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원 정원에 심겨진 관상목이나 과목(果木)들은, 해마다 가을이나 이른 봄에 가지치기를 해 주고 있다. 그래야 실하게 자라고, 과일들도 암팡지게 열릴 것이다. 또 우리 요양원에서 소천하신 무연고분들을, 요양원내의 관상수 아래에 모셨다. 그래선지 관상수의 잎새며 꽃들도 그 분들의 숨결인양 한결 더 아름답다.
우리 내외가 이곳에 요양원을 세워 이사 온 지도, 어언 십사년이 되었으니, 이제 관상수들도 훌쩍자라 여름 날 그늘이 되어주고, 시월 가을에 잎새들이 곱게 물들어, 심을 때가 어제인양 감회가 새롭다. 금년 봄에도 요양원 담 밖에, 유실수 몇 그루를 심었는데, 이 가을에 다시 보니 몰라보게 훌쩍 자랐다. 과목들은 이같이 건강하게 잘자라고 있는데, 내 몸둥이는 세월이 지날수록 고장난 곳이 잦아서,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점검하듯, 수시로 점검을 하여야 한단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해마다 종합 검진을 받고 있다. 검진을 받는게 어디 몸둥이 뿐이겠는가? 옛말에 "선비가 하루만 책을 멀리해도 혀에 가시가 돋는다."고 하였다. 혼탁한 세파에 부대끼고 있는 우리의 심령도, 자정능력을 잃지 않도록, 매일 말씀으로 정화시켜야 한다.
온갖 비리와 이기주의가 난무한 세상으로 부터, 자신을 지키는 비결이 무엇이겠는가? 매일같이 돋아나는, 영적 암덩이와 같은 잡 생각들을, 말씀의 검으로 수시로 가차없이 잘라내 버려야 하는데, 우리는 남의 허물에 대해서는 매정하면서도,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왜 그리도 너그러운지. 누군가가 "한번 엇나간 사람은 다시 고쳐 쓰기 어렵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과연 그러한가? 하긴 옛말에,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도 있고, 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때부터 알아 본다."는 말도 있다. 말이나 소를 길들이는데도 어릴때 길을 들여야 한다고도 한다. 그래서 유아교육 심지어 모태교육을 중시하기도 한다. 물론 사람도 어렸을 때에 유난히 별난 개구쟁이 들이 있다. 일찍 때묻은 본성을, 인성교육 만으로 온전히 바꾸기란 어렵다.
하지만 성경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 들이는,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임하게될 때, 오랫동안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아 온 삶이 변하여, 말씀을 따라 사는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종종보게 된다. 그래서 전혀 쓸모 없던 인생이, 쓸모 있는 인생, 꼭 있어야 할 인생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그 기쁨은 크다.
이것은 생물학적 변화가 아니라, '영적인 변화' 즉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 다시 말하면 세파에 씻겨서 잃어버렸던, "본래의 나"를 되찾음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축복인 것이다. 또한 이것은 육성의 오감으로는 감지할수 없는, 성령에 의한 본래의 자리로의 회귀이기 때문에, 이러한 체험이 없는 이 에게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사람의 몸은 약 30조에 이르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 세포들은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사라지는데, 보통 하루에 3300억개의 새로운 세포가 생성되고 사라진단다. 이는 1초에 380만 개의 세포가 교체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금과 완전히 다른 세포로 교체되는 주기가, 약 7년쯤 소요된다고 한다. 그리되면 지금의 나와 7년 후의 나는 생물학적으로 보면, 이전과 전혀 다른 세포로 구성된 ‘내'가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이렇게 내 몸둥이가 새로운 세포로 조직되었다 하여, "새로운 나로 태어 났다"고 말할수는 없다.
나는 오고 오는 모든 세대들 중에, 지난 세기 1946년에 대한민국 이 땅에 태어나, '김 종근' 이라는 독립된 인격체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삶은, 학문을 통하여 혹은 깨달음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고쳐 사는 삶이 아니라, 맑고 어질어야 할 인성이, 육신의 소욕이나 세상의 안목에 영안이 흐려져서, 내 영혼이 죄에 물들어, 마치 마약이나 알콜에 중독되듯, 죄의 수렁에 빠져 죽을수밖에 없던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함이다. 살고 있는 집을 고치는 것(Remodeling)이 아니라, 다시(새로)짓는 것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장 17절) 라고 갈파한 바울의 고백이, 바로 나의 고백이 된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새롭게 태어난 죽은 자가 아닌 산자의 삶을 살수 있도록, 날마다 하나님을 향하여, 세상을 향하여,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살자! 그래야 내 심령과 세상 안팍으로 밀려오는 세상적이고 찰라적인 것들에 휘말리지 않고, 있어야 할 참 나를 찾을수 있다. 할 수 없는 이유나 핑계를 찾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새롭게 태어났기에 예전엔 할 수 없었던 일이, 이젠 마땅히 내가 해야 하는 사명임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이것이 주님과 하나된 삶이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 예전의 세상의 안목과 육신의 소욕을 모두 간직한 채 따를 수 있을까? 약간의 변화를 통해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을까?
주님께서 우리를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해 주시고자, 스스로 인간의 옷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듯이,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자라야, 주님의 사랑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다고 말할수 있다. 인생에게는 언제나 두길이 있다. 가야할 길과 가서는 안되는 길이다. 어느 길을 갈 것인가는 오로지 우리의 선택이다. 어떤 이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며, 예수님께 ‘스승’이라고 부른다. 자기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사제지간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인생을 학문적으로 배우는 사제지간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 따르려는, 환골탈태의 온전한 내적변화가 있어야 한다.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새롭게 태어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달라는 말에도,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달라는 말도, 받아주시지 않은 것이다. 유다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일에 대해,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자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라.” 라고 하셨으며, 가족들과의 작별 인사에 대해서도,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셨다. 오로지 달려야 할 길만을 꾸준히 달리고,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약간의 고침이나 수양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훌륭한 대화란 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 종그니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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