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및 스코들랜드와 화란에서의 개혁신학
▶김영규 개혁주의성경연구소장의『17세기 개혁신학』2015. 최종본
▶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독일 궤팅켄대학(Th.D.)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Div.eq.)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74회 졸업
▷총신대학교 신학과(B.A.), 74학번.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역임
▷Director, Research Institute for the Bible and Reformed Theolegy(www.ribrt.org)
주요저서 및 논문
■ 『Calvin and the Old Testament:Sola Scriptura and the Trintarian God as an Unique Author of the Old Testament(Germanic), 1993. ISBN 89-950009-1-0 93230』(Seoul 1994.) - 궤팅켄대학 박사학위(Th.D.) 논문
■ 『A Dialogical Document and the Metaplasmic Phases of the Pre-Mosaic Hevrew hehind Gen 23.(Germanic. 1993.) ISBN 89-950009-0-2 93700』(Seoul. 1994.) - 창세기 23장에 관한 논문은 인류 역사 중 20세기에 와서 땅이 그 창세기 기록의 진실을 밝힌 예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모두 고인들이 되었지만, 그 당시 고대 애굽어 기록들과 문헌들 편집의 최고 권위자이었던 H.W.Helck 교수와 고대 아카드 언어나 고대 슈메르 언어의 대가였던 D.O.Edzard의 자문을 받아, 독립적으로 주전 2400년 전의 고대 슈메르 문서들의 대화체 기록 방식들과 동일한 시기의 셈족 기록물들인 에불라 토판들에서 발견된 대화체 기록 방식들 및 고대 애굽 중 왕조의 편지들이나 기록물들에서 증거된 대화체 관용 표현들을 연구하여, 지금 현 창세기 23장에 기록된 그대로가 그 당시 "대화체 중재재판 판매 문서"의 직접적인 내용임을 증명한 논문이었다. 그런 대화체의 시대적 제한성 때문에 야곱에 관한 기록을 마지막으로 한 지금 창세기는 완성된 후 많은 세월을 지나 요셉의 죽음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 첨가된 것은 그 기록자를 알리는 간기(Colophon)라는 사실이 가정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화체 기록에 있어서 '그리고 역시 누가 누구 앞에 이르기를'과 같은 직접 화법 인용 관용구는 셈족 에불라 토판에서도 발견이 되나, '그리고 역시' 없이 '이제 내가 너에게 말하여 이른 것에 대해서' 등과 같은 직접화법 관용구는 후대 고대 애굽의 직접화법에서 증명이 되지 않는 창세기 족장시대에 해당된 고대 애굽 왕조들인 12 왕조와 13 왕조의 고유한 표현방식이라는 것이다.
■ 『17세기 개혁신학』(개혁주의성경연구소, 1995.)
■ 『조직신학 편람 I,II-2,III,IV.』(개혁주의성경연구소, 1998.)
■ 『엄밀한 개혁주의와 그 신학』(도서출판 하나, 1998.)
■ 『Biblica Hebraica et Graeca(Archaic Hebrew Texts and Greek Handwriting Texts of the First Century AD.) ISBN 89-89519-02-0 93230, 2002, RIBRT』(개혁주의성경연구소, 2002.)
■ "Paleographical Dating of 46 to the Later First Century, (Biblica-로마교황청 직영 국제학술기관지, Vol. 69, No. 2, 1988.) P46(최초 바울서신 모음집 사본)의 연대 측정이 주후 1세기 말인 최소한 도미티안 황제시대 이후가 아님을 증명하였다. 또한 필자에 의하면, "P46의 필체는 주후 1세기 안에서는 물론 1세기 전후 수 많은 문헌 파피루스들 중에서도 극히 희귀하게 지금 남아 있는 주전 3세기 전형적인 교육교본 필체를 가진 파피루스 사본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한다. 논문바로가기 https://www.friktech.com/rel/p46.htm
■ "도르트회의 Marburg 대학의 대표자 Rudolphus Goclenius(1547-1628)의 철학과 신학에 대해서"(대한논총, 2009.)
■ "하이델베르그 대학과 바젤대학의 개혁신학자 J.Jacobus Grynaeus(1540-1617)의 신학에 대해서"(대한논총, 2011.)
■ "초기 청교도 신학 안에서 법치사회의 기독교적 이상과 그 개혁정신 및 그 한계에 대해서"토마스 카트라이트의 논쟁자들을 중심으로"(대한논총, 2012.)
