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태복음 6장 12절, 18장 21절-35절

자주 우리 기독교인들은 주기도문이라고 하여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문으로 기도한다. 그런데 주기도문을 드릴 때마다 가장 부담스러운 항목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라는 부분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6장 9절에서 13절까지로 해서 그의 기도문을 끝냈으나, 바로 6장 14절과 15절에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라고 죄 용서를 반복해서 언급했다. 이 죄 용서 문제를 명쾌히 해결하고 주기도문을 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처럼 주술의 종교가 아님으로 확실하지 않은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주술처럼 암송하지 않아야 한다. 이 죄 용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용서, 나의 용서”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려 한다.

하나님의 용서를 이해하려면 마태복음 18장을 잘 이해해야 한다. 18장은 하늘에서 큰 자는 겸손이 체질화된 어린아이들이라고 하시면서, 남을 실족하게 하지 말라는 경고로 시작한다. 18장 6절에서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 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라는 무시무시한 말씀도 했다. 남을 실족하게 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라고 했는데 성도들의 우리 일상생활에서 거의 적용하지 않고 있다. 즉 교회나 성도들 가정 안에서도 형제자매를 정죄하고, 미워하고, 패 가름함으로 많은 형제자매를 서로 쉽게 실족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네 한쪽 손이나, 네 한쪽 발이나, 네 한쪽 눈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버리고, 빼어버리고, 병신이 되어서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한 말씀을 남의 일 같이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간다.

우리 인간에 향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11절에는 밝히고 있다. 성도가 실족하고, 형제들을 실족시켜 구원받지 못하는 주된 원인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우리 모든 인간관계에서 파생되는 죄 용서 문제로 돌리고 있다. 형제를 구원 못 시키는 것은 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주지 않는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구체적으로 죄 처리하는 방법을 예로 말씀하셨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면 개인적으로 만나서 죄 용서받도록 권하고, 안되면 한두 증인과 같이 가서 권하고, 그래도 안 들으면, 교회에서 그 죄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라고 하시면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라는 죄 사함의 원리를 18절에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죄 용서하는 사면권이 있음을 확인해 준 말씀이다. 우리 스스로 형제나 이웃 간에 죄의 매듭(쓴 뿌리)을 다 풀어 해결하라는 것이다. 이 말에 즉각적으로 베드로가 21절에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22절에 “네게 이르노니 일 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 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라고 무한대로 용서하라고 했다. 이어 탕감받은 종의 비유를 23-35절에 제시하시며 우리 성도는 무한대로 용서함이 마땅하다고 말씀히셨다. 비유인즉 천국의 임금이 일만 달란트, 한화로 약 이십조 원, 정도 빚진 종(opheiletes, 옵헤일레테스)에게 “다 갚으라.”고 하니 엎드려 절하며 “다 갚으리이다.” 하여서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완전탕감하여 주었다고 했다. 탕감해줬다는 동사, 압헤켄(apheken)은 직설법, 부정과거, 능동태, 3인칭, 단수로써 그는 완전히 탕감해 줘버렸다는 뜻이다. 그 종은 그 엄청난 빚을 깨끗이 탕감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 이십조 원을 탕감받은 자가 오백데나리온, 약 3천만 원 빚진 동료를 만나매 목을 잡고 “빚을 갚아라”라고 했다. 그 동료도 “갚겠으니 기다려 달라.”고 엎드려 간구하였으나 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런데 이 사실을 그 탕감해 준 임금이 듣고, 그를 불러 말하데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라고 하며 노했고, 결론적으로 35절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네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하고 끝냈다.

이 비유는 인간의 상식으로 상상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액수 약 20조원이나 되는 빚의 탕감사건이다. 한 종이 20조원이나 되는 돈을 임금에게 빚졌는데 자기는 한 푼도 갚지 않았는데 임금이 완전히 탕감해줬다. 그런데 이 종은 그 탕감받음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것인지 몰랐던 것 같다. 알았다면 “아 나는 자유인이다. 빚 탕감받은 이 날 참 기쁜 날이다. 집 식구를 다 모으고 이 사실을 전하고, 잔치를 베풀며, 자기에게 빚진 자들을 다 불러 자기의 탕감사건을 간증하면서 빚진 자 모두의 빚을 다 탕감해 주고, 이 탕감의 감격을 절대로 잊지 않고 매일 매일 내게 빚진 자들은 탕감해 주며 살았어야 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방금 탕감받고 돌아서서 나오는 그 순간 그 많은 돈을 탕감받았다는 선포도 없었고, 그 기쁨과 고마움을 곧 잊어버리고 만다. 마침 돌아오는 길에 3천만 원 빚진 친구를 만나 “빚을 갚으라.”라고 하니 엎드려 간구하여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라고 했으나 옥에 가두어 버렸다. 반듯이 탕감해줬어야 했는데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 성도들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모두 이런 사건투성이이다. 실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확신하며 주기도문을 드리고 있느냐?라고 뭍고 싶다. 다시 말하면, 우리 성도들 서로 서로가 죄 사해주고 죄 사함 받는 것을 삶을 실천하고 있느냐?라는 것이다. 몇 가지 의문점에 답을 찾음으로 이 용서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한다.

