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우리들도 교회를 믿는가?
【특집】정치와 종교는 분리될 수 없는 것
【찰스 핫지】 유아기에 죽은 사람은 모두 구원을 받는다?
찰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의 조직신학 저술은 전체 3권으로 출판되었는데, 국내에는 크리스탄 다이제스트 출판사에서 번역한 1권만이 번역서로서 출판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2권과 3권은 영문판이나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는 pdf 파일로 된 영문본을 통해서 접할 수가 있다.
그런데 찰스 핫지의 조직신학 제1권 제2장에서는, “자연신학의 불충분성”(Insufficiency of Natural Theology)에 관하여 다루는 가운데서 “유아의 구원”에 관하여, “유아기에 죽은 사람은 모두 구원을 받는다.”(All who die in infancy are saved.)고 언급한 것을 볼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비유에 대하여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으로부터 추론된다.”(This is inferred from what the Bible teaches of the analogy between Adam and Christ.)고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러므로 유아기에 죽은 사람이 모두 구원받는다는 것은 로마 가톨릭주의자들과 로마교도들의 교리와는 다른 프로테스탄트들의 일반적인 믿음이다.”(It is, therefore, the general belief of Protestants, contrary to the doctrine of Romanists and Romanizers, that all who die in infancy are saved.)라고 언급했다.
이러한 핫지의 언급들은 유아들에 대한 보편적인 구원을 주장한 것처럼 이해된다. 그리고 실재로 이 부분이 찰스 핫지의 주요한 결점이라고 알고 있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찰스 핫지의 위의 언급들은 자연신학의 부족함에 관하여 설명하는 맥락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하는 문구들이다. 특히 “그의 사역들로부터 기인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타락한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기에 충분한 것인지의 여부에 관한 질문은 합리주의자들에 의해서는 긍정적으로 답변되었지만, 모든 기독교 교회의 역사적 교파들에 의해서는 부정적으로 답변되었다.”(The question whether the knowledge of God derived from his works, be sufficient to lead fallen men to salvation, is answered affirmatively by Rationalists, but negatively by every historical branch of the Christian Church.)고 하는 문맥과 “동방교회와 라틴교회는 성례를 구원 은총의 유일한 통로로 삼기 때문에, 이교도나 기독교도를 막론하고, 세례받지 못한 자의 구원 가능성을 부정한다.”고 한 문맥, 결정적으로 “그러한 정의는 세례받지 못한 유아 및 성인들, 그리고 아무리 성경에 관한 지식이 충분하고 그 마음과 삶이 경건하다고 할지라도, 로마교회의 교황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의 소망으로부터 제외시킨다.”(That definition is so framed as to exclude from the hope of salvation not only all unbaptized infants and adults, but all, no matter however enlightened in the knowledge of the Scriptures, and however holy in heart and life, who do not acknowledge the supremacy of the bishop of Rome.)고 한 문맥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하는 언급들이다.
즉, 세례를 받지 못한, 그리고 앞으로 세례를 받을 가능성을 볼 수가 없는 유아들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되는 택자들의 수에서 제외될 수 없음을 말하는 가운데서 “유아기에 죽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입은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는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핫지는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세례를 받았든 받지 않았든, 그리스도인이나 이방인 땅에서 태어난, 믿는 부모나 믿지 않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모든 종류의 유아를 그리스도의 구속의 혜택으로부터(from the benefits of the redemption of Christ) 제외하지 않는다.”고 설명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는, 그러므로 유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난 “모든 자”에서 제외하는 것은 사도의 주장뿐만 아니라 (롬 5:12-21) 본문의 전체적인 정신에도 위배되는 것이다.”(It is, tlierefore, contrary not only to the argument of the Apostle, but to the whole spirit of the passage (Romans v. 12-21), to exclude infants from "the all " who are made alive in Christ.)라고 하여, 그가 일관되게 세례를 받지 못한 유아들 모두를 구원받은 자들에게서 제외시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무엇보다도 프렌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 1623-1687)의 『신학 강요』(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를 바탕으로 하는 찰스 핫지의 『조직신학 2권』(Systematic Theology - Volume II)을 보면, 8장에서 죄에 관하여 다루는 가운데서 “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에게 미친 영향.”에 관하여 기술하기를 “아담의 죄가 그 자신뿐만 아니라 통상적인 출생에 의한(by ordinary generation)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혔다는 것은 전체 기독교 세계의 신앙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그의 종족에게 수반된 악의 본질과 범위, 그리고 아담의 후손이 그의 범죄의 악한 결과에 연루된 근거 또는 이유는 항상 다양성과 토론의 문제였습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공통된 교리는 우리 교회의 상징에 간략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기준에 따르면, “인간이 타락한 상태에서의 그 죄성은 아담의 첫 번째 죄의 죄책감, 원의(original righteousness)의 결핍,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모든 실제적인 범법 행위 안에서 일반적으로 원죄라고 불리는 그의 전체 본성의 타락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본성의 부패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그 자체와 그 모든 행위가 참되고 합당한 죄”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원부패(original corruption)로 인하여 사람은 “완전히 무능하고, 무능력하며, 모든 선에 반대되고, 모든 악에 전적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악의 근거에 대해 우리는 “아담과 맺은 언약은 아담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 즉 통상적인 출생에 의해 그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인류를 위해 맺어진 것이며, 아담 안에서 죄를 짓고 그의 첫 범죄로 그와 함께 타락했다”고 배웁니다. 또는 신앙고백서에 표현된 것처럼 “모든 인류의 뿌리인 우리의 첫 부모들은 그들의 죄의 죄책이 전가되었고, 죄와 타락한 본성 안에서 동일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라고 언급한다.
