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박사(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기도 하지만, 또한 갑질 공화국(共和國)이다. 그래서 <갑질>이 무엇인지 알아봤다. 영어에는 갑질이라는 단어가 없다. 그냥 Gapjle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갑질하다’라는 것을 풀어서는 ‘to overuse One’s Power’라고 되어 있다. 즉 자신의 권세를 과도히 사용하는 것을 갑질이라고 한단다. 갑질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첫째, 일반적으로 갑질이라 함은,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가 자기 상대방에게 오만무례하게 행동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하며 제멋대로 구는 것이라 한다. 둘째, 갑질 고객도 있다. 갑질 고객은 직원에게 오만무례하게 행동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제멋대로 구는 고객을 의미한다. 셋째, 울트라(Ultra) 갑질도 있다. 

그러면 갑질은 어디서 올까?
갑질은 우월감에서 나온다. 상대보다 자기 자신이 우월하다는 생각은 따지고 보면 열등감에서 나온다. 자신감과 우월감은 서로 다르다. 자신감은 확신에서 오지만, 우월감은 상대를 낫게 보고 자기가 우위에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상대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고 멸시하는 것은 정말 못난이들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우월감과 열등감은 결국 한통속이다. 모든 인간은 타락했고 평등하지만 모든 인간은 타락했고 죄로 어두워져 있다. 그러므로 누가 누구를 정죄하거나, 상대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고 갑질하는 것은 정말 잘못되었다고 본다. 

때문에 우월감과 갑질은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큰 문제가 된다. 할아버지가 3선 위원이니, 작은아버지가 무슨 판사니 하면서 상대방을 멸시하는 갑질은 참으로 역겹다. 본래 한문에서는 갑(甲)과 을(乙)은 오래 역사를 가진 단어로 갑골문자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수직 문화이기에 자신보다 조금만 아랫사람이라고 생각되면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위압적으로 상대방에게 마음에 상처를 주는 무례한 행동을 한다. 또 갑질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서, 상사가 아랫사람에게서도 나타나고, 권력을 가진 자가 권력을 못 가진 자에게 갑질을 하고, 공권력을 가진 자들은 일반 민초들에게 갑질을 하되 상대방이 감당할 수 없는 모멸감을 갖도록 멸시하는 것이  오늘날 다반사이다. 뿐만 아니라 정치하는 사람들은 표를 구걸할 때는 천사처럼 한없이 낮아졌다가도, 일단 국회에만 입성하면 완전 다른 사람으로 바뀌고, 수백 가지의 특혜를 받으면서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갑질을 한다. 그들은 자당의 유익을 앞세워 희한한 거짓 정보를 유통 시키고 마타도어 작전을 하는가 하면, 감옥에 가야 할 사람들이 버젓이 의정 단상에서 할 말 다 하고, 국민을 희롱하고 있는 것도 모두 갑질이다. 그러니 지금 대한민국은 <갑질문화>라는 질병에 걸려 있다. 쥐 꼬리 만한 권력만 있어도 아랫사람을 개무시하고, 이권을 챙기는 사회이다. 특히 민주화했다던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면, 어느새 그들은 갑질 전문가들이 다 되어 있다. 

자유대한 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진취적 국가인 것은 맞다. <K-POP>, <K-Culture>, <K-방산>으로 참 잘 나가는 국가인 것은 맞지만,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질병은 갑을 관계의 긴장과 아픔 속에 있다. 그래서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권력을 잡든지, 때 돈을 벌든지 하면 삶의 목표가 갑(甲)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모두가 권력 콤플렉스와 부자 콤플렉스에 빠져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는 어디를 둘러 보아도, 정의와 윤리와 진리를 추구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등신 소리를 듣는 환경이다.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무에게도 무시당하거나, 멸시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으면서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이 행복한 나라일 것이다. 아모스 선지자의 말처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가 우리의 소망이다. 그럼에도 최근에 서초구 어느 초등학교의 초임 여자 선생님을 향한 학부형들의 집단적인 갑질에 시달려 그만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꿈 많은 25세의 젊은 여선생님이 오죽했으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싶다. 교육 생활에 몸담았던 한사람으로 참으로 애처럽고, 민망하고 가슴이 아프다. 알려진 바로는 그동안 여교사는 <갑질 학부형>들에게 감당키 어려운 모멸감을 받고 있었고, 교사로서 자존감을 짓밟히는 갑질을 당해왔다고 한다.

지금 대한민국의 공교육은 죽어있다. 교사들 대부분이 전교조에 소속되어 있고, <학생인권조례>라는 것을 만들어, 선생이 학생들을 체벌하면 형사책임을 묻게 되어 있다. 전교조가 누구인가? 북한 사회주의 사상을 추종하는 세력들이다. 이러한 전교조 그룹이 한국 교육계를 장악하고 있으니 우리 대한민국의 공교육이 큰 위기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들리는 말로는 학생들이 선생님들을 피멍이 들 정도로 두들겨 패도 체벌할 수 없단다. 그러니 이는 자기 아버지를 고발하는 공산당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하니 실로 섬뜩하다. <학생인권조례>로 인해 <교사의 인권>은 바닥에 추락해 있다. 학부모들이 담임 선생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고 있으니 그 아이들이 여선생을 놀림감으로 만들고, 남 선생님께 대들고 폭력을 행사해도 되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제 자식 귀한 것만 생각하고 교사들에게 막말하고 갑질하는 학부모들은 반성했으면 한다. 사실 80이 넘은 나 같은 사람도 학생들이 무섭다. 우리 집 앞 공용주차장에 중학생들이 모여 흡연을 하고 꽁초를 함부로 마구 버려도 두들겨 맞을까봐 감히 말을 못 하고 있으니 말 그대로 세상은 말세다. 

