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년 전, 서울 용산역 공중화장실을 들어 갔는데, 화장실 벽에 쓰여있는 낙서가, 아주 명언이었다. "걸레는 아무리 깨끝이 빨아도 걸레다. 모든 여성들이여 걸레가 되지 않토록 주의하라!" 그동안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면서, 벽에 씌여진 낙서들을 무수히 보았지만, 이 경구의 낙서 외에는, 기억에 남는게 없다. 옛말에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다. 인생의 길을 묻는 당신에게, 길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내 가까이 바로 내 삶과 내 마음안에 있다.
살다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아주 반가운 일이 뻥하고 터질 때도 있다. 예를 들어 몇주 전에, 우리 요양원 앞 도로위에 아스콘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하루 온 종일 작업하고, 그 다음 날에야 공사가 끝났다. 그래서 나가 보았더니, 유독 우리 요양원 앞 길 300여 미터만 아스콘작업을 했다. "살다가 이렇게 좋은 날도 있구나"싶어, 내 맘에 감동이 강물처럼 흘렀다. 그동안 요양원 앞을 오가는 모든 차량들이, 하나같이 과속주행을 했다. 그래서 얼마나 가슴을 졸였었는지. 이제 과속 방지턱과 주행도 시속 30km로 표기 되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사를 어느 기관에서 해주었을까? 춘천시에서? 아님 강원도청에서? 암튼 참 고마운 일이다.
어떤이는 강자만이 살아 남는다는 인간세상을 말하면서, "권투장 링의 사각지대"를 얘기한다. 주어진 시간동안 링안에서 사투를 벌인다. 허지만 아무리 강자라도, “한 대도 안 맞고 이길 수는 없다.”는 말처럼, 우리는 링의 사각지대와 같은 냉혹한 세태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생을 아무런 고통과 시련 없이, 편하고 쉽게 사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하룻동안에도 차갑거나 후덥지근한 새벽이 있고,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한 낮이 있고, 깜깜한 밤이 있다. 이 하룻동안도 주어진 날이지, 일회용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는 허접스런 그런 날이 아니다.
루소(Rousseau)가 본래의 것을 훼손하려는 것에 대하여,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이는 중국의 노장사상의 영향이라기보다, 인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인간의 태생적 단면을 갈파한 것이다. 노자(老子)가 젊은 날의 스승 상(商)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강한 삶인가"를 물었다. 그러자 스승이 자신의 입을 쩍 벌리며 뭐가 없느냐" 그러자 노자가 "이빨이 없습니다." 스승이 다시 입을 쩍 벌렸다. 그러자 노자가 혀만 보입니다." 스승이 "이제 깨달았느냐?" '예' 그럼 노자가 무엇을 보았을까? "단단한 이빨은 년륜에 의해 없어지고 부드러운 혀만 남았다."는 것이다.
야구 선수가 3할 타자만 되어도, 최고의 타자라는 영예를 얻는다. 이는 30%의 성공, 70%의 실패를 의미한다. 분명히 실패가 더 많다. 그래도 30%의 성공만으로도, 가장 뛰어난 선수라고 평가를 받는다. 축구에서도 마찬가지다. 골키퍼는 단 한 점도 내주지 않기를 바라겠지만, 그런 경우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명 골키퍼가 되려면, 많은 골을 내주면서 계속 성장하는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수많은 죽은자들이 묻혀 있는 공동묘지를 가 보라! 오직 산자에게만 살아 있기에 문제가 있고, 고통과 시련이 있게 마련이다. 바로 이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홍수가 났을때, 죽은 것들은 물살을 따라 다 떠내려 가지만,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살을 거스려 올라 간다.
자신에게 다가 오는 시련을 거부하려 드는 사람은, 인생의 링안에서 한 대도 안 맞고 이기려는 사람과 같다. 이런 사람을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생의 아린 맛과 매운 맛을 깨닫지 못한 착각 속에 사는 사람, 헛물 켜는 사람들이다. "한대도 안맞고 이길수는 없다." 평범한듯 보이지만 아주 명언이다. 이런 명언들을 내가 어디서 보았을까? 이런 놀라운 진리가 발견되는 곳은, 도서관이나 박물관이나 상아탑이 아니고,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속 곳 곳에 널부러져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공중 화장실에서도 찾을수 있고, 우리의 일상적인 삶속에서도 얼마든지 발견 될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의 진수들을 오로지 세상적이고 찰라적인 것들에 눈이 어두워 정작 보아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하는 영적 장님이 되어,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탐심을 버리고 본래 있어야할 나를 찾자! 본래의 나를 찾게 될때, 모든이가 나의 이웃이 되고 벗이되고 또 하나의 내가 되어, 죽어서 하늘나라가 아닌, 바로 여기 내 마음 안에, 지옥도 있고, 하늘나라도 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라는 말이 있다. 진리 즉 삶의 지혜는, 우리가 살아 가는 삶속에 켜켜이 녹아 있다. 그러므로 진리는 내 삶의 저 건너에 있는게 아니고, 일상적인 내 삶 안에서, 끊임없이 경구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특별한 곳에서만 진리가 있다고 착각에 빠질 때가 많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유명한 산상수훈과 함께,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며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다.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이유는, 당시에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공회 혹은 저자나 길위에서, 남들 눈에 띄이는곳에서 장황한 기도를 늘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란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를 찾듯, 엄마와 어린아이가 소통하듯, 인생의 지혜를 묻는 하나님과의 소통이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물론 특정한 장소에서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가까운 관계이며, 사랑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요양원엔 대부분 치매 노인들이다. 치매노인과의 대화는 말보다 가슴으로 하여야 소통이 된다. 진정한 대화는 입술로 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혼으로 하는 것이다. 행복이란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를 기뻐하는 것이다. 의무가 기쁨으로 되어질 때, 우리의 짐은 축복이 된다. 우리가 말씀을 실천에 옮길 때, 비로소 참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종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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