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 칼럼] 강건한 나라

조선시대에는 지방 곳곳에 서원과 향교가 있어 소위 유림들이 나랏 일의 시시비비를 활발하게 논하여 언로(言路)가 살아 있었다. 암행어사 제도 역시 임금이 백성들의 애환을 살피는 '신문고'와 같은 것이었다. 이처럼 엄격한 신분제의 나라 조선시대에도 언로(言路)는 열려있었다. 하지만 명리를 존중하는 성리학의 표본인 사대부들의 양반 정치였기에 쓸떼없는 번문욕례(繁文縟禮)가 많았다. 예를 들어  "양반이 똥 구멍으로 호박씨 깐다."는 비양거림이 있듯, 양반사회의 겉과 속이 다른 면들이 많았다. 사람 사는 사회에 사람이 하는 일에 무슨 귀천이 있을까마는 그러나 양반과 상것들이 엄존했던 시대가 바로 조선시대였기에 신분에 따라 하는 일이 달라서 사농공상(士農工商)순으로 신분을 분류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신분제도가 조선시대처럼 법제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예를 들면 도공(陶工)들에 의해 '고려청자'라는 빛나는 민족의 유산을 남겼다.

다음은 이조 중엽 후기 정조 때의 이야기로 당시 양반사회의 모순을 여과 없이 그려내고 있다. 조선의 양반사회는 농자 천하지 대본이라할 만큼 농업에는 신분이 필요 없었다.산에 올라 산야초를 캐는것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한양에서 낙향하여 고산준령에 올라 약초를 캐는 일이 많았다. 가을이 깊어 가는 어느 날 이제 막 산에서 개울가로 내려와 숨이 턱밑에까지 차서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진 약초꾼 영감이, 두손으로 개울 물을 벌컥 벌컥 마시고는,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과 목덜미를 씻어내고 있었다.
그때 사모관대에 가죽 신을 신은 젊은이가 “영감, 나를 업고 도강(渡江)을 좀 해 주시구려." 약초꾼이 뒤돌아 보니 젊은 양반나리가 노인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행색이 초라한 약초꾼은 두말없이 첨벙첨벙 젊은이에게 다가가 등을 구부렸다.  젊은이가 영감의 땀에 젖은 옷이 비단관복을 더럽힐까 엉거주춤 어부바를 하고서 영감 어깨를 잡았다. 넘어질듯 몇번이나 기우뚱 거리며 겨우 겨우 개울을 건너자, 젊은이가, “영감 연세가 얼마나 되시는지 기운이 참 좋으시구려”   “연세랄 것은 없고 쉰이 조금 넘었소이다.”   

그러자 젊은 선비가 이어 물었다.  “헌데 영감, 혹 이 고을에 도승지를 하시다가 낙향하신 윤 대감 댁이 어딘지 아시오?” “따라 오시오.”  그러고는 약초꾼 영감이 앞장서서 걸으며 그 젊은 선비에게 물었다. “젊은 양반은 어디서 오시는 뉘시오?” “한양에서 오는 길인데 윤 대감님을 찾아뵐 일이 있어서 왔소이다.” 그리고는 젊은이가 “영감, 혹시 이 근방에 주막은 없소?” 그러자 약초꾼 영감이 “가막고개를 넘어 오셨으니 시장하시겠구료! 이 늙은이도 산을 좀 탓더니만 배가 출출하외다.” 산허리를 돌자 마침 잔칫집이 보였다. “염치 불구하고 들어가 요기나 좀 하십시다.”  드넓은 기와집 안마당, 바깥마당 할것없이  차양이 드리워져 있고 쇠고깃국 끓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혼주인듯 넓은 갓을 쓴 이가 직접 나와 사모관대 젊은이를 모시고 사랑방으로 들어가 떡 벌어진 진수성찬 한상을 차려 오고 청주를 따랐다. 약초꾼 영감은 사동의 지시에 따라 마당 구석 멍석 위에 앉아 개다리 소반에 국밥 한 그릇과 탁배기 한 잔을 받았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요기를 하고 일어서자, 집주인이 사모관대 젊은이를 대문 밖까지 배웅했다. 잔칫집 동네를 빠져 나와 다리를 건너고 고개를 넘자 조그마한 강변마을이 보였다.  “저기 감이 주렁 주렁 달린 초가집이 윤 대감 댁이오. 그런데 윤 대감은 왜 찾으시는 거요?” 약초꾼 영감이 젊은이에게 묻자 젊은이가 영감님을 뚫어져라 보더니 대답했다. “주상 전하께서 윤 대감님께 귀한 약재를 하사하시라고 해서요.”
약초꾼 영감이 성큼성큼 걸어가 감나무집으로 들어갔다. 젊은이가 영감을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와 엉거주춤 서 있자 집사가 나와 안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젊은이를 앉혔다. 급하게 멱을 감고 사모관대를 차려입은 윤 대감이 나왔다. 젊은이가 기절초풍을 하고 벌떡 일어나 코가 땅에 닿도록 업드려 "죽어지이당"