차 례
머리말 ... 5
I. 한국장로교회와 정통개혁신학... 7
II. 역사적 정통개혁신학의 바른 노선의 요점...24
III. 17세기 개혁신학의 역사적 배경...59
IV. 17세기 개혁신학의 개관(槪觀) ...109
V. 도르트회의와 예정론 논쟁... 130
VI.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그 신학... 343
VII. 17세기 언약신학과 정통개혁신학의 몰락..369
맺는 말... 371
참고문헌... 373
2. 17세기 개혁신학의 역사적 배경 - 영국에서의 개혁신학
영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의 문제들은 대륙에서 첨예화되지 않은 문제들이 영국에서는 첨예화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철저한 종교개혁의 문제들이였다고 볼 수 있다. 영국국교회의 신학인 감독주의 신학 혹은 아카데미 신학도 오랫동안 카톨릭주의와 첨예하게 싸우는 종교개혁적, 혹은 부분적 칼빈주의 신학이었다고 볼 수 있다.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전체적으로 아직도 루터주의적인 종교개혁에는 이르지 못하였고 에드워드 6세의 개혁은 루터주의적인 종교개혁 혹은 부분적 칼빈주의에 가까웠다.
예를 들어 메리여왕 때 순교당한 죤 브래드포드의 경우 정확한 칼빈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존 낙스의 친구이었던 존 폭스의 칭의론은 루터주의에 머물렀던 종교개혁자의 모습이었다. 에드워드 6세 때(1550) 런던주교 리들리(Ridley)의 종교개혁은 성만찬에 있어서 제단대신 테이블로 바꾸는 것도 큰 개혁이었다. 그 개혁은 루터주의로부터 더 나아간 개혁이었지만, 부쩌, 오에콜람파디우스, 쯔빙글리, 불링거, 칼빈, 피터 마르티르, 라스코, 헤디오, 카피토 등이 공히 개혁하고자는 것에 불과하였다.
한편 쮜리히에서 돌아온 후퍼(Hooper)는 1550년 7월에 왕에 의해서 주교로 임명을 받았을 때, 두 가지 이유로 거절하였다. 하나는 맹세의 형식에 있어서 하나님과 성령이외에 다른 이름으로 맹세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론적인 복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재단을 개혁하고자 하였던 리들리는 복장문제는 별문제가 아니라고 법에 복종할 것을 주장하였다. 후퍼의 이런 개혁정신은 부쩌와 피터 마르티르와 같은 정신이었다. 부쩌와 피터 마르티르가 그 땅에 피신하여 있었어도 그렇게 종교개혁은 유아기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 여왕 집정 초기에 완성된 영국 국교회 39개 조항은 바로 이런 유아기 시기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작성되었던 42개 조항에 의해서 기틀을 잡은 것을 다시 수정한 고백이었다.
에드워드 6세가 죽고 난후 메리여왕의 핍박시대에 대륙으로 피신한 종교개혁적 성직자들이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와 함께 영국 땅에 들어오나, 엘리자베스 여왕의 종교개혁이란 에드워드 6세의 종교개혁의 회복에 불과하였다. 에드워드 6세 때의 종교개혁 인물들(Rogers, Hooper, Ridley, Latimer, Cranmer)은 메리여왕 시 화형을 당하였고 그 때 277명이상이 순교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개혁유산을 보존하고자 하였는지도 모른다. 이런 핍박으로 인하여 지하교회가 형성되게 되었고 800명 이상이 바젤, 프랑크푸르트, 엠덴, 스트라스부르그, 두이스부르그, 알로우, 쮜리히 등으로 피신하였다. 루터주의자들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쫓아냈다. 그 말은 그들 피난민들이 개혁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특별히 프랑크푸르트에 피신한 자들 중에 단순히 에드워드 6세 때의 고백과 의식들을 넘어서 좀 더 개혁을 시도하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들이 죤 낙스, 죤 베일, 죤 폭스등의 인물들이 중심이었다. 이들의 신학은 칼빈의 개혁사상과 가까운 대륙의 종교개혁자들(무스쿨루스, 마르티르, 불링거, 비레)의 정신들과 연결되었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6세의 개인교수였던 콕스(Dr. Cox)를 중심으로 에드워드 왕의 예배모범을 고집함으로 분열이 생겼고 더구나 이들이 타국 관원의 재가를 받아냄으로 여기에서 개혁하고자 하는 자들이 화합하지 못하고, 일부의 인물들이 거기를 떠나 바젤, 제네바로 떠나게 됨으로, 엘리자베트 여왕시대의 퓨리탄들과 융화자들(conformists)이 분리되는 상황이 형성된 것이다. 그때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제네바로 간 인물들이 교회를 이루었는데, 여기에서 후대 스코틀란드 장로교회 의 교회정치원리와 예배모범(The Service, Discipline, and Form of Common Prayers and Adminstration of Sacraments used in the English Church of Geneva, Feb, 10th 1556)이 형성되게 된 것이다. 