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정글과 인간
내 나이 40대 중반까지도, 나라에서는 청 중년층을 상대로, 산아제한 불임 수술을, 거의 의무적으로 독려했었다. 그래서 이 수술을 하게되면, 여러가지 혜택이 주어지기도 했다. 그 결과는 민족 단절이라는 백척간두의 위기를 가져왔다. 인구조절은 하나님의 영역이지 인간의 영역이 아님에도, 하나님의 뜻을 역린한 결과의 후유증은, 곧장 다음세대 에게로 넘어와서, 동기간이 없이 홀로 마마보이로 자란 신세대들은, 대부분 사회 공동체에 대한 의식이 결여되어, 공동사회 진입이 어려워지게 되고, 사회 적응능력도 떨어지고, 홀로서기마저 힘들어져 공동체의식 또한 결여되어, 사회공동체의 요람인 '신혼 가정'대신, 독신세대가 그야말로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면서, 출산률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0.7%, 현재를 두고 진단한다면, '멸종 위기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이다. 젊은 층과 노년 층의 반비례로, 노령화에대한 정부의 근본적인 원인·해법의 엇박자로 인하여, 대책의 실효성은 떨어지고 있다. 저출산의 근본적인 원인은,"혼인율이 낮아진데 있기” 때문에, 그 처방으로, “여성이 출산을 해도, 경력이 단절되지 안토록 안배를 해주는 것이, 최선의 대책이다."라고 진단했다. 이 진단은 일본 인구동향 분석에서, 한국이나 일본도 아랍이나 인도네시아처럼 천연자원이 없는데, 국가를 지탱할 버팀목인 젊은 인구가 줄어드는건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여자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수) 은, 5년 전부터 1명을 밑돌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인구 회복은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고, 멸종위기 단계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인구전문가의 진단이다. 지난해 한국의 출산율이, 역대 최저치인 0.78명을 기록했다.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의미다. 이웃나라 일본은 어떤가? 지난 해 2022년 일본의 합계 출산율은 1.27명으로 한국보다 높다. 그러나 같은 해 고령인구(65세 이상) 비율이 30%에 육박하고, 출생아 수가 80만명 이하로 떨어지면서, 일본 정부 또한 저출산 해법을 심각하게 고심하고 있다. '아마노 연구원'은, 지금까지 일본 저출산대책의 실효성이 떨어진 것은, 원인과 해법 간 엇박자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실제 일본 부부들의 자녀 출산비율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변함이 없는데, 문제는 저출산 원인의 90%는 미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혼비율이 점차 줄어 들어, 출산율이 낮아진 것인데, 정부 정책은 이를 간과하고, 양육에만 집중돼 왔다"는 것이다. 물론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얘기일수도 있지만, 그러나 두가지 모두 깊이 숙고할 일이다.
국가가 시책을 입안할 때, 반드시 선행되어야할 것이, "사회의 당면문제를 정확히 파악하여, 그에 꼭 맞는 처방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오진(誤診)을 받아 그 처방대로 약을 복용한들, 무슨 효험이 있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저출산의 원인은, 혼인율의 감소에서 오는데, 정부 대책의 초점은 엉뚱하게, 아동수당을 비롯한 출산·양육 분야에만 맞춰져 있다는 지적이지만, 그러나 커피가 가는 곳에 설탕이 따라가듯, 두 문제의 상관관계를 심도있게 살펴봐야 할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저출산의 근본 원인으로 꼽은, 혼인율 감소 현상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아마노 연구원은 ‘남녀 임금 격차’에 따른 것으로 분석한다. 그는 “경기가 어려워질수록 여성의 취업이 남성보다 어려워지고, 상대적으로 이러한 격차가 덜한 '도쿄'로의 여성 인구 유입이 많아지고 있다”며, “또 최근에는 결혼 후에도 맞벌이를 원하는 젊은 세대가 많아, 그런 환경이 비교적 잘 갖춰진 도쿄로 이동하는 인구가 많아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그럼 우리나라는 어떤가? 젊은이들은 주거문제등 많은 취약을 알면서도, 대도시로 가고 있다.
