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논쟁점들에 따라 합의된 신학적 입장

 김영규 박사 프로필  ▶독일 궤팅켄대학(Th.D.)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Div.eq.)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74회 졸업 ▶총신대학교 신학과(B.A.), 74학번.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역임 ▶ Director, Research Institute for the Bible and Reformed Theolegy(www.ribrt.org)
 김영규 박사 프로필  ▶독일 궤팅켄대학(Th.D.)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Div.eq.)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74회 졸업 ▶총신대학교 신학과(B.A.), 74학번.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역임 ▶ Director, Research Institute for the Bible and Reformed Theolegy(www.ribrt.org)

1.1. 신적인 선택과 유기에 대해서 

결론적으로 인간구원의 신적기원을 가능한 한 인간론(인간의 자유)에 기초하고자 하여, 전적인 은혜의 차원에 심한 손상을 주고 있고, 그들의 민주주의 이념과 반대되게, 그들이 하나님의 민족차별성을 민족우위성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그들의 예정론에 대한 파괴와 성도의 보존에 대한 파괴와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공동고백의 일반적인 틀에 의하면, 죄론 다음에 기독론을 언급하고 그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에 대한 적용차원에서 신앙의 자리를 언급하고 있다. 이 부분에 와서 하나님의 진노와 영생의 개념을 고백하고 있다. 즉 그 복음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에 머물고 그것을 받아 드리고 참되고 살아 있는 신앙을 가지고 구주 예수를 받아 드리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와 그 부패로부터 구속되며 영생을 선물로 얻는다는 고백방식이다. 칼빈처럼 여기에서 예정론에 대한 열쇠를 풀고 있다. 즉 하나님이 시간상 어떤 이들을 신앙으로 선물하셨고 어떤 이들을 선물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영원한 결정으로부터 나왔다는 고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행 15:8; 엡 1:11).

비록 강퍅할지라도, 이 결정에 따라 하나님은 택자들의 마음을 은혜로부터 부드럽게 하고 굽히어 믿도록 하시고 그의 택자들이 아닌 자들을 그의 의로운 판단에 따라서 그들의 악과 강퍅케 됨으로 내버려 두신다. 여기에 그리고 이런 식으로 그들은 깊은 인간의 차이, 긍휼히 여기시고 의로우신 차이, 선택과 유기의 결정을 인식하고 고백하고 있다. 이런 식의 고백은 하이델베르그 고백의 순서에 따라 그에 대한 해석의 차원인 듯한 인상을 얻게 된다.

1) 그 선택은 불변의 하나님의 작정이다. 하나님 자신이 지극히 지혜롭고 불변하며 전지하고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 자신으로부터 일어난 선택도 방해받지 않고 불변하며 번복되지 않고 깨지거나 이미 택한 자들이 다시 버려지지 않고 수에 있어서 변경되는 것이 아니다.

2) 그 선택은 세상의 기초 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3) 택자들의 수가 확실하다.

4) 그 택자들이 다른 자들보다 더 좋거나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다.

5)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곤비한 자들, 즉 처음 정직하였으나 그들 자신의 죄로 인하여 타락하여 죄와 부패 안에 있는 온 인류로부터 택하였다.

6) 그 선택은 하나님의 뜻의 자유롭고 기뻐하심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은혜로운 선택의 원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성향들이나 역사들을 모든 가능한 조건으로부터 구원의 조건으로 택하셨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어떤 사람들을 일반 죄인들의 수로부터 자신의 소유로 삼았다는데 있다(롬 9:11,12,13; 행 13:48).

7) 순수한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다.

8) 하나님은 그 그리스도를 영원 전부터 모든 택자들의 중보자와 머리로, 구원의 기초로 세우셨다.

9) 구원의 길 혹은 수단까지 결정하였다. 즉 택자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도록, 그가 친히 그를 주시고 유효하게 그의 로고스와 영을 통하여 같은 교통으로 부르시며 만나시며, 혹은 그를 믿는 참된 신앙으로 선물하시고 의롭게 하시며 거룩히 하시고 그의 아들과의 교통 가운데 능력 있게 보존하여 영화롭게 하시어 마지막 그의 긍휼을 증명하고 그의 사랑스러운 은혜의 부요성을 찬양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 선택은 원인과 조건으로서 예지된 신앙과 신앙의 순종, 거룩 혹은 어떤 다른 좋은 성향이나 능력으로부터 일어나지 않았고 택함을 입을 인간 안에서 미리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신앙의 순종과 거룩에 이른다. 즉 선택이 구원의 모든 은택의 샘으로서 그로부터 신앙과 거룩, 구원의 나머지 은사들, 마지막 영생까지 열매로서 나오는 것이다(엡 1:4).

