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험한 세상 사잇꾼 되어
자기 신념과 신앙을 절대시하거나, 잘못된 신념과 신앙을 교조화하면 그건 우상 숭배나 마찬가지다.
욥의 친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욥에게 가서 욥을 제사장으로 번제를 드리고, 욥이 내게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 제사를 기쁘게 받으리라.
종교상인 발람이 무당처럼 흉내를 내는 제사는 주님이 받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은 욥의 제사를 받는데, 친구들은 욥에게 저주하고 조롱하였다.
【소강석】 험한 세상 사잇꾼 되어
이어령 선생님은 생전에 '사잇꾼'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느 조직이든 이쪽과 저쪽의 사이를 좋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조직은 망하지 않아. 개발부와 영업부, 두 부서를 오가며 서로의 요구와 불만을 살살 풀어주며 다리 놓는 사람, 그 사람이 인재고 리더야. 리더라면 그런 '사잇꾼'이 되어야 하네. 큰소리치고 이간질하는 '사기꾼'이 아니라 여기저기 오가며 함께 뛰는 '사잇꾼'이 돼야 해.”(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역시 언어의 연금술사요 천재적 통찰력이 빛나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시대를 보면 사잇꾼은 보이지 않고 사기꾼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정치도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고 행복하게 하는 본령을 벗어나서 자기 진영과 정파의 이익만을 위해 온갖 협작과 비난을 앞세워 공격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 사회는 이념, 계층, 지역 갈등을 일으키며 분열하고 충돌하고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종교마저도 어느 한쪽에 서서 진영과 정파에 치우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종교는 어느 한쪽으로 서는 게 아닙니다. 특별히 종교 지도자는 여기도 품고 저기도 품는 사잇꾼이 돼야 합니다.
코로나 때 저는 이미 정부에 주도권을 빼앗겨 버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교단 총회장과 한교총 대표회장을 하면서 어떻게든지 현장 예배를 지키면서도 국민 보건을 도모하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어떻게든지 션샤인 처치가 되고 허들링 처치가 되도록 나날이 애를 태우며 하루하루를 살아갔습니다. 특별히 초갈등 사회를 맞이하여 진보와 보수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어서 특별한 상황이지만, 그렇지 않은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진보와 보수, 좌우가 서로 잘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을 봅니다. 저도 지금까지 사잇꾼의 지도력을 발휘해 왔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저의 스탠스를 지지해주고 응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극단적 진영에서는 저를 얼마나 공격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특별히 코로나 시기에 만약 제가 어느 한쪽 말만 듣고 잘못된 판단을 하였다면, 한국교회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데드크로스의 깊은 수렁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션사인 처치가 되어 사회적 순기능 역할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사회에 초갈등을 유발하고 심화시키는 우를 범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코로나 시기에 예배 회복을 위하여 정부와 맞서서 싸울 때는 싸우면서도 동시에 사회의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교회의 역할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코로나로 인하여 상처를 입은 한국교회의 사회적 이미지도 점점 회복할 수 있었고, 분열과 갈등이 아닌 협력과 상생의 길을 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저는 여전히 이런 사잇꾼의 리더십을 발휘하려고 했습니다. 분열된 교계 연합기관을 하나로 묶으려고 엄청 노력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지나치게 여(與)도 아니고, 야(野)도 아닌 중도적 균형을 지켰습니다. 성경적 본질과 가치를 지키는 데는 철저하게 보수적이지만 사회적 약자와 동서 화합, 남북 화해에 있어서는 진보적인 가치도 추구했습니다. 물론 자신의 태도를 극명하게 표현하는 게 가장 쉬운 일이죠. 누구를 비판하든지, 누구 한 사람을 치켜세우든지 이런 건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양쪽을 다 품고 양쪽과 함께 같이 가는 사잇꾼의 역할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종교가 무엇입니까? 영혼 구원과 함께 사회에서는 순기능이 되고 선순환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오히려 종교가 사회 분열과 갈등을 심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무엇보다 종교는 영생의 길을 안내하면서도 갈등하고 충돌하는 사회로 하여금 숨통을 트이게 해줘야 합니다. 종교 지도자가 사기꾼이 되면 사이비가 되고 이단이 되어 자기 욕망과 욕구만 채우게 되죠. 