모든 옷들을 깨끗이 빨고 출퇴근 차량운행까지 했는데, 개인 사정으로 그만두게 되어 마음 아프다.  이 땅위엔  자신의 영달이나 일신의 유익을 위해 공공사회와 공권력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걸레같은 시정잡배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므로 모든 만남 중에 내 인생의 획을 긋는 마남은 예수와의 만남이다.  우리는 자칫 육신의 소욕과 세속의 욕망에 탐닉되어 본래 있어야 할 나 자신의 본 모습을 잃어 버리고, 소위 '가인'을 닮아가는 나에게 '본래의 나' 즉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 주시기 위해, 인간의 옷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섬김의 본'을 보이시고, 마땅히 죽어야 할 오고 오는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주신, '참 바보 예수'를 바라 보시라!  바로 이것이  '십자가 사랑'을  향한 믿음이다. 

우리의 몸속에 이와 벼룩과 빈대같은 흡혈 촌충들이 기생할 때, 삶의 질이 떨어지듯 인간으로서의 인성을 해치고 인간관계까지 망가뜨리는 '죄성'을 죽이시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 주시려고 우릴 위해 참 바보처럼 죽어주신 예수를 보라! 인류사에서 수많은 성인과 영웅호걸 들이 오고 갔지만, 온 인류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 제단에 던진 이는 없다. 

구약성경 룻기의 주인 공은 분명 '룻'이지만, 나는 룻의 시어미인 나오미의 하나님을 향한 변함없는 신앙인격이 나를 사로 잡는다.  가난에 등떠밀려 이역 땅에 가서 기둥같은 남편과 장성한 두 아들을 다 잃고 혈혈단신이 되어, 늙은 몸으로 다시 조국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두 과부 며느리가 시어미 나오미를 따라가겠단다. 고부간의 갈등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두 며느리를 향한 나오미의 희생적 사랑만이 돋보인다. 

둘째 며느리 오르바는 시어미의 만류에 고국땅에 주저 앉고 큰 며느리 룻은,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며 시어미를 따라나서는 룻의 효성스런 결단을 보라!

비록 나오미는 마라의 쓴물처럼 그의 온 생애가 인생의 맨 밑바닥에서 마치 걸레처럼 모진 세월을 지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삶은 비단결처럼 아름다웠기에, 혈혈 단신이 되어 고국 베들레헴으로 돌아 가는 시어미를 룻이 죽기를 한하며 따라 나선 것이다. 그것은 혹독한 시련을 오로지 신앙으로 견뎌내는 시어머니의 신앙인격을 통해 하나님의 인격을 만났기 때문이다. 진정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이처럼 혹독한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그려낸다.   

다윗은 신앙의  대표적인 표상이다. 그는 양치는 목동때부터 하룻 동안 들고 나는 모든 일에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는 아주 신실한 목동이었다.  소년 다윗은 블레셋 대장 골리앗을 엘라 골짜기의 물멧돌 하나로 그의 숨통을 끊음으로 이스라엘을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구하였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여인네들의 노래에 사울의 눈에 시기의 화살이 꽂히자, 그때부터  다윗은 사울 왕의 칼 끝을 피하여 십여년을 풍잔노숙 하며 걸레와 같은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도,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을  보복할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그는 사울을 하나님이 기름부은 하나님의 종으로 보고 끝까지 그를 선대하였다.  이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좋은 인연을 만나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현명한 사람은 소매 끝만 스친 인연도 그것을 살릴줄 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열왕기와 역대기 그리고 그가 기록한 전도서와 잠언서 등에서 보는 것처럼 그는 한시대를 풍미한 실로 다방면으로 능소능대한 당대의 위인이었다. 그는 약관 전에 왕이 되어 사십년을 치리하면서 가히 지혜의 왕 이라할만큼 그가 남긴 족적은 실로 대단하였다. 그의 처첩들은 삼천이 넘었다고도 한다. 그럼  그많은 처첩들은 자녀없이 살았을까?  그도 그럴 것이 성경은 솔로몬은 자녀에 대해서는 르호보암 (Rehoboam)외에는 전혀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르호보암은 암몬 여인 '나아마'의 소생으로 성경에서 유일하게 언급되고 있는 솔로몬의 아들이다. 솔로몬의 지혜와 화려한 치적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유독 자녀에 대해서나 왕세자 교육에 대해는 그 어느 곳에서든 전혀 언급이 없다.  사울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120년 (B.C.1050-931.)간 계속되던 이스라엘의 통일왕국시대가 자기 아들 르호보암때에 이르면, 대혼란이 야기되리라는 것을 지혜의 왕 솔로몬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까?
 