 「갑질은 우월감에서 나오고 우월감은 열등감에서 나온다!」 갑(甲)이나 을(乙)이나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만들어진 평등한 인생이니,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존경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정성구칼럼】참 예배를 회복하자

정부는 <코로나19 감염예방법>을 빌미로, 자유대한민국의 모든 교회들의 예배를 통제하고 있다. 음악콘서트는 5,000명을 허용하고, 전철, 버스는 자유롭게 하면서, 왜 그렇게도 교회예배는 작심하고 19명까지로 정해놓고 있는지...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자는 반드시, 결국 망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나마 늦게라도 교회 지도자들은 정부의 과잉대응을 지적하고, 법적 대응을 하면서 다시 전과 같이 <대면 예배를 드려야겠다>는 <예배 회복 운동>이 여러 곳에서 힘을 얻고 있다. 교회 지도자들이 비록 처음부터 정부의 예배 통제에 항거는 못했지만, 지금의 예배회복운동은 뒷북을 치는 일이다. 그래도 뒷북이라도 치는 것은 옳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냥 전과 같이 예배를 다시 드리자는 캠페인은 생각해 볼 점이 너무 많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제대로 된 예배를 드렸는지 부터 반성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진정으로 그토록 생명보다 귀하다면, 교회 지도자들은 처음부터 생명 걸고 예배를 사수했어야 했다. 그러니 정부 권력에 의해서 기독교 탄압의 방법으로 교회와 예배가 발가벗긴 상태에서 그냥 예배회복운동 만으로는 안된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카톨릭의 미사와 전혀 다르다.
예배는 종교행사가 아니다.
예배는 콘서트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예배는 성경적이고, 개혁교회의 전통에서 한참 멀어진 매우 인위적이고, 형식적이고 이교적 예배가 많았음을 반성해야 한다.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삼위 하나님이시지만, 대게는 매우 인본주의적이고, 청중의 입맛에 맞고, 감성에 맞고, 즐겁게 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필자는 여러해 전에 남미의 잘 알려진 신학자 한 분을 모시고, 서울의 한 대형교회에 예배를 드리려고 갔었다. 예배가 끝나고 나는 그에게 “오늘 예배가 어떠했나요?”라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은 <마치 미식 축구시합을 본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남미 사람들의 눈에도 한국교회의 예배는 마치 풋볼 게임을 구경하는 것처럼, 그저 즐기고 기분대로 하는 <감성적 예배>라는 것이었다. 오늘 한국교회는 교파를 막론하고 고성능 전자악기로 빠르게 연주하고, 드럼을 치며, 고래고래 고함을 치면서 CCM을 불러대고, 심지어 괴상한 율동을 하면서 예배하는 곳도 많았다.
 
그러니 교회 안에는 록 음악 같은 복음송은 있는데 경건한 찬송은 없다. 또한 어떤 목사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찬송이 느리면 은혜가 안되고, 빨리 부를수록 은혜가 된다고 부추기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예배 분위기에 성삼위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드리는 영적예배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예배를 콘서트쯤으로 생각하는 목사는 사람을 높이고, 사람들이 영광을 받도록 하고,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순종과 충성을 강요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성경 몇 구절을 인용하여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으로 둘러대고 있으니, 이렇게 합리화 하는 것은 예배가 아니다. 감성이 곧 영성이 아니다.
 
또 어떤 경우는 목회자가 사적, 신비적 체험을 성경 진리인 듯이 말하고, 성도들에게 그것을 진리로, 신앙의 표본으로 삼으려고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뿐만 아니라, 시중에 널리 깔려있는 심리학적 인본주의적인 책들을 대충 읽고, 그것이 마치 성경의 진리인 듯이 우겨대는 설교자도 적지 않다. 교회 개혁자 요한 칼빈(J. Calvin)은 500년 전에, “목사를 망하게 하는 것은 야망(Emvision)이다”라고 했다. 교회성장의 꿈은 좋으나 그것이 목사개인의 야망이 되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 성경적, 비복음적, 비교리적인 것이라도 목사의 야망에 휘둘리는 경우가 많이 있다. 목회란, 목사 개인의 헛된 욕망과 꿈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다. 수가 적어도 하나님의 복음을 세상 끝날 까지 증거 하겠다는 순수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 회복은, 코로나19가 잠잠해지고 정부가 대면예배를 허용한다는 명령을 한다고 해서, 예배가 회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 예배 회복>은 무엇일까?
그것은 <성경대로의 예배>이다. 또한 교리적으로 맞는 예배회복이 있어야 한다.
요4장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에서, 그 하나님은 영이라고 했다. 그런데 영은 옛 번역대로 대문자 Spirit로서 일반적인 영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이시다. 곧 성령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진리란, 헬라어로 <άλήθεια>인데, <허구(Fiction)>의 반대어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진리라는 것은, <구약에 기록된 모든 메시야의 약속이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 메시야가 나시리라는 구속사적 진리를 믿고, 순종하면서 드리는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라는 것이다.
 
예배 없이 구원 없고, 예배 없이 교회 없고, 예배 없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 예배회복은 전과 같이 예배를 다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런 때에 엉망진창이 되고, 인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 예배의 형태를 <하나님의 중심>의 예배로,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로, <성경 중심>의 예배로, <개혁교회의 예배> 원리를 회복해야 하리라고 본다.
 
참 예배 회복은, <교회가 참 교회가 되고, 목사가 참 목사가 되는데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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