그리고는 “직접적 전가”(Immediate Imputation)에 관하여 9항에서 언급하기를, “일반적으로 프로테스탄트들과 개혁파, 루터파, 그리고 라틴 교회의 커다란 집단에 의해 채택된 것은, 아담과 그의 후손 사이의 연합적(federal)이며 본성적(natural)인 결합으로 인해 그의 죄가 비록 그들의 행위로서는 아닐지라도 후손들에게 전가되어 그에 대한 형벌이 그들에게도 임할 것이라는 사법적 근거를 이룹니다. 이것이 직접 전가의 교리(the doctrine of immediate imputation)입니다.”라고 설명하여 소개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한마디로 찰스 핫지는 튜레틴과 마찬가지로 아담의 죄가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직접적으로 전가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의 맥락으로 볼 때에, 유아기에 죽은 모든 아이가 구원에 이른다고 설명하는 것은 전혀 사리에 맞지 않다. 만일에 그러한 주장을 하려고 했다면, 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들에게 직접적으로 전가되는 것이 아니며, 최소한 간접적으로 전가되는 것으로 설명하여야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분명히 찰스 핫지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적용되도록 택함을 입은 모든 유아기에 죽은 아이들”이라고 하는 논리적 단서를 근거로 “유아기에 죽은 사람은 모두 구원을 받는다.”고 언급한 것임에 분명하다.
이처럼 글이나 문장은 때로 광범위한 문맥과 의미 가운데서 그 뜻을 정확히 파악할 수가 있는데, 이는 성경에 기록된 단어나 짤막한 문장의 경우에도 종종 적용된다. 예컨데 딤전 2:4절에서 사도는 기록하기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으며, 더욱 6절에서는 “그(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라고 했으나, 그 때의 “모든”(헬: panta)은 딤전 5:20절에서 언급하는바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고 할 때의 예처럼, 논리상 제한적인 인원 가운데서의 “모든”을 말하는 경우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그(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라고 한 6절 말씀은 또한, 요 17:9절에 기록한바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라고 한 주님의 말씀과 모순되는 맥락이 아니라 부합하는 맥락 곧, 성부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대속물이 되셨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글이란 종종 짧은 문맥 가운데서 분명하게 보이는 뜻과 의미가, 넓은 문맥 가운데서 비로소 그 진의를 드러내고 오해를 불식시키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의 방식으로서 그 자신에 관하여,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에 관하여 성경으로써 계시하셨으니, 우리는 벧후 3:16절에서 언급한바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되어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조심하는 성경 읽기와 글 읽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장대선 목사, 대방천교회>
【특집】 우리들도 교회를 믿는가?