이들로부터 또한 유명한 제네바 성경이 발생(1560년)하였다. 이들이 바로 영국이나 스코틀란드의 종교개혁의 주역을 맡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엘리자베트 여왕 시기의 철저한 종교개혁정신이 있었다면, 그것은 칼빈주의적인 종교개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퓨리탄이란 개념은 에드워드 6세의 종교개혁을 회복한 엘리자베트 여왕 시대에 영국의 종교개혁의 법적인 통일성에 동의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비난의 용어(주후 3세기의 용어, Cathari 혹은 Puritani)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네바 쪽에서 온 퓨리탄들의 개혁이란 에드워드 6세 때의 종교개혁을 더 철저히 개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코틀란드 장로교 신학이 그것의 전신인 제네바의 영국교회으로서 한 맥을 이룬다면, 엘리자베트 여왕 시대의 제네바 종교개혁정신이 장로교 신학의 다른 본맥을 결정하고 있다. 그 예로 토마스 카트라이트와 싸웠던 동료교수 화이트깁트(John Whitgift)는 일부 교리에 있어서 철저한 칼빈주의자이였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 다른 분야에서 더 철저한 칼빈주의로 나아갔던 카트라이트의 신학적 입장과 싸우고 과격한 핍박자가 되었기 때문에, 장로교적인 개혁주의 신학이 그런 모든 분야에서 철저하지 않은 칼빈주의와 구별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넓게 도르트회의에 참석한 영국 국교회주의자들이란 개혁주의자들 안에 포함시키고 있다. 따라서 개혁주의 이름아래 우리와 구별되면서 서로 고통과 피를 흘려야 하는 신학적 다양성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영국의 개혁주의는 에드워드 6세 때(1547년 이후 1553년 메리여왕의 등)의 토마스 크렘머(Thomas Cranmer)의 개혁이 중요하고 그 다음은 카트라이트 논쟁이고 셋째로 같은 화이트깁트와의 브라운주의자들 혹은 바로우주의자들의논쟁, 넷째로 람베트 선언서(Lambeth Articles)의 중요한 사건이다. 크렘머는 에라스투스주의자로서 영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봄이 좋다. 그런 에라투스주의자들과 싸우는 것이 장로교 운동이다.
교회정치형태로 보아 장로적인 노회가 처음 생긴 것은 1572년이지만 그런 노회의 전신이 장로교 성직자들의 모임인 ‘예언회’(The Prophesyings)가 그 전부터 있어 왔고 카아트라이트의 주장들이 그 당시 새로운 것들이 아니었음이 이미 Daniel Neal의 퓨리탄 연구에서 증명되었다. 오히려 그 때의 교회개념이 70년 후에도 여전히 정확히 같은 개념으로 웨스트민스터회의 정치론에서 작성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주교의 심문 앞에서 Morton Corbet의 목사 Axton의 증언에 따르면, (심문자의) 주교직의 소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법적으로 주교직에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니다”고 용감히 대답하고 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그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대답하였다.
즉 첫째로 디모데 전서 4장 14절에 있는 장로회(Eldership)의 동의에 의해서 임직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로 베드로전서 5장 2절과 사도행전 14장 23절에 따라 한 양떼 곧 한 지교회에 대해서 감독직이 임직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로 사도행전 14장 23절에 따라 회중의 선거(Ceirotonh,santej)에 의해서 선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이런 반박근거들은 장로교의 핵심내용이 되고 있는데, 이런 고백내용들은 그가 거절하는 ‘성의(Apparel)’ 사용문제나 세례 시 십자가 그리기 및 성만찬 시 무릎을 굽는 행위에 대한 논박내용들과 함께 장로교의 중요한 역사적 뿌리가 되고 있다. 그 심문에서 보여준 대로, 초기 퓨리탄들이 이런 엄밀한 개혁주의 신학으로 무장하기까지 예언회가 그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그런 퓨리탄들의 고백내용들은 유명한 Thomas Cartwright에 의해서 공적논쟁으로 발전되었다. 케임브리지 Trinity College에서 행한 강의내용들은 20가지로 요약되고 있다.
1. 교회개혁에 있어서 모든 것들을 사도적 제도로 소급시키는 것이 필연적이다.
