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 가장 먼저 대했던 책이 '사자소학'(四字小學)이란 책이었는데 이 책 첫 구절이 "아버지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가 나를 기르셨다. (父生我身 母育我身)"로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엄니에게 물었다. "나를 낳은 것은 엄마인데 왜 책에서는 아빠가 나를 낳았다고 하느냐?" 어머니의 대답은 "크면 알게 된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이미 늙었어도 지금도 이 글귀는 난해하다 해산의 고통도 아빠가 아닌 엄마이고 젖을 먹여 기르신 이도 어머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인간의 태어 남을 '부계혈통'으로 표현 한다. 아무튼 생명의 탄생이야 말로 경외롭고 신비로운 것이다. 생물학적 표현으로 마치 아메바와 같은 난자와 정자가 서로 만나 한 인격의 생명체가 된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신비로운가! 사랑이란 인연으로 청춘 남녀가 부부로 만나 최소 공동체인 새 가정을 이루고 사랑의 열매인 자녀를 낳고 이렇게 종족보존으로 인간사회가 형성된다. 참으로 신비로운 공동체다.
그런데 이렇게 신비로움을 듬뿍 머금은 인간공동체가 단절의 위기를 맞고 있어 안타깝다. 오로지 사랑의 열매로 억만 년을 이어 온 세계 인류가 아이러니 하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라마다 단절의 위기앞에 서 있다. 성장의 무대가 전혀 다른 청춘 남녀가 사랑의 자석에 끌리듯 서로 한 몸 한 가정을 이루어 사랑의 열매로 자녀를 낳고 사회를 이루고 나라가 형성 되고 장구한 세월동안 인류 문명의 꽃을 피어 왔다. 태초에 조물주가 아담과 이브를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인간 사회를 활짝 여신 것이다. 비록 인간의 수명이 백년 안팍이지만 종족의 산실인 가정의 형성으로 인류는 온 지구를 덮을만큼 땅에 충만한 축복을 받았다. 헌데 그 축복이 여기까지 인가? 지금 우리는 인류사 에서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나는 요양원 터밭에서 요양원에 입소한 노인분들 밥상에 올릴 채소들을 가꾸다 보면 간혹 예외가 있긴하지만 채소는 사람의 손길이 가는 만큼 자란다는 것이다. 인간이 생산하는 채소가 기호품식품이므로 선호도는 있을지언정 채소에 무슨 등급이 있겠는가? 허지만 인간 사회에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신분제도가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을 통제하여 왔다
옛날 고려 무인정권 때 노비 '만종'이란 자가 신분타파의 난을 일으키며 외친 제일성이 "왕후 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 였다. 맞는 얘기다. 그런데 이러한 고려 사회때 보다도 한술 더 뜬 전형적인 신분 사회가 바로 조선시대 였다. 이는 인류사의 흐름을 거스린 반역(反逆)의 시대였다. 조선은 명(明) 청(淸) 교체기 때에도 신분 제도의 요람과 같았던 명(明)에 대한 사대에 매여,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가는 明나라의 끈을 놓지 못하다가 병자호란을 자초 하였지만 그러나 정작 중국 淸은 실용주의를 통해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공자와 주희의 공론(空論)을 타파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대대적인 사회 변혁을 단행하고 있을 때에도, 조선은 우물안 개구리 처럼 유교와 성리학의 공론(空論)과 붕당(崩黨)으로 천금같은 세월을 쌈박질로 허송하다가 결국 나라를 일제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인간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어떤 보이지 않는 손길이 또는 어떤 알수 없는 힘이 나를 이 세상에 내어 보낸 것이다. 실존 철학의 이론을 빌리면 우리는 이렇게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이처럼 인간은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뜻에 의하여 생명이 열린 것이다. 그러기에 생명은 신비롭기만 하다. 이처럼 생명의 시작도 마침도 오로지 내가 아닌 절대자의 섭리안에 있다. 우리는 '자연'이란 말을 너무도 쉽게 또는 난해한 것은 모두 자연의 영역으로 돌린다. 이처럼 인생은 어찌보면 내 삶속에 진정 있어야 할 나는 없고 오직 절대자의 섭리만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가 하면 또한 인간의 생명을 얼핏 육신적인 안목으로만 보게 되면 단순히 생물학적인 출생에서 나의 존재가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주 안의 모든 이치가 오로지 절대자의 섭리에 의하여 정반합(正反合)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불가해한 것이기에 우리는 다만 이를 '하늘의 섭리'라 말할 뿐이다. 그리고 또한 이성적(異性的)사랑앞에서는 양심도 침묵하고 이성(理性)도 무력하고 도덕도 빛을 잃고 체면도 무너지고 하나님이 짝지어준 異性的 사랑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축복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축복이지 싶다. 이성적(異性的)사랑의 요람인 가정이 발아(發芽)되고 양성(兩性)의 결합으로 제 2의 생명이 태어난다.
