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 칼럼] 시대를 바라보며 문득 떠오르는 이름!

어느 철인(哲人)이 말하길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다." 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나의 경우 그 생각을 바로 글로 저장해 두지않으면 바로 망각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생각한 것을 글로 붙잡아 두려는 것이 책이다. 젊었을 때나 늙은 지금이나 수많은 생각들이 명멸하는데 그때 붙잡지 않으면 금방 날아가 버린다. 칠십이 넘고부터는 건망증이 점점 심해져서 안경을 끼고도 안경을 찾고 물건을 손에 들고도 찾고 해서 혹 이게 치매 전조증이 아닐까하고 있던 차에, 누가 "글을 매일 써보라 그러면 건망증이 치료될수도 있다."고 해서 글을 쓰기 시작한게 벌써 5년정도 되지 싶다. 

이렇게 편린처럼 나의 삶속에 녹아있던 것들이 하나 둘 모아졌는데 나의 소중한 벗 김용배 장로님에게 카톡으로 보낸 것들 중에 2022년에 쓴것을 골라 친구가 편집해서 책을 내게 되었단다. 옛말에 "재주는 곰이 부리고 수입은 뙤놈이 챙긴다"더니 그가 수고롭게 펴논 상에 내 숱가락만 올려 놓고 이 열매를 받으니 송구 할 뿐이다. 나 홀로 하기 힘든 것도 두 손이 합해지면 이렇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인생의 사계절을 살아 오면서 문득 내가 무엇때문에 사는가? 하고 원초적인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성경은 인류의 기원이 티끌에서 시작되었다고 인생의 근본을 얘기하고 있다.   "인생아! 네가 무엇이냐? 너는 잠간 보이다가 사라는 먼지 니라." 흙 먼지 티끌 진토 이런 것들은 본래의 것에서 떨어져 나온 것들이다. 영혼을 잃어버린 삶! 그것은 보기에 아무리 화려해도 세파에 날리는 먼지같은 삶이 아닐까? 먼지가 먼지로만 있게되면 백해무익이다. 방안에 쌓인 먼지가 그렇고 지구의 대기를 덮고있는 미세먼지가 그러하다.  먼지가 모아져서 토양이 될 때라야 참 생명이 움트는 대지가 되는데  요즘 현대인들은 "이러한 인간의 근본을 잃으면 다 잃어버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혼은 없고 오로지 육신의 소욕에만 모든 것을 걸고 살고 있는 것같아 안타깝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먼저 섬기는 삶으로 바뀌어야 내가 소속되어 있는 모든 공동체가 윤택하게 되고 그래야 우리 각자의 삶도 훈훈해진다"고.

내가 있는 '행복이 가득한집 요양원'에는 아흔 한분의 어르신들이 있고 이분들을 수발하는 예순 다섯의 직원들이 있다.  이중 요양보호사가 마흔 둘이다.  이들이 지킴이로서의 역할을 다할 때 요양원은 생기가 돈다. 그러나 그중 하나라도 최선을 다하지않으면 금방 티가난다. 직원중에 자기일에 최선을 다하여 섬기는 이가 있고 직업으로 하는 이가 있고 여기에 얹혀서 건성으로 하는 이도 있다. 큰 일을 하여야 큰 인물인게 아니다. 성공도 실패도 지극히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사물을 대할 때는 유능한 사업가의 안목으로 보아야 겠지만 그러나 사람을 대할때는 사랑을 받아야 할 인격체로 대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서로를 아끼는 것이다. 나랏 일도 이와 똑같다.  요즘 선거철이 되어 여 야할 것없이 나랏일꾼을 선택하는게 아니라 자기 수족같은 심복을 심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듯하여 안타깝다.  

그런데 성경을 음미해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사실을 나는 중년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다. 사람이 인간(人間)으로 더불어 살면서 수많은 만남가운데 가장 큰 만남은 예수와의 만남이다. 우리는 가끔 이렇게 말할 때가 있다.      
"오늘도 정신없이 살았네" 이렇게 세상적인 것에 휘둘려 나를 잃고 사는 것이 인간 본연의 삶이 될수는 없다.  혹 누가 내게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섬김의 삶을 사는게 내 즐거움 이다" 라고 말하겠다. 나는 이 나이에도 바쁘게 살고 있다. 행복이 가득한 요양원에서 입소한 노인들과 호흡을 함께하며 지내는게 유일한 나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노인들의 삶속에 나의 삶이 사랑으로 녹아질 때 나는 사는 보람과 희열이 넘친다.  

