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오월을 보내며!
나는 서른 살에 목사가 되어 공자가 말한 '30세 입(立)'이란 말처럼 그후 50년을 살아 왔다. 하지만 이렇게 한 평생을 주의 종으로 살아 온 삶과는 결이 전혀 다른 그래서 내가 지금 쏟아내는 말이 마치 '뚱딴지'처럼 오십년 목회자의 말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속내 말을 하려 한다.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누구나 선천적으로 타고난 조상들의 가풍이나 얼과 같은 구습에 젖게 되는 것은 태생적으로 피할수 없는 운명이지 싶다. 나로 예를 든다면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나는 몸이 너무 병약해서 아프지 않은 날보다 병치례 하는 날들이 더 많았었다. 내가 병약한 원인이 젖이 부족했다든가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때엔 이에 대한 의료적인 처방보다는 당시의 의술이 이에 미치지 못하여 대부분 민간 요법이나 무당을 찾거나 절 혹은 토속신앙에 의탁 했던 예가 더 많았었다. 그래서 자연 샤머니즘 같은 것에 빠지게 되었다. 내가 태어난 가정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어린 내 생명의 건강도 병원과는 아주 거리가 먼 '절(寺刹)이나 무당에게 맡기는게 다반사였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지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시대에 이미 우리나라에 굳건히 터를 잡고있었다.
그래서 불교가 삼국시대 때 부터 지금까지 우리 민족이 걸어온 삶과 깊게 연관 되어서 천년의 오랜 역사와 더불어 애환을 함께 하여 왔다. 그래서 절에 가 보면 대웅전의 부처만 있는게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무수한 토속 신앙들이 사찰안으로 스물스물 들어와서 삼신당 (三神堂)과 북두칠성과 칠성각이 들어 오고 산신령을 비롯한 각양 무속 신앙들이 들어와 부처를 모신 절간이 아니라 온갖 토속 잡신들이 사찰을 어지럽혀 왔다. 세속의 때를 씻어내야 할 사찰이 세속과 야합하는 온상지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나도 경주 김씨 가문의 오랜 기다림 끝에 불알을 찬 5대 종손으로 태어났으니 얼마나 소중한 자식이었을까? 그런데 귀하게 태어난 아이는 몸값을하느라고 병치레를 많이 한단다. 그래서 나는 아주 어릴 때 다시 말하면 부처가 누구고 절간이 어떤 곳인지도 전혀 모를 때에 엄마 품에 안겨 절을 자주 드나들면서 그 때에 내 인생을 부처님에게 맡겼단다.
그 어린 시절에 내 인생을 나의 意思와는 전혀 상관 없이 절간에 의뢰했다고 해서 그때 내 이름을 '팔근'이라고도 불렀단다. 내가 어려서는 몸이 허약해서 사주(四柱) 팔자(八字)라고 부르는 것을 점쟁이 들이 호기심 많은 인생들에게 아주 매력적이었 다. 장차 내가 어찌될까? 앞 일을 가름하기 어려운 인생문제를 인간들은 타고난 운명을 풀어보려는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 사주팔자(四柱八字)였다. 내가 스물 두살 때 서울 삼양동 하얀수염의 도사에게 내 장래를 물었더니 나의 평생사주를 약 일천자에 가깝게 써 주었다. 그 글가운데 이런 글 귀가 있었다. "二十四歲 大科級第 萬人仰視" 근데 난 이 나이에 수면제 50알을 먹고 죽어있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타고 난 숙명적인 것이 있다. 하늘이 하는 일은 부잣집에서 태어나기도 하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이것을 인간이 바꿀수는 없다. 태어난 시대 배경도 그러하다. 석기시대에 태어 날 수도 있고 현대 문명인으로 태어날수도 있다. 사람들은 곧잘 부귀영달을 얘기 한다. 옛날 신분제가 뚜렷했던 시대에도 그러했지만 비교적 신분제가 헐렁했던 고려 중기 때에 정중부를 시작으로 이의민 경대승에이어 최충헌 가문까지 장장 100여년에 걸친 권문세가의 장기 집권의 세월 동안 오로지 武人들의 세상이었다. 이때 최충헌의 가노( 家奴)였던 만적과 망이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며 '천민 해방의 난' 즉 신분제 타파의 난을 일으켰으나 亂을 일으키는데 그쳤다. 그래서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고려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이처럼 문인가문 출신들 외에는 대부분이 천민들 출신으로 글을 모르는 문맹들이었다. 그중에 무예가 출중한 무인들이 기껏해야 문인들의 호위 무사로 진출하는 것이 유일한 출세의 길이었다. 그래서 설혹 무인으로 대장이 되어도 문인들의 호위 무사일뿐 국사의 모든 것은 문인들의 독무대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무기는 잘 쓸줄 알았지만 글을 깨우치지 못한 까막 눈이었기 때문에 문인들로부터 무시를 받은 설움은 실로 대단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문인들에게 쌓인 분노와 수모가 폭발한 것이 바로 '정중부의 난'이다. 다시 말하면 이름없는 평민출신의 무인들이 득세를 하여 마침내 이들이 왕을 척결하고 새 왕을 옹립하는 등 정권을 오롯이 하여 최충헌(崔忠獻)의 때에 그의 가노( 家奴) 였던 만적과 망이 망소와 같은 천민들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며 신분타파를 외치며 노예해방의 혁명을 일으켰다. 신분제로 부터 해방이 되면 그래서 신분이 상승되면 행복해질까?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참 자유를 갈구하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조선 시대에 비해 신분제도가 엄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정계진출에는 명문가문 이래야 했다. 물론 개천에서 용나 듯 드물게 좁은 문이 있긴 했지만 무인들이 득세할수 있는 시대가 바로 고려시대였다.