2. 설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 외에 어떤 자도 목회자로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
3. 그런 하나님의 말씀의 목사 이외에 어떤 누구도 교회 안에서 공적으로 기도하거나 성례를 집회해서는 안 된다.
4. 교황적 임직은 타당하지 않다.
5. 오직 정경화된 성경만이 교회 안에서 공적으로 읽혀져야 한다.
6. 공적의식은 교회 안에 사적인 기도나 낭독이 없도록 짜여져야 하되, 목사의 기도에 모든 회중이 참여하도록 짜여져야 한다.
7. 죽은 자를 묻는 책임은 목회사역의 중심적인 사역에 속해 있지 않다.
8. 정경화된 성경이나 하나님의 모든 이름들에게 동등하게 경외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복음서를 읽을 때 백성이 서 있거나 예수의 이름으로 절을 해야 할 이유는 없다.
9. 성만찬시 무릎을 꿇거나 서 있는 것이나 앉아 있는 것이나 모두 합법적이다.
10. 성만찬은 사적으로 집례되어서는 안 되고, 세례는 여자나 평신도에 의해서 집례되어서는 안 된다.
11. 세례 시 십자가의 상징은 미신적인 것이다.
12. 자녀의 이름으로 내가 믿고자 한다. 내가 믿는다는 대답을 하거나 여자나 장성한 자로 대부 혹은 대모를 삼도록 허락 없이도, 교육의 의도를 가지고 신앙고백을 행하여 부모가 자기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합리적이고 타당하다.
13. 자녀들에 이름을 줄 때, 그리스도의 호칭들과 직책들과 마찬가지로 이교정신을 피하는 것이 좋다.
14. 년 중 특별한 때에 결혼을 금하는 것은 교황주의적이고 그런 때에 허가를 하는 것이 관대한 것이다.
15. 사적인 결혼 즉 회중 앞에서 공포되지 않은 결혼은 좋지 않다.
16. 사순절을 지키고 금요일과 토요일의 금식은 미신적이다.
17. 축제일을 지키는 것도 불법적이다.
18. 주일날 상업하고 장사하는 것은 불법적이다.
19. 목사임직 시 ‘성령을 받으라’고 선언하는 것은 조소적이고 사악하다.
20. 왕들과 주교들은 기름부음을 받지 않아야 한다.
결국 이런 강의 내용 때문에 베자로부터 태양아래 그 만한 학자는 없다고 할 만큼 학문이 풍부한 학자일지라도, 강의가 금지되었고 교수직을 잃을 뿐만 아니라 대학으로부터 추방되었다. 그 후 그는 화란으로 피신할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와 정신을 같이 하였던 퓨리탄들이 첫 의회탄원서를 낸 이후 John Whitgift가 그것에 반박의 책을 출판하자, 그는 국외에서 다시 그 논쟁에 참여하게 되어 그 반박의 글들이 유명하게 되었다.
그런 퓨리탄 운동의 배후에는 예언회가 있었고, 한 때 그 ‘예언회’들은 주교 아래서 활성화되고 발전되기도 하였다. Edmund Grindal 대주교 당시 1582년 4월 6일 스코틀란드 장로교에서 임직을 받았던 성직자 John Morrison에게 강도권을 받음으로 장로교적 형태의 임직이 인정되게 되었다. 역시 목회자들의 모임에 스코틀란드 성직자들도 포함되었다. 즉 이런 성격이 주교정치형태아래 장로교 성직자들이 포섭되는 타협주의 노선의 모습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드러난 퓨리탄들의 신학적 입장들이 장로교의 근본적 성격이 되었다. 비타협주의 정신이 갖는 신학적 다른 입장들이 모두 장로교 신학은 아니나, 그 타협주의 정신 아래서 그 기본골격을 이뤄 지게 되었다. 다른 신학적 입장들이란 철저한 칼빈주의 운동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더 에드워드 6세 때 Cranmer의 개혁유산인 ‘공동예식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받지 못하는 정신에서 나타났다. 그 예식서는 성례식, 공적 사적 기도, 임직법에 대한 규례들에 대한 것으로서, 그 예식이 교회법으로 강요되었기 때문에 퓨리탄 정신이 일어났다. 예식서의 가르침과 반대로 퓨리탄들은 생각하기를, 세례 시 무릎을 꿇고 서서 받거나 아무 상관이 없다. 십자가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입교문답을 하고 나서 주교에게 안수 받을 필요가 없다.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해서는 안 된다. 카톨릭주의자들처럼 예복(Gown, Cap, Tippet, Supplice)을 입을 필요가 없다, 주일을 온종일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외경을 읽을 의무가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 예식들에 대한 타협주의자들과 비타협주의자들이 일어났다. 