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진정한 어른이 되자
내가 태어난 고향 임실과 지근 거리에 있는 전주(全州)는, 도로가 잘 발달된 지금은, 10분이면 오가는 거리지만,내가 어렸을 때는 비포장 도로에, 산세와 지형을 따라 길을 낸 완전 사행선( 蛇行線)이어서, 완행버스가 가다 쉬다를 반복해, 보통 한 시간 이상이 걸렸다. 물론 기차도 있었는데 전라선 완행열차는, 하루 두세번이 고작이었다. 당시는 근대화 물결은 찾아 볼수 없는, 농자 천하지 대본(農者 天下之大本)을, 나라의 근간으로 삼았을 만큼, 근대화엔 잠자는 나라였기 에, 늙은이들 보다 젊은 청소년들이, 도시와 시골 할 것없이, 육이오 전란의 참혹한 격동기를 격을 때에도, 마치 개울 물속의 피라미떼처럼 골목마다 아이들로 차고 넘쳤다. 요즘같은 때에 "풍요속의 빈곤'이란 무엇일까? 요즘 젊은이들은 자녀 낳기를 싫어한단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땐, 농기구 만드는 공장은 몇군데 밖에 없었지만, 아이들 만드는 공장은 집집마다 있었다. 당시 우리 정부는, 이렇게 넘쳐나는 청장년들에게, 일거리를 만들어 줄 경제력도 아이디어도 없이, 오로지 자신들의 자리 보존이 최상의 목표 였다.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의 꿈은, 오로지 청 장년들 각자의 몫이었다. 당시는 '집 나가면 고생'이라 할 정도로 우물안 개구리로 사는게 전부였다. 농사와 가축, 그리고 산에서 땔감을 하는 일 등, 단순 노동 외는 할일이 없다 보니, 할 일을 잃은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온갖 도박과, 비행, 술집들만 산간벽지까지 늘어났다. 아! 꿈도 비젼도 없었던 그 시절, 입 하나를 덜기위해 식모로, 선 머슴으로, 타향 객지로 보내어 졌던 그 막막했던 시절, 헐 벗고 주린 그 모진 세월을 어떻게 살았던가! 그 시절 일년 중 제일 어려운 시기이자, 가장 넘기기 힘든 고개가, 문경 새재도 차마령 고개도 아닌, 보리 수확전의 춘궁기인 '보릿 고개'였다. 천만다행이랄까 그 시절 나는, 중농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덕으로 춘궁기에 식량이 떨어져서 밥을 굶어본 일은 없었다. 이 당시 생겨난 말이 십시일반(十匙一飯)이란 말이 있는데, "열사람이 밥 한 수저씩만 보태면, 밥 한그릇이 된다는 말"이다.
그처럼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에도 마을 사람들은, 먹을게 없어 굶고 있는 가난한 이웃, 쇠똥이네와 개똥이네의 결식(訣食)을 챙겼더랬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미풍양속 이었던가? 1970년대를 고비로 암울했던 어둠이 걷히고,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朝鮮)이, 오천년의 잠에서 깨어나, 여명의 아침을 열기 시작했다. 새로 거듭 날 대한민국의 동맥이 될 경부선 고속도로가 뚫리고, 나 또한 1965년 상경한 후, 입신양명의 세속적 청운의 꿈을 접어 버리고, 마침내 1977년 11월 결혼과 동시에, 하나님의 종으로 귀의 했다. 이러틋 한 인간이 인간 본연의 자리로 돌아 오기 까지는, 자신을 바로 찾으려는 절대절명의 동기가 주어져야 한다.
금년 한해도 어느덧 봄 여름 가을을 지나, 한 겨울 섣달이다. 오늘은 온 종일 첫 눈이 오고 있다. 산야가 온통 하얗다. 그래선지 문득 김삿갓(김병연 이조 철종 때의 방랑시인.)의 詩 한수가 떠오른다. "월백 설백 천지백 (月白 雪白 天地白), 달도 희고, 눈도 희고, 온 세상이 다 희고. 산심 야심 객 수심 (山深 夜深 客愁深). 산도 깊고, 밤도 깊고, 나그네 수심도 깊다." 그러고 보니 금년 한 해도 다 기울어 가고, 이제 남은 것은 한 겨울 추위만 남아 있다. 세상은 갈수록 삭막해져 가는데,미처 월동 준비도 없이 한 겨울을 맞고 있는 가난한 이들은, 이 한 겨울을 어찌 지낼까? 지금부터 무려 22년전, 즉 2000년대 부터 지금까지, 전주시 노송동 주민 센터 부근에는, 해마다 성탄절이 다가 오면, 어김없이 얼굴 없는 천사가 나타났다. 이 천사는 주민 센터에 전화를 걸어, 현금과 돼지 저금통이 든, 종이 상자를 놓아둔 위치를 알려주는데, 한두 해 그러다가 만 것이 아니고, 이 일을, 지금까지 해마다 계속해 오고 있다.