이런 경우 새로운 곳에서의 적응으로, 결혼 적령기를 놓쳐서 혼인을 하기 어려워지는 경우가 있다. 우리와 지근거리에 있는 일본은, 우리의 젊은세대와 사회문화 환경이 비슷함에도, 그래도 일단 결혼을 하면, 여성들은 모두 아이를 가질 맘을 갖는다는데, 세계 최저치의 낮은 출산율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는, 남녀 불평등 사고방식때문에, 극심한 임금 격차로 출산할 마음의 여유가 적다는 분석이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국가 중에서도, 남녀 임금 격차가 31.1%나 될 정도로 임금격차가 심각하다. 이것은 조선시대 부터 내려 온, 남존여비의 앙상레짐이, 우리사회의 무의식속에 DNA처럼 살아 있어서, 세계 유일하게 남성이 여성보다 30% 이상 급여가 많은 나라가 되었다. 이러한 저출산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서, 혼인율을 높일 수 있는 지원책으로, 결혼 후에도 맞벌이를 유지할수 있게 해주는 대책이 절실한 것은, 신혼가정이 안심하고 아이를 출산할수 있도록, 요람을 마련해 주는 일 일것이다. 산야(山野)의 이름모를 들 풀도, 가을이 짙어지면 성장을 멈추고, 꽃부터 피우며 열매를 맺는다. 소나무도 병들면 온 힘을 다 쏟아 많은 솔방울을 만든다. 종족보존을 위한 병든 소나무의 눈물겨운 모습이다. 눈도 귀도 입도 보이지 않는 산야의 식물들도 계절을 알고, 또한 자기의 생애가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까지 알고서, 종족 보존을 위하여 혼신을 다해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데, 유독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들은, 이제 한민족이 멸종의 위기를 맞아, 민족이 그야말로 멸종위기에 와 있는데도, 오로지 일신의 안일에만 젖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불감증이다.
하늘이 내려준 종족 보존의 법칙마저 망각하고 있는 것은, 혹여 인간 DNA에 돌연변이와 같은 흠결이 생긴 것은 아닐까? 아무리 제도가 잘 갖춰져 있어도,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팽배하게 되면, 민족단절의 위기가 온대도, 결국 저들은 갈데까지 가지 않을까 싶다.그래서 여성이 출산을 해도, 자신의 커리어에 지장이 없다고 느껴져야, 비로소 출산 본능이 살아날 것이기 때문에, 결혼할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게, 선결문제일 것이다. 아무튼 대한민국이 단절되는 불행을 막는 나라의 씨스템, 즉 종족본능을 일으킬수 있는, 비젼이 선결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자연히 삶에 희열이 있어야 한다. '보람'도 그중의 하나다. 나는 어제 들깨를 심으려고 땅을 팠더니, 땅속에서 크고 작은 지렁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땅이 살아 있다는 징조다. 이처럼 땅속에서 사는 미물들도 많다. 과연 그 미물들에게도 무슨 불만이 있을까? 흔히 인간의 일생을 얘기할때, 네발에서 두발로, 그리고 종내는 세발로 마감한다. 이것은 나 홀로 설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의 근본은, 먼저 참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초의 인간으로 돌아갈수 있는 인간교육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 토대를 누가 세울수 있을 것인가?자녀를 낳을 수 있는 파격적인 환경과, 여건을 만들면 출산을 할까? 현금성 지원책으로는 언발에 오줌누기에 불과할 것이다. “만약 결혼 지원금을 기존 약 100만원에서, 약 1000만원으로 올린다면? 전혀 영향을 못 미칠 언발에 오줌누기식 발상에 불과할 뿐이다. '현재 국내 체류 외국인은 230만명' 으로, 모두 경제가능 노동자들이다. 만약 젊은 외국인의 유입이 없다면, 도농(都農)할 것없이, 당장 모든 생산기능이 마비되고 말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예전엔 외국인을 혐오시하는 경향이 농후했 으나,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할 나위없이 가장 좋은 해결책은, 하루 빨리 통일을 앞당기는 일이다. 아! 통일이여! 어서오라!