의복이 날개라 했던가!
조금전까지도 초라하게만 뵈던 약초꾼 촌로가 바로 이조 정조 때에 이조판서를 지낸 '윤행임'이었기 때문이다. 호는 시문제(是聞齊)요, 정조의 지극한 신뢰를 입어 20여년동안 지밀(至密)에서 왕명을 받들었던 인물이었으니 그 사람 됨을 알만하다.사모와 감색 관복에 관대를 두르고 가죽 신을 신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나오는 폼새가 아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상 위에 올려진 임금님의 서찰과 하사품인 경면주사, 우황, 사향을 향해 꿇어 앉아 절을 하고는 깊은 감회에 젖어 흘러내린 눈물이 노안을 홍건히 적셨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윤 대감은 도승지를 십이년이나 하면서 임금이 병상에 누워 있을 때 곁을 지키며 모친상 부음을 접하고도 자리를 뜨지 않아 나중에 임금님의 질책을 받을만큼 정조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던 그가 부친이 병석에 눕자 주상의 윤허를 얻어 낙향한지 삼년이 되었다. 성경에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시느니라." 

이처럼 인생들은 사람의 속내를 보지못하고 차려 입은 외모 만을 본다. 그런가하면 조선 선조 때의 학자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1534-1599)의 '對月吟'; 달을 바라보며 읊다) 라는 한시(漢詩)가 있다.
"운렴천봉정(雲斂千峯靜)
구름 걷히니 일천봉우리 드러나고,
강공야기청(江空夜氣淸)
텅빈 강 위에 어리는 밤기운이 맑구나.
고현유일조(孤懸惟一照)
외로이 떠 있는 달 한결같이 비추는데,
창망각다정(愴望却多情)
비장한 심정으로 바라보니
문득 다정하여라!
천상무원결(天上無圓缺)
달은 이지러지거나 뭉글어짐이 없지만,
인간유회명(人間有晦明)
인간 세상에선 그믐 달과 보름 달로 보이나니!
영종고수은(寧從高樹隱)
차라리 높은 나무 너머로 자취를 강출지언정,
막허중성쟁(莫許衆星爭)
뭇 별들과 밝음을 다투지는 아니하리!"

어떠한가? 가을이 깊어 가는 가을 끝자락에서 이 시를 음미하고 있노라면,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달을 노래했지만 송익필처럼 탁월한 통찰력으로 달을 읊은 이는 찾아보기 어렵다. 송익필(宋翼弼)의 詩는 마치 우주에서 달을 관조하듯 자신을 밝은 달에 빗대 세상 뭇별들과 다름을 말한 뒤, "하늘에서는 뭉글어짐이 없지만, 인간 세상에서는 그믐달과 보름달로 보이나니"라는 시어(詩語)로, 신분제도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그는 서얼 출신으로 경기도 고양 구봉산 자락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는 학문이 깊어 경서에 해박했으며 언행이 바르고 곧았기에, 동시대의 율곡 이이와 성혼은 성리학을 논할 만한 자는 오직 '송익필'뿐이다. 할 정도였다. 물취이모(勿取以貌)란 말이 있다. 사람 됨됨이를 보아야지 겉 모습만을 보고 사람을 판단해선 안된다는 교훈이다.

[종그니 칼럼] 강건한 나라

우리 몸 안에 쌓인 배설물을 몸 밖으로 내 보내지 못하면 바로 이것이,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적폐가 된다. 나랏일도 마찬가지다.

미국 최초 개척시대 때의 이야기다. 당시 신대륙인 미국 동부지역에, 엄청나게 큰 금광이 있다는소문이 유럽을 휩쓸었다. 그래서 한 몫 챙기겠다고, 너 나 없이 미국 동부로 모여들었다. 영국의 세청년도 부푼 꿈을 안고 이곳을 찾아들어 와, 수 년여의 고생 끝에 상당한 금을 채취해서, 이 금을각자 자루에 담아 세 사람이 거친 황야의 계곡을 빠져나가는데, 세 사람의 마음이 모두, 어떻게 하면 "저 두 놈 을 없애고, 내 것으로 만들꼬"였다. 그래서 셋 중 두 놈이 먼저 한 놈을 족쳐 죽이고, 둘이서 금을 나누었다.

둘이서 한참을 가다가, 또 금 두 자루를 놓고 사투가 벌어졌다. 그래서 결국 한 놈 차지가 되었다. 그런데 최후의 한 놈도, 서로 사투를 벌이느라 탈진 상태가 되었다. 당시 그곳은 대중교통도 없었고, 마실 물도 없는 끝없는 사막의 연속이었다. 처음엔 힘이 있어 금자루를 어깨에 메고 갔으나, 나중에는 걸을 힘조차 없게 되자, 금자루를 땅에 끌고 갔다. 얼마 못 가 금자루가 터져서, 금덩이가하나둘 빠져나갔다. 

이 친구는 지칠 대로 지쳐, 겨우 주막을 찾아 대문간에 이르러,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금을 줄 테니 물, 물을 달라." 외치다 쓰러져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친구들의 생명을 죽이고, 질질 끌고 온 금 자루는 이미 텅 빈 빈 자루였다. 그런데 세 사람이 금을 캐서, 금광을 나오는 것을처음부터 지켜보며, 이 세 사람의 결말을 감지한 자가 있었다. 