그러나 한편 고려시대에는 사대부가 없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그 일례로 자유분방했던 고려때의 도공들이 만든 '고려청자'를 보라!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비천한 신분으로 전락한 도공들이 만든 '이조 백자'와 이를 비교해 보시라! 임진왜란 때 천대받던 도공들을 왜인들이 보고 그들을 일본으로 데리고 가서 귀족처럼 예우했다. 귀천을 가리지 않고 자유분방했던 고려 때의 고려 청자는 천년의 역사를 머금고 있으면서 마치 방금 빚은 양 그 빛깔이 영롱하다. 그 시대 상황에 그럴수밖에 없는 황당한 굴레나 당대의 여건이나 신분적 조건 때문에 운명이자 숙명이기도 했겠지만 절대 바뀔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아시라! 사람만이 아니라 나라에도 운명이나 숙명과 같은 태생적인 것들이 있다. 운명론적으로 보면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세계에서 팔자가 가장 사나운 나라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오랜 역사를 통해 우리나라는 중국대륙에 반도로 붙어 있어서 중국세력과 끊임없이 부딛치거나 그 세력에 복속되어 자주성을 잃어버린 시대가 더 많았었다. 삼한시대를 지나 중국 만주 벌에 기반을 둔 부여나 그 후에 평양에 기반을 둔 고구려가 마침내 중국대륙의 주인이 되어 천하를 호령했다. 그런데 같은 고조선의 뿌리에서 나온 신라 백제 고구려는 옛 朝鮮의 한 뿌리였음을 자각하고 서로 융합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실제로는 그 반대로 신라가 당시 중국 唐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하고 이어 백제를 멸하였다. 그후 우리 조선 민족은 그 후유증으로 신라는 겨우 백제의 옛땅만을 차지했을 뿐 고구려의 광할한 중국 만주 벌은 唐에게 모두 잃고 말았다. 그후 대조영(大祚榮) 이 중국 측천무후 때 고구려의 유민들을 이끌고 돈화(敦化)부근에서 '발해'를 세워 고구려의 모든 옛 땅을 수복하였다. 이처럼 발해는 唐과 신라의 연합군에게 패한 고구려의 유민들이 합류하여 중국 송화강 이남과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되찾았으나 애석하게도 중국 요(遼)에게 나라를 잃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중국은 우리민족의 발상지이자 우리의 역사인 고조선과 부여,그리고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모조리 자기들의 역사속에 편입시켜 우리의 역사를 송두리째 침탈하고 있어도 우리는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을 뿐이다. 이토록 우리는 선린 (善隣)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수천년 동안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끊임없이 침탈과 약탈을 당하여 이루 말할수 없는 수모와 전란에 부대끼며 살아야 했다. 일본 또는 왜구는 중국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해양세력으로 그들로 부터 입은 우리의 크고 작은 피해는 이루 말할수가 없다. 당시 우리는 그들을 '왜구'라고 불렀다. 일본 섬나라에서 생산되는 곡물은 언제나 충분치를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동해안을 비롯한 모든 해안을 돌며 무시로 약탈행위를 일 삼았다. 그중에서 가장 큰 전쟁은 '토요토미 히데 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이다.