주후 3세기 이후로 형성된 로마 가톨릭교회로서의 신앙과 종교가 어떻게 타락하고 부패한 것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신자들도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태초로부터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을 지닌 인간의 제도와 종교에 대한 믿음과 신뢰에 기반을 둔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앙과 종교 가운데서 빚어진 온갖 부패와 부도덕한 죄악의 행실들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처럼 타락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를 개혁한 교회들로 모인 신자들의 신앙과 종교는 곧장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앙과 종교와는 다른 바탕을 이루게 되었으니, 로마 가톨릭교회와 별반 다르지 않게 ‘sanctam Ecclesiam catholicam’ 곧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할지라도, 우리는 윌리엄 트위세가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라고 하는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에 관한 설명 가운데서 질문하는바 “당신은 왜 교회가 있음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또한 교회를 믿는다고 하지 않는 것입니까?”라는 물음에 대해서, “우리는 교회가 있음을 믿지만, 그러나 우리는 교회를 믿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교회는 기껏해야 죄인인 사람들의 모임에 불과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그러한 믿음으로서의 신앙과 종교를 이루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윌리엄 트위세의 교리문답은 “교회란 무엇입니까?” 하고 물은 후에 답하기를 “A Company of God’s children” 곧, “하나님의 자녀들의 무리”라고 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은 동일한 자녀들일 뿐인 무리로서의 교회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로 모이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무리(a Company)요 모임(a class)을 가리켜서 교회라 칭하는 것이니, 우리들의 믿음의 대상은 교회 자체가 아니라 교회 가운데서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임에 분명하다.
무엇보다 딤전 3:15절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르기를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οἴκω’라는 헬라어 단어는 “집”으로서, 흔히 생각하는 건물로서의 집이 아니라 ‘Household’ 곧 ‘권속’ 혹은 ‘가족’을 의미하는 단어다. 그런즉 사도 바울은 단순히 하나님의 가옥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속으로서의 집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 집의 권속들은 앞서 딤전 3:1~13절까지에서 기록하여 언급한 교회의 직분들을 가리켜서 칭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14절에서 “내가 속히 네게 가리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가 있듯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여 운영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집”이라 칭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만일에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앞서 1~13절까지에서 언급하는 감독과 집사들과 같은 교회의 직분들이 이미 세워진 교회들을 굳이 사도 바울이 방문해야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 같은 구별에 있어 미약했었던 것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에 관한 이해였다. 그들에게 있어 교회란, 윌리엄 트위세의 교리문답에서 답하는바 “하나님의 자녀들의 무리”가 아니라 사제(priest)들 곧, 1~13절에서 설명하여 언급하고 있는 교회의 직분자들이 세워짐으로서 충분히 교회를 이루는 것이라는 개념에 따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도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사제들로 이뤄진 무리들로서 교회를 이룬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써서 가르치기를, 교회란 그저 모인 무리들이나 소수의 직분자들이 세워지는 것으로써 비로소 눈으로 볼 수 있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세워지고 운용되는 것을 통해서 비로소 눈으로 볼 수가 있게 드러나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혀두고 있다. 그러므로 15절에서 사도는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라는 언급과 더불어서, ‘στῦλος καὶ ἑδραίωμα’ 곧,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고 덧붙인 것이다. 그런즉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집” 곧, 하나님의 권속 혹은 가족으로서의 교회란, 결코 건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모인 무리들도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에 따라서 행하며 운영되는 것을 통해서 비로소 눈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교회를 믿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앙과 종교를 개혁하며 회복한 개혁교회인 장로교회들 가운데서도 다시 교회를 믿는 신앙과 종교를 흔히 볼 수가 있다. 재개발을 가로막는 알 박기 식의 행태 가운데서 수백억의 토지보상금을 챙겨서 담임목사가 마음대로 아들에게 양도한 사랑을 제일로 한다는 어떤 교회나, 교단의 반대와 권면에도 불구하고 끝내 아들에게 후임자리를 넘겨주어버린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게 된 교회를 보면, 영락없이 온 교인들이 ‘교회를 믿고’ 있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 두 교회들이 모두 장로교단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무질서하고 독단적인 행태를 벌이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행태 가운데서도 교인들이 전혀 문제제기를 할 수 없도록 장악하여 통제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교회의 무류성을 주장하는 중세시대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바 “지상에서는 가장 순수한 교회라 할지라도 혼합과 오류에 시달릴” 뿐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있음을 믿지만. 우리는 교회를 믿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교회는 기껏해야 죄인인 사람들의 모임에 불과”하다는 점을 결코 간과하지 않으며 고백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개혁된 교회의 신앙이다. 결국에는 돈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려고 억지를 쓰는 죄인들에 불과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자, 그런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려고 교단 전체의 권고조차도 무시하고 저주를 퍼부을 만큼 타락해 버린 사람들이 모인 그런 곳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집” 곧, 하나님의 가족들이 모인 곳이라 말하기가 차마 부끄러울 뿐인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딤전 3:16절에서 사도 바울은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라는 감탄의 말로써, 앞서 15절에서 언급한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에 대한 찬미를 기록하고 있다. 특별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라는 15절의 언급은, “기둥과 터”라고 하는 집의 필수적인 요소들에 관한 언급으로 인해 확연하게 진리의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교회를 마치 건물처럼 표현한다 할 때에 가장 중요하며 기초가 되는 터와 기둥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진리인데,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터요 기둥인 진리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하게 밝혀두며 찬송시의 구절로써 기록해 두고 있는 것이 바로 16절 말씀의 독특하고도 놀라운 문체상의 특성인 것이다.
