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본문은 서언의 1:12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매우 잘 설명해준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은 자기가 보낸 아들을 믿지 않는 유대인을 버리시고 그를 믿는 이방인을 자녀로 선택하신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성경에서 가장 흥미있는 대목 중의 하나이다. 이곳에서 하나님 아들의 “은혜와 진리”가 동시에 가장 강렬하게 드러난 것 같다(1:14-17).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매우 인상적으로 드러나므로,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가로막는 모든 벽을 허물고 그분을 나의 거룩한 신랑으로 맞아들여야 한다. 인간에게 거룩함 만큼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 것은 없다. 거룩함은 예식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며 죄인과 하나님을 연결하는 끈이다.
이 보도를 당시 역사적 배경을 알고 읽으면 이 대화가 훨씬 생동감을 준다. 자세한 해설을 원하면 게르하르트 마이어의 “요한복음”이나 필자의 설교를 참조하기 바란다. 이곳에서는 서언(1:1-18)과 관계되는 중요한 점만 간추려서 소개한다.
이곳에서는 만남이 주제이다. 믿음이란 만남에서 시작하여, 끊임없이 만남을 통해 내가 변화되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이다. 이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교제가 시작하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독생자의 영광을 보게 된다(1:14). 또한 이 만남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게 된다(1:13).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1:12). 이 관계는 심지어 신랑과 신부의 결합으로도 표현된다(3:29). 이 만남은 인격적이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거룩함이 기본이 된다. 이 만남을 통해 그리스도는 죄에 찌든 죄인을 거룩함으로 끌어올리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감정적으로만 이해하면 안 된다. 예수님은 음란한 자매에게 인간적인 동정을 보이신 것이 아니라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 고립된 한 죄인에게 말을 거신 것이고, 그녀의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경배의 소원을 불러일으켜, 그 경배의 대상이 남자도, 가족도, 재산도, 명성도 아닌 메시아라는 것을 가르치시고, 그 메시아가 자기라는 사실을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불행한 여인을 진정으로 경배하는 자로 만드시고, 그녀를 모든 잘못된 경배의 대상으로부터 해방하셨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날 때까지는 각자만의 경배 대상을 가지고 있다. 한국인에게는 그것이 주로 남편, 아내, 자녀, 출세, 돈, 학문적 성공, 명예와 같은 것들이다. 교회에 다닐지라도 이것이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그러한 자에게는 예수님이 항상 두 번째가 된다. 한국인은 항상 무엇을 추구하지만, 그 추구하는 대상은 보통 예수님이 아니다. 교회에 이런 사람이 많으므로 교회가 타락하지 않을 수 없고, 심지어 목사까지 이것을 부추기므로 많은 교회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
우리가 오직 예수님만 경배하고 사랑하고자 할 때에 비로소 우리 신앙생활은 올바로 자리 잡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들어오셔야 그분과 내가 하나가 되고, 그분이 내 마음에 있는 모든 욕망과 거짓을 쫓아내시고 나를 정결하게 만드신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한 남편, 즉 유일한 경배의 대상일 때만 가능하다. 예수님이 이 여인이 경배의 대상을 남편 안에서 찾았으므로 자기가 진정한 경배의 대상, 진정한 남편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만 사랑할 수 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면 자발적으로 그분만을 위해 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그분을 알게 되면, 그분을 정말로 알게 된다면(“네가 만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10), 그분을 알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알고 버린다. 그러면 그분의 거룩하심과 아름다움이 항상 나의 마음을 끌므로 나는 그분을 향하게 된다.
한가지 덧붙일 것은, 예수님이 사람을 만나주시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 니고데모와(3장) 사마리아 여인(4장), 38병자(5장), 간음한 여인(8장)과의 대화에서 나타나듯이 예수님은 그 사람의 수준과 인성에 맞게 만나주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다. 그럼에도 공통적인 것은 “은혜와 진리”가 기본을 이룬다.
마지막으로, 이 사마리아 여인과 니고데모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 두 사람은 신분, 종족, 성별, 신앙적 배경 등에 있어서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이 대조가 메시아에 대한 이 두 사람의 반응의 차이를 보는 자를 더욱 경악하게 만든다. 메시아를 가장 잘 이해해야 할 니고데모는 의심하고, 메시아와 가장 먼 곳에 있을 것 같은 그 여인은 메시아를 깨닫는다. 또한 매일 하나님을 경배하는 유대인, 성전의 제사장, 그리고 그들의 선생인 니고데모는 하나님 경배의 본질을 모른다. 앞에서 이들에게 메시아 자신이 경배 대상(“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19)임을 비유적으로 가르치셨는데, 그 무식하게 보이는 이방 여인에게는 경배의 본질을 더욱 깊이 가르치신다(4:21-24). 신앙의 본질과 비밀이 가장 작은 자에게 계시되고 영접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영원한 비밀이다.
4.1. 만남
1) 만남의 시작: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오신다(6-9)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만남의 시작은 그리스도의 겸손한 부탁이다: “물을 좀 달라”. 이곳에서 하나님 아들은 지치고 목마른,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이방인이다. 그분에 낮 12시에 작열하는 중동의 햇볕을 피해 우물 곁에 앉아 피곤한 몸을 잠시 쉬시는 분이시다(6). 이 부분에서 특기할만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예수님이 남자요 랍비로서 여자에게 말을 걸으셨다는 것이다. 유대인 랍비라면 그런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 더구나 다른 사람이 없는 곳에서(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 남자가 여자에게 말 거는 것은 관습에도 어긋난다. 그러나 구원자의 사랑은 이러한 관습을 넘어선다.