첫째, “나를 죄인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죄인이 되었다는 것인가?”

법원에 가면 모든 죄수가 자기는 죄가 없다고 부정하는데 교회에 가면 모든 성도는 내가 죽을죄를 지은 죄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성도들 대부분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어떻게 지었는지를 물으면 잘 모른다고 한다. 예배당에 가면 모두가 죄인이라고 하면서 울고 가슴 치며 기도하니까 나도 그렇게 하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어떻게 지었는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드니,”라고 했다. 여기에서 헬라어 헤말톤(hemarton), “죄짖다.”라는 동사는 직설법, 부정과거, 능동태, 3인칭, 복수인데 “모든 사람이 죄를 직접 자기가 능동적으로 죄를 지었다.“라는 말이다. 사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죄를 범했다고 알고 있는데, 주어가 3인칭 복수로 모든 사람(아담)이 주어가 되어 죄를 능동적으로 법했다는 선언이다. 이는 인류의 조상 아담이 죄를 범할 바로 그때 인간이라는 존재는 모두 같이 그 죄를 스스로 자발적으로 범하는 일에 참여했다는 말이 된다. 즉 인간이라면 모두 그 죄를 범하는 일에 능동적으로 동참했다는 말이다. 아담 혼자서 지었는데 그 죄를 후손들은 수동적으로 덮어쓴 것같이 죄가 전가되었다는 말은 틀렸다. 여기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는 말씀은 인간이라면 모두 그 죄 짖는 일에 직접 스스로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내 죄 문제를 아담에게 떠넘길 수 없게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 죄 짖는 일에 직접 가담하여 죄를 범한 것이고, 태생적으로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한 죄인인 것이다.

둘째, “내 죄 값이 얼마나 된다는 것인가?.”

로마서 6장 23절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다. 이 말씀은 죄를 범한 사람의 죄 값으로 사망을 언도해다고 했는데, 이 사망이라는 죄값은 과연 얼마쯤 된다는 것인가?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들의 죄 값을 치풔 주셨다고 요한복음 3장 16절에 말씀하고 있다.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 스스로가 인간의 죄 값을 치루시려고, 죄가 없으신 그의 외아들 예수를 우리의 죄를 뒤집어 쒸워서 십자가에 매달아 피를 흘려 죽여서 속죄의 희생 제사물로 삼으신 것이다. 그 희생제사로 죄 깞을 완전히 해결해 주셨다고 했다. 내 죄를 사해주신 하나님의 그 희생 제물의 값이 비유에서는 일만 탈란트, 약: 이십조 원이라는 것이다. 그 죄 값은 인간으로서는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어 사망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고. 그 20조원이 내 죄값, 사망 값이라는 것이다.

셋째, 내 죄 탕감사건이 무엇이며, 내가 어떻게 탕감받았는가?

하나님은 내 죄를 탕감해 주는 길을 태초부터 계획하셨고 예언하셨고, 실행하셨다. 이 하나님이 일으키신 탕감사건이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건이다. 그 사건은 죄인인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전적인 값없이 받은 은혜의 사건이었다. 나는 내 죄로 사망할 수 밖에 없었는데, 내 입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며 예수님을 내 삶에 영접하는 사건을 가짐으로 해서, 내 죄는 완전히 탕감받았고, 영생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자유인이 된 것이다.(롬 10:9-10).

넷째, 고백한 죄는 용서함 받았음에 확신을 가지면 되는가?.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내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으면서도 그 죄를 깨끗이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갖지 못한다. 즉 강단에서 목사님이 죄를 회개하라고 하면 항상 옛날에 다 회개한 죄를 다시금 울며불며 반복해서 회개하는데, 그것은 말씀을 불신하는 행위요, 하나님의 용서를 안 믿는 자세다.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주기도문 귀절이 부담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 고백한 죄는 깨끗이 사함 받았음을 믿어야 한다.