그런 사이비나 이단은 사회에 더 큰 해악을 가져다주고 악순환을 일으키며 인간의 삶을 오염시키고 파멸의 길로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애당초 종교를 잘못 만났으면 잘못된 종교 지도자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소속 목사이고, 그 교단의 총회장과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한교총 대표회장으로 섬기게 된 것을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단 한 번도 양극단에 서서 대척점을 두는 행동을 하지 않고 저만의 정체성 위에서 화합꾼과 사잇꾼이 되어왔던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저의 욕망보다는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살아온 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저는 험한 세상의 사잇꾼 되어 하나님과 성도들, 그리고 우리 교계와 사회에 사랑과 용서, 화해와 연합의 다리를 놓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소강석】 저녁형 인간이 아침을 깨우다
저는 원래 저녁형 인간으로 태어난 것 같습니다. 어린시절 시험공부를 해도 주로 날을 새기도 했고 낮에 잠을 잤습니다. 낮에 공부를 하는 것보다 밤을 새워 저녁에 공부하면 서너 배 이상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광주신학교를 다니며 백암교회를 개척할 때도 깊은 저녁에 공부를 했습니다. 오후에 학교를 마치고 오면, 부지런히 동네 구석구석을 다니며 전도를 하고 깊은 밤이 돼서야 레포트를 작성하고 공부했습니다. 깊은 밤에 공부를 하면 그렇게 머리에 쏙쏙 잘 들어오는지 모릅니다. 저녁에는 그렇게 온몸에 활기가 넘치고 총명스러운데 새벽이 되면 맥을 못 추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새벽기도를 인도해야 하잖아요. 어떨 때는 저를 깨우는 정 권사님께 “왜 나를 깨우냐고, 권사님이 새벽기도 좀 인도하시면 안되냐”고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정 권사님이 천막교회당으로 가 버리세요. 그러자 또 교인들이 와서 깨우는 것입니다. “전도사님, 어서 일어나씨오. 새벽기도 설교해 주셔야지요.” 그럴 때 저도 모르게 짜증을 내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짜증을 받아주신 교인들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단 한 번도 새벽기도를 빠져본 적이 없습니다.
한동안 새벽형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책들이 많이 나왔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책을 읽고 “나는 왜 이러지? 새벽형 인간이 성공을 한다는데 나는 왜 저녁형인가?”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저뿐만 아니라 정말 저녁형 인간이 많이 있더라구요. 저녁을 아주 유용하게 쓰고 효과적으로 쓰는 사람을 봤습니다. 저녁이 되면 가슴에 별이 들어오고 달이 들어와서 시를 쓰는 사람도 있고, 작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저녁에는 은하수의 별들이 이야기를 가지고 와서 밤을 새워 소설을 쓰게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저녁형 인간도 성공한다’라는 책을 써 보고 싶은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저녁에 일을 하고 낮잠을 잡니다. 그러나 저처럼 저녁에 독서를 하고 새벽에 일어나려면 얼마나 몸이 무겁겠습니까?
그래도 제가 구미동 목회시절까지는 모든 새벽기도를 직접 다 인도했습니다. 한얼산기도원에 가서 새벽 4시까지 철야기도회를 인도하고, 우리 교회에 와서 또 5시 새벽 기도를 인도한 적도 많았습니다. 목포에서 집회를 마치고 야간열차를 타고 와서 또 새벽기도를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또 옛날에는 부흥회를 가도 저녁집회, 새벽집회, 낮집회를 다 인도했습니다. 젊을 때는 그걸 다 감당할 수 있었던 거죠. 그런데 언제부턴가 왜 그렇게 새벽이 힘든지요. 그래서 저는 새벽집회 대신 밤 특별집회를 인도하게 됐습니다. 밤 특별집회를 인도하면 저는 펄펄 납니다. 그러니까 특별새벽기도 대신 밤 작정 기도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학기를 맞아 자녀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해서 특새를 하게 된 것입니다. 자녀들이 주로 저녁 시간에는 학원을 가니까요. 진짜 저는 잠과의 전쟁, 새벽과의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평소에 늦게 자던 사람이 일찍 잔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늦게 자는데도 기본이 3시에 깨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2시에도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합니다. 그때 만약에 누워서 자버리면 더 몸이 무거울 것이기에 책상에 있거나 또 복도를 걸어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맑은 정신으로 새벽기도를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한 다윗의 고백이 더 다가옵니다.(시108:2) 이러기를 반복하면 몸이 축나겠죠.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던 다윗도 70세에 죽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그래도 이번 한 주간은 야행성이고, 저녁형인 제가 새벽을 깨우고 새벽을 울리는 한 주간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새벽에 일어나 교회에 오니 얼마나 눈가에 잠이 오겠습니까? 그래도 제가 설교를 워낙 쉽게 하고 짧게 하니까 제 눈에 조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아이들이 그렇게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은 저녁형 인간이 새벽을 비추고, 깨우고, 울리는 역설적 주간이었습니다.