둘째는, 예수님은 유대인이 설정해 둔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경계선도 넘으셨다는 사실이다(9). 그럼으로써 예수님은 남녀의 경계선과 민족 간의 경계선을 훌쩍 넘어서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사랑이 나타났다. 예수님은 비록 목이 마르셨지만, 그것 때문에 말을 거신 게 아니다. 유대인 랍비라면, 여자가 그를 불쌍히 여겨서 자발적으로 물을 제공했다 할지라도 “네가 감히”라고 화를 내며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도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도움을 준 사람의 호의까지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그와 함께 그 사람도 받으들인다는 표시이다. 보통 사람은 자기와 상대할 정도가 못 되는 사람에게서는 도움을 잘 받지 않는다. 사마리아 여자는 이러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주님의 말 한마디가 굳게 닫힌 그녀의 마음을 열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겸손한 요청은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존중을 나타낸다. 무엇보다 그 겸손하심이 잘 드러난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쉬워서 소문난 죄인에게, 자기를 낮추며 부탁까지 하시겠는가? 바로 그 예수님이 “친애하는 여인이여, 나에게 도움이 필요하니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소?”라며 청원하고 계시다. 모든 것을 다 가지신 분이 도움을 꼭 받아야 하는 사람처럼 겸손하게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셨다.
우리 죄인은 죄 때문에 마음이 꼭 막혀 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도록 오랫동안 자기를 훈련하여 마음을 닫았다. 그러므로 단지 그리스도의 겸손만이 우리 마음을 열 수 있다. 그분은 가장된 겸손이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인격적으로 존중하시므로, 내 강퍅한 마음 상태를 존중하시므로 이러한 방식으로 나에게 오시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자”는 두 가지 면에서 좀 놀랐다. 1) 여자로서 남자의 청을 받은 것과 2) 무엇보다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자인 자기에게 무엇을 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대답한 것은 마음이 조금은 열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마도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을 수도 있다. 이웃들도 자기를 무시하는데, 유대인 랍비가 말을 건 것은 그녀에게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다. 굳게 닫힌 이 여인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분은 참으로 예수님 외에는 없었다. 우리가 비통하고 절망하여 마음이 닫혔을 때 찾아갈 수 있는 분이 계시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가 된다.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거나 도울 사람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신음하며 내는 기도 소리까지 주님은 들으신다.
그럼에도 의심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이 여인은 솔직하게 묻는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결국 이렇게 대화가 시작된다. 자비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꽁꽁 언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을 여셨다. 여기에는 겸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도 한몫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실 때는 우리도 마음을 열어야 한다.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예수님이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로서 문을 두드리실 때 우리는 얼른 마음 문을 열어야 한다(참조: 계 3:20). 예수님의 겸손하심과 사랑은 가장 굳게 닫힌 마음까지도 열 수 있다. 예수님의 능력은 바로 부드러움과 지혜와 사랑이다.
2) 그리스도의 약속: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10-14)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의 겸손한 요청과 여인의 반응으로 만남의 전제조건이 이루어졌다. 그녀의 마음이 조금 열렸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님은 그녀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하신다: 하나님의 선물인 생수를 주시겠다고 하신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를 통해 왜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다가가셨는지가 드러난다. 그분은 “하나님의 선물”을 주시고자 하신다. 하나님의 선물처럼 좋은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이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찾을 수 있다.
첫째로, 예수님은 죄인에게 가장 좋은 것인 하나님의 선물을 주고자 하신다. 여기에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난다. 그분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자 우리에게 겸손하게, 그리고 인격적으로 접근하신다. 이것을 알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상당한 부분에서 바뀌어야 함을 배운다. 그분은 나에게 꼭 필요한 것, 가장 중요한 것, 너무나 소중한 것, 나에게 영원토록 필요한 것을 주시고자 하신다. 이것을 꼭 붙들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시라는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진정한 신자는 수많은 고통을 통해 성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계신다는 신뢰가 없으면 나는 쓰러진다. 고난을 통과하면 나에게 엄청난 선물, 하늘의 은사인 거룩함과 평강이 주어진다는 것을 바라고 적극 고난을 받아야 한다.
둘째로, 죄인이 이 은사를 원해야 한다: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하나님은 이 귀한 은사를 원하는 사람에게만 주신다. 그러므로 그녀의 소원을 불러일으키고자 “생수”라는 말을 사용하신다. 생수야말로 그녀가 갈망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물을 생수에 비유하셨다. 그 여자는 그 은사의 귀중함을 아직 모르므로, 예수님은 그녀가 가장 이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그녀의 마음을 끄는 “생수”라는 말로 표현하셨다. 이것은 마치 “내가 주는 이 선물을 네가 받아주었으면 참 좋겠다”고 하신 것과 같다. 마틴 루터는 이 장면의 의미를 “하나님의 유혹”(locken: 꾀다)이라는 매우 자극적인 표현까지 동원해 밝게 드러내고자 했다. 이처럼 예수님은 굳게 닫힌 사마리아 여의 마음을 움직이시고자 신적인 지혜를 사용하셨다.