그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한 성직의 정직, 옥살이, 도피, 추방, 침묵이 퓨리탄들의 역사이다. 이런 반대 입장이 확장되지 않도록 그 예식서를 강요하고 일반가정에서 퓨리탄들이 설교, 가르침,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역시 토마스 카아트라이트와 싸웠던 Whitgift가 대주교가 되어 발령된 5가지 금지령이 퓨리탄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여기에서 그가 ‘공동예식서’와 ‘39개 조항’을 내세웠을 때, 에드워드 6세의 개혁정신을 계승하고 고집하는 것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퓨리탄들 중에는 칼빈주의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즉 브라운주의자들인 Elias Thacker과 John Copping도 비타협주의자들로서 정죄되어 죽게 되는 사건이 있었고 거의 10년 후에는 다시 강하게 그 브라운주의 운동이 일어나 영국에 영향을 끼쳤다. 그 대표적 인물들로 Henry Borrowe, John Greenwood, John Penry등이었다. 이런 브라운주의자들과 다른 이단, 예를들어 직접적인 내적인 말씀을 강조하면서 “죄를 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 신성화되었기 때문이다”고 주장하는 소위 ‘사랑의 가족’(Family of Love)이 퓨리탄들 사이에 혼합되었기 때문에, 그런 이단의 오해와 모함 아래, 진정한 퓨리탄들은 모든 쪽으로부터 핍박을 당하였다. 즉 외적으로 고통을 당하면서 같이 비타협적인 길을 간다고 하는 자들로 인하여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사무엘 러더포드가 지적하였듯이, 종교개혁시대부터 있었던 사탄이 기독교를 세속화시키는 도구로서 자유인들(Libertines)은 옛 영지주의자들이고 그 자유인들로부터 신비주의적 사랑의 가족운동주의자(Familists)들이 나왔으며 반율법주의자들(Antinomians)은 자유인들과 사랑의 가족운동주의자들로부터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극단의 이성주의자들이 신비주의자들과 만나는 것처럼 극단의 신비주의자들은 관원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이상화하는 극단의 에라스투스주의자이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런 고통이 조금 정리된 것은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인데, 첫째로 1586년에 ‘공동 예식서’에 대응하는 장로교의 원리에 따라 정치와 권징에 관한 새로운 고백서가 작성되어 서명되었던 사건이다. 이 고백서는 월터 트레버스의 라틴본, 카아트라이트에 의해서 번역된 월터 트레버스의 영어역본 및 대중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카아트라이트에 의해서 간단히 정리된 장로교 정치지침서에 기초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고백서에 서명한 인물들은 퓨리탄의 아버지인 Thomas Cartwright와 Walter Travers이외에 Edgerton, Barber, Gardiner, Payne, Fenner, Field, Snape, Lord, Farmer, Rushbrook, Wilcox, Whitaker, Perkins, Gellibrand, Cawdery, Udall, Dyke, Paget등과 더불어 500명이상의 인물들이였다. 그러나 이들 중에도 역시 에라스투스주의자들이 있었고, 일부 가운데 온건한 브라운주의자들 혹은 회중교회주의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둘째로 스코틀란드 개혁에 자극을 받아 그 개혁에 부응한 종교개혁이 웨스트민스터총회를 통해서 이루어 졌다. 이때 비로소 에라투스주의자들과 회중교회주의자들이 장로교회주의자들과 분리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혁정신들은 회중교회주의자들의 분리와 그들의 새로운 고백서로 말미암아 균열을 얻게 되었고, 바로 이루어진 왕정복고로 인하여 그 땅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따라서 정통 개혁주의 노선과 관련하여 판단할 때, 웨스트민스터 총회 전까지 단순히 비타협주의자들 혹은 퓨리탄이란 말은 바른 신학적 노선에 관련된 말로 이해할 수 없다.