【소강석】 살아 있기에 글을 쓴다
확실히 요즘은 옛날 총회장 시절보다는 달리 조금 덜 바쁩니다. 총회장과 한교총 대표회장으로 섬길 때는 분초를 쪼개가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마음은 바쁩니다. 마음이 바쁘다 보니까 때로는 불안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존재적 불안은 아니고 뭔가를 준비하지 못하고 미리 할 것을 해놓지 않았을 때 불안한 마음이 찾아옵니다. 예를 들어 설교 준비가 안 되었다든지 강의안이나 칼럼 등 써야 할 글을 미리 쓰지 않으면 심리적 불안이 오게 되는 거죠.
요즘 돌이켜 보니 시를 많이 못 쓴 것 같았습니다. 물론 ‘문학나무’에 성경인물 시를 계속 쓰고 있습니다마는. 이번 주 같은 경우는 시를 많이 못 쓴 것에 대한 불안감이나 압박감 같은 것이 들어 왔습니다. 일반적으로 시는 고독해서 쓰기 시작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물론 고독해서 시를 쓰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본인이 살기 위해서 시를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 뿐만 아니라 일반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심해서 쓰다가 보니까 나중에는 살기 위해서 글을 쓰고 그 시와 글이 자신을 이끌어가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시를 안 쓰고 문인이 글을 안 쓰며 가수가 노래를 안하고 목회자가 설교를 안 하면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것처럼 글을 쓸 때 자기 인식을 하게 되고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존재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글과 삶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글을 쓰면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자신의 존재가 어떠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코 죽은 자는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불안을 느끼는 것 자체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죽어 있으면 이런 불안도 느끼지 못합니다. 이 불안이 끊임없이 창의적 세계로 가게하고 또 끊임없이 생명의 글을 쓰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글 쓰는 사람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 글을 살고 있는 사람이 글이 안 써지면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해지겠습니까? 저는 전업 시인이 아니기에 시를 써도 되고 안 써도 됩니다.
이번 주는 시는 그만두더라도 목양 칼럼(아포리즘)이 잘 떠오르지가 않았습니다. 물론 먼저 칼럼을 써 놓았습니다.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아들과 ‘건국전쟁’에 대해 서로 대화하고 토론하는 글을 썼는데, 아들에게 보여 주었더니 좀 어색한 것 같다고 해서 다른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다시 새로운 글을 쓰려고 하니까 깊은 사유(思惟)를 해야 했습니다. 문득 저는 글과 시, 시와 생명, 그리고 삶과 시간을 연결하는 이야기를 구상해 보았습니다. 분명히 저는 시 때문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시를 써도 되고 안 써도 됩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까 반드시 시를 써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시가 아니라도 반드시 글을 써야 하지요. 설교문이 됐건 칼럼이 됐건 기고가 되었건 글을 써야 합니다.
제가 글을 쓸 때 창의적인 존재가 됩니다. 창의가 없는 한 저는 죽은 존재와 다름없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글을 써야 합니다. 아니 글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글이 어느 때부터 인가는 저를 창의적인 세계로 인도하고 창의적인 공간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사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한도 내에서 제한적으로 사는 게 육신의 삶입니다. 물론 우리는 부활을 하고 예수 믿는 자는 영원히 천국에 거하지만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글을 써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글과 함께 사는 사람이고 글을 사는 사람이고
글의 인생이 되고 글의 생명이 됩니다. 살아있으나 사유하지 못하고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은 죽은 존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살기 위해서 오늘도 글을 쓰고 시를 씁니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목양 칼럼을 쓰게 되고 새로운 시를 써야겠다는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써야 할 글이 많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어서 적어도 제 키만큼의 책은 써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은 턱없이 모자란 것 같습니다. 물론 출판되지 않는 글 분량이야 제 키보다 훨씬 많지만요. 하여간 저는 앞으로도 창의적인 글을 쓰고 끊임없이 시를 쓸 것입니다. 살아 있는 한 생명의 글을 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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