인간은 이 사마리아 여자처럼 처음에는 하나님의 은사에 관심조차 없다.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오히려 이것을 거북하게 여기고 심지어는 대적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은사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설명하셔서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이것이 이 여인과의 대화의 초점이기도 하다. 인간은 보통 자기의 삶에만 관심이 있거나, 종교적인 만족을 구할 뿐이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교인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교회에 와서 말씀과 은혜의 소비자가 된다. 말씀을 듣고 은혜 받아 기뻐하지만, 하나님의 은사가 정말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하늘의 은사를 보이시면서까지 이들의 마음을 끌어당기신다. 우리의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시다!
그러면 예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선물”은 무엇인가?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죄 사함과 거듭남의 은사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히 새롭게 낳기를 원하신다. 그 사마리아 여인도 완전히 새로워지기를 원하신다. 이것보다 더 큰 선물이 있겠는가? 이로써 인간이 깨끗해져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그분과의 교제가 시작하고, 삶이 말할 수도 없이 부요하게 되고 영생을 얻는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바로 이것을 주시고자 요청자의 처지로 그녀에게 겸손하게 다가가셨다.
본 단락은 그 여자의 솔직한 질문으로 시작했다. 그녀는 철저한 땅의 사람이다. 앞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선물”을 준다고 하셨지만, 이것을 간과하고 “생수”만 염두에 두었다. 예수님은 깊은 우물에서 자기가 마실 물도 퍼낼 수 없는 처지에서 어떻게 그 귀한 생수를 얻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이것을 보면 그 자매는 열광주의적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이고 솔직하다. 무조건 약속한 것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제 그 약속한 물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신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
이 대화가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좀 어려웠겠지만, 나중에 이 글을 읽을 유대인이나 구약을 잘 아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좀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하나님과 연관하여 생수라는 말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이스라엘이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버림!)…”(렘 2:13). 또한 스가랴 14:8절에는 메시아 시대에 성취될 엄청난 약속이 있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예수님이 바로 이 일을 하셨다! 그분은 부활 이후에 성령님을 통해 이 모든 것을 넘치도록 주셨다(사도행전 2장). 죄 사함을 통해 우리를 완전히 새롭게 하시고, 영생을 주시고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와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의 약속을 주신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가 기대하는 물과는 전혀 다른 물을 의미하신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밝히신다. 마실 물과 영생의 은사를 연결하신다. 15절의 청원을 보면 그녀가 아직은 이것을 잘 이해하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이것이 그녀가 16절의 갑작스럽고 매우 거북한 예수님의 요구를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렇게 아름다운 약속의 말씀이 없이는 15절의 청원이 나올 수 없으며, 16절의 급작스러운 예수님의 요구가 이해되지 않는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이 말씀은 그녀가 매일 겪는 고난의 체험을 들면서 그로부터 오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물은 아무리 마셔도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목마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반드시 이것보다 좋은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갈증만 식히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시는 사람 안에서 생수의 근원이 되어 영원토록 생수가 솟아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항상 이 물을 마시면서 영생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내 안에 있는 성령님께서 말씀으로 나를 끊임없이 새롭게 만드신다는 의미이다. 나를 하나님의 진리와 거룩함으로 위로하시고 내 안에 진리에 대한 갈망이 생기게 하면서 또한 그것을 채워주시고, 사랑이 샘솟게 하시고 소망으로 살게 하신다. 이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이다!
그녀는 이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 제자들은 잘 이해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메시아가 오셔서 주신다는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o 사 49:10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
o 사 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o 사 58: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
o 겔 47:1 이하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이처럼 누구든지 메시아가 주시는 생수를 마시면 영혼이 완전한 만족을 얻는다. 인간에게는 아무리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갈증이 있다. 이 갈증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만 해결된다. 이 불행한 여자, 아무리 남자를 사귀고 의존해도 항상 부족하고 갈증이 났지만, 그녀는 이제 예수님 안에서 비로소 그 타는 갈증을 없앨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이 은사, 말씀을 통해 내려지는 이 은사의 물줄기는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샘 솟듯이 흘러나와 그녀와 나를 새롭게 한다. 우리는 이 물을 마시면서 영원을 향해 살게 된다. 이러한 갈망과 채움이 없으면 영원한 구원도 없다.
어거스틴도 그의 고백록에서 비로소 그리스도를 발견한 후에 그 오랜 갈망이 그쳤다고 한다. 이 세상이 주는 모든 것은 결코 우리를 영원토록 만족하게 하지 못 한다. 그 효과가 아무리 길지라도 죽음과 함께 그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빨리 그 허무함을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자는 아직 여기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 무언가 신비한 비밀이 있음을 감지했다. 이분이 자기의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기 시작했다. 이제 드디어 예수님께 청원한다:
3) 사마리아 여인의 청원(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 말 한마디에 그녀의 실존적 고통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그녀에게는 물 길으러 가는 것이 하나의 재미가 될 수도 있었다. 아침이나 저녁, 좀 시원할 때 물을 길으러 우물가에 가서 동네 아낙들과 대화를 주고받는 것도 삶의 큰 즐거움이다. 그러나 그녀는 가장 더운 때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많은 땀을 흘리고 우물가에 가야 했다.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가야만 했으므로 외로움을 느끼고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매우 슬펐을 것이다. 마음은 날로 비통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큰 소원은 더는 물을 길으러 가지 않는 것이다. 그녀의 가장 큰 소원은 마당에 생수가 나는 물의 근원이 터지는 것이다. 그러면 그토록 힘들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사마리아 여자가 이러한 청을 드렸을 때 아마도 이런 정도의 바램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녀가 예수님을 신뢰했다는 것이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렇게 자기 심정을 털어놓지 못한다. 어쨌든 이것은 큰 진전이다.
