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8일 밤에, 이태원거리에서 발생한 대 참사 사건은, 미연에 충분히 예방할수 있었던 사건을, 당국자들의 타성에 젖은, '안전 불감증'이 빚어낸 대 참사였다. 박정희 대통령시절에 외친 구호가 있다.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남북이 대치되어 있는 상황임에도, 기강이 해이해 진 불감증이 빚어낸 대참사다. 이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이태원은, 태생적으로 할로윈과 딱 맞는 지명(地名)이다. 옛부터 우리나라는 지명에 대한 유래가 깊다. 이태원을 漢文으로는 '梨泰院'이라 쓴다. 그런데 이태원이란 지명이, 한자(漢字)로만 무려 세번이나 바뀌었다. 조선 초에는 '오얏나무 李'를 써서, '李泰院'이라 부르다가, 임진왜란 이후엔 '異胎院' 으로 고쳐 부르더니, 다시 효종 이후에는 오늘의 '梨泰院'으로 되었다. 이태원은 서울을 벗어나 처음 만나는 원(院)이었다. 서울을 흔히 사대 (四大)문안이라 일컷는데, 院(원) 또한 서쪽으로 홍제원, 동쪽으로 보제원, 남쪽으로 이태원, 북쪽의 인덕원이다.
이태원은 원래 지금의 용산고등학교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람마다 이름이 있듯이, 사회 공동체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마을들도, 모두 마을 고유의 숨결과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이태원의 역사 유래를 촘촘히 들여다 보면, 그 이름속에 이 땅의 '슬픈역사'가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 '슬픈 역사' 하면, 조선 시대의 '두 칠푼이'들인 선조와 인조가 떠오른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카 (소서행장)와,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두 부대는, 조선땅을 경쟁적으로 진격하여,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남대문으로, 유키나카 부대는 동대문으로, 아무 저항없이 조선의 수도 한양에 입성했다. 조선의 왕 선조는 발빠르게 의주로 줄행랑을 쳤다.
"임진왜란때 두 왜장이 남대문과 동대문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무혈입성한 문이라해서, 훗날 조선총독부는, 남대문과 동대문을 조선고적 1호, 2호로 지정했다. 결국 이 문들은, 오늘날 대한민국 국보 1호와, 보물 1호가 되었다. 이런 아픈역사가 있음에도, 불 타버려 졸속으로 복구한 남대문을, 국보 1호라고 전 세계에 자랑하는게, 낯이 부끄러워 비감이 서린다. 무풍지대처럼 한양에 들어 온 '가등청정'은, 이태원에 주둔을하게 된다. 이때로 부터 '가등청정과 그 부대'는, 조선의 여자들을 겁탈하기 시작하는데, 대분분의 여자들은 피난을 가버린 상황이라, 그 대상은 피난을 가지 못한 여자와, 이태원 황학골에 있는 '운정사'의 비구니들이 주대상이었다.
천주교 신자이자 반전론자인, 상인 출신의 소서행장과, 불교신자이자 주전론자인, 장수 출신의 가등청정은, 일본에서부터 라이벌이었는데, 오히려 불교신자인 가등청정은, 여승들을 겁탈하고 운정사까지 불살라 버렸다.( 가등청정은 우리나라 천년고찰인 불국사도 불지른 놈이다.) 이처럼 나라 전체가 왜구들의 독무대가 되어, 사찰의 비구니들과 일반 아낙네들이, 저들의 성 노리개로 강제 임신을 하여 사생아들을 낳게 된다. 절간이 사라진 상태에서 비구니들의 아이들과, 왜놈에게 겁탈당한 부녀자들이 낳은 아이들을, 낳고 기를 보육원을 지어 정착케 하였는데, 당시 왜병들의 피가 많이 섞인 보육원이라하여, 異胎圓(이태원; 다른 민족의 태를 가지고 있는 곳) 이라는, 진실로 입이 열이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치욕스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그후, 임진왜란이 끝나자, 왜구들에게 잡혀갔다 돌아온 조선여자와, 왜란 중에 성폭행을 당한 여인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자, 선조는 이들과 이들의 자식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포로와, 귀화한 일본인들을 한 곳에 몰아서, 일종의 이방인 공동체 지역으로 만들었는데, 그곳이 바로 이태원이다, (출처 : 임하필기(林下筆記), 동국여지비고 참조). 여기에 칠푼이 중 하나인 인조까지 가세하여, 병자호란때에 끌려갔던 여인들이 환향년(還鄕年)이 되어, 그 자식들까지 상당수가 이곳으로 끌려와 정착하게 된다.
이후,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절치부심 북벌을 준비하던 인조의 아들 효종은, 치욕의 상징인 이태원(異胎圓)이란 지명이, 두고 두고 치욕스럽게 여겨져, 이곳을 배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이름의 梨泰院으로 고쳐 부르게 하여, 오늘에 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수치스런 역사를 배경으로, 사생아로 태어난 이태원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런 이방인의 땅'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이태원을 품고 있는 용산일대는, 조선시대 때부터 군사 관련 시설이 많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태원을 중심으로 일제의 군용기지로 이용되면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가 이곳에 머문 이후, 이태원 또한 군사지역으로 자리잡게 된다.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조선에 온 청나라 부대는, 1882∼1984년간 이태원에 주둔했고, 이후 일본군 조선사령부가 1910∼1945년 조선이 해방되기까지 주둔하였다. 이때부터 근대식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어 '서울의 이방'이 되었다. 광복 이후엔 미군이 이곳을 차지했었고, 6.25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태원 상권은 사실상 미군이 주도했다. 1957년 미군들의 외박과 외출이 허용되면서, 기지촌까지 생겨났다.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군기지에서 흘러 나온 물품들로, 상권이 형성된 이태원은, 이후 미군들을 위한 유흥가로 탈바꿈하여, 기지촌과 미국식 클럽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이후 정부는, 이태원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서빙고동, 한남동, 동부 이촌동 일대에, 외국인 전용주택과 아파트는 물론, 고급 외국인 주택단지까지 건설하였다. 그러자 1960년대 이후 한국에 들어온 각국의 대사관들이, 이태원 지역에 대거 입주했고, 그 영향으로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고급 주택단지가 조성되었다
이태원은 1990년대 이후, 아프리카인의 유입이 늘면서, 현재는 판잣집과 대저택이 공존하는 독특한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기지촌 단속으로 퇴폐업소가 사라지면서, 경리단 길과 더블어, 한국 속의 외국으로 탈바꿈하는 '이태원', 웬지 가까와지지 않는 이국풍이 물씬한 도심지 이태원, 그 이름 저변에는, 이토록 가슴시린 민족의 뼈아픈, 가슴앓이 역사가 숨겨져 있는 이곳이, '할로윈데이'의 명소로 자리매김 되어, 젊은이들 수백명이 비명에가거나, 참상을 당한 장소가 된 것은, 아! 역사는 반복되는 가! 선조와 인조때와 판박이처럼 무능하기 짝이 없는 현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종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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