그들은 "중국의 명(明)을 치려하니 길(道)을 열어 달라"고했다. 그것은 우리 조선이 중국 明에게 예속되어 있음을 익히 알고 하는 술수였다. 중국이 김일성과 모의한 6·25 남침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의 한 단면일 뿐이다. 오천년(五千年) 조선의 유구한 역사에서 동으로는 해양의 왜구에 의해서 대륙으로는 중국 중앙에서 정변이 일어 날 때마다 우리는 무수한 댓가를 치러야 했다. 또한 왜구들의 침략은 헤아릴수 조차 없이 많다. 나라를 통째로 들어 이사를 갈 수 있다면 정말 이사를 가고 싶은 숙명을 안고 살아 온 것이 우리 민족의 애환이었다. 그 숙명 중에 가장 가혹했던 것은, 첫째로 중국 본토를 거머 쥐고 있는 민족 즉 漢族만이 아니고 어느 민족이건 언제나 중국의 중앙을 잡게되면 중국의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우리의 주적이 바로 일본이었다. 임진왜란(제1차 중일전쟁)이 그랬고 청일전쟁(제2차 중일전쟁.) 그리고 무력에 의한 '한일합방' 이 그러하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일제에 의해 36년이라는 기간동안 나라 없는 설움과 우리 말과 우리의 글인 한글과 우리의 姓과 우리의 이름까지 빼앗겨버린 엄혹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그런데 요즘 대한민국 설립당시 일본에 동화되어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친일파와 그 아류인 뉴라이트들이 독립기념관장이 되는 등 나라가 온통 왜색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요즘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바로 연결되는 숙명적인 관계는 수천 년간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그래서 약소국의 설움으로 조선은 생존 전략으로 사실상 무력을 포기하고 스스로 중국 밑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바로 약소국의 설움이다. 그에 따른 피해나 수모 또한 전쟁 못지 않게 고통스러웠다. '처녀들을 바치라' '금을 바치라' '말(馬)을 바치라'는 등 조공 요구는 끝이 없었다. 바치라는 용어가 매번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물산이 부족한 나라가 조공을 바치다가 나라 살림이 거덜 날 지경일 때도 있었다.
이 가혹한 조공을 피하고자 조선은 중국 조정을 지혜로서 코를 싸 쥐게도 하고 혹은 말로 혹은 지혜로 그 속내를 꺽기도 했다. 조선에 오는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서 금과 은을 내놓으라며 부린 행패는 끔찍한 재앙이었다. 중국이 러시아의 연해주 진입을 막는다며 조선군 파병을 요구하고 조선군이 총을 잘 쏘자 총을 다 뺏고 무장을 해제해버린 것이 때국놈들의 근성이다. 근세 개항기에 조선이 미국에 외교관을 파견하자 일본 뿐아니라 靑國도 이를 가로 막고 미국 대통령도 만나지 못하게 방해했다. 어떤 때는 20대의 중국 애숭이가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 대신들을 때리고 조선 왕 위에 군림하기도 했다.
중국이라는 숙명 속에서 우리는 한 순간도 민족 자존감을 찾지 못했다. 이러한 구한 말에 조선에 들어 와서 조선 땅에 뼈를 묻은 미국 선교사들을 아시는가?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과 같은 분들이야 말로 바로 십자가 사랑의 예수로 조선에 온 것이다. 생각해 보라!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선교사로 왜, 무엇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못살고, 가장 더럽고, 가장 희망 없는 나라에 와서 자발적으로 자신과 가족의 모든 것을 바쳐 스스로 희생의 외 길을 걸었을까? 이들이 세운 학교와 병원은 지금도 우리나라의 한 뼈대를 이루고 있다. '로제타 홀 여사'는 가족 전체가 한국에서 봉사하다가 전염병으로 사랑하는 남편과 딸을 잃었다. 가족 둘을 한국 땅에 묻고도 한국을 떠나지 않고 “한국에서 더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고대병원 이대병원을 세우는 등 43년간 봉사하다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죽으면 한국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했다. 지금 서울 양화진엔 홀 여사와 아들 부부까지 5명이 묻혀 있다. 고개가 숙여지고 목이 메인다.
얼마 전 어느 일간지에서 앞서 소개한 홀 여사를 보도했더니 어느 분이 이런 의견을 보내 주었다. "우리는 중국과 2000년 이상 관계를 맺어왔지만 미국 선교사들과 같은 도움을 준 중국인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내가 아는 장로님은 한국 페인트 계에서 제 일인자다. 그분이 중국 선교의 일환으로 중국에 한국 페인트 공장을 두 곳에 세우자 중국인들의 태도가 돌변하여 전과 후가 너무도 달라 결국 두 공장의 소유권을 모두 포기해야 했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그들 특유의 노회와 억압과 행패만이 기억날 뿐이다. 그런데 우리와 불과 100년 정도 관계를 맺은 미국은 세계 변방의 이 나라에 말로 다할 수 없는 도움을 주었다. 육이오 전란 때 우리와 함께 피 흘려 싸워 대한민국을 되찾아 주었고, 식량을 주고, 기술을 주고, 한술 더 떠 우리를 미국으로 데려가 가르치기도 했다.