다섯째, “하나님의 자녀인 내게 전적으로 죄 사면권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예수는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죄 사면권이 있지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해주는 죄 사면권이 없다.”고 믿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에게는 죄 사면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태복음 6장 14절에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이라고 하셨다. 빚으로 따지면 그 빚을 탕감해 주라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는 권한도 없는데 죄를 사해주라고 했다면 그것은 모순된 말씀이다. 사실 빚 탕감 비유에서 주인께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받은 그 사람은 자기 동료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남의 죄를 사면하는 사면권도 위임되어있다는 것을 확인해 준 말씀이다. 사도신경에도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라고 한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 성도는 “죄를 사하여 주는 것과 죄 사함을 받는 것을” 믿고 고백하면 된다. 우리 성도들은 죄 용서권이 있음을 믿고 서로가 서로에게 죄지은 자를 다 용서 해주어 죄 없는 자유인으로 살아야 한다.

여섯째, 내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8장 18절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고 하셨고, 요한복음 20장 23절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고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라고 하셨다. 성도 간에 아무리 큰 죄라도 서로 사하면 사해진다는 약속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용서해 주면 하늘에서도 우리 죄를 용서해 준다고 했어나, 우리가 풀지 않으면 하늘에서도 풀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 사이의 죄 용서권을 성도인 우리에게 모두 위임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만민을 구원하려는 것이다. 탕감받은 우리가 탕감해 주어야 하늘에서도 탕감 할 수 있다.

일곱째,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내가 죄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 형제는 실족하게 되고, 나도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깊은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 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하게 되기를 원치 않는데 우리가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그릇 치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예배소서 4장 32절에는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라고 명했다. 엄청난 권한의 주어짐이고 축복의 명령이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탕감, 용서를 바로 깨닫는다면 서로 용서 못 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특히 한국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용서가 어려운 한(恨)라는 벽이 있다. 우리 민족은 한(恨) 맺힌 민족이다. 이 한 맺힌 사연은 원수 갚음으로 끝내는 것이다. 성도라며 하나님의 용서를 깊이 감사하고, 내게 죄지은 자를 다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용서해 줬다고 하면서 절대로 잊지 않고, 가슴에 한으로 담아두었다가 기분 나쁘면 수시로 재탕 삼탕해서는 안 된다. 죄지은 자를 사하는 것이 마땅한데 사하지 않으면 사함을 받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죄 사함받는데 필요한 요소가 무엇인가?

죄 사함을 받으려면 자기의 죄에 대하여 인정과 용서를 구체적으로 고백하는 회개가 있어야 한다. 내가 남에게 죄지은 것이 생각나거든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그 상대편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6하원칙에 따라 말로써 고백하여 그 고백한 죄를 용서 받아야 한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그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할 때는 일흔 번씩 일곱 번씩이라도 용서해 주고 용서받는다는 것이다. 자기가 엄연히 남에게 죄를 저질러 놓고도 상대방에게 죄를 자백하여 용서를 구하지도 않은 채 자기 혼자 스스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는 자기의 죄는 다 사함받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용서함을 잘 못 적용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 한국 영화 “밀양”이 있다. 한 악한이 어린 남자아이를 납치해서 돈을 요구하다가 결국 그 아이를 죽인다. 그 후 그는 잡혀 형을 언도 받고 감옥살이를 하는데 아들을 잃고 방황하든 어머니가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마침내 그 아들을 죽인 죄수를 용서해 주려고 형무소를 찾아가 그 죄수를 면회하게 되었는데, 의외로 그 죄수가 용서를 빌기는커녕 매우 행복한 얼굴로 “나는 여기 감옥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고 내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용서받았다. 그래서 현재의 나의 삶은 천국 생활과 같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있다. 용서해 주기로 마음먹고 찾아간 그 어머니에게 그 죄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용서받았다.”.라고 함으로 그 어머니는 혼란스럽고 미쳐버릴 것 같이 된다. “누가 용서를 해 줬는데 용서를 받았다고?”라고 하면서 그 어머니는 기독교를 영원히 떠난다. 지금 교회에서 죄 사함의 문제가 이런 식으로 처리된다면 교회에 남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구체적인 회개를 피해자 앞에서 고백하고 용서받아야 실질적인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맺는 말

우리가 우리 죄를 용서하는 것이 만민의 구원 문제가 달려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하라고 했다.

성도들이여!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갚을 길 없는 죄를 다 탕감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죄 사면권도 주시면서 용서를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헤아리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용서해 주라고 했다. 나의 그 어마어마한 죽음에 이르는 죄의 값을 탕감해 주신 하나님의 용서를 항상 감사하며. 형제가 어떤 죄든지 용서를 구하면 깨끗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자기에게도 성령님의 감화로 생각되는 죄가 있으면 상대편에게 사실대로 고백하여 용서함 받아야 한다. 더 이상 죄의 노예로 살지 않아야 하며, 죄로 생긴 한(恨)까지도 깨끗이 용서하고 해결하자. 서로 용서함으로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우리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서 항상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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