역시 택자들은, 서로 다른 단계들과 다른 방식일지라도, 그의 때에 그들의 구원의 영원하고 불변의 선택에 대해서 확신하게 된다. 그 지각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폐되고 깊은 것을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했을 때 지각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 하나님에 대한 자녀다운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갈증, 죄를 넘어 의를 향하여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 선택의 실패할 수 없는 열매들을 자신들 안에서 영적인 기쁨과 거룩한 즐거움으로 지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있는 신앙이나 마음의 확실한 신뢰, 양심의 평화, 자녀다운 순종에 대한 열심,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 안에서의 영광이 자신 안에 아직 유효하게 느껴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 일들을 이루도록 약속하셨던 수단들을 사용하는 자가, 유기에 대한 언급을 들었을 때, 낙심되거나 자신을 유기자들 안에 사려해서는 안 되고, 수단들을 지각하는 데 있어서 부지런히 진행하고 넘치는 은혜의 때를 열렬히 열망하며 그 같은 것들을 경애와 겸손을 가지고 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10) 그 선택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신약에서나 구약에서나 하나요 동일하다. 즉 하나님의 작정하시고 기뻐하신 뜻은 하나요 유일하며(een eenig welbehagen, voornemen en raad des willens Gods) 그것을 통하여 영원 전부터 우리를 택하시되,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게 은혜와 영광과 구원과 우리가 그 안에 행하도록 그가 준비하신 구원의 길에 이르도록 택하셨다.

11) 성경에 증거에 따르면, 모든 인간들이 선택된 것이 아니라 어떤 이들은 선택되지 않거나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서 간과되었던 자들이다(voorbijgegaan). 즉 스스로 자신의 죄책으로 말미암아 곤비함에 뛰어 들어간 그들을 하나님께서 그의 전혀 자유롭고 의로우시며 무제한적이고 불변의 기뻐하심에 따라 그 일반 곤비함에 내버려 두시고 구원의 신앙과 회심의 은혜를 얻지 못하여 자신의 길과 그의 의로운 판단아래 내버려 두시며 결국 불신앙과 다른 죄들 때문에 징계하시고 영원히 벌하시기로 결정하였다. 이런 유기에 대한 결정이 결코 하나님을 죄의 원인자(een auteur van de zonde)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섭고 흠 없는 의로운 심판자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가르침은 택자들로 하여금 더욱 더 하나님께 돌아가고자 열망하나, 하나님과 구주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스스로 세상의 염려와 육체의 정욕에 빠진 자들에게만 무서운 것이다.

1.2.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로 말미암은 인간의 구원

우리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의 만족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에 대한 일시적이고 영원한 형벌로 벌 받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아버지와 성령과 똑같은 영원한 무한한 본질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음으로 완전히 만족된다. 그런데 바로 복음의 약속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생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강조한 것은 이 복음을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과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zonder onderscheid) 보내신다는 점이다. 이 점은 도르트회의의 결정은 선교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관점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확실하고 분명한 도모 없이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완전 자유로운 하나님의 도모와 하나님의 뜻과 기뻐하심에 의해서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택들이 주어진 것이라고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은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택자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표현방식으로 고백되어 있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영원 전에 구원하기로 선택하였으며 아버지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모든 자들만을 모든 민족들과 혈족들, 종족들, 방언들로부터 구원하시기를 원하였다는 표현으로 고백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모두는 분명히 택자로 고백하고 있으나, 그리스도께서 그 택자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표현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주로 택자들에게 일어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게 될 구원에 관한 도모가 세계의 시작부터(van het begin der wereld) 실패함이 없이 지금까지 성취되었고 역시 계속 성취될 것이라는 논점이 기술되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타락한 후 비로서 구원의 백성이 실제적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상이 타락 후 선택설의 입장이 아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런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의 고백 중

첫째로 ‘실패함이 없이(onfeilbaarlijk)’ 혹은 ‘유효하게(능력 있게, krachtiglijk)’라는 표현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성취된 구원이 어떤 사람에게도 실제적으로 전유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한 반대 입장이다.

둘째로 창조 전 택자들과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도모에 대한 언급은 그런 도모를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목적이 단지 은혜의 새 언약을 사람들과 체결할 수 있는 순수한 권리를 얻고, 구원의 성취와 적용사이의 구별을 없애는 어떤 새로운 조건 즉 구원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는 것과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구원이 그런 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힘이나 완전한 의지를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얻는데 있었다고 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대답이었다.

