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 칼럼] 삶의 우선순위

내가 언젠가 TV에서 사하라 사막의 불모지에서 자라는 선인장을 본적이 있다. 왜 사막인가? 비가 내리지 않아서 이다. 인간의 심령도 사막처럼 메마른 심령이 있다. 어떻게 메마른 심령이 되었을까? '심령의 밭'을 적시는 '사랑의 비'가 없기때문이 아닐까? 언제부턴가  젊은이나 늙은이를 막론하고 따뜻한 인간미는 기계문명과 함께 사라지고 인생이 단회성이듯 막가파 인생들이 사나운 야수처럼 특히 밤이되면 골목 길은 무법의 정글이 되어가고 있다.  이는 아무 것도 내어 줄 것이 없는 사막의 땅  뜨거운 태양 열에 달구어진 모래 땅처럼 현대 문명속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 인간들의 마음도 서서히 사막화 되어 가고 있다. 불모지 사막에서는 생명체란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처럼 혹 내 맘은 불모지 사막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사하라 사막과 같은 불모지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다. 바로 베두인 족들이다.  사람이 살고 있는데 동식물인들 못살겠는가? 도저히 생물이 살수 없는 사막의 땅에도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 보면 깜짝 놀랄만큼 여러 종류의 동식물들이 그들에게 아무 것도 내어줄 것이 없는 불모지 사막의 땅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참으로 대단한 생명력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황량한 사막의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물이나 곤충들 예를 들면 낙타는 사막에서 적응하여 살아 갈수 있도록 태생적으로 몸 구조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비단 동물에게만 있는 현상이 아니다.  

아주 척박한 사막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수 있도록 몸 조직체가 아주 바뀐 식물들도 있다.  예를 들면 알로에 백년초 용설란 선인장 등이 그러하다. 내가 살고 있는 춘천에는 화목원이라는 식물원이 있는데, 이 식물원의 한 룸에 들어 가면 여러 종류 사막의 다육 식물들을 한 눈으로 볼수 있다. 이 다육식물들은 모두 사막의 기후 풍토에 적응할수 있도록 몸 구조가 완전히 바뀌었다. 원래 떡잎처럼 활엽수이어야 할 잎새들이 마치 침엽수인 소나무보다 훨씬 더 억센 가시로 변형되었다. 그래서 아침에 뜨거운 태양이 떠오르고 석양에 질때까지 광활한 사막을 발갛게 달구고 있는 태양열이 활활 타올라, 이글거리는 뜨거운 불볕에 용광로 가 되어버린 사막에서도 지독히 끈질긴 생명력으로 각종 다육식물들이 서식하고 있을 뿐아니라 그 불덩이 속에서도 움직이는 동물들과 곤충류들도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이 뜨거운 사막에서 저마다 생존의 본능을 터득하며 살아가고 있다.  참 놀라운 생명력이다. 십여년 전 나는 생명력이 아주 강한 알로에를 재배한 적이 있었다.  알로에의 태생지는 물론 사막이다. 이 알로에를 빨리 수확하려면  비닐하우스에 재배하면 된다. 그리하면 노지에서 기르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자란다. 그러나 무조건 잘 자린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노지에서 재배한 상추에는 유황성분이 있는데 비닐 하우스에서 자란 상치는 하얀 진액이 없다. 하얀 진액? 그게 바로 노지에서 자란 상추에게만 있는 유황성분의 액체다 바로 이 액체에서 상추 고유의 쓴 맛이 난다. 이 유황성분은 한 여름 뜨거운 노지에서 자란 상치에서만 생성된다.  