내가 1980년 4월 20일 주일 날 하나님의 강권으로 마치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온 밤 동안 전심으로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나 또한 장장 일곱시간에 걸친 생명을 건 기도에 의해 '잃어버린 진정한 나'를 찾게 된 이후 나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 졌다. 이후 나는 세상적인 모든 욕망을 완전히 비워 버리고,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주님의 종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를 나는 중생 '거듭남' 이라고 표현한다. 나의 삶의 대전환 이것은 필연의 운명이요, 섭리요, 오로지 그분의 은총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의 결이 완전히 바뀌어 진 것이다. 이처럼 절대자의 사랑으로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중생의 체험은 도취요 황홀이요 환희요 신비다. 생명이 있는 동안 이 땅에 나를 보내신 이에 대한 사랑처럼 강한 사명도 뜨거운 정열도 아름다운 희열도 없을 것이다. 이는 삶의 진수와 주님의 나를 향한 참 사랑을 깨달음으로 새로운 세계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낡은 自我가 죽고, 새로운 자아가 다시 태어나는 신생이요 무명의 내가 본래의 나로 비약하는 존재의 변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구나 이러한 변화를 쉽게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믿음으로의 거듭남을 체험 하지 않고 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허다 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거듭 남은 참회의 열매이기에 삶의 희열과 감사가 충만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자기의 사명을 찾게 되어 이후 우리는 이것을 위해 살고 이것을 위해 삶을 바치겠다는 투철한 사명감을 깨닫게 될때 우리의 삶은 깊어 진다. 인간 생애의 최고의 희열은 자기의 사명을 깨닫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다음은 내가 죽음 앞에 설 때다. 죽음은 삶의 종말이요, 존재의 부정(否定)이요, 인생의 종지부(終止符)요, 일체가 끝이 나는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無로 돌아가는 것이요, 사랑하는 모든 것과 영원히 이별하는 것이다. 죽음에는 허무감이 따르고 공포감이 따르고 절망감이 따른다. 그리고 죽음은 예외없이 우리에게 다가 온다. 죽음은 인간의 가장 으뜸가는 한계상황 이다. 죽음 앞에 선다는 것은 나의 종말 앞에 서는 것이고 虛無 앞에 서는 것이고 限界 앞에 서는 것이다. 죽음을 심각하게 느낄 때 우리의 삶은 엄숙해지고 진지해진다. 우리가 투철한 인생관 을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진솔한 삶을 살수 있다. 그러기에 인간은 어찌보면 사명적 존재다. 나의 생명이 나의 使命과 만날 때 나는 비로소 나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고 成熟한 自我로 성장한다. 나는 무엇을 할 것이냐, 나는 어떻게 살 것이냐, 이것은 인생의 근본문제에 대한 단도직업적인 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하여 명확한 대답을 주는 것이 바로 使命이다. 그러기에 인간의 自覺중에 가장 중요한 자각은 '자기 사명의 자각' 이다. 사명을 자각할 때 나는 비로소 '진정한 自我'가 되는 것이다. 사명은 나의 인생에 새로운 탄생과 새로운 빛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삶은 목표가 있다. 그 목표는 삶의 탄생과 동시에 주어진다.
【종그니 칼럼】 환경 문제
옛말에 '과유불급'이란 말이 있다. 이는 "무엇이든 지나치면 모자람만못하다." 는 뜻이다. 지구환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해결책이 비관적일 수도 혹은 낙관적일 수도 있다. 지구의 자연생태계의 변화, 또는 모든 재해의 원인을 유독 인간에게서만 찾는 예를 볼때가 종종 있다. 그런 지적을 받는 것은 아마도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어제도 "북극의 얼음이 녹아 북극 곰이 죽어가고 있다"며 후원금을 모금하는 광고를 보았다. 그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난민들의 어려운 생활상을 영상화해서 후원금을 유도하고 있는 광고도 보았는데 이런 알림방이 혹여 나의 지나친 기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후원금을 차떼고 포떼고 나면, 현지 당사자들에게는 과연 얼마나 전달 되고 있을까? 하고 궁금해질 때도 더러 있다.