솔로몬은 성경 어디에도 자녀에 대한 훈육이나 후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보는 대로 주지육림과 수많은 처첩들에 둘러쌓여 살았다. 그런데 왜 자녀는 르호보암뿐일까? 그럼에도  지혜의 왕 솔로몬은 르호보암에게 나라를 치리(治理)하는 교육에 대해 성경은 왜 침묵하고 있는 것인가?

이 땅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딱 두 부류의 사람 즉, ‘하나님을 만난 차이’로 본다.  이땅에 우리가 살면서 수많은 만남으로 이루지기에 人生이다. 인생을 살면서 인생의 진수를 무엇에서 찾을까?

부정모혈로 우리가 생명으로 태어났지만, 그러나 대 우주가 우연히 저절로 있게된 것이 아니듯, 모든 만물가운데 으뜸으로 다시말하면 우주를 품은 우주적 존재로 태어난 인생이기에,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죽으면 끝나는, 한낱  먼지같은 인생 걸레같은 인생들이지만 창조주를 만나는 순간, 대 우주를 품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실패한 인생의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세상의 안목으로 사는 것이다. 

시간(時間)에는 세 가지의 성질이 있다. 같은 시간에는 두 가지 일을 못하는 '단일성'이 있고,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순간성'이 있으며, 오늘이 나의 생일이라면 다음 해에 또 나의 생일이 빙빙돌아 오는 '연속성'이 있다.  결국, ‘비단 결’같은 사람보다 인생의 희노애락을 격은 ‘걸레’같은 사람이 더 소중하고 이 시대에 더 필요한 사람이다.

"학문"(學文)은 배우고 익히면 될 것이나, "연륜;(年輪)은 반드시 인고(忍苦)의 세월을 거쳐야 한다.  그러기에 나이는 거저 먹는 것이 아니다.  노년의 아름다움은 '성숙(成熟)'이다. 지금이 사계절 중 가장 성숙한 '중추의 가을' 이다. '성숙'은 '깨달음' 이요, '깨달음'은 반드시 '지혜'를 만난다.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소욕으로 인하여 힘든 것을!  세월이 나를 쓸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인 것을!  종그니가

【종그니칼럼】 기생충

우리나라 속담에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칸 태운다."는 말이 있다. 옛부터 우리의 삶속에 깊숙히 들어와 있는 이 해충은, 두고 두고 우리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  어제 뉴스를 들으니 어느 대학 기숙사에서  빈대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한다. 기숙사관리가 얼마나 엉망이었을까 가 짐작이 간다.  이 기사를 보고 있자니 내가 어렸을 때의 추억들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찌지리도 가난했던 그때는 도시와 농촌할 것없이 빈대, 이, 벼룩들이 집안은 물론이고 우리가 입고 있는 속옷이며 머리속까지 침투해서 우리의 삶의 질을 완전히 망가뜨린 시절이 있었다.  당시 우리 시골 집엔 사랑 채가 있었는데 이 사랑채엔 전국 각처에서 행려객들이 들고 나곤했다.한번 입으면 다시 갈아 입거나 세수도 잘 안하는 각처에서 모여든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객들에게서 묻어 나온 이 해충들은 사랑방 돋자리 밑과 방구석 구석과 목침의 틈새까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어린 내가 하루 아침 저녁으로 사랑 방 청소를 했는데, 몽근 비로 쓸면 이 빈대 벼룩들이 수도없이 쏟아져 나왔다.   

옛말에 "홀아비에겐 이가 서말이고 과부에겐 동전이 서말"이란 말은 헛말이 아니었던 나의 유년시절엔 이와 빈대 벼룩은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 깊숙히 들어와 있었다. 당시 이러한 해충들을 없애는 살충제가 있긴 했지만, 이러한 해충들을 퇴치하기엔  약효도 별로 였고 또 이를 살 형편도 녹녹치 않아서, 그냥 손톱으로 잡거나 이의 알(써캐)같은 것은 어금 이빨로 으깨죽이기도 했다. 잡아도 잡아도 끝이없는  빈대와 이와 벼룩을 잡는 유일한 무기는 엄지 손톱과 호롱불에 지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의 종류는 500여종이나 된다고 한다. 주로 사람의 몸과 의복에 부착하여 흡혈하며 사는 기생충이다. 암컷이 하루에 10개정도 알을 낳는데 일주일이면 부화하고 열흘이면 성충이 된다. 벼룩은 이보다는 조금 작거나 고만 고만했는데 톡톡 튀는 재주가 있어서 잡기가 아주 힘들었다. 빈대는 몸통이 얇고 넓죽하게 생겨서 집안의 틈새나 나무벼개의 틈새에 숨어 딱 붙어있으면 찾기가 힘들었다. 이처럼 빈대는 몸에 붙어 흡혈한뒤 몸을 숨기는 데 귀재였다.   