2,000년 4월, 한 초등학생이 58만 4천 원이 든 돼지 저금통을, 주민 센터 민원실에 맡긴 것을 시작으로, 작년 12월까지 그 금액은 자그마치 8억 872만원에 이른다. 전화 거는 사람이 다양한 것을 보면, 온 가족이 함께하는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물론 언론에서도 이들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한사코 몸을 숨겼고, 주민 센터 측도 그 의사를 존중해서, 신원확인을 하지 않기로 했단다. 신원 공개를 거부하고 해마다 년말 엄동설한이 오면, 어김없이 나타나 큰 돈을 기부해 오고 있는, 이 가정의 모습에서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선행을 드러내려 한다 그럴지라도 차라리 자기 선행을 온 누리에 드러내고라도, 저물어 가는 세밑 엄동설한을, 추위에 떨고 있는 어려운 이웃들 에게, 사랑의 온기가 많이 많이 스며들었으면 좋겠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들! 사랑은 마음에서 우러 나와야 하는 것이기에 이 가정을 통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본다. 이 땅위엔 보이기 위한 사랑, 보이기 위한 위선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온갖 이기주의가 만연한 오로지 돈밖에 모르는 이 시대에, 20년을 한결같이 우리에게 보여준 참 사랑의 진면목을 보면서, 보여주기식 과시욕에 이골 난 우리들의 '이기적인 마음'을, 너무도 부끄럽게 한다. 주님께서는 율법 학자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십일조에 대해 말씀하셨다. 십일조는 본래 땅을 가지고 있지 않은 레위족과 불쌍한 과부, 고아, 외국에서 귀화한 이민족들을 돕기 위해 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십일조의 근본 정신은, 바로 이웃 사랑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하나님 말씀을 금과 옥조로 삼는 자들이, 십일조를 바치지 않는다."고 꾸짖고 있다.
십일조의 근본정신인 사랑은, 실천하지 않으면서 아주 작은 율법 조항까지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고 자찬하는 너희가 참으로 '가증스럽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오늘을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 모습은 아닐런지? 이런 우리 모습을 보시고서 주님이 혹여, '사랑이 메마른 위선자'라 꾸짖지 않으실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데, 우리는 얼마나 성실했는지, 아님 너무 무심하지는 않았는지,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참회하는 심령으로, 묵상해 보았으면 싶다. 겨우 쓰고 남은 돈 몇푼으로 생색내는 찌질한 맘으로, 모든 사랑을 홀로 실천한 것처럼 오만해서야 되겠는가? 주님은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려면, "먼저 네 마음 그릇을 깨끗이 하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참 사랑의 비결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서가 아니라,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종그니가
우리는 상대방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행동을 할 때 곧잘, "나이 값을 하라."고 힐난한다. 국어사전에서 성인(成人)을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으로 정의하고 있다. 다 자랐다는 것은, 타고난 신체의 성장이 멈추었다는 얘기다. 이때의 나이가 대략 만 19세다. 그럼 몸이 다 자란 나이가 되면 과연 성인이 된 걸까? 내가 임실 땅 시골에서 우물안 개구리처럼 부모 밑에서 지내다가, 1965년 3월 열 아홉살 때, 낯 설은 서울살이를 시작하면서, 어쩜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는 과정을, 책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습득하게 되었다. 시골하고는 180도 로 전혀 다른 서울 생활을, 하나에서 열까지 내가 챙겨야하는, 마치 처녀림을 헤쳐나가듯,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 과정을 격으면서 나는 철이들었다. 몸이 다 자랐다고 어찌 성인이라 말할수 있겠는가! 명실공히 성인이 되려면, 자기 언행에 대한 책임까지 질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요즘 젊은이 들 중, 도리나 의무에 대해서는 뒷전이고, 오로지 권리만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매우 잘못된 인격형성이다.
분명 외형적으로는 어른인데, 하는 모습은 철부지 애 같은 젊은이들이 있다. 옛말에 二十而 冠(이십이 관), 三十而 立(삼십이 립)이라 했는데, 요즘 젊은이들 중에는, 서른이 훌쩍 넘었음에도, 어머니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래서 몸은 어른인데, 정신년령은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마마보이들이 많다. 왜 그럴까? 어른이 되기 위해 겪어야 할 과정을 힘들다고 부모가 대신했기 때문이다. 정신 분석가 '제임스 홀리스'는 진정한 성년이 되려면, 다음 세 가지를 반드시 경험해야 한다고 갈파한다.