또 한 예로 "지구의 허파역할을 하는 아마존이 이기적인 인간들에 의해 황폐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며 지나친 위기만을 부각 시키고 있기도 하다. 이는“환경종말론을 주장 하는 기후변화에 대한 지적이므로 과학적인 엄밀한 분석을 통하여 이를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오그래픽이 지구 온난화 위기를 전하기 위해 촬영한 동영상 중, 삐쩍 마른 북극곰이 먹이를 찾아 다니는 모습을 TV를 통해 심심찮게 보았다. 하지만 이 영상은 충격요법을 통해 '기후위기 상황'을 널리 알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과학적으로 북극곰의 죽음과 기후변화 사이의 연관성이 모호하다는 반론도 적지않다.
"대자연안에 살고 있는 인간이 인간중심의 이기만을 앞세워 대자연을 무단으로 파괴하고 있다."는 말은 경청할만하지만,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고 얻어 낸 결론이라고 보기 또한 어렵다. 기후변화, 삼림파괴, 플라스틱 쓰레기의 재해로 인한, 동식물의 멸종위기 등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끊임없는 탐욕과 오만이 초래한 결과라고 단정 짓는 것만이 최적의 해결책은 결코 아닐 것이다. 친환경론자들 또한 우리와 호흡을 함께하며 현대 문명 속에 살고 있다.
인류가 보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 이 땅의 자원을 활용하는 중에 자본주의적 과잉생산과 이에 따른 과소비로 인한 역작용 또한 엄청 크다. 탄소배출, 기후변화, 환경오염 등이 서로 맞물리면서, 지구의 위기가 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로 인한 위기만을 강조하기에 앞서, 자원의 무분별한 낭비등에 대한 대책 또한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환경위기론이 주장하는 문제 중에 하나는 무조건 인류를 환경파괴의 주범으로만 보고 인간을 자연과의 공존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이같이 일방적인 방향으로 지향한다고 해서 주어진 현실이 개선될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긍정적이고 현실적이며 또 지극히 포용적이고 실용적인 방법으로 환경의 중요성을 올 바로 인식해서 끊임없이 개선해 나아가야 할 과제라 할 것이다.
1963년부터 2016년까지 50여년동안 사냥당한 북극 곰은, 5만 3500마리에 달한다고 한다. 아마존 열대우림이 기후변화와 삼림파괴로 곧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는 주장 역시 사실과 다르다. 아마존은 80%가 건재하며 20%가 개간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아마존이 ‘지구의 허파’로 지구 전체 산소의 주요 공급원이라는 것도, 식물들이 호흡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산소를, 대부분 식물들이 윈윈하며 사용하고 있다.
또한 "자연적인 것이 좋다" 는 일부 환경주의자들은, 공장식 축산보다 자연에서 기르는 '방목형 축산'이 환경에 더욱 좋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방목형 축산을 택할 경우, 소고기 1㎏당 14~19배의 땅과 물 등이 더 필요하다고 한다. 앞으로는 바다 어류도 자연산보다 양식을 추구해야 한다.
기후변화를 제외한 영역에서 어류의 지속성을 위협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남획'이다. 자연을 지키기 위해서는 양식을 하여야 한단다. 그리고 오늘날 해양 쓰레기로 지탄받는 플라스틱은 그 역사를 돌이켜보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플라스틱이 바다거북과 코끼리를 멸종 위기로부터 구해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적을 것이다. 플라스틱이 개발되기 전 인류는 수천년간 매부리 바다거북 껍질로 안경, 빗, 리라, 보석, 각종 상자 등 다양한 사치품을 만들어 왔다. 이를 위해 인간은 1844년 이후로 바다거북 약 900만 마리를 잡았다.
상아 역시 사치품과 공예품으로 각광받아 19세기 말 미국과 영국에서는 매년 10만마리 가까운 코끼리가 죽었다. 환경주의에 의한 이런 이분법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란 목표에 도움이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일회용 과잉소비에 맞춘 과잉생산을 유발하는 플라스틱을 부정적으로만 보면, 분명 플라스틱은 환경오염의 주범이다. 과잉생산과 과잉소비를 동시에 풀어야 하는 환경문제는, 앞으로 수세기 동안 인류의 화두가 될 것이 자명한 이 시대에 이 문제는 바로 내 문제요, 또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안겨진 초급을 다투는 대 과제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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