셋째로 우리의 죄에 대해서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든지 우리 대신 그리스도께서 그 죄책을 지셨다는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의 고백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아무도 저주의 원죄에 대한 죄책이 없고 모든 인간들이 이런 죄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고백이다.

1.3. 인간의 부패성과 하나님에게로 회심과 그 방식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원죄는 그 자체에 있어서 전 인류를 저주하거나 일시적이고 영원한 형벌들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 인간의 의지에는 영적인 은사들이나 선한 성향, 선과 거룩, 의와 같은 덕들이 존재할 수 없고 그 의지 자체는 결코 부패되지 않았다는 것, 중생되지 않은 사람은 죄로 완전히 죽지 않고 영적인 선에 완전 무능하지 않는다는 것, 타락 후에도 남아 있는 보편은혜(de gemeene genade)나 은사들을 부패된 자연인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좋은 사용에 의해서 좀 더 즉 복음적 혹은 구원적인 은혜, 구원 자체까지 점진적으로 그리고 단계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것, 인간의 참된 회심의 경우 의지에 어떤 새로운 성향, 능력이나 은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인간의 행위일 뿐이라는 것, 우리가 하나님께 회심하게 된 은혜는 부드러운 충고 외에 다른 것이 아니거나 이것이 인간의 회심에 있어서 가장 고상한 역사의 방식이며 충고에 의해서 일어나는 인간의 본성과 가장 일치한다는 것, 하나님이 힘 있게 그리고 실패함이 없이 신앙과 회심으로 기울게 하는 그의 전능의 그런 능력들을 인간의 중생에 사용하지 않으신다는 것, 은혜와 자유의지가 회심의 시작을 행하는 영적인 원인들이요 역사의 순서에 있어서 은혜가 의지의 역사에 앞서지 않으며 인간의 의지가 스스로 움직이기 전에는 하나님이 회심에 이르도록 힘 있게 인간의 의지를 돕지 않는다는 것 등이다.

이에 대해서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은 기독론과 구원론의 뿌리를 굳게 할 필요가 있었다.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독특한 역사를 분명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타락 전과 타락 후 그 변화에 대해서 분명히 고백하였는데, 타락 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인간의 의지 안에 의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고백하였고, 타락 후에는 오성(verstand)과 의지와 마음에 있어서 전적인 타락을 고백하고 있다. 이런 전적타락은 그런 것이었다. 즉

첫째로 모든 인간들은 죄 안에서 태어났고 진노의 자녀들로서 태어났으며, 어떤 구원하는 선에 이르기에 무능하고, 악으로 기울러져 죄들 가운데 죽으며 죄의 종들이다. 따라서 중생케 하는 성령의 은혜 없이는 하나님께 돌이키려고 하지 않고 돌이킬 수 없으며 그들의 부패된 본성을 개선하지 못하며 스스로 개선에 이르지 못한다는 대답이다.

둘째로 원죄와 관련하여 외적으로 펠라기우스주의를 비판하면서 아담의 부패성은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에 따라서 모든 그의 자손에게 이르되, 모방(navolging)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패된 본성의 전가(전이, voortplanting)에 의해서 자손들에게 이른다는 고백이 되었다. 이런 아담의 죄의 전가(imputatio peccati Adami)는 후에 직접적인 전가(imputatio immediata)와 간접적인 전가(imputatio mediata)방식으로 나뉘지만, 도르트회의에서 분명히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보편적인 입장으로 정리된 셈이다.

셋째로 타락 후에도 자연의 빛(lumen naturale)이 남아 있을지라도, 이 빛으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지식에 이르거나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 올 수 있기에는 아주 멀다. 그러나 자연의 빛이나 첨가된 율법에 의해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과 말씀을 통하여 할 수 있다는 것이요, 이것의 메시야의 복음이며, 신약에서와 같이 구약에서도 그것을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기뻐하셨다.

넷째로 하나님의 이런 뜻의 비밀을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신약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계시하셨다. 그런 다른 경륜의 원인은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더 많은 가치성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완전 자유로우시고 기뻐하신 뜻과 넘치는 사랑에 있다는 고백이다.