【종그니칼럼】정글과 인간
노루가 자기 방귀에 놀란다고 하지만 사람도 매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도둑이 제발 제린다." 아무리 간 큰 도둑이라도 죄 앞에 가슴이 옥죄어 오는 것은, 도둑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정글의 강자 호랑이가 병든 듯 걷는 까닭은, 먹잇 감을 홀리기위한 기만술이다. 그럼 노루와 같은 초식동물들은 본능적으로 무엇이 발달하였을까?
이들은 무자비한 포식자를 피하려고, 바람 소리에도 기민하게 줄행랑을 치도록 오감기능이 잘 발달되었다. 육식동물과 초식동물들은, 서로 상대의 수를 읽는 기능이 본능적으로 발달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호랑이는, 온몸에 힘을 빼고 병든 짐승처럼 비틀대다가, 먹잇감이 방심한 틈을 타 잽싸게 낚아 챈다. 위풍당당한 모습을 확 낮추고,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 내는 기만술이다. 거미가 날 벌레들이 잘 날아 다니는 골목에, 아주 절묘하게 끈끈한 그물을 치고, 죽은듯 기다리는 모습을 보라! 이처럼 우리가 정글의 생존 본능에서 배우는 생존의 이치가, 아주 다양하다.
"노루는 자기 방귀 소리에 놀라 십 리를 도망간다"는 말이 있다. 겁 많은 노루를 빗대서, 쓰는 말이다. 노루는 왜 이런 바보 같은 행동을 할까?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남았을까. 정글은 바보 같은 행동을 하는 생명체를 가차 없이 걸러내는데 말이다. 우리에게는 바보처럼 보이지만, 노루 입장에서는 전혀 아니다.
이제는 한반도에서 야생 호랑이를 볼 수 없지만, 수수만년 동안 노루는 호랑이의 먹이감이었다. 우리가 백두산 호랑이라고 부르는 시베리아 호랑이는, 그림자처럼 다가 와, 말 그대로 비호 같이 덮치는데 아주 능숙하다. 이런 호랑이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데, 무슨 소리가 났을 때, 이를 무시한다면 생존하기 어렵다. ‘지나가는 바람 소리겠지’라고 생각하거나,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하고 방심하기 보다, 자기 방귀 소리라도 일단 안전한 거리까지 피하고 보는 게 초식동물의 생리다. 그러니 거의 모든 초식동물들이 이런 성향을 갖게 됐으리라
바보짓 같이 보여도,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람처럼 피하고 보는 조심성이 초식동물들을 살리는 것이다. 물론 초식동들이 이럴수록, 호랑이의 삶은 고달파 질 것이다. 천하의 호랑이라도 먹어야 산다. 그래서 노련한 호랑이들은 아주 의뭉한 전략을 쓴다. ‘채근담’에서는 이를 두고, 응립여수 호행사병(鷹立如睡 虎行似病)이라 하였다. (매는 조는 듯이 앉아 있고, 호랑이는 병든 듯 걷는다.) 매는 창공 500m의 거리에서도 지근 거리처럼 ‘매의 눈'은 날카롭게 먹잇감을 예의주시하고, 호랑이는 위풍당당하게 걷는 게 당연한데, 왜 매는 조는 듯이 앉아 있고, 호랑이는 병든 듯 걷는다고 할까? 질문을 반대로 던지면 답이 보인다. 그게 바로 살아가는 정글의 법칙이다.
만일 매가 예리한 눈초리를 번득이고, 호랑이가 몸에 힘을 주어 걷는다면,
다른 동물들에게는 당연히 위험신호를 주게 된다. 항상 이들과 멀리 떨어져야 신상에 이로운 노루나 초식동물들에게 이 모습은, 위기의 징조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조만간 생과 사를 가르는 위험이 자신들에게 닥칠 것이라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초미의 신호를 보고 바람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인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 평소 한 성격 하는 상사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은데, ‘별 일 있겠어? 저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자기 방귀 소리에 놀란 노루가, 일단 십 리쯤 달아나듯 미리미리 조심하는 게 나을까?