그는 말을 타고, 그들 뒤를 멀리서 추적해 오면서,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그들의 시종을 지켜보며, 자루가 터져 흘러나오는 금을 하나하나 주워담았다. 그는 금광에서 금을 캐는 수고도 없이, 이 세 사람의 금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다. 결국, 최후의 소유자는, 말 탄 자의 몫이 되었다. 세 사람 모두 돈에 눈이 가려, 천하보다 더 소중한 생명을잃은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조선 말기 연암 박지원이 쓴, ‘황금대기(黃金臺記)'에 기록된 이야기다.

도둑 세 놈이, 옛 왕릉 무덤을 도굴해서, 많은 황금을 훔쳤다. 횡재했으니 축배를 들기로 하여, 한놈이 술을 사러 갔다. 그는 오다가 술에 독을 탔다. 혼자 다 차지할 속셈이었다. 그가 도착하자, 두놈이 다짜고짜 벌떡 일어나 그를 죽였다. 그새 둘이 황금을 나눠 갖기로 합의를 보았다.둘은 기뻐서 독이 든 술을 나눠 마시고, 두 놈 다 공평하게 죽었다. 그리고 그 황금은 지나가던 사람의 차지가 되었다.

애초부터 국가 문화재인 왕릉을 도굴해서,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문화재를 취득하려 한 발상 자체가 잘못이고, 황금을 도굴하여 손에 거머쥔, 그 황금에 눈이 뒤집혔기 때문에, 천하보다 더 소중한 사람의 생명이, 이젠 없어져야 할 토사구팽이 되고 만 것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은, 목전의 이익 앞에 가치관이 전도(顚倒)되어, 돈이, 혹은 권력이, 인생의 정점에 놓여 있는 듯하다. 그러나 돈이 많아지면, 반드시 돈의 노예가 되기에 십상이다. 콜럼버스가 미국 신대륙을 발견한 후, 수많은 사람이 신천지로 몰려들어, 한 손엔 성경을 들고, 또 한 손엔 총을 들고, 잉카제국을 무너뜨리고, 수많은 금을 수탈해 갔다.

수탈해 간 그 금들로 유럽의 화려한 성전건물에 사용되어 졌다. 참 눈 가리고 '아웅'한 격이다. 이처럼 재물의 속성을 가장 잘 알았던 성 프란치스코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그 많은 유산을, 최소한의생계수단으로 꼭 필요로 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고루 다 나눠 주고,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었다.

권력 또한 돈과 마찬가지로 ‘권력(權力)'을 손에 쥐고 나면, 응당 사람의 폭이 넓어져서, 인간관계가 더 돈독해져야 하는데, 전혀 그게 아니다. 권력의 마력에 맛을 들이고 나면, 아예 사람이 근본부터가 달라져 버린다. 되려 교만이 하늘까지 닿아서, 그 눈에 뵈는 게 없게 된다.

해방 이후 좌우의 싸움이 얼마나 극렬했던가! 그래서 남과 북이 서로 찢겨서,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얼마나 많은 동족상잔의 피를 흘렸던가?

녹두알갱이만 한 남한땅을 두고도, 그 가당찮은 이념 때문에, 남북이 갈라서게 되었음에도, 그래도성이 덜 차서, 또다시 동서로 갈라서고, 또 좌우로 나뉘어서, 民主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마치아귀들의 아비규환처럼, 년년세세 권력의 암투가 얼마나 치열한가! 

모든 적폐를 正當化하는 권력 앞에, 正義란 그저 권력의 侍女에 불과할 뿐이다. 말 그대로 '내로 남불'이다. 내가 하면 그른 것도 옳고, 남이 하면 바른 것도 그른 '적폐(積弊)'가 된다. 또한, 권력의 탑을 쌓을수록 권력의 종이 되어, 도둑이 술병에 독이 든 것을 모르고 마시듯,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면서, 죽는 길을 자초하고 있다. 

까닭 없이 갑작스레 큰 돈이 생기면, 으레 경계를 해야 하고, 분수에 넘치게 권세의 자리가 주어지면, 나에게 합당한 것인가? 하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뒤 돌아보아야 할 것에도, 권력의 자리를 마치망나니 칼 쓰듯, 쥐고 흔들어 댄다. 

길을 가다가 독사를 만나면, 누구나 머리카락이 쭈뼛하지 않을 사람이 있는가? 이를 알라! "황금과권력은 필연 독을 품은 독사라는 진리를!" 독사를 보면 피해야 하고, 오직 땀 흘려 얻은 것만이 진정 내 것임을 알고, 이제 겨우 첫발을 내디딘 새해엔, 주어진 선한 양심과 주어진 자연의 섭리를 따라, 진정한 땀방울로 얻어진 것만이, 땀의 대가임을 알아, 자연과 인간애가 어우러져, 코로나를 극복하고, 새 지평을여는, 신기원을 열어주길 권력지향 주의자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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