3. 화란 땅에서의 장로교적인 개혁신학
토마스 카아트라이트와 더불어 영국에서 정식 임명되었어도 실제 쫓겨났다고 할 수 있는 왈터 트레이버스(Walter Travers)가 장로교 성직자로서 처음 Antwerp에서 힘 있고 부요한 의복상인들의 설교자로서 부임하여 섬겼으나(1578-1580), 스페인과 전쟁으로 인하여 그 자리를 버려야 하였기 때문에, 1582년에 Middelberg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는데, 그 때 Thomas Cartwright가 와서 그 교회를 섬기게 되고(1582-1585), 그 다음 Dudley Fenner(1585-1587)가 섬겼다. 급진주의자인 Francis Johnson(1590-1592)가 오기 전까지 그 곳 상인들의 교회는 장로교 교회로서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이 장로교는 이 후로부터 영국 국교회의 예배모범이나 고백서를 사용하지 않거나 강하게 거절한 역사를 가진 교회이기도 하지만 한편 이미 카트라이트가 여기에 와서 섬기는 과정에서, 그 도시의 다른 피난민 회중교회가 있었는데, 이 교회를 이끌었던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e)이 1584년에 영국으로 돌아가고 그의 조사였던 로버트 헤리슨(Robert Harrison)도 1585년에 사망하자 그 교회는 해체되었고, 그 해체된 30 내지 40명의 회원들이 카아트라이트가 이끄는 상인들의 장로교회에 합세하였다. 이런 브라운주의자들은 그 교회의 내적인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특별한 이 상인들의 교회에 스코틀란드 출신의 비타협주의 장로교 성직자인 죤 폽스(John Forbes, 1558-1638)가 부임하여 그 교회를 계속 맡았는데, 그는 토마스 카아트라이트나 월터 트레버스와 친밀하였던 Andrew Melville의 제자였다. 스코틀란드의 왕이 칼빈주의적인 스코틀란드 교회를 영국국교회 정치형태로 바꾸려는 맹렬한 와중에서, John Forbes가 총회의장으로서 있었던 1606년 7월의 총회의 기점으로 교회위기에 들어섰었고, 그로 인하여 1606년 11월에 여러 동료들과 함께 유배되었다. 프랑스, 네델란드, 독일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1608년 초에 Zeeland에 정착하게 되었다. Vere에 있는 스코틀란드 교회의 설교자로서, Vlissingen의 군인교회에 설교자로서 섬기다가 독일 북쪽 Stade에 있는 상인들의 교회에서 설교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Middelburg에 있는 상인들의 교회를 맡고 있었던 Lawrence Potts의 부목사로 섬기게 된다. Lawrence Potts가 그 곳을 1612년에 떠나자 그 교회를 그가 맡게 되었다. 그 후 1621년에 상업적 이유로 Delft로 옮겨 섬기게 되었는데, 그가 퓨리탄들의 핍박자인 윌리암 로드 주교에 의해서 임명된 성직자(George Beaumont)에 의해서 1635년 교체될 때까지, 뚜렷이 장로교의 성격을 가진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그 교회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실은 이 교회가 영국교회의 예배모범과 달리 독립적으로 사용된 예배모범(Booke of the Forme of Common Prayers, Administration of the Sacraments, & Agreable to Gods Worde, and the Use of the Reformed Churches, Edinburgh 1584, reprinted at Middelburg)이 칼빈의 것(La forme des prières et chantz ecclesiastiques avec la maniere d'administrer les Sacraments et consacrer le Mariage selon de coustume de l'Eglise ancienne, 1542)이나 스코틀란드의 예배모범과 아주 유사하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있다. 이곳에서의 교회형태가 메리 여왕 시 프랑크푸르트로 피신하여 피난민 교회형태와 함께 역사적으로 관심이 있는 부분이다. 이미 Walter Trewers가 섬겼던 시기인 Antwerp의 상인교회에서부터 피택된 장로들과 집사들이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이 예배모범의 특성 중 세 가지가 화란개혁교회와 다른 것들로 알려지고 있다. 첫째로 목사나 장로임직이 17세기의 장로교의 표징이 되었던 목사의 안수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는 점, 둘째로 교사들(doctores)에 대해서 더 많은 책임성이 부여되어 있다는 점, 셋째로 노회의 근원이고 영국 퓨리탄들과 스코틀란드에서 보편적인 소위 ‘예언회’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예배모범의 특성들 이외에도 이 지역에서 처음 1621-1628/1633에 소위 장로교 노회(‘English Classis’, ‘Presbytery’, ‘ Delph Classis’)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노회는 처음 1622년 4월 20일에 개최되었는데, John Forbes가 노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여기에서 화란교회로부터 자유를 선언하였다. 자신들의 교회를 하나님 앞에서 가장 값진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로 선포하였고 매 노회마다 새로운 회장과 서기를 선출하였으며 자신의 노회보다 더 높은 교회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입장을 표명하게 되었다. 이미 첫 회집에서 목사회원권 문제를 다루어 다음 회기까지 그 목사의 소명에 대한 증서를 제출하도록 결정하였다.