빈대는 이나 벼룩보다 훨씬 커서 한번 물리면 따갑고 몸이 가려워서 견딜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나 벼룩하고는 살아도 빈대하고는 살기 힘들만큼 사람을 아주 힘들게 하는 해충이었다.  몸 길이는 5mm정도 아주 납작하고 다리는 세쌍이고 온 몸에 짧은 털이 있다. 악취가 대단하고 주로 밤에 활동한다. 그래서 빈대하면 현대 그룹 창업자 정주영 회장을 떠올릴만큼, 그와 빈대에 얽힌 일화가 있다. 정주영씨가 젊은시절 어느 건설회사에서 막노동 일을 할때 기숙사에 빈대가 득실거려 밤이면 숙면이 힘들정도 였다.  그래서 그는 빈대 퇴출작전으로 큰 함지박 둘에 물을 가득 붇고, 그 함지박 물속에 침대다리 둘씩 네 다리를 놓고 잠을 아주 잘잤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밤 빈대들이 방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와 정회장 몸통으로 뚝뚝 떨어졌다.

이를 본 정주영 회장은 한갖 기생충에 불과한 빈대도 살기 위해 이렇게 죽을 힘을 다하여 머리를 쓰는데, 소위 만물의 영장인 내가  건설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 빈대처럼 몸과 머리로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고 한다.  이처럼 그에게는 삶의 현장이 바로 살아있는 교육의 장이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가 '산림녹화'라는 구호속에 농촌과 도시할것 없이 부억을 땔나무 대신 연탄으로 개조하면서, 연탄 불에 빈대 이 벼룩들이 종적을 감추었더니, 오십여 년이 지난 지금 이 문명한 시대에, 그동안 잊고 살았던 해충들이 슬금슬금 이렇게 가장 서식하기 좋은 곳을 골라 다시 나타난 것이다.   얼마전 프랑스에서는 빈대가 전국으로 번져 빈대와 전쟁중이라는 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지극히 위생적인 시대에 지극히 비 위생적인 빈대가 나타나다니 도대체 이 무슨 해괴한 징조일까?   

이 대학 기숙사에서 빈대에 물린 학생은 현재 고열로 병원에서 치료중이라고 한다.일단 빈대에게 물리면 살이 벌겋게 붓고 심한 가려움증에 시달리게 된다.  해충 하면 연세가 드신 분들은 이와 벼룩 빈대까지도 떠오르실 텐데, 이제 옛날 이야기속에서나 나올 줄 알았던 빈대가, 최근 여기 저기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인천의 한 찜질방에 이어 이처럼 대구의 한 대학교 기숙사에서 많은 빈대가 발견된 것이다.  빈대에 물린 학생이 병원에서 치료까지 받았는데, 학교 측은 쉬쉬하다가 이 사실이 쁘록나자 뒤늦게 방역에 허둥대고 있다. 학교 기숙사에서 빈대에 물린 학생의 다리 전체가 온통 붉은 반점으로 뒤덮였다.  그 대학 기숙사 방 바닥에는 갈색 빛을 띤 빈대가 득실 득실하단다.  침대 위의 매트리스를 들추자, 흡혈 해충인 죽은 빈대와 함께 빈대 새끼까지 스물거렸다고 전한다. 대구 계명대학교 기숙사에서 빈대가 나온 건 지난 17일인데, 가려움과 고열에 시달리던 학생이 침대 매트리스 아래에서 빈대를 발견했다. 병원 치료까지 받은 학생은 기숙사 행정실에 빈대에 대한 방역을 요청했지만, 담당이 아니라며 그동안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가, 논란이 커지자 학교 측은 학생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 뒤 부랴부랴 방역작업을 실시 했다고 한다. 