노련한 매와 호랑이는 조는 듯 앉아 있거나, 병든 듯 비틀거리며 걷는다. 그래야 사냥감들이 경계심을 풀 것이고, 배가 고플 때 쉽게 사냥감을 얻을 수 있다는 본능적 생존전략이다. 특히 산전수전 다 겪은 호랑이들은 힘을 쭉 빼고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닌다. '지금 나는 배가 불러서' 아님, '지금 나는 몸이 병들어서 너희들을 사냥할 관심이 없어'라는 제스처를 온몸으로 보이면서 말이다. 물론 풀린 눈 속의 예리함으로 주변 상황을 전방위로 ‘스캔’ 하는 건 당연지사다.
이렇게 어슬렁거리다가 괜찮은 대상을 발견하면, 슬슬 따라간다. 목표물의 행동을 잘 관찰할수록 먹잇감들의 패턴을 알 수 있다. 패턴을 알면 목표 달성이 쉬워진다. 맹수는 조용히 기회를 만든다. 물론 이것만으로 성공을 보장할 수는 없다. 무심코 밟은 나뭇잎이 바스락거려, 다 잡은 먹잇감을 놓쳐버릴 수도 있다. 나무 위의 원숭이들이 소리를 질러 산통을 깨기도 한다. 사슴들 또한 아무리 배가 고파도, 한 녀석은 반드시 주변을 살핀다.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곧 바로 ‘경계경보’를 발령해 호랑이의 존재를 알린다.
재미있는 건 사냥감들에게 들켰을 때 호랑이의 태도다. 멋쩍은 듯 먼 산을 쳐다보며 딴청을 부린단다. 모든 증거가 완연한데도 오리발을 내미는 ‘발 연기’를 하는것이다. 다르게 보면 밀림의 제왕도 이런 노력을 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기다. 반면 초보 호랑이는 호랑이답게 힘을 잔뜩 주고 다닌다. 하지만 이 때문에 먹고 사는 일은 어려워진다. 경쟁자도 사냥감도 사라지니 말이다. 호랑이답지 않아야 잘 살 수 있다는 묘한 역설이다. 쓸데없이 주목받는 것만큼 쓸데없는 것도 없다.
호랑이들의 세상에서 힘을 빼고 어슬렁거릴 수 있다는 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아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할 때 상황을 내 편으로 만들어 놓고 시작할 줄 안다는 것이고, 절호의 기회를 만들 줄 아는 노련함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호랑이니까, 배가 고프니까 일단 달려보자고 하는 건 굶어 죽는 지름길이다. 사냥감들도 수수만년 동안 체득해 온 본능적인 감각이 축적되어 있어 쉽게 잡히지 않는다. 실제로 호랑이의 사냥 성공률은 최선을 다해도 10% 미만이라고 한다. 그러니 무작정 쫓아가는 건 지혜로운 사냥술이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정글의 세상을 관조하며, 인간이 사는 사회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본다. 영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액톤경은 말한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권력은 부패하기마련이며 절대적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고 일갈했다. 권력이 한 인간에게 집중되는 것을 썩은 물에 함의하고 있다. 우리 나라 역대 권력자들을 회상해 보면, 힘을 뺄 줄 아는 호랑이 같은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호랑이는 커녕 삵도 못되는 역사의식조차도 의심되는 이들이 나라를 어지럽혔고, 지금도 여상하다. 이를 아시라! 인간 사회는 육체의 본능대로 살아가는 정글사회가 아니다. 초식의 인간이 있고, 육식의 인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그가 강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바로 세우지 못한 나약함 때문이다.
인간은 "발은 땅에 머리는 하늘에 두는, 짐승과 근본이 다른 존재."다. 바닷물이 많아도 마실 물은 아니고, 비가 많이 내려 물이 범람해도 마실 물은 아니다. 마음이 밝으면 불꺼진 방 안에도, 빛나는 하늘이 있고, 마음이 어두우면 대낮에도,칠흙처럼 어둡다. 오늘만 보지 말고 내일을 볼 줄 아는, 그러한 어진 사람, 마치 희랍의 디오게네스처럼, 한 낮에 등불이라도 켜고 다니며, 이 시대가 요구하는 그러한 일꾼을 목마르게 찾고 싶은 작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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