왜 이 채소를 상치(上置)라 이름했을까? 임금 수랏상 맨 윗 자리에 놓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유황은 보통 활화 산 깊은 곳에서나 구할수 있다. 참 아이러니 하게도 그래서 이것이 건강식품이란다. 그래서 나는 해마다 상치를 하우스 아닌 노지(露地)에서 기른다. 우리 요양원 어르신들의 기호식품이기 때문이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몰랐던 시절에는 계절은 참 오묘하기만 했을 것이다. 해마다 3~4 월 봄이 되면 잡초를 비롯하여 겨울 잠을 자던 모든 식물들은 생명의 본능으로 봄이 옴을 알고 생명의 싹이 움튼다. 산야의 나목들과 동토의 땅속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던 풀 뿌리에서도 새 생명의 싹이 돋아 나고 그리고 햇살이 점차 따가와 질수록 잎은 연초록에서 지금 오월의 산야는 온통 파란 하늘 색으로 탈 바꿈 하고 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이름하지  않았던가! 여름을 앞둔 지금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참 아름다운 계절이다.  혹 여러분은 '사브라'를 아시는가?  이스라엘 부모들은 사랑하는 자녀에게, "너는 '사브라'가 되라 "고 당부한단다. 아니 사브라가 뭐길래? 사브라는 다름아닌 선인장 꽃의 열매다.  선인장은 생명이 살기 어려운 사막의 악 조건에서 자라는 다육식물이다. 사막의 혹독한 환경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 약 10년이라는 세월을 참고 인내한다. 아침에 내리는 이슬이 하루의 생존 에너지가 된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선인장은 따가운 햇살을 받아 탄소동화작용으로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를 만든다.  이렇게 작렬하는 태양에 의해 10년을 버텨온 선인장은 수명이 다하는 해다.  그래서 선인장은 본능적으로 그 마지막 해에 화려하게 꽃을 피우면서 내뿜는 천리향으로 천지 사방에서 벌들이 날아 든다. 참 신비롭지 아니한가?  선인장이 죽음을 어찌 알고 이렇게 차분하게 죽음을 준비할까? 이렇게 선인장은 영락없이 향기 가득한 꽃을 피워 천지사방에서 벌 나비를 불러 들여 마침내 열매를 맺으면 그 씨앗을 또 천지사방으로 날려 보내고 마침내 선인장은 탈진하여 생을 마감하게 된다. 소나무도 수한이 다하거나 병들면 솔방울을 많이 맺는다. 참 신기한 종족 보존의 본능이다.   

지정학적으로 이스라엘은 서쪽으로는 지중 해와 인접해 있고 동쪽은 사막이어서 여기서 불어오는 동풍은 바로 모래 바람을 동반한 뜨거운 열풍이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가는 우리나라에 특히 겨울과 봄이면 기승을 부리는 미세먼지를 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이스라엘과 지근 거리에 있는 사하라 사막은 그곳에서  살아 있는 모든 동식물들을 달아보는 시험대다. 정말 어떤 생물도 살기힘든 아주 척박한 사각지대다. 이렇게 척박한 환경에서는 대개 변온 동물들인 사나운 독사와 독충들이 서식하고 있다.  물 한 방울도 얻을수 없는 온통 모래 땅에 타들어 가는 그런 불모지에서 어떻게 생물들이 살수 있을까?  중동의 가나안 땅에는 우리나라의 샛강 크기의 물줄기가 저 멀리 헬몬산에서 부터 흐르는데 이것이 이스라엘의 젖줄 요단강이다.  이렇다 할 지하자원도 없고 기름 한 방울 나지 않은 아주 거치른 땅에 기라성 같은 산유국 아랍 나라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유대인들은 그 모진 악조건속에서도 세계 제일의 일등 강국인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근면에 있다.  이처럼 척박한 들판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하려면 오래 참고 그 땅에서 식물들이 자랄수 있도록 여건을 하나 하나 만들어 가야 하는 아주 척박한 나라다.  이를 아시라 사람이 살기가 혹독해질수록 강인해지지만 편안해지면 나태해지면 다 무너진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자녀를 '사브라'로 부르는 이유는 그들은 어려서 부터 댓가 없는 성공에 대한 환상들을  다 내려 놓고, 심는 대로 거두는 인생의 법칙을 가르치는 유대인들만의 지혜라 할 것이다.  

오늘을 살고 있는 당신은 지금 인생의 밭에 무엇을 심고 있는가? 혹 "나는 돈이 없다."  "배운게 없다."  "인적 기반이 없다." 고 탄식만 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당신에게 지금 주어진 것에서 출발하시라.  나는 일반 목회를 그만 두고 무의탁 양로원 설립을 하려 했을 때 내 수중에는 150만원이 전부였다.  그러나 목적과 방향이 분명했으므로 최선을 다했더니 철옹성같던 불가능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장을 여는 새 길이 열었다.  나는 쌈지 돈 150만원으로 시작한지 만 3년만에 무의탁 양로원을 지을 터를 사고 맹지의 땅을 4m 길을 만들고 그리고 토목 공사를 하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무의탁 양로원을  세웠다.  이처럼 뜻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새 길이 열린다. 가진게 아무 것도 없는 백수라고 기죽지 마시라.  하나님이 알몸으로 우리를 이땅에 보내시면서 저와 여러분에게 이 땅에서 잘 적응할수 있도록 그에 꼭 맞는 지혜와 달란트를 주셨다.  동서남북을 바라 보시라! 바로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가 활짝 열린 길 즉 희망의 길이다.  풀 한포기 자랄수 없는 일년 내내 새벽 이슬 외엔 비 한방울 내리지 않는 사하라 사막에는 아침부터 내리 쬐는 따가운 태양 열과, 가도 가도 끝이없는 뙤약 볕에 뜨겁게 달구어진 모래 뿐인 사막에서 눈여겨 보면 움직이는게 있다.   숫덩이처럼 타들어 갈듯 이글거리는 모래위와 모래 속을 헤집고 다니는 동물들이 있다. 독사와 전갈 도마뱀 등이다.   곤충들 중에는 개미도 있다.   