1623년 4월 12일에 개최된 제 2차 영국노회에서는 John Forbes가 다시 회장으로 선출되고 John Wing이 서기로 선출되었는데, 17명의 목회자들 중에 12명만 증서들을 제출하고 다섯 목회자들은 제출하지 못했다. 그 중에 레이든에서 목회하였던 Hugh Goodyear가 첫 집회에만 참석하고 그 다음 집회에서 참석하지 않았다. John Paget가 목회하고 있었으나 화란교회에 속해 있었던 암스테르담의 영국교회의 동사목사이였던 Thomas Potts는 제 1차 집회에서 방청객으로 참여할 수 밖에 없었다. 퓨리탄으로서 유명한 John Paget 역시 그 노회를 분리주의자들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John Paget의 동사목사이였던 Thomas Potts의 후임을 위해서 암스테르담의 영국교회에 속한 회중교회파들이 본국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Thomas Hooker를 초빙하였을 때(1631년 7월 2일), John Paget가 20개의 의문들을 물어 저지하였던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단순히 John Paget가 화란개혁교회에 속하여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였다. 영국의 장로교주의자들은 브라운주의자들처럼 분리주의자들이 되기를 원치 안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John Paget와 같은 일부 반대자가 있었을지라도, John Forbes가 노회장으로 있었으면서 Thomas Scott(Utrecht에 교회목사로), 그의 사위인 John Oswald(Dordrecht에 있는 교회목사로), Steven Paine(종군설교자로), Jeremiah Elborough(Thomas Scott의 후임목사로), Henry Sibbald(Nijmegen에 있는 교회목사로), George Clark(종군설교자로), Maximiliaan Teellinck(John Wing의 후임목사로) 등이 임직을 받아 장로교 목회자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 임직은 노회장과 다른 두 목사회원의 입회하에 노회장에 의해서 수행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목사시험으로서 이미 설교과목이 알려져 있고, 그 임직방식도 설교 이후 강단에서 내려와 임직을 받은 자로 하여금 무릎을 꿇게 하여 안수하였다.
그밖에 제 2 차 노회에서는 도르트회의의 결정에 모든 회원들이 서명하기로 결정하였고 예배모범에 대해서 성경으로부터 한 두 장의 성경봉독, 시편송, 설교의 순서를 확증하였으며 성만찬 집례 시 전달하고 받는 일 만을 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런 노회활동은 본국의 영국교회로부터 늘 압력이 있었는데, 1623-24에 제임스 1세는 그 노회에 ‘항존의장(perpetual moderator)’을 임명하기를 원하였고 그래서 1624년 4월 17일 노회에서 John Forbes를 보내기로 결정함에 따라 런던에 와서 도르트회의에 참석했던 George Carleton의 중재로 왕에게 그 사정들을 전하였는데, 그 노회에 주교를 임명하면 보르스티우스주의자들과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유익을 얻을지 모르는 큰 불안을 야기할지 모르는 위험을 경고하였다. 그 점에 있어 왕의 동의를 얻었다. 그러나 1627년에 와서 그 노회로 하여금 새로운 의식을 소개하고 새로운 목사들을 시험하고 임직하는 것을 금하였고 결국 1628년 8월은 그 노회의 마지막 회집이 되고 말았다. 1632년 4월에 다시 회복을 시도하였으나, 관원들이 호응해 주지 않았고 그래서 형식적으로 소집이 되지 않은 1633년 3월로 폐지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 장로교회가 중요한 것은 그 당시 화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아직 젊거나 태어나지 않은 때이므로 이런 교회들의 신학들은 화란 신학의 분위기를 형성시켜주었다고도 볼 수 있다. 화란교회와의 관계에서 출판한 John Forbes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의 논쟁의 글이 중요하다. 그가 그 논쟁의 글에서 나타난 입장은 Johannes Maccovius에 의해서 최근에 야기된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사이의 열띤 논쟁동안에서 나타난 입장이었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가 이 글에서 타락 전 선택설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보증을 얻는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뜻과 성정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이해에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정되었다는 사실이 선행의 생활을 인도하였다. 역시 참된 신자만이 성경의 참된 의미를 이해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중생의 필요, 택자의 소명과 성화에 강조가 있다.