이를 통해 우리도 아직 믿음이 크게 없을지라도 예수님을 신뢰하고 계속 말씀을 배우면 언젠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말씀을 순종하게 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예수님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와 순종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강한 영적 소원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즉 예수님이 주시려는 영적 은사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 은사를 받을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 사람은 주님께 은사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귀하게 여기지 않아서 다시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4) 그 여인의 경배 문제를 해결하시다(16-18)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그 여자의 청원에 이어 대화가 갑자기 반전된다. 예수님이 너무나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픈 개인적인 문제를 건드리신다. 이것은 예수님은 영생의 큰 은사를 주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녀가 지금 경배의 대상을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먼저 치료가 되어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갑자기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시는 이유는, 실제로 그 남편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라 그녀의 문제를 해결하고 병든 자아를 해방하기 위함이다. 그녀는 남편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즉각 예민하게 반응한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이 한마디에 그녀의 상실 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녀는 남편이 있지만 그가 자기 남편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이고, 참다운 남편을 찾아 여섯째 남자를 만났으나 그도 자기를 실망하게 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은 인간의 깊은 곳에 있는 “본연의 상실성”의 표현일 것이다. 무엇을 할지라도 자기를 깊은 곳에서 만족하게 할 수 없는, 보편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실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시라는 것은 그분의 대답에서도 나타난다(16-17). 이렇게 한 사람의 고통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성적으로 매우 타락한 현대인은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사람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를 멸시할 뿐이다. 예수님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는 말을 그녀의 비참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낸 대답으로 받아주셨다. 이 말은 완전한 진실은 아니지만, 예수님 앞에서 솔직한 자기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남편처럼 함께 동거하고 있는 사람에게 남편이 아니라고 할 정도면, 그에게 너무 실망하여 더는 바랄 것이 없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인간은 이렇게 실망하지 않으면 결코 그리스도를 찾지 않는다. 만약 그분을 믿을지라도 그분은 항상 삶의 뒷전에 쳐진다. 항상 남편과 가족이 앞서고 그다음이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녀의 거짓말이 아니라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 것에 초점을 맞추시고 “네 말이 참되도다”(18) 받아주셨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의 상태를 이미 다 알고 있으므로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과,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메시아임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하여 대화가 자연스럽게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매우 자연스럽게 그리고 극도로 상하고 예민했던 그녀의 마음이 닫히지 않도록 지혜와 사랑으로, 인격적으로 하셨다. 더욱이 “네 말이 참되도다”라는 말씀에는 우리가 미처 다 헤아릴 수도 없이 깊은 구원자의 사랑과 지혜가 들어있다.
우선 예수님은 그녀의 부끄럽고 추한 과거를 전부 들추셨다. 이것을 그냥 덮어두시지 않으셨다. 이처럼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죄는 모두 드러나야 한다. 모든 사람은 발가벗은 추한 모습 그대로 예수님 앞에서 서야 한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 앞에 아무것도 숨길 수 없음을 마침내 깨달았다. 이제 스스로 가면을 벗어야 한다. 여자로서 부끄러움도 견디어야 했다. 이 시점에서 슬그머니 피하는 것은 영원한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대부분은 진리 앞에서 자기 죄를 숨기지 않는가?
그런데 이곳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신적인 지혜와 사랑을 볼 수 있다: “네 말이 참되도다.” 이 말씀 안에는 그녀가 저지른 죄와 잘못을 완전히 사해주신다는 의미가 들어있다(물론 회개를 전제로 하여). 다섯 남편을 두었고, 지금도 음란한 관계에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녀를 받아주실 수 있다는 진정한 복음의 말씀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용서와 죄 사함의 신비한 ‘이미와 아직’의 긴장 관계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용서가 없이는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할 수 없으며, 이와 반대로 우리의 회개가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비를 우리의 이론과 논리로는 풀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경배할 뿐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가 죄를 짓고 있을 때 찾아오신다. 그리하여 우리 죄를 깨닫게 하시고, 동시에 우리 처지를 이해하시며 메시아적 사랑과 죄 사함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이처럼 겸손한 메시아의 사랑과 은혜가 없이는 그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구원은 이렇게 온전히 하나님에게서만 온다.
