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선 목사, 도서출판 고백과문답 대표

기회주의자(Opportunist)와 관련하여, 위키백과는 “일관된 입장 없이 그때그때의 정세에 따라 자신에게 이로운 쪽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 정의한다. 그리고 ‘기회주의자’라는 단어의 시작은 1880년대 프랑스 제3공화국 시기 ‘기회주의 공화당’(Républicains opportunistes)에서부터 기원한다. 

하지만 프랑스의 기회주의 공화당은 프랑스 제3공화국 시기에 공화주의를 추구하면서도 보수적인 세력들의 눈치를 보아서 사회보수주의를 추구하거나, 혹은 반노동 정책을 지지하기도 하는 등 일관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이미 그 기원에서부터 중도적인 입장이기보다는 그야말로 확고한 원칙적 입장을 지니지 못하고 상황이나 세력관계에 따라 동요하는 무원칙적인 행동을 보였음을 알 수가 있다.

사실, 기회주의라는 것은 굳이 19세기 프랑스의 정치적 배경에서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인간의 부패한 본성 가운데 하나인 무능력하고 우유부단함을 뿌리로 하는 것이다. 예컨대 기독교 신앙을 지향하는 기독교회 안에서도 부패하여 연약한 인간의 본성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 자연스럽다는 것은 원죄로 말미암은 죄책과 부패가 고스란히 반영된 자연스러움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진리에 굳게 뿌리를 내리기보다는 주어진 현실에서의 이익과 생존을 지향하는 양상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딤전 6:5절에서 사도 바울이 권면하는바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이 바로 기회주의자들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현실에서 기회주의자들은 어느 교회와 회중들 가운데서도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심지어 ‘개혁주의’를 올곧게 표방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과 명령을 기준으로 판단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세나 생존을 우선으로 고려하고 판단하여 행동하는 이율배반(antinomy)의 모습을 얼마든지 볼 수가 있다. 

상황과 형편이 좋으면 엄밀한 개혁주의자로서 행세하지만, 상황과 형편이 곤란할 것 같은 정황이 보이면 얼마든지 기존의 입장도 바꿔 버릴 수 있는 그런 기회주의자들이 개혁신학을 지향하고 표방하는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널리 퍼져있는 것이다. 

굳이 엄청난 부귀영화나 목숨을 담보로 해야만 하는 치명적인 상황이 아니라, 그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상적인 생활이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서 그처럼 기회주의적인 처세를 일삼는 신자들을 얼마든지 볼 수가 있다.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의 문제가 불신앙과 배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에 대한 충성의 문제일 뿐이라고 핑계하였던 목사들과 신자들의 경우처럼 말이다.

그런데 디모데전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은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에 관하여 “다툼” 곧 분쟁을 야기하는 자들로 언급하는데, 그러한 분쟁은 특별히 “진리”와 관계된 것으로 언급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경건”이 지향하는바 “진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경건”에 대하여서도 자신들의 이익과 관계하여 판단하며, 그런즉 당연히 자신들의 이익을 거스르는 방향에 놓인 진리와 관련하여 다툼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는 롬 16:17절에서 더욱 명확하게 언급되는데, 로마서 16장에서 사도 바울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은 성경의 진리와 가르침에 분명히 반대되는 위치에 있는 이익들을 위하여 얼마든지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이니, 이어지는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르기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라고 말했다. 바로 이러한 자들이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자기들의 배만 섬기”는 자들로 인한 분쟁은 결코 자신들의 이익에 국한해서만 파급되는 것이 아니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은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여서라도 자신들의 배를 위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들의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를 소수의 개인적 견해로 한정하지 않고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믿음이 연약하고 쉬이 동요할 수 있는 “순진한 자들”을 자신들의 입장으로 끌어들여서 분쟁을 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특정한 회중만이 아니라 심지어 전체 교회에까지 자신들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다툼을 일으키곤 한다. 마 15:14절에 기록한바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볼 수가 있듯이, 그러한 자들은 자신들의 배를 섬기기 위하여 온 회중과 교회까지 구덩이에 빠뜨리고 마는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자들의 영향력이 심지어 세속(secular)이라 칭하는 사회와 정치의 영역에까지 치닫고 있다는 점이다. 어느 시대에나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은 기독교 신앙과 교회에 국한하여서만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신앙이 자리한 그 사회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온 세상을 구덩이로 몰아넣는다. 

작금의 대한민국 안에서 기독교가 그렇게 하고 있으며, 역사 이래로 거의 모든 나라와 사회 가운데서 자기들의 배만 섬기는 가라지들이 교회와 사회 전체를 망가뜨려서까지 자신들의 이득을 추구했음을 볼 수가 있다. 심지어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의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극소수의 신앙인들 가운데서도 자기 배만을 위하며 섬기는 자들을 얼마든지 볼 수가 있으니, 바로 그러한 자들 가운데서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 기득권을 더욱더 구가하고 유지하려는 부유한 자들의 시류에 동조하여 굳건하지 못한 믿음을 지닌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선동하고 있지 않은가! 해묵은 반공주의의 이념(Ideologie)을 앞세워서 말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순진한 자들”이란 분명 굳건하지 못한 자들이다. 아직 자기 배만을 섬기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믿음에 있어서 그 의미와 맥락을 정확히 이해하고 사고하며, 그리하여 확실하고도 굳건하게 믿음을 견지하지 못하는 아직 피상적인 수준의 믿음을 따르는 자들을 일컫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자들에게 경건을 자기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행태가 고스란히 구덩이에 이르도록 어리석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자들의 마음을 동요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행태를 직시하게 만드는 성경의 진리까지라도 살짝 가리고 변경하기 위한 분쟁을 야기한다.
신앙 안에서의 이러한 불류들과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딤전 6:6절에서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고 했다. 그리고 얼핏 8절에 기록한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는 언급을 통하여서 소유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마음을 둘 것을 권면하였는데, 그 다른 것이란 바로 5절에서 언급하는 “진리”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착념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진리에 착념하지 못할 때에는 필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부하려는 마음에 온통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며, 바로 그것이 자기 배만을 섬기는 기회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생활 패턴으로 이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모든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실패한 것 곧, 하나님의 말씀-이것은 또한 진리이다-에 머무르지 않고 이생의 안목에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을 거스르는-이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는 권면만큼이나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양상이다

참으로 엄청나게 반대되는 양상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히 12:14)할 것임이 분명하다. 참되고 온전한 믿음이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배운 교훈에 머무르며 그것에 만족하는 것이다. 

바로 이를 생각하고 확신하지 못하는 “순진한 자들”과 더욱 자기 배만을 위하며 섬기는 기회주의자들이 너무나도 득세한 시대일지라도,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그처럼 “악한 데”에 대해서는 미련하고 오히려 “선한 데”에 지혜로운(롬 16:19) 자들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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