내가 노인분들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일반목회를 하면서다.  서울 용산에서 경상도 하동에서 부산 영도에서 1997년까지 20여년동안 도시와 농촌을 오가며 목회를하면서 그때의 노인들은 허리 펼 사이도없이 평생을 일구렁 속에서 t살았다. 그리고 노후에도 여상히 힘든 노년의 삶을 살고있는 것을 보면서 저들을 위한 노후 복지를 실천에 옮기고자 천신만고의 어려움을 뚫고 경기도 청평에 대지 1200평에 240평의 건물을 1999년 IMF의 혹독한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완공하였다.

나는 이를 내 생애에 가장 큰  보람으로 알고 2009년까지 만 십년동안 무의탁 양로원을 자비량으로 운영하면서 결국 경매처분되는 아픔을 격었지만, 이 고난중에도 내가 섬기고 함께 살아온 갈 곳없는 노인분들을 위한 나의 눈물의 기도가 마침내 우리나라에도 요양원 제도가 도입되었을 때 그 비쁨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무의탁 양로원을 운영하다 우리 내외는 신용불량자가 되는 아픔이 따랐지만, 그러나 우리 내외는 어찌보면 벼랑끝 같은 삶에서 보람을 갖게 되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사람은 사랑과 보람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경매처분되는 벼랑끝에서 우리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 오갈곳 없는 예순 다섯분 때문에, 다시 힘을 내어 오뚜기처럼 일어나 천신만고 끝에 춘천 박사로 의암호수와 춘천시내가 모두 보이는 자리에 '행복이 가득한 집 요양원' 을 세워 2009년 9월부터 지금까지 아흔 한분의 어르신들을 섬겨오고 있다.

[종그니 칼럼] 염려할 것인가? 기도할 것인가?

내가 살아보니 실의에 빠져 주저앉을 것인가 다시 힘을 내어 일어설 것인가는 오로지 나의 몫이다. 나와 내 분신인 내 아내가 숨쉬고 있는 동안은 우리 내외가 몸 담고 있는 곳이 집이든 병원이든 요양원이든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종으로 사는 보람이 아닐까 싶다. 사람은 보람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요양원에 있는 노인분들 대부분은 눈에 생기가 없다.   왜?  삶의 동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남아공  만델라가 28년동안의 혹독한 감옥살이를 어떻게 견뎠을까? 아스콘 도로위에서도 잡초가 뿌리를 내린다.  이것이 생명이다. 나는 지금 콩팥기능이 거의 상실되어 발목까지 통풍이와서 아프지만 글을 쓸 때와 요양원 어른들과 동무하고 놀때는 잊혀진다.  이처럼 내게있어 예수로 사는 삶이 가장 큰 즐거움이다.  

욥기서 23장 10절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正金)되어 나오리라"

한 욥의 고백처럼 내 육신은 늙고 병들어 옷이 헤어지듯 낡은 몸이 되어가도 하나님의 형상인 내 영혼은 가을 하늘처럼 맑다. 중국 최후의 왕조 청(淸)을 사치로 말아 먹은 서태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의 사치와 호사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하다.  그는 최고의 값진보석으로 치장을 했는데  그가 죽은 후 그의 시신에 치장한 보석은 당시 청나라의 빚을 값을수 있는 엄청난 보화로 몸을 장식했으니 몸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서태후가 죽은지 10일 후에 청(淸)은 멸망했다. 당신은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사시려는가? 나는 나의 삶이 얼마일지 알수 없지만 나이를 잊고 예수로 살고 싶다.  안아주고 보듬어주고 아픔을 같이하며 슬픔을 들어주는 섬기는 종으로 살고 싶다.     

[종그니 칼럼] 시대를 바라보며 문득 떠오르는 이름!

유럽대륙에 있는 인구약 일천여 만의 입헌 군주국 벨기에는, 소위 "베네룩스 3국"으로 통칭하는 유럽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끊임없는 외환의 국난을 겪으면서도, 끝끝내 불사조처럼 살아남은 외유내강의 나라이다. `레스꾸이에` `우리와 같은 처지인`한국을 돕자 는 슬로건으로, 한국戰 당시 군대를 파병한 우방 중의 우방인 혈맹국이다. 특히 올해는 한국과 벨기에가 수교한 지 120주년 되는 해다. 두 나라는 지정학적으로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은 ‘작지만 강한나라’ 라는 공통점이 있다. 벨기에는 한국전쟁 당시에 자국 군인 3,171명을 파병한 혈맹국이다.