예수님은 논쟁이 아니라 사랑과 배려와 진리로 우리를 깨우쳐주신다. 그리하여 우리를 진정한 깨달음과 영생으로 이끄신다. 따라서 이 대화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매우 잘 드러난다. 이렇게 예수님은 인간의 위대한 스승들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인간의 심성으로는 예수님과 같은 분을 상상할 수도 없다. 이렇게 하늘에서 오셔서 우리에게 자기를 계시해 주셔야 우리가 그나마 겨우 깨닫는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 문제를 서서히 깨달아가며,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마음 깊이 묻어두었던 참된 갈증과 문제를 꺼내 놓았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진리를 알게 된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죄인을 어떤 사랑과 지혜로 어떻게 구원하시는지를 배웠다. 물론 이것이 전형적인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매우 두려운 방식으로 죄인이 죄를 직면하게 하실 수도 있으시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모든 죄인에게 가장 알맞은 방법으로 (인격적으로) 다가오신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우리를 죄의 속박으로부터 풀어주셔서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주시며, 오로지 예수님만 신뢰하고 경배하는 자로 만드신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은사가 그의 삶을 채운다: 말씀, 진리, 죄로부터의 해방, 영생, 영적 기쁨, 완전한 평안, 양자 됨, 제자의 삶, 하나님과의 화해와 교제 등. 이것이 마음에서 솟아나와 영생하기까지 이르고, 남들에게도 작은 축복의 샘이 된다.
4.2.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19-26)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4).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이 본문에서 사마리아 여자를 계속 목마르게 하여 새로운 남자를 찾게 한 것은 그녀가 경배하는 대상을 남편에게서 찾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런데 그 대상은 그리스도 외에는 없으므로 그녀가 실패하고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내적으로는 버려진 채 살았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대화를 통해 이 사실을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우리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인격적인 믿음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 계명, 구원의 길을 자기 지정의를 동원해서 전인격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영접이 가능하고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시작한다.
이곳에서 또다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 아들의 종의 모습이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21).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자기 말을 믿어달라고 간청하시는 것과 같다(계 3:20). 이 겸손한 말씀이 그 여인의 마음을 더욱 활짝 열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겸손하게 꼭 닫힌 죄인의 마음을 두드리신다. 그렇지 않으면 죄인은 자기 마음을 열지 않는다. 이러한 것이 그녀에게 너무나도 어렵고 뜻밖인 커다란 계시를 영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3-24).
이렇게 큰 계시는 당시 제자들도 이해할 수 없었다. 구속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세례 요한이라면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제자들을 포함한 고대인에게는 신이 항상 특정 장소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신이 거하는 장소가 있고, 그가 나타나는 장소와 경배를 받는 장소도 별도로 있다. 근동이나 그리스에 가면 아직도 거대한 고대의 신전을 볼 수 있다.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옛날과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이유로 예루살렘을 두고 아직 이스라엘과 아랍권 세력이 싸우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라고 하신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소로서의 영광스런 지위와 의미를 잃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점을 제일 먼저 이해한 사람은 스데반인 것 같다(“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행 7:48).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전을 파괴하셨음에도, 많은 사람 심지어 기독교 신자들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지으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옛 성전은 이제 없다!
이 말씀은 우선 하나님께서 경배를 받으실 때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신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점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에게는 민족과 국가의 구분도 없어진다는 의미로 확대 적용할 수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그 때”, 구속사의 그 시간이 오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심지어 이방인과의 구분도 사라진다. 이방인도 유대인과 똑같이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다. 유대인의 여호와 하나님이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은 점점 덜 쓰이고 아버지가 하나님의 호칭이 된다(참조: 마 6:9). 이로써 유대인의 구속사적 의미도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믿고 예배할 수 있는 때가 온다. 이제 유대와 사마리아와 그 외 지역으로 확장되는 선교를 통해 모든 곳에서 하나 된 하나님의 백성이 탄생할 것이다(행 1:8; 8:1 이하). 이 하나 된 하나님 백성에는 이스라엘 열두지파도 속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아의 시대에 가져야 할 진정한 소망이다(참조: 9:1,13). 따라서 유대민족주의는 사라져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구약)성경과 동떨어진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미 솔로몬의 헌당 기도에 하나님에 대한 경배가 장소적으로 한 건물에 제한되어 있지 않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왕상 8:27). 선지자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더욱 깊이 다루었다(사 66:1; 말 1:11). 그러면 우리에게 사 2:2절 이하와 슥 14:16절 이하의 말씀을 이해하는 길이 열린다:
o 사 2:2-4절: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o 슥 14:16-17절: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땅에 있는 족속들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비 내림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말일에는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몰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율법이 나오는 예수님께로 모인다! 이방인들은 이제 문자적인 초막절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해석해 주신 하나님의 율법(예: 산상수훈)을 지킨다. 이렇게 예수님이 오셔서 가르쳐야만 구약의 어려운 예언이 풀린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특정 장소로 제한된 성전에 계신다든지, 혹은 하나님을 경배하러 모든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모인다는 것은 구약적인 표현이며 일시적인 것이다. 이것은 율법(정결 예식)과 마찬가지로 단지 “사이에 들어온”(롬 5:20) 것으로서 영원한 것이 아니다. 새 창조 때에는 성전이 없을 것이다(“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계 21:22). 예수님은 지금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성전과 “거룩한 산”이 더는 필요 없는 새로운 예배를 가르치고 계신다. 따라서 사 2:2절 이하와 슥 14:16절 이하의 성전, 예루살렘은 그곳에서 새 언약(“피의 언약”)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킨다.