우리의 안목으로 확인한바, 이 “지상에서는 가장 순수한 교회라 할지라도 혼합과 오류에 시달릴”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있음을 믿지만. 우리는 교회를 믿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교회는 기껏해야 죄인인 사람들의 모임에 불과”하다고 한 윌리엄 트위세의 교리문답에 전적으로 동의하여, 우리들은 이 지상의 교회에 우리들의 모든 믿음과 소망을 쏟아 부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골 2:3절에 기록한 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으니,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기둥과 터는 바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로서의 “진리”임에 틀림이 없다.
사도 바울은 지금 데모데서를 기록하며 그의 아들과도 같은 사역자 디모데에게 바로 그러한 그리스도의 진리에 따라 행할 것을 간절히 호소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지상에서 교회가 눈에 드러나 보이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드러냄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사역이 디모데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니, 사도 바울은 간절하면서도 시급한 마음으로 “그러한 경건의 비밀”에 관하여 다시 한 번 되뇌도록 서신으로 기록하여 디모데에게 보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존재는 바로 이러한 경건의 비밀 곧,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드러냄에 따라 비로소 분명하게 드러나 보이기도 하며, 반대로 희미하게 가려져 버리고 말기도 한다.
무엇보다 사도 바울이 아들과 같은 사역자인 디모데에게 가르친바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들을 골 2: 6-7절에 기록한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한 말씀 가운데서 더욱 명확하게 찾아볼 수가 있다. 또한 구체적으로 골 2:8~15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바울은 이르기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고 했다. 바로 이러한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행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는 것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를 이 지상에서 눈에 보이게 드러내는 합당한 행실임에 분명한 것이다. 이 같은 말씀들의 맥락으로, 딤전 3:16절 후반부에서 사도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곧,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지셨느니라.”고 말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경건의 비밀들 가운데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 것이야말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의 기둥과 터를 이루는 것이니, 바로 이 같이 크고 놀라운 비밀들을 드러내어 밝히고 행하는 교회의 모든 일꾼들과 사역자들에게까지 이르도록 기록한 것이, 사도 바울이 동일하게 간절하고 황급한 심정으로 기록한바 디모데서의 모든 내용들이다. 그런즉 이러한 말씀들 가운데서 우리들은 비로소 크고 화려한 건물 가운데 모인 수많은 무리의 사람들로 이뤄진 회중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이러한 경건의 비밀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결코 그 가운데서 교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음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비록 자그마하고 소박하기 짝이 없는 이러한 공간에 모인 지극히 적은 수의 사람들로 이뤄진 회중이라 할지라도, 여기에 사도 바울이 전하여 기록한바 그리스도에 관한 크고 놀라운 경건의 비밀들이 풍성하게 드러나며, 또한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아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골 2:6-7) 할 때에, 그 가운데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의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가 명확하고도 분명하게 드러남을 확신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들이 정말로 바라고 추구하며 간절히 구하는 것은, 이 땅에서 눈에 드러나는 터와 기둥들의 규모와 개수들에 관한 것이 결코 아니다. 비록 매 주일마다 그야말로 두세 사람이 모여 드리는 예배 가운데서 그 모습을 나타내 보이고 있을지라도, 많은 사람들 앞에 보기 좋게 드러낼 수 있는 그 어떤 행사나 사역들도 감당할 수 없는 지극히 영세한 규모의 회중이라 할지라도, 이 자리 가운데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경건의 비밀들이 크게 드러날 때에, 그 때에 하나님의 집이 확실하게 분별될 수가 있는 것이다. <장대선 목사, 대방천교회>
【특집】정치와 종교는 분리될 수 없는 것
‘교회 정치’(Church politics)와 ‘국가 정치’(National politics)