첫째, 살면서 인생의 쓴맛 아린 맛을 체험하는 일.
둘째, 자신의 의지보다 더 큰 힘이 있음을 깨닫는 일.
셋째, 자신이 아닌 누구를 아끼고 사랑하는 일.
이를 삶속에서 경험하지 못하면, 자기중심의 사고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즉 삶을 터득한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계란에서 환골탈태하여 껍질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를 보라. 희노애락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식물도, 단단한 씨앗에서 새생명의 발아가 되기까지는, 엄청난 산고(産苦)가 있었으리라! 이처럼 새 생명이 태어나 거나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도, 저절로가 아닌 해산(解産)의 고통과, 성장의 진통이 따르며, 그때마다 감당해야 할 삶의 체험과, 성장과정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연단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내게 주어진 ‘고난’을 무조건 거부할 것이 아니라, 피하지 말고, 마치 조가비가 몸속에 들어온 모래 알갱이를, 고난의 눈물로 천번만번 덧입혀서 진주를 만들어 내듯이,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홀로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과 되어야 할 시련인 것이다.
니체가 갈파한 '생(生)의 철학'과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存)은, 그 사고(思考)와 발상이 동서를 뛰어 넘는, "실존자로서의 인간을 갈파한 일치"이다. 인생은 살아 있는 존재이기때문에, 사는 날 동안 파도처럼 무수히 부딛치는 시련과, 부대끼고 체득하면서 삶이 영글어 가는 것이다. 집어 삼킬듯 거센 파도처럼 다가오는 시련들을, "운명아! 비켜라!" 하고 물리칠수 있는 용기, 바로 이것이 치기를 벗고 발돋움하는 적응능력이요, 홀로서기인 것이다. 즉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부여된 여건을, 능소 능대 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비로소 단독자로 홀로 설수 있는 성년이 되 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적인 성장은, 어릴때는 부모슬하에서 자라면서 마마보이로 멈출 것이 아니라, 홀로서기의 예행연습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인간(人間)이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사람과 사람사이의 법도인 도리와 이치를 배우지만, 동물들은 오로지 육체의 감각인 오감(五感), 즉 시(視), 청(聽), 후(嗅), 미(味), 촉(觸)에 의한 육체의 본능을 따라 살기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과는, 근본이 다르다. 그러기에 비록 몸은 성인이 되었어도, 도리를 아는 인간이 아니라 형상은 인간이나 마음은 짐승같은 인간들에의해, 인간사회가 어지럽혀지고 있다.
손자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패(知彼知己 百戰不敗)라 했는데, 하나님을 바로 알고 나를 알면, 실패할 인생은 없다. 사람은 인간(人間)이기 때문에 공생하며 살수밖에 없지만,또한 사람은 육체와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이므로, 하나님의 섭리를 떠나 살수 없다. 영적 성장은 세월과는 무관하게, 날마다 하나님과 영적인 교감과, 영의 양식인 말씀의 꼴을 먹어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비단 육체뿐만 아니고, 영적으로도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신다. 왜냐하면 세상 지식과 세상을 보는 안목이 아무리 뛰어나도, 자기 자신을 다스릴수 있는 자유의지가 살아 있어야 하기때문이다.
구약성경 사사기를 보면, 아득히 먼 옛날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도 죽고,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도 죽자, 이스라엘엔 영적 빙하기가 왔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열기는 얼어 붙고, 오로지 육신의 안목을 따라 사는, 육신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인간들로 가득 찼다. 광야에서 사십년동안 연단의 세월을 거쳐,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가? 가나안족속들이 모두 타락하여, 먹지못할 들포도 들이 되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참 포도열매 맺기를 바라고 심었더니, 저들 또한 참 포도가 아닌 들 포도를 맺었을 때의,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는가? 신세대들은 기성세대를 닮아 간다. 요즘 이들의 정치하는 작태를 보라! 젊은이들이 그들을 통해 무엇을 배우겠는가? 서울 이태원 사건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비명횡사를 했음에도, 그 누구하나 "내 잘못이라며,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는 사람이 없다.
참 철면피처럼 뻔뻔하고 옹졸하다. 나이만 먹었다고 어른이 아니다.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갈 때, 진정한 나라의 어른이 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은, 소련과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며칠이나 버틸까 했었고, 미국은 "비행기를 보내줄테니 미국으로 망명하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국군 통수권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현재 해외에 체류하고 있던 우크라이나 젊은들이, 속속히 고국으로 돌아와, 독립 전쟁에 참여 하고 있다. 국난의 위기에 서 있는 우리 나라엔, 언제쯤 이런 백절불굴의 통수권자가 나올 것인가!
종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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