물론 미국 세계 전략의 한 부분이기도 했겠지만 중국과는 태생적으로 다른 "하나님 사랑에 의한 인류애"라고 하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육이오 전란 때 미국 '맥아더'는 압록강 유역까지 거의 수복했을때, 중공이 인해 전술로 나올 기미를 보이자 맥아더는 중국 만주에 핵을 투하할 것을 제의 했지만 '트루만'이 이를 반대했다고 한다. 만약 맥아더의 건의가 받아 들여졌다면 아마 우리는 그 때에 우리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이루었을 것이다. 천려일실의 통한이 가슴에 사무친다. 우리가 지금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 하게 된 것도 순전히 우리 국민들의 피와 땀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우리가 마침내 중국에서 벗어나 미국 선교사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났고 그리고 또 미국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늘의 한국은 과거와 차원이 근본적으로 다르게 세계에 우뚝 서 있지만 그러나 중국은 아직도 지난 날의 구태를 벗지 못하고 오늘의 한국과 맺은 관계를 과거 조선과 맺었던 관계로 착각하는 구태의 근성에 아직도 함몰되어 있다. 그 예로 그들은 한국 대통령 특사를 중국 지방 장관이 앉는 자리에 앉혔다. 몇해 전 시진핑은 미국에 가서 미국 대통령에게 “한반도는 중국의 일부였다”고 주접을 떨기도 했다. 참 후한무치한 인간이다. 민주주의 나라에 가서 전제국의 온갖 만행을 저질렀던 그들이 그것을 자랑이라고 그 교활한 세치혀로 우리 대한민국을 감히 폄하한 것이다. 그는 주한 중국 대사로 부국장급 정도의 하급 관리를 계속 보내고 있다. 그 중국 대사가 얼마 전 “한국이 중국에 betting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고 했다. 후회? 참 소가 웃을 일이다. 후회는 우리가 아니고 중국일 것이다.
대한민국은 지난 날 굴종의 역사에서 벗어나 아주 잘못된 역사관을 지닌 중공에 대하여 지극히 정상적이고 대등한 우호 관계를 맺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결코 중공에 ‘베팅’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미국에 베팅한 적도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과 미국은 서로가 베팅을 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유와 민주주의에 의한 베팅이다. 이 베팅으로 한국은 팔자를 고쳤다. 수천년의 악몽에서 깨어나게 된 것이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처럼 우리가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이 아직도 우리가 지들의 제후국으로 돌아오게 될거라고 믿는다면 그 몽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입은 언제나 바름과 굴절을 내 뱉는다. 그러나 물고기는 언제나 입으로 낚인다. 사람도 언제나 입방정으로 낚인다.
【종그니칼럼】오월을 보내며!
나의 벗 중에 황 순철이란 친구가 있다. 젊은 날 나와 司試 同門이기도 한 이 친구는, ㅇㅇ법대 출신으로, 처음 중학교에서 선생으로 있으면서 사법시험준비를 하는 것은, 선생으로 학생들에게 떳떳한 처신이 아니라고 여겨, 퇴직한 후 자비량으로 공부하다가, 연로한 부모를 모시게 되면서, 초등학교 문지기로 월급 75만 원을 받아, 그중 50만 원은 모교 법대생 두 후배 생활비로 뒷바라지하고, 남은 돈으로 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친구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로 어쩌다 한번 찾아가면, 마트에서 방울토마토 혹은 과자 한 봉지를 사서 날 대접했다. 지극히 검소한 그의 생활이 삶 속에서 진솔하게 묻어났다. 그가 거처하고 있는 집을 가보면, 집안에는 책으로 가득했다. 낡은 책들도 많아서 이런 낡은 책들은 이제 버리라고 하면, 책은 그 안에 담겨 있는 글을 읽는 것이지, 겉을 보는 게 아니라며, 핀잔을 주곤 했다. 학교에서도 초등생들의 손발이 되어 주고, 놀이 동무가 되어 주는 모습을 보면, 한없이 천진난만한 친구요, 한국의 페스탈로치 였다.