1901년 벨기에는 `고종의 요청에 의해` 대한제국과 외교를 맺은 유일무이한 나라다. 당시의 대한제국은 벨기에와 우호·통상·항해 조약을 체결했다. 고종은 국제사회로부터 영세 중립국으로 인정을 받아야 세계열강으로부터 주권을 지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열강들 사이에서 영세중립국으로 주권을 유지하던 `벨기에`는, 세계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길을 찾던 대한제국에 국가생존의 모델이었다.

한국과 벨기에는 지정학적으로 유사점이 많다. 한국이 중국과 일본의 침략으로 수많은 부침을 겪은 역사가 있었다면, 벨기에는 독일, 프랑스 등 주변 열강의 틈바구니에 끼어 헤일 수 없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특히 금년 2021년은 벨기에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 이기도 하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된 후, 1948년 벨기에는 대한민국 정부를 처음으로 인정한 국가들 중 하나였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벨기에는, 1951∼1953년에 걸쳐 유엔군의 일원으로 3,171명을 파병했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앙리 모로 드믈랑`은, 장비만 지원하자는 국무위원들의 제안을 일축하고, 파병을 강하게 주장해 관철했고 전쟁에 직접 참전하였다. 드믈랑은 나중에 펴낸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전쟁은 한 국가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었기에, 한국은 벨기에처럼 열강에 둘러싸인 작은 나라이기에, 같은 처지의 한국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한국전쟁에서 벨기에의 참전용사 중 106명이 전사하고 350명이 부상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벨기에의 가톨릭 사제들은, 한국으로 건너와 국가 재건을 도왔다. 1951년 한국전쟁 당시 간호 장교로 참전했던 `테레즈 캄비에 수녀`는, 종전 후 폐허가 된 한국에 그대로 남아, 가난에 찌든 사람들과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복지사업에 헌신했다.

1929년 벨기에의 상류층 가문에서 태어나, 가톨릭 신부가 되어 로마에서 보장된 탄탄대로의 길을 마다하고, 근세 여명기에 잠자는 나라 조선으로 자원하여 온 `지정환 신부 (디디에 엇세르 스테번스 Didier t`serstevens` 1931,12,5~2019,4,13.)는, 내가 어렸을 때, 내게 성세성사와 견진성사를 주셨고, 나에게 사제의 길을 가도록 적극 권면 하셨다.

그 후 1967년에는, 부모로부터 받은 2,000달러(당시 이 돈은 큰돈이었다.)로 전북 임실 나의 고향 땅에 한국 최초로 `임실 치즈` 공장을 설립하여, 1969년 마침내 치즈 개발에 성공하였고, 할 일 없는 젊은 청년들에게 양과 젖소를 기르게 해주고 임실주민 협동조합을 설립, 소유권을 이양해주었다. 유신정권 때는 유신독재에 저항하다 강제 귀국을 당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그가 고국 벨기에에서 자금을 가져와, 임실 치즈공장을 세울 만큼 한국을 사랑한 것을 알게 된 박 대통령은, 그를 다시 한국으로 불러왔다.

요즘 미얀마 민주화운동에 미얀마 군사정권이, 시민들을 무참히 살육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지정환 신부가, 우유 트럭을 몰고 광주를 방문하여, 시민군들에게 우유를 제공했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지난 2017년 나는 초등학교 은사이시고, 나를 서울로 유학의 길을 열어 주신, 박찬원 은사님과 함께 임실로 내려가, 은퇴하신 후 노환으로 휠체어에 의존하시는 지정환 신부님을 찾아뵈었을 때, 신부님은 나를 애틋하게 맞아 주셨었는데, 작년에 주님의 부르심을 입으셨다.

분단된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너무 사랑하셔서 그가 고등학교 졸업 후 북한 공산군에 의한 6, 25전란을 보고, 약소국 한국땅에서 사목하겠다고 다짐한 후, 모든 것을 뿌리치고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에 와서, 이 나라를 위해 온 생애를 바치신 지정환 신부님께 삼가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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