유대인은 새 언약이 맺어지기까지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다. 하나님은 이들을 축복하시고 이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을 알고 경배한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이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 구약성경의 가르침만 진리이다. 이 구약 백성인 이스라엘로부터 “구원이 난다.” 즉, 구원에 대한 모든 하나님의 계시가 아브라함 이래로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안에서 일어났다. 이스라엘이 – 예수님 시대에는 유대인이라 하는데 – 모든 세상에 구원을 중재하는 자라는 것은, 사 7:3절과 렘 3:17절뿐만 아니라 롬 3:1-2; 9:4-5,11,18절도 말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계시가 예수님에게로 수렴되고, 예수님께서는 이 구원을 완전한 모습으로 가지고 오셨다(참조: 히 1:1-2). 그러므로 구속사에서 이스라엘이 가진 특별한 위치는 예수 그리스도에서 끝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미래의 예배는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다(23). 참된 예배는 성경 전체에서 가르치고 강조한다. 인간이 낙원에서 쫓겨난 이후 일어난 최초의 비극은 거짓 예배 때문에 일어났다. 가인이 드린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니었으므로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아주시지 않았다. 그러면 참된 예배는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예배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방식과 다른 모든 예배는 거짓 예배이며 우상 숭배이다.
참된 예배를 위해서는 하나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로 합해야 한다. 하나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다면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다. 하나님 말씀만 진리이므로 내 뜻이 하나님 뜻에 온전히 일치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신다. 멀리 계신 하나님, 죄인과는 지극히 먼 하나님께서 친근한 우리 “아버지”가 되셨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얼마나 가까워졌는가! 바로 앞에 뵙고 대화할 정도가 되었다. 이것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보여주었다.
성령님을 받은 자는 죽었던 영이 살고 진리를 깨닫게 되므로 이 살아있는 영으로, 하나님의 영 안에서 진리로 예배드리게 된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셔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순결하고 거룩한 성품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게 되다. 이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늘 “생수”를 공급해 주신다. 이렇게 성령님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곧 사도 바울이 가르친 성령 충만한 삶이다:
롬 12:1-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합당한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간단히 말하면, 매일 우리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경배가 되어야 하고, 이 경배는 성령님을 받아야만 가능하고, 말씀을 깨달아 진리를 아는 자,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들이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살며, 매일 일하면서도 감사하며 기도하며 찬송함으로써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당시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한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사마리아 여인이 이 가르침을 알아들었을까? 우리는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고 함부로 무시하면 안 된다. 진리인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구원에 관한 한 그 기본적 의미는 누구나 다 깨달을 수 있다. 오히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 강한 선입견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제 그 여인은,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아라는 것을 가리키는(혹은 암시하는) 일련의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그분이 “유대인에게서” 오셨고, 그분과 함께 새 언약과 새로운 예배의 “때”가 도래했고, 그분이 “진리”를 계시하셨고, “아버지”를 보이셨고, 그분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법을 가르치셨다. 이제 이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곧 깨닫게 된다.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본문은 하나님은 참된 예배자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은 이것을 거부했다. 고린도 교회도 이 문제로 사도 바울의 책망을 들었다. 세상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의 수는 넘치지만, 참되게 예배하는 자는 소수일 수도 있다. 우리가 “영과 진리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진리인 말씀으로, 하나님께 합한 마음으로 예배드리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예배는 헛되다. 또한 우리의 삶 전체가 참된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한다.
참고:
예수님은 이곳에서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오직 하나님만 경배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경배하면 안 되는가? 이곳에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예수님 부활 이후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Kyrios)로 경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분께 직접 기도를 드렸다. 성경 계시는 이렇게 진전되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서 정점을 이룬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경배 대상이라고 가르쳐도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어떻게 경배해야 하는지 잘 가르치는 것이다: “영과 진리로!”
4.3. 사마리아 여인의 회심과 그 결과(27-30; 39-42)
사마리아 여인 회심 이야기와 요한복음 서언과의 관계
이 이야기에는 서언에서 가르쳤던 많은 주제가 등장하면서, 그 주제들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해설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이 이야기가 예수님 사역의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다. 잠시 앞부분을 돌아보면서 이야기 전체를 요약한다.
1)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14):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 아들이 긴 대화를 통해 죄인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기를 드러내시고, 그녀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로써 그분의 영광을 본 예수님의 제자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지라도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대부분 유대인이 예수님 가르침을 받고서도 그분을 배척한 것을 본다면, 그녀의 행위가 참으로 빛난다. 단 한 번 대화만으로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2)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14)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가 드러난다. 죄인은 한량없는 은혜를 받으면서(“은혜 위에 은혜: 16”) 진리로 인도된다. 이 대화에서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관찰할 수 있었다.
3) 또한 이것을 통해 모세와 그리스도(율법과 복음: 17)의 단절과 연속성을 동시에 볼 수 있다. 단절은 그녀의 큰 죄에도 그녀를 율법으로 대하지 않으신 것이며(심판), 그녀가 완전히 변화되어 앞으로 음란한 삶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가 되어 율법이 성취됨으로써 율법과 복음의 연속성이 나타난다.
4) 중생과 회심: 그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12)를 받았으며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난 자가 되었다(13).
5) 하나님의 은사인 그리스도: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16). 그녀는 올바른 경배의 대상을 찾았다. 그분이 바로 자기가 갈구하던 영생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도 자체가 우리에게는 유일한 은사이다. 그분으로부터 다른 모든 좋은 것, 선한 것, 하늘의 선물, 은사가 파생된다(나온다): 기쁨과 확신, 자유 등.