대학이 초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빈대 출현 사실을 감추기에만 급급했다.  옛말에 빈대잡으려다 초가삼칸 태운다는 말이 있듯, 이와 반대로 쉬쉬하다 대학이 문을 닫아야 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이다. 대학 측은 지난 여름방학 때 영국 유학생이 기숙사 방을 사용했는데, 현재는 한국을 진작 떠난 상태다. 이를 두고 담당생활 관장 얘기는, "단기로 머무는 외국 학생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그런 것이 하나의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라고 추정하고 있다."고 했다. 물론 그것도 문제가 됐겠지만 문제는 청결이다. 대학 기숙사는 다수가 밀집하여 생활하는 곳이라. 외부, 특히 해외에서 들어 오는 물품에 대한 철저한 방역이 필요할 것은 물론이다. 대학 기숙사에 빈대가 출현했다는 것은 그만큼 방독과 청결에 철저하라는 예고다. 대학 기숙사는 외국 유학생등 세계 곳곳에서 여러 젊은이들의 생활공간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외국 유학생들에 대해 청결과 방역을 철저히 했어야 함에도 늑장을 부리다가 사단이난 후에야 부랴부랴 호들갑을 떨고 있다.  우리나라 속담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는 말이 있다. 얼마전 유럽에서 빈대 소동이 있었다고 보도 된바도 있었다.  

나랏 일이든 가정 문제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한 반대급부가 따르게 마련이다. 대학 당국은 학교 기숙사를 모든 학생들에게 무한개방하고 있었다면, 그에 상응한 가능한 모든 일에 주도면밀하게 살폈어야 했다. 지난 여름 충북 청주시 오송읍 오송 지하차도가 폭우로 수십명의 익사사고가 났을 때에도 충북지사는, 그 지역의  홍수에 대비하고 있다가 기민하게 대처했어야 함에도 천금같은 시간을 개인 일로 탕진하고도, 이번 국정감사에도 뻔뻔스럽게 변명으로만 일관하는 모습을 보면서, 탐관오리가 따로 있나 싶어 만감이 교차 하였다.  국가복지정책에  자기의 희생이나 노력없이 아무데나 빨대를 꽂고 빌붙어 살려는 인생들이 바로 국가와 사회를 좀먹는 빈대같은 흡혈귀들이다.  먼저 이러한 좀벌레들을 미리 미리 차단하는 것이 어찌 여기에만 국한 되겠는가! 관계 대학당국이 태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 구태가 여지없이 드러난 것처럼 수신제가도 나랏 일도 매 마찬가지다. 나남 할것없이 마치 기계를 닦고 조이고 기름치듯 눈에 쌍심지를 켜고 예방에 온 힘을 다 쏟아야 할 것이다.

【종그니칼럼】과유불급(過猶不及).

사람은 마음을 잘 다스리면 참 자아에 이르고, 본 마음을 잃게 되면 탐욕의 노예가 된다. 그래서 옛 선현은 "안분신무욕 수탐즉 우(安分愼無 慾 隨貪卽 憂)"(분수를 알아 욕심을 없애면 마음이 편안하나, 탐심을 품은즉 걱정이 임한다.)고 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그의 책 ‘에티카’에서 이렇게 말했다.  “탐욕이란 이 세상 것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이자 집착이다.”  탐욕에는 절제가 자리 잡을 수 있는 여백이 없다. 그러기에 탐욕에는 중간지대란 없다. 물욕에 대한 끊임없는 목마름으로, 욕망의 수렁에서 헤어 나올수 없기 때문이다. 타들어 가는 목마름이 있다고해서, 바닷물을 마시는 어리석은 자는 없다. 그럼에도 세상의 탐욕의 늪에 깊이 빠진 자들은, 하나같이 헤어나오지 못하고 갈떼까지 가고 만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소위 삼권분립 위에 군림하고 있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다. 엇그제 국회에서의 국정감사를 잠시 보았는데, 어느 국회의원이 "대통령이 감사원 활동에 관여할수 있느냐?"고 묻자, "대통령으로서는 관여할수 없지만 국민의 일원으로 서는 관여할수 있다."고 황당한 답을 했다. 감사원장이 스스로 감사원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살아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에, 감사원의 존재성과 독립을 스스로 반납하는 발언이다. 법언에 "권리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고 했다. 이러한 아부적 사고(思考)가 결국 부패의 고리가 되어, 역대 대통령들이 은퇴 후 모두 간당 간당 하거나, 아방궁 같은 집을 지어 놓고, 결국 자충수가 되어 영오의 몸이 되거나, 오욕의 무대 뒤로 사라지고 만다.    