그리고 영국국교회의 교회정치에 반대하여 딤전 6:13에 근거하여 목사들의 군주는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면서 영국 국교회의 성직제도를 비판하였다. 한 때 온건한 회중교회주의자인 Thomas Hooker(1586-1647)가 1633년 신대륙으로 떠나기 전까지 약 2년 동안 이 John Forbes밑에서 조력 목회자로 일하였던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은 경건한 신학자들이었을지라도, 여러 가지 점에서(회중의 권위에 대해서, 분리주의자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교인이 아닌 자들의 유아들의 세례에 관해서,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칭의의 정확한 정의에 대해서) 견해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4.스코틀란드에서의 개혁신학
스코틀란드에서는 1549년만 해도 공의회에서 Thomas Aquinas의 저서들이 학생들과 교수들에게 추천될 만큼 카톨릭적인 뿌리가 내려져 있었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 초기신학은 Luther와 Melancthon을 예정론주의자와 어거스틴주의자로 평가하여 수용하는 온화한 루터주의 타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초기 종교개혁자로 알려진 Patrick Hamilton은 그런 온화한 타입과 달리 Marburg에서의 Lambert, Tyndale, Frith와의 교제릍 통해서 그런 신학자들의 신학사상을 고집하는 자이었다. 죤 낙스와 직접 관련된 J. Wishart는 스위스와 스트라스부르그 종교개혁자들과 교제로 그들과 같은 사상을 고집하여, 그가 친히 초기 스위스 고백을 번역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시 스코틀란드의 종교개혁 역사에 있어서 두드려진 신학자들은 죤 낙스, 죤 크래그(John Craig, c.1512-1600),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등이라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세 종교개혁자들 중 신학적인 종교개혁한 자는 앤드류 벨빌이다. 왜냐하면 그가 처음 성경에서 주교와 장로의 개념은 같다는 칼빈의 개념을 도입하여 장로교의 뿌리되는 입장을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정신은 제네바에서 베자나 카아트라이트와 회우와 밀접히 관계한다는 사실도 주목되고 있다.
물론 그는 이런 정신 이외에 다른 신학적 입장에서는 온화한 칼빈주의자이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A. F. Mitchell에 따르면, 그는 타락 후 선택설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후 그의 제자들이 에딘버러 대학과 글라스고우 대학에 엄밀한 칼빈주의 신학을 심어왔다고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신학자로서 패트릭 샵(Patrick Scharpe), 로버트 롤록(Robert Rollock)과 로버트 보이드(Robert Boyd), 윌리암 쿠퍼(William Cowper)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1618년 퍼스 선언이후 반동이 일어난 것인데, 그것은 도르트 회의 선언에 반대되는 사상인 조건적 선택사상과 보편구원론을 글라스고우의 로버트 보이드를 계승한 카메론(John Camero)이 주장하여 그 추종자를 얻게 되었고, 그는 다시 불란서의 소무르(Saumur) 대학으로 가 유럽에서 보편구원론을 주장하는 아미로드(Amyrauld)를 제자로 길러낸 결과를 얻었다. 이런 입장은 리차트 박스터에 의해서 다시 주장되어 박스터주의를 영국에 심어 놓았던 것이다. 그렇게 글라스고우에만 퍼진 것이 아니라 에버딘에서도 유사한 주장을 들고 일어난 사람이 1618년에 폽스(Wm. Forbes)와 로버트 베이론(Robert Baron)이다.
그리하여 이런 주장에 넓게 인정되었고 받아 드리게 되었으나 1636년에 비로서 사무엘 러더포드에 의해서 논박되기에 이르렀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은 택자에게 제한된다는 강한 칼빈주의 주장으로 반박하게 된 것이다. 결국 1638년 스코틀란드가 장로교로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정죄됨으로 장로교 신학의 뿌리를 확고히 했던 것이다. 1638년 총회의장인 데이비드 디킨스(David Dickson)에 의해서 강하게 그런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이 비난되었고 그 다음 총회의장인 알렉산더 헨더슨의 직임기간에 앤드류 멜빌의 제자이기도 한 로버트 롤록까지도 그런 보편주의 구원론에 관한 주장에 대한 의혹 속에 정죄되기도 했고, 죤 폽스는 아르미니우스주의로부터는 떠나겠다고 선언하였어도 교회정치와 예배모범에 대해서 맹세하지 못하여 1644년에 화란으로 떠나게 되었다. 베이론을 추종하는 자들도 1639년에 권리를 박탈당했다.
이렇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나오기 전에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의 신학적 깊은 뿌리에 도르트회의 신조가 확고히 정착되었고 그 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신학이 자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배경은 장로교의 정치원리에 대한 스코틀란드의 신학적 뿌리와 함께 장로교의 중요한 신학적인 입장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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