다섯째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따라서 택자들에게 구원이 때가 되어 적용될 때, 크고 놀라운 은혜로 능력에 의해서 일어나고 그 변화는 새 창조의 역사이다. 따라서 죽음으로 깨어나는 것이요 살아나는 역사인 중생이란 전혀 초자연적인(een gansch bovennatuurlijke) 역사이요 큰 능력의(een zeer krachtige) 역사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적적이면서 비밀의 역사이다. 이 때문에 거기에 하나님 자신 만이 일하신다. 이는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영원히 하나님에게만 감사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신앙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의 자유의지에 제공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에게 직접 전달되고 불어넣으며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믿을만한 능력을 주어 인간의 자유의지로부터 동의나 직접적인 신앙을 기대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거기에서 의지를 일으키고 산출하시는 그 분이 참으로 모든 것들에 있어서 모든 것을 이루기 때문에, 인간 안에서 믿고자 하는 의지와 신앙 자체를 산출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은 구원에 있어서 신인협동론을 주장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입장에 반대하여 구원의 성취에서 뿐만 아니라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섯째로 중생의 이런 신적인 은혜는 인간의 의지와 속성들을 없이하는 것이 아니요 힘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요, 그로 하여금 영적인 삶을 살도록 하고, 자발적이고 바른 영의 순종이 우세하게 하는 것이다.

1.4. 성도의 견인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성령에 의해서 중생된 자는 죄의 지배와 노예로부터 해방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이 세상에서 육체와 죄의 몸으로부터 완전 해방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이로부터 일상의 죄들이 나오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케 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게 그들이 도피하도록 하며 기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거룩한 실천들에 의해서 죽도록 하며, 이 죽음의 몸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어린 양과 더불어 그들이 다스릴 때까지 완전의 한계선을 추구하도록 하기 위한 항존적인 원인을 그들에게 주는 것이다. 내주하는 죄의 이런 잔여 때문에 그리고 세상과 사탄의 시험으로 인하여 회심한 자들이 그 은혜 가운데 완전하게 남아 있을 수 없고 그들 자신의 능력들 안에서 내버려둠을 당하게 되어도, 하나님은 신실하시사, 그들에게 단번에 주셨던 그 은혜 가운데 친히 자비로 확증하시고 끝까지 능력으로 보존하신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참된 신자들을 은혜가운데 확증하시고 보존하시는 그의 능력이 얼마나 더 큰지, 긍휼이 풍부하신 하나님께서 비참한 타락에서조차도 선택의 불변의 의지에 따라 성령을 자신의 백성으로부터 완전히 거두시지 않는다. 그들이 영접의 은혜와 칭의의 신분으로부터 타락할 만큼 혹은 죽음의 죄에 이르거나 성령을 해방하는 죄에 이를 만큼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이 성도의 견인에 대한 고백이다. 그런 고백과 함께 그런 견인과 보존이 갖는 뿌리와 특성들이 고백되었다. 그런 보존의 조건이 인간으로부터 전혀 찾을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긍휼로부터 옮을 고백하고, 따라서 그런 구원의 방법과 서정조차도 헛되거나 없이 될 수 없다는 성격과 함께 고백되었다. 의지에 이르기까지 전적부패를 인정함으로 모든 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겸손케 한다.

교회를 택자들의 회중이라고 정의함으로 교회의 건물에 교회의 일로 강조하지 않는다. 외모나 가시적인 형태로 성도들 사이의 차별하는 일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방식에 따라 가시적 교회와 그 밖이 구별이 되지 않는 목회방식이다. 일반은총과 성육신의 원리에 따라 극한 죄인들에게까지 무조건적인 사랑이 미친다. 그러나 열매가 없어도 끝까지 인내하고 주어진 성도들을 사랑하고 목양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결코 허영이나 가식을 나타내는 일이 없고 늘 진실을 향하여만 열심이 있으며 쉬지 않고 정진과 부지런함을 인간의 도덕성과 예의, 부나 학문이나 지연, 학연에 따른 인간관계가 배제된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취우치지 않고 존중시되어야 하는 생활태도이다. 그 때 균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향한 열심이 인간관계의 이음매이고 그 관계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이상과 그 열매 혹은 향기를 창출하는데 목적이 있다.

현대시대에도 목회의 성공과 교회성장의 핵심적인 부분을 생각할 때, 오히려 개혁주의 중심사상과 도르트회의 결정의 내용들이 더 유용하다. 특별히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 대한 선포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차원, 극한 죄인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보증에 확실한 근거로서 하나님의 끊임없는 열심과 긍휼에 대한 선포는 어느 시대에나 복음을 듣고 회심하고 위로받는 자들의 만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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