무지랭이 같은 인생들은 그 것을 목도하면서도, 5년 후면 끝날 권력에 아편 중독자들 처럼, 권력의 아편에 되취 되어, 개미 쳇바퀴돌 듯 그 길을 답습하고 있다. 이를 두고 영국의 액톤 경은  "흐르는 물이 고이면 썩듯,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며, 절대적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고 갈파하였다. 이렇틋 절제와 분수를 모르는 탐욕은, 더 큰 탐욕을 토하면서 인면수심이 되어, 나라를 정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 간다.  문재인 정권이 가장 잘못한 것이 태양광 사업이고, 국가 기간산업이었던 원자력 사업 파기행위다. 국내 태양광사업은 자생력을 잃어버리고, 중국 저질의 싸구려 태양광 사업이, 전 국토를 초토화시켜 버렸다. 세계를 주름잡던 원자력 기술은, 어이없게 중국으로 몽땅 넘어가 버렸다. 아둔한 정권이 남긴 슬픈 족적이다. 원자력을 중국에 넘겨주고 얻은 반대급부는 무엇이었을까?

이제 아마추어 윤석렬 정권은, 출발부터 아니 발상부터가 지그 재그다. 옛말에 수신제가 후 치국 평천하(修身齊 家 後 治國平天下)라 했는데, 수신제가도, 대통령학도 모르는 아마추어가, 대통령학을 배워가면서 통치행위를 하여야 하니 서글프다. 오늘 날 농업혁명이 수천년을 거쳤다면, 산업혁명은 300년, 당면의 "제 4차 산업혁명 주기"가 겨우 20년, 다음 "제 5차 산업혁명 주기"는 겨우 15년인데, 집권자의 5년 임기가 얼마나 막중한지 가늠해 보시라!

어떤 청년이 취직이 되지 않는다면서, “최저임금을 받아도 좋으니 취업만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하소연했다. 이런 절실함이 통했는지 얼마 뒤, 마침내 취업에 성공했다. 경력도 없고 학벌도 좋지 않아서, 최저임금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도 기뻤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에 불만이 쌓이기 시작하더니, 초심은 사라지고 이것은 역차별 이라는 생각에, 초심과는 달리 불평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자동차나 집을 구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전에 타던 차보다 더 비싼 차를 사야지," "전에 살던 아파트 보다 더 넓은 아파트를 사야지," 한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삼십대 후반에 교회의 도움을 받아, 부평에 있는 열 아홉평 아파트를 구입하여 입주를 했다. 마누라 입이 넘 좋아서 벌어졌다. 집 청소를 두어달 동안 매일하던 어느 날, 마누라 입에서 첫 푸념이 나왔다.  아무개 친구는 자기보다 훨씬 어린데, 서른 네평 아파트를 장만했단다. 난 그 모습이 너무 천진스러웠다.

사실 우리는 오늘 보다는 내일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수고를 감내한다. 그러나 내일에 대한 소박한 바램이나 꿈이,  탐욕으로 바래지면 안된다.  평상심을 잃지 말자! 요즘 저금리 때에 투기목적으로, 아파트를 은행 돈으로 샀다가, 은행이자가 천정부지로 올라가, 낭패를 보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세상의 헛된 흐름에 영합하지 않고, 자족할 줄 아는 사람만이, 허탄한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허탄한 욕심의 유혹을 물리치고, 어떻게 현재에 만족할 수 있을까? 사실 세상의 잣대를 들이대면, 현재에 만족하기 어렵다. 몇해 전 어느 사업가가, 124억원을 은행 금고에 두고 죽었다. 금고엔 "연세대학 장학재단에 기증한다."는 유언장이 있었지만, 유족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돈을 모두 찾아 갔다. 자녀들이 선친의 유지를 뭉개버린 것이다. 돈 앞에는 선친의 유지도 안중에 없는 자녀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할까? 그래서 자녀가 없는 내는 어떤가?

당신은 당신 스스로를 얼마나 컨드롤 할수 있는가?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 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하신 이 말에, 고개가 숙여지는가? 땅엣 것에 온 마음을 두어 욕심에 눈이 가리게 되면, 정작 보아야 할 소중한 것이 보일리가 없다. 그러나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은, 이미 생명의 근원인 주님을 만났기에, 유한한 세상의 것에 마음을 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심령의 눈은 진정한 삶의 등불인 것이다.  눈이 맑다는 것은 단순, 정직, 솔직, 순수 등의 의미다. 특히 주님에게  눈길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야, 주님의 마음을 읽을수 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라고 했다. 당신의 보물은 어디에 있는가? 이를 알면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게 된다.  하늘인가?  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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