6) 삶의 완전한 전환과 증언(8): 그녀는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고 완전히 변화되었다. 그러므로 자기를 미워하고 피하던 마을 사람에게 가서 이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이들이 그녀의 말을 듣고 뜨거운 더위에도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그 여인은 분명히 변화되었다. 이로써 그녀도 하나님 아들을 매우 확신 있게 증언하는 자가 되었다(8).
7) 교회 설립: 서언에서 “우리”라는 말이 두 번 나오고 영접하는 자, 믿는 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들은 증언자의 모임인 교회를 의미한다. 이로써 그녀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되었고, 그녀를 통해 이스라엘이 아니라 사마리아에 첫 교회가 생겼다(4:39-42).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잘 연구하면 누구나 하늘에서 오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 아들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거듭나고, 경배의 문제가 해결되고(그분만 유일한 경배의 대상이다), 자아로부터 해방되어(4:28: “물동이를 버려두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진정한 경배자가 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증거자가 될 수 있다.
사마리아 여인의 회심과 증거를 통한 전도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난 자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기술한 곳이 몇 군데 있다: 사도들, 삭게오,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 등. 그러나 우리는 이들이 그 당시에 결정적인 회심이 일어났는지 잘 모른다. 이에 비하여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에는 회심자의 요소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녀는 예수님과의 대화 중에 중생하고 회심한 것으로 보인다. 긴 대화를 통해 마음이 크게 동요되고 생각도 정리되어 예수님을 자기 주로 영접하게 되었다. 28절의 “물동이를 버려두고”는 완전한 전환을 의미한다.
직전까지도 그녀에게는 물을 긷는 물동이가 매우 중요했지만, 이제는 예수님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해졌다. 그랬으므로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서 마을로 달려갔다. 이러한 점에서 버려둔 그 “물동이”는 그녀의 옛 삶을 단적으로 상징한다. 그런데 더욱 신기한 일은, 그녀가 시내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전도할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자기가 메시아를 만났기 때문이며, 동네 사람들도 자기와 같이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빨리 동네로 들어가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외쳤던 것이다.
또한 그녀가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외친 것은, 그녀가 메시아를 만남으로써 과거와 단절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당신들도 이 분을 만나보라고 외쳤다. 느닷없이 그 여인이 나타나서 말 한마디 했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 말만 듣고 우물가로 몰려갈 리가 없다. 그녀는 여러 말로 우물가에서 일어났던 일을 설명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마을 사람들이 놀랐던 것은 그녀의 모습과 태도였을 것이다. 항상 침울하고 어둡게 보이고 숨어다니던 그림자와 같은 인생이, 너무나도 밝은 얼굴로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이 우물가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쉬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정말 놀랐을 것이다. 그녀는 죄 사함의 은혜를 피부로 느끼고 너무나 감사하고 기뻐서 어찌할 줄 모르는 모습으로 전했다. 이것이 그녀가 분명히 회심했다는 증거가 된다. 바로 이것이 메시아를 만난 이의 기쁨이다. 이것이 주민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31-38절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의 기쁨을 생각하면 이 여인의 회심은 참된 회심이었고, 이것은 영생에 이르는 열매(36)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한 여인의 회심을 대단히 기뻐하셨다.
우리도 모두 이렇게 회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옛날에 회심했을 때는 기뻤는데, 지금은 힘이 빠졌다고 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인격적 회심이 아니라 종교적 회심이었기 때문이다. 참된 회심은 예수님이 죄인의 마음에 들어오심으로 이루어진다. 우리 마음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영생수를 공급해 주신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분과 깊은 교제가 이루어진다. 예수님을 정말로 만난 사람은 결코 그분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사마리아에 최초의 교회가 설립되다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사마리아 여인의 확신에 찬 증거로 도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다. 그리고 예수님을 초청하여 이틀을 유하시어 가르치시자 이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들의 고백을 들어본다: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이들은 자기들이 증오하는 이스라엘인의 랍비를 “참다운 세상의 구주”로 영접했다는 것과 그분을 초대하여 이틀 동안 말씀을 배웠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이들은 믿음의 면에서 유대인보다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훌륭하다. 미신에 물든 이방인이 어떻게 그렇게 순수하게 그리고 빨리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을까? 더욱이 여기에는 이적 보도가 없다. 즉 이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배웠을 것이다. 이들에게 이적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 보잘것없는 사마리아 여인의 회심이 이렇게 큰 결과를 가져왔다. 예수님이 그녀의 회심을 매우 기뻐하신 것과, 이를 통해 선교의 비전을 드러내신 것을 볼 때, 이곳에는 분명히 교회가 세워졌을 것이다. 고대인들은 우상을 많이 섬겼는데, 이들이 정말로 구원자로 여기는 분을 섬기지 않을 리가 없다. 이들은 독자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다가 나중에 사도들이 와서 그분의 부활과 승천을 전하며 그 교회를 관리했을 것이다.
하나님 아들의 영광된 모습을 본 사람은 이 여인처럼 변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녀는 이제 마르지 않는, 마음으로부터 항상 솟아오르는 영생수를 가졌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의 삶이 이렇게 변하지 않는 것은 그가 예수님을 경험적으로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분의 영광을 모른다. 그분이 주신 하늘의 은사를 맛본 적이 없어서 이것을 구하지도 않는다. 우리도 마음에 생수를 넘치도록 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항상 그분께 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고달픈 이 세상 길을 힘차게 갈 수 있다. 예수님이 거저 주시는 은사를 풍성하게 받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얼마나 간절하게 주시고자 하고 넘치게 주시는지 본문을 통해 배웠다. 또한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은 더는 자기 문제 때문에만 매달리지 않고, 자기를 극복하며 예수님을 전하는 자가 된다. 그의 삶은 이렇게 온전히 변한다.