모두 다 하나같이 몸에 철갑을 두르고 털이 없다. 지옥같은 그곳엔  철저한 약육 강식이다. 잔인한 환경에서 사는 그들에게는 언제나 삶이 곧 삶과 죽음의 갈림 길이다. 사막에서 자라는 선인장은 다 자라게 되면 그때에야 비로소 찬란하게 피어나는 꽃!  아!  그 꽃이 피기까지 모든 잎새들을 가시로 바꾸고 몸속의 수분을 모두 앗아 가는 이글거리는 태양의 뜨거운 열기를 견디며 끝끝내 길고 긴 여정 10년이라는 인고의 세월 한 생애를 기다린 끝에 마침내 꽃을 피우기까지, 선인장은 작렬하는 태양볕에 몸안의 수분 증발을 막기 위하여 전신을 철갑으로 두르고 잎새마저 가시로 탈바꿈하면서 오직 하나 생의 마지막 순간에 단 한번 꽃을 피워 후손들을 널리 널리 퍼뜨리는게 유일한 꿈이었다. 그대는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는가? 꿈을 잃은 민족은 오늘만 있고 내일이 없기에 자녀도 낳지 않고 젊은 날을 엔조이로 보내려 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자녀 교육은 선인장 가시에 찔려 피가 흐르는 손으로 가시를 품고 인내로 그 긴 세월을 기다리며 순전한 순결의 꽃을 피우는 사막의 선인장의 열매  '사브라'를 닮아가길 꿈꾼다. 어릴 때부터 유태인의 살아 있는 교육은 '하지 마라'가 아니라 사브라처럼 '때가 이를때까지 참아라' 라고 한단다. 그러기에 유대인의 참 교육은 수명이 다할 때에야 꽃을 피우는 그때까지 오래도록 참고 기다리는 것이 교육이란다. 그래서 오늘날 유대인들은 메씨아로 오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그 피의 댓가로 십년이 아니라 무려 2000년동안을 나라없는 설움을 받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서야 잃어버린 고국 땅을 되찾았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컷을까? 

이스라엘 민족은 전 세계 인구의 0.2%이고, 미국 인구의 2%밖에 안 되지만, 하버드대 등 아이비리그 대학생들의 20% 이상을, 노벨상 수상자들의 30% 이상을 그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열매는 저절로 되는게 아니다. 그 과정은 힘들고 엄청 쓰고 아리다.  하지만 그들은 이 수 많은 고비 고비를 거치면서 세계 굴지의 내로라 하는 기업들을 만들었고 미국의 정치, 언론, 영화, 금융, 산업, 학문 등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사브라'라는 호칭은 의지의 강화와 교육의 지혜에 둔다. 여러분! 이를 아시는가? 금덩이는 많을수록 무겁지만 지혜는 많을수록 몸과 맘이 가벼워 진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자녀에게 '사브라' 라고 부를 때마다 그들은 사브라의 메시지를 심어준다고 한다. 어찌보면 내 인생은 선친께서 등에 뿔난 직업(농부)이 제일 보람 있고 평탄한 길이라고 말씀하신 그 유훈을 따랐더라면 유유자적 농부의 길을 걸었을 것을!  나는 선친의 경험의 유훈을 마다하고 나에게 죽음의 사막과 같은 서울에서 선인장처럼 뿌리를 내리려 했지만, 온정의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땡볕이 내리 쬐는 악조건 속에서 겨우 살아 남는데 그쳤지만,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은 내게 "아침에 맺히는 이슬 몇 방울 빨아 들이며 너는 그 모진 세상에서 기어코 살아 남았구나!  너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이제는 아느냐?  '너'라는 열매를 맺기까지 무수한 인고의 세월을 견뎌 온 너는 이제 진정 선인장 열매 '사브라'다.  그러니 끝까지 살아 남아 또 다른 열매 사브라를 맺어라.  네 생애에 그 열매가 맺어지거든 그때 나는 너를 영원한 '사브라' 라 불러 주리라."

[종그니 칼럼] 삶의 우선순위

톨스토이의 명작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있다"에서 마르틴이라는 구두 수선공이 나온다. 그는 과거 아내와 두 자녀를 잃고 막내아들까지 어린 나이에 떠나보냈다. 하나 남은 아들마저 죽자 상심한 마르틴은 한동안 교회에도 나가지 않고 술로 겨우 버텼다.