종교문제와 국가의 통치행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많은 경우 ‘정교분리’(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의 원칙을 채택하고 있다. 중세 로마 가톨릭의 제국적인 종교 우위의 폐단과 종교개혁의 시대를 거치면서 로마 가톨릭의 국가교회적인 틀에서 벗어나 오히려 국가의 통치에 우위를 두는 ‘에라스투스 주의’(erastianism)의 반대 극단에 치우치는 이해(예: 재세례파의 철저한 정교분리원칙)를 거쳐서, 계몽사상을 바탕으로 인본주의의 분위기를 바탕으로 하는 현대의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종교와 국가의 정치는 각각 별개의 영역으로 양립하도록 이해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된 것이다. 특히나 일부 이슬람 국가들에서 종종 발생하곤 하는 인종청소(ethnic cleansing)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종교적인 입장들과 관점에 따른 판단은 차치하고 국가 자체가 특정 종교를 전적으로 지지하게 될 때에 발생할 수 있는 폐단을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영역주권적인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평화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문명과 문화에 있어서 종교가 전혀 배제되었던 적이 없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종교(혹은 신앙)의 영역은 국가의 통치행위와 관련한 영역과 전혀 별개로 양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종교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국가의 경우처럼 국가의 통치행위에 의해 종교가 철저히 배제되고 억압되는 식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에는 국가에 의해 종교의 영역이 강제될 수 있는가 하면, 각 종교들 안에서 발생하는 분쟁들을 행정적으로나 실정법상 강제력에 의해 실질적으로 처리 혹은 중제하기 위해서라도 국가의 통치행위가 그 역할과 작용을 잘 수행해야만 하는 것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영역주권은 서로 배타적인 위치를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부득이 중첩되는 영역을 통해 협력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역은 피조세계 전체를 아우른다”
사실 우리 한국사회를 보더라도, 종교와 국가 사이의 관계는 결코 별개로 양립하는 형태로 있지 않았다. 기독교보다 훨씬 오래도록 자리하고 있던 불교의 경우에도 그렇고, 백년을 조금 넘은 정도의 선교역사를 바탕으로 한 기독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국가와 전혀 별개로 양립해 있는 경우는 실제적으로는 없었다. 조선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이 타고 들어온 배가 군대를 배경으로 하여 들어왔던 것처럼, 이후로도 국가와 기독교는 끊임없는 협조와 협력의 관계설정을 바탕으로 비로소 자리를 잡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 누려왔던 종교인 면세의 특혜는 바로 그러한 협조와 지원의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이며, 적산가옥을 불하한 미군정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의 맥락이라 할 것이다.
그런 가운데 얼마 전 예장 합동교단의 한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의 자격 적법성과 관련한 법원의 판결을 둘러싸고 정교분리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하는 비판이 기독교 안에서 제기된바 있다. 특별히 그 판결의 대상이 종교인(목회자)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한 판결은 교회의 치리회가 감당해야 할 영역을 침해하는 월권적인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한국의 기독교를 대표해 왔었던 한 연합단체의 대표가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정치권에 기독교 정당을 진입시키려는 움직임을 강력하게 시도하고 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정부의 정책들에 대한 공공연한 반대와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를 기독교 단체나 심지어 지교회가 공적으로 표명하기까지 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기도 한데, 이러한 기독교 내의 행동들은 기독교 스스로가 국가의 통치행위와 종교의 문제가 결코 신앙과 별개로 양립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라 하겠다.
정부의 정책이나 시책들이 어떤 경우에는 기독교 신앙의 가치관과 영역들에도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정부의 정책이나 시책에 대한 충분한 의견제시와 수렴을 요구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의견제시와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정상적인 창구 또한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가 행동으로 입증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특정한 국가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영역이 교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지으신 피조세계 전체를 포함한다는 점에서도 ‘교회정치’(Church politics)와 ‘국가정치’(National politics)를 적절하게 연계하여 이해해야 할 필요가 절실하다.