예수님의 기쁨과 선교 비전, 그리고 선교의 원칙(34-38)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살펴보았는데, 그 중요성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두고 제자들에게 미래 일을 가르치신다. 중요한 일은 다음과 같다:
a) 한 여인의 회심을 통해 수난과 부활 이후 세계 선교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는 비전이 촉발되었다.
b) 전도(선교)가 무엇인지 분명히 가르치신다.
c) 예수님 시제 사용의 독특성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미래의 일을 말씀하시면서 과거형과 현재형을 사용하신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1) 예수님의 시제 사용
본문 해석이 어려운 점은 예수님이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과거형과 현재형으로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38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를 수확을 위해 보내셨다(과거형)고 하셨는데, 이들은 아직 정식으로 부르심도 받지 못했고 교육도 받지 못했다. 이들이 활발하게 전도하고 수확하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 이후부터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말씀하시지만, 실상은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다. 왜 그렇게 표현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비록 이것이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지만 반드시 일어날 일이므로 그 성취를 강조하시기 위해 이미 일어난 일로 표현하시는 것 같다. 이것을 “예언적 과거시제”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예수님은 장래에 있을 이 커다란 일이 “이미” 야곱의 우물가에서 상징적으로 시작된 것을 아셨다.
2) 전도 윈칙
씨를 뿌리는 자와 기르시는 자는 예수님(하나님)이시다 . 마 13:37을 볼 때에도 씨 뿌리는 자는 예수님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그렇다면 거두는 자는 제자들이다! 좀 더 확대 해석을 해본다면,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사역과 앞으로 일어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속 사역은 씨를 뿌리는 일이고, 앞으로의 전도와 세계 선교 명령을 통해 이어질 사역은 열매를 거두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고전 3:6에서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자라게 하는 것도 하나님 이심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단지 수확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볼 때 지극히 작은 일이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눅 19:17). 따라서 전도(선교)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공로는 지극히 작은 것이므로, 하나님이 모두 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전도에는 우리 공로가 없으므로 전도를 많이 했다거나 큰 사역을 이루었다고 우쭐대는 것은 큰 죄다.
하나님의 전권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과 설교자는 단지 자기가 심고 경작하지 않은 것을 거두는 사람이다: “내가 너희로 … 거두러 보내었노니.” 이들은 기르고자 노력하고 애쓴 사람은 하나님과 예수님이다. 우리는 단지 거두는 자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다.
3) 그럼에도 전도는 중요하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이루시지만 그럼에도 우리 사역이 중요하며, 우리 사역을 매우 기뻐하신다는점을 눅 19:17 말씀을 통해 나타내신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거두는 전도사역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구속사역인 복음을 전파하고(“나는 심었고”), 어떤 사람은 가르치고 섬겨야 한다(“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며”). 이러한 인간의 사역이 없으면 하나님 말씀은 전파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는다고 하신다:
o 고전 3:6-8: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o 계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4) 전도자의 사명: 증거를 통해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한다.
전도자는 무슨 새로운 이론을 가지고 창조적으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받은 것을 그대로 신실하게 전하는 일이다: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신실)하였으니”. 복음을 순수하게 전하는 일이다. 하나님 말씀을 정확하고 깊이 있게 가르치며, 자기가 가르친 말씀에 따라 살면서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증거하는 일이다. 우리가 사람을 키우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가장 큰 배반이다. 사람을 키운다는 것은 사람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만드는 일이다. 우리는 말씀을 증거하고 자기가 증거한 대로 삶으로서 우리를 변화시킨 하나님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죄인이 하나님을 영접하고 영생을 얻는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의 사역도 중요하다: “곡식을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마 13:24 이하).
5) 보내심의 사슬
“보내다”는 표현도 중요하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이스라엘에 보내셨는데, 이것은 선교가 아니라 그들을 회개로 돌이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들과 이방인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이들을 영생으로 추수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예수님은 하늘로 돌아가시고, 대신 제자들을 세우셔서 이들을 보내신다. 이렇게 해서 보내심의 사슬이 성립된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은 제자들을 보내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보내다”라는 말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자로부터 전권을 위임받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셔서 세우시고 그에게 전권을 주셔서 그를 통해 말씀하시고 일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1) 예수님은 자기 제자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전권을 가지고 계시다. 2) 제자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대리자로 사람들에게 등장한다. 보내심에 대해 예수님은 여러 곳에서 가르치셨다: 마 10:5,16,40; 23:34; 막 6:7; 눅 10:1,16; 22:35. 한 구절만 인용한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눅 10:16).
이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에서 보냄의 사슬이 잘 드러났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은 그 여인을 보내셨다. 보냄 받은 그 여인은 많은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했다. 예수님은 이 보냄의 사슬이 얼마나 잘 이루어지는지를 직접 체험하셨다. 이 보내심의 사슬이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도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는 일에 함께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열매를 보신다.
끝으로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이심을 유대인보다 사마리아인들이 먼저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42).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주시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요한복음 기술의 목적이다. 이들은 이 사실을 벌써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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