그가 사는 마을에는 일찍 남편과 자녀들을 잃고 홀로 노년을 보내는 할머니가 계셨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성경책을 들고 와서 지금처럼 괴로울 때 읽어보면 큰 위로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르틴은 첨엔 눈 밖에 있었던 성경이 할머니와 함께 겹쳐지면서 진심 어린 위로의 말씀과 격려를 통해 성경을 읽으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는 진정 하나님이 계신다면, 자신도 어서 빨리 데려가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또한 그는 욥기 서에서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요. 주신 것을 거두어 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라."는 욥의 고백을 읽자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 지금 자신의 엇나간 삶을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보면서 그렇게 성경 말씀에 조금씩 몰입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성경 말씀을 읽고 나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마르틴, 내가 내일 너를 찾아갈 테니 창밖을 보라."

꿈이긴 했지만 그 꿈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놀랍도록 생생하게 각인되었다.

다음 날 아침, 마르틴은 전날 들었던 음성을 떠올리며 하루 일과를 준비한다. 그는 온종일 창밖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하나님은 오시지 않았고 창밖에는 늙은 청소부만이 눈을 쓸고 있었다. 마르틴은 밖으로 나와 그와 함께 눈을 쓸었다. 그리고 그를 가게 안으로 들게 한 뒤 따뜻한 차를 대접하며 추위에 언 몸을 따뜻하게 해드렸다.

다시 한 시간쯤 지나 창밖을 보니 얇은 옷만 입은 체 젖먹이 아기를 안으며 떨고 있는 젊은 엄마를 보았다. 그는 그 여인을 가게 안으로 맞아들여 먹을 것과 추위를 견딜 수 있는 옷을 찾아 주고, 가까운 대피소로 인도해 주었다.

그리고 거의 해가 질 무렵 창밖을 바라보니, 사과 파는 할머니가 소매치기 소년을 붙잡고 야단을 치고 있었다. 마르틴은 밖으로 나가 꾸중을 듣고 있는 소년에게 할머님께 용서를 빌게 하고 사과 값을 대신 갚아 주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집으로 돌아온 마르틴은 성경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 날 자신이 낮에 만난 청소부 할아버지와 아기를 안고 떨고 있던 아기 엄마, 그리고 과일 장사 할머니와 굶주리던 소년이 한 모습으로 나타나 환한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마르틴, 네가 오늘 만난 사람들이 바로 나였단다. 그러므로 너는 오늘 그들로 가장한 나를 대접한 것이다”

깜짝 놀란 마르틴은 꿈에서 깨어나 펼쳐져 있는 성경 말씀을 보았다. 그 순간 자기 눈을 의심케 하는 말씀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내가 배고플 때, 네가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네가 내게 마실 물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네가 나를 따뜻하게 맞아들였고, 내가 헐벗었을 때 네가 나를 입혀 주었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보잘것없는 이에게 대접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란다.”

"사랑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이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 마르틴은 비로소 마음이 활짝 열리게 된다. 이 땅에 머물 곳이 없어 방황하고 있는 수많은 이들과 자기 자신을 비교해 보면서 이 세상엔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을 볼 줄 아는 `사랑의 눈`이 열린 것이다.

이것이 진정 산자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예배당으로 가고, 산으로 가서 기도 하고, 또 신학을 공부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이웃을 향한 사랑이 머무는 곳 그 현장에 계신다.

"우주를 한 사람으로 축소시키도 하고, 그 한 사람을 하나님으로 확대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라고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는 말했다.

굳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연구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곳에서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배우는 것 또한 소중한 학문이다. 또한 그 분야의 학문이 실용을 넘어 홍익인간을 만드는 교육이어야 할 것이다.

부모와 형제, 이웃 간에 관계의 마땅한 당위를 알고 행하는 것이 상생의 인륜이다. 그러나 지금은 물질 만능과 이기주의에 휩싸여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람과 물질과의 바른 관계가 참담하리만큼 모두 허물어져 가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이기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사회 문제의 모든 이슈가 마땅히 내가 先行 하여야 할 사회적 의무는 없고 그저 정글처럼 이기적 권리주장만 만연해 가고 있다.

지금 당신의 눈에는 물질보다 부모님과 형제, 이웃이 먼저 보이는가? 물질보다 인간이 먼저 보일 때에 마음으로만 감지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부모로 형제로 이웃으로 스승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없는데, 어떻게 인간 혹은 자연 뒤에 자신을 감추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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