그런데 장로교회들의 경우에는 이미 그러한 문제에 있어서 가장 명확한 답을 지니고 있다. 로마 가톨릭의 ‘교황정치’나 성공회와 같은 ‘감독정치’와 구별되며, 경건주의 혹은 재세례파의 신앙전통을 기본적으로 이어받은 교파들의 ‘철저한 정교분리의 원칙’과도 구별되는 명확하고 분명한 성경적 제도로서 장로교회 정치 형태의 입장이 이미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한국에 장로교회가 전파된 지 백년이 넘도록 그러한 장로교회정치의 입장이 제대로 이해되거나 정립되지 않고 있을 뿐, 이미 장로교회의 신학과 신앙의 표준인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 안에서도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국가(정부)가 지닌 정당한 권한에 복종하는 것이 신자들의 의무다”
먼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년판) 제23장은 “국가의 관원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3항에서 이르기를 “관원들(Civil magistrates)은 말씀과 성례의 집례, 천국 열쇠의 권세도 자신들의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히 5:4절에서 사도는 대제사장에 관하여 언급하는 문맥에서 이르기를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고 했으며, 또 마 16:19절에서 주님은 오직 베드로에게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라는 말씀을 통해 사도권을 부여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제23장 3항은 그렇게만 언급하지 않고, 이어서 언급하기를 “그렇지만 관원은 교회가 일치와 평화를 유지하도록, 하나님의 진리가 순결하고 온전하게 간직되도록, 모든 신성모독과 이단들의 활동을 금하도록, 예배와 권징에 있어 모든 부패와 악습을 방지하거나 개혁하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규례들이 합당하게 서고 시행되며 준수될 수 있도록 적절한 수단들을 강구할 권한을 지니고 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관원들의 의무다.”라고 했다. 이는 수많은 구약성경의 예와 더불어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는 롬 13:1절의 말씀과,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고 한 벧전 2:13-14절 말씀 가운데서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3장 4항은 “관원들을 위하여서 기도하고, 그들의 인격에 대하여 예우를 갖추며, 공세와 기타 세금을 바치고, 그들의 적법한 명령에 복종하며, 양심에 따라 그들이 지닌 권한에 복종하는 것이 백성들의 의무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사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3장에서 그와 같이 명시하고 있는 것은, 앞선 제4장의 “창조”에 관한 조항 1항에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의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태초에, 세상을, 곧 보이는 것(물질적인 세상만물)이나 보이지 않는 것(영적인 세상만물)이나 그 안의 모든 것들을 6일 동안에 창조하시되, 곧 무로부터 창조하시기를 기뻐하셨으며, 모두가 매우 선하였다.”고 한 맥락에서인데, 즉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간에, 믿음의 세상만이 아니라 불신의 세상에 있어서도 전적인 창조자이시며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맥락으로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 정치 형태에 관한 모범은 서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왕국을 다스리려고, 지금 이후로 영원토록 그 왕국을 공평과 정의로 굳게 세우시려고 다윗의 왕좌 위에, 곧 다윗의 왕국 위에 앉아 계신다.”고 한 것이다. 즉 교회뿐 아니라 세상의 권세 또한 그리스도의 통치권 가운데 있는 것이다.
“교회 정치와 국가 정치는 따로 떨어져 각각 분리될 수 없는 것”
그런데 우리 사회의 기독교 신앙의 국가에 대한 이해를 보면, “관원은 교회가 일치와 평화를 유지하도록, 하나님의 진리가 순결하고 온전하게 간직되도록, 모든 신성모독과 이단들의 활동을 금하도록, 예배와 권징에 있어 모든 부패와 악습을 방지하거나 개혁하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규례들이 합당하게 서고 시행되며 준수될 수 있도록 적절한 수단들을 강구할 권한을 지니고 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관원들의 의무다.”라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언급을 거의 간과하고, 그저 정교분리의 원칙만을 앞세웠다. 그러면서도 정작 “건전한 법령들(wholesome laws)에 따라서, 특히 경건과 공의와 평화를 보존”하려는 바탕에서 시행하려는 명분의 정부 정책들에 대해서도 좌우로 분리된 이념(ideologie)적 기준에 따라 반대를 표명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스스로 정교분리의 원칙을 넘어서는 잘못을 행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반공(Anti communism)에 대한 기독교의 전적인 지지에서 알 수 있듯이 교회와 국가, 교회 정치와 국가 정치는 결코 따로 떨어져 각각 분리될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임을 우리 스스로 증명해 보인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국가 정치와 교회 정치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는 조금의 관심이나 진전도 없는 채로 기독교 정당 국회 진출이라고 하는 선동이 한국의 기독교 내에 한사코 일고 있으니, 교회 정치와 국가 정치에 관한 최소한의 이해를 결여한 것으로 보이는 그러한 움직임을 현제로서는 결코 긍정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분야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성경적인 연구와 역할이 갈수록 절실하게 대두되고 있다. 아울러 그러한 연구와 역할의 부재로 말미암아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특정 정권에 편승하는 종교로 오해될 소지의 행동들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먼저 조심스럽게 상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장대선 목사, 대방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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