예전에 내가 무의탁 양로원을 운영하던 시절, 이 친구가 이따금 시간을 내 찾아와 주곤 했는데, 채소밭을 매고 있던 초여름 어느 날, 예고 없이 찾아와서. 그때 나는 밭에서 김을 매서 잡초를 밭 언덕에 버렸더니 그 친구는 정성스럽게 잡초를 캐서 밭 언덕배기를 호미로 파고서 잡초를 심곤 했다. 내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밭에 난 풀도 우리 눈엔 잡초이지만, 이 땅에서 함께 살라고 조물주가 만드신 고귀한 생명을, 인간의 이기심으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말자."고 했다. 다시 말하면 농작물도 풀과 함께 자라게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친구의 진순 무구한 말이 너무 맘에 와 닿아서, "네가 목사 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동안 나는 밭에 난 풀은 당연히 뽑아야 할 잡초로만 보았는데, 그는 같이 살아야 할 생명체로 본 것이다. "생명을 존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 "지금도 나는 그의 고매한 품성에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이러한 그가 내 친구임을 한없는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그는 달걀을 인간이 식용으로 먹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그런 면에서 우유는 송아지의 몫이지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처럼 아둔한 나를 항상 깨우쳐주던 그런 친구가, 지금 알츠하이머로 고생하고 있어 가슴 아프다. 이 친구는 자연을 비롯한 모든 생물이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거라며, 이를 훼손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들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한때 좋아서 기르던 애완견도 기르다가 싫증 나면, 아무런 마음의 가책도 없이, 마치 쓰레기 버리듯 내다 버려, 산야엔 들개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어, 이기적인 인간들이 재앙을 키우고 있다. 이게 어디 반려동물뿐이겠는가! 자기가 낳은 어린 자식도, 늙은 부모도, 마다하고 버리는 세상이 되었다. 버리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 존엄의 양심까지 버리는 그것이 문제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삶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순전히 자기 편의의 위주로 눈에 보이는 현실의 이익만을 앞세워 사는 자들이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건네야 할 피안(彼岸)도 없고, 올라야 할 지고지순의 세계도 없다.
성경 창세기에 이삭의 장남 '에서'가 나온다. 그는 사냥을 나갔다가 아우 야곱이가 쑨 팥죽에 꽂혀, "지금 당장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장자권이 밥 먹여 주냐."며, 하나님의 축복의 그릇인 장자권을 팟죽 한 그릇과 바꿔버렸다. 후에 야곱은 하늘의 축복을 고스란히 받게 되어, 그의 이름도 야곱에서 이스라엘이란 승리의 이름으로 하늘의 별수와 같은 축복을 받게 된다. 이처럼 하늘로부터 오는 축복은, 하늘의 뜻을 따라 사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임에도, 대부분의 사람은, 이서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육신이 원하는 것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 사람이 길을 걸어도 작은고개 큰고개가 있듯, 인생길도 이와 다를 바 없는데도, 사람들은 크든 작든 연단의 고개 넘기를 싫어한다. 사귀다 기르다 싫증 나면 버리고, 일도 직장도 사업도 조금 힘들면 그만두고, 무조건 쉽게만 살려고 한다. 그럴지라도 자신을 이제 별 볼 일 없는 자라고 비하하지 마시라! 만년 청년처럼 사시라! 생각을 바꾸면 인생의 파노라마는 얼마든지 활짝 펼쳐진다.
산에 나무가 많은 것을 山林이라하고, 서재에 책이 많은 것을 書林이라한다. 며칠 전 TV에서 공부하는 80이 넘은 노익장이, 십 년 동안 독학으로 영어 공부하는 것을 보았다. 이 노익장의 영어 실력은, 미국인과 소통하는 데 전혀 불편이 없었다. 그래도 영어공부가 부담되면, 지난날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하면 얼마나 재밌겠는가! 이제 시작이다! 시작이 반이다! 나는 인터넷 장님이지만, 인터넷 카페에 열심히 들어가 보시라! 수시로 친구들과 어울려 여행도 하시고, 즐거운 인생을 만들어 보시라! 바다에, 강에, 산에, 들녘에 대자연의 벗들이 얼마나 많은가! 서림에 책이 있듯, 푸른 하늘이 있고, 밤이면 달이 있고, 별이 있고, 우주 대자연이 나를 에워싸며, 응원하는 벗들이 온통 나를 휘감고 있는데, 왜 외로움을 만들며 사시는가? 늙어 수중에 있는 돈도 쓸 줄 모르는 구두쇠는, 인생을 즐길 줄도 모른다. 어떠신가요? 지금 당신의 삶은 어느 곳에 와 있는가요? 하늘은 본래의 나, 꼭 있어야 할 나를 찾기를 바라신다. 오월의 마지막인 오늘! 내 삶을 복기하듯 되돌아보며, 세상에 묻혀 잃어버린 나를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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