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 가운데서 이단과 사이비 종교는 지금, 독버섯이 아니라 나무가 되어버렸다.
언제부턴가 공중파 텔레비전 방송의 편성에서 시사교양물의 편성이 급격히 사라져버린 실정이다. 정규 뉴스방송 외에 시사적이거나 인문교양에 해당하는 프로그램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어느새 영화와 각종 S·N·S의 개인방송물들이 대신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구독자 수와 조회 수에 사활이 걸린 S·N·S 개인방송의 특성상의 한계 또한 역력한 실정이다. 하지만 그 어떤 확실한 지원도 보장할 수 없으면서도, 그 어떤 권력이나 압력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하고 독립된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그나마 S·N·S 개인방송들에서 수행하고 있어서, 그 부정적인 측면을 충분히 보완해 주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 가운데서 최근에 넷플릭스(Netflix, Inc.)라고 하여, ‘인터넷’(Net)과 ‘영화’(Flicks)를 뜻하는 어휘들을 합성하여 명명한 스트리밍 엔터테인먼트 기업에서 편성한 ‘나는 신이다.’ 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화제가 되고 있다. 비록 상업성이 농후한 플랫폼이기는 하지만, 이미 공중파 방식의 방송망이 와해되다시피 한 마당에, 방송 편성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민감한 주제에 대해 과감하게 다루어준 프로그램의 의도가 상당한 긍정의 반응을 얻어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 동안 건전하고 정통적인 편에 속하는 기성 교회들이 고착된 영역에 국한하여 다양한 시도를 하는 가운데서, 이단이나 사이비에 속하는 비정통적 종교들 가운데서는 정교분리의 원칙 따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자본력을 동원한 광범위한 사회적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나는 신이다.’ 라는 프로그램의 경우에도 한 이단 단체가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시청을 보장할 수가 없었으나, 법원의 판단에 따라 가처분 신청이 기각됨으로써 비로소 많은 사람들이 그 단체와 수장에 대한 경각심을 공공연하게 공유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사안에 대해서 이례적으로 검찰총장이 사건 공판에 최선을 다하라는 지시를 내리기까지 했는데, 그 결과를 떠나서 사법부의 한 영역을 맡은 수장에 의해 종교의 문제와 관련한 지시가 내려졌다는 점에서 사뭇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그 동안에 우리 사회의 법률에서는 헌법에 명시한 ‘정교분리’(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의 원칙에 따라서, 종교적인 사안이나 사건들에 대하여 최대한 판단이나 지시를 절제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교회 등 각종 종교단체에서 일어나는 분쟁이나 사건들에 대해서도 최대한 자체 규정이나 정관에 근거하여 법리적인 해석과 판단을 내리는 경우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물론 재산 관계에 있어서의 분쟁의 경우에는 민법적 조항들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 왔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번 넷플릭스 방송 편성과 관련한 일련의 배경들 즉, 언론과 사법부의 역할에서 알 수가 있듯이, 정교분리의 원칙은 이분법적으로 끊어낼 수 없는 것을 논리상으로 끊어낸 개념일 뿐이다. 각종 종교단체들은 국가와 사회를 기반으로 양립하여 있는 것이기에, 그 운영을 절대적으로 사회와 분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분리를 상당하게 이뤄낸 현실의 모델로서 재세례파 계열의 아미쉬(Amish) 공동체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조차도 사회와 완전하게 격리되어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와 ‘국가’의 적절한 양립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인데, 그 점에 있어서 현대사회 대부분은 정교분리라고 하는 가상의 논리를 근거로 불완전한 휴전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바로 그러한 휴전의 상황에서,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방송으로 말미암아 촉발된 검찰총장의 수사지침은 정교분리로만 양립할 수 없는 종교의 영역에 대한 신중한 논의를 암시하고 있다 하겠다.
물론 이번에 불거진 문제들은 공히 종교적 문제라기보다는 개인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일탈행위에 대한 처벌이므로, 사법적 처벌의 정당성이 너무나도 분명한 사안일 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도덕적 일탈행위가 종교단체의 운용을 바탕으로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라는 점에서, 종교단체의 운용에 관한 사법적인 판단과 심판을 부를 수밖에 없는 사안이기도 하다. 마치 코로나 팬데믹의 상황에서 불거진 특정 종교단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서 기성교회와 교단들은 상당히 수동적인 반응과 대처를 보이는 실정이다. 기독교와 관련한 이단이나 사이비 단체들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국가권력의 역할이 최대한 신중해야만 하며, 다만 사법적 판단의 근거가 분명한 사안들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라 주장하기 십상인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사실, 진리에 관한 문제보다도 윤리적 혹은 도덕적인 문제를 더욱 현실적으로 중시하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수 있으며, 오히려 진리에 관계된 영적인 판단과 대처가 거의 이뤄질 수 없도록 되어 있는 현실의 치리와 권징의 한계를 간과하는 단발마적인 판단임을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특히나 기독교의 경우에는 오직 성경에 근거하는 명확한 진리의 표준과 원칙들이 제시되어 있으니, 그에 따른 영적인 권한과 연계되는 세속적 혹은, 국가적 권한의 영역과 역할에 대한 실질적인 인식과 연구, 그리고 실천을 위한 신학적 논의들이 요구됨을, 현 시국에서 한 상업적 방송이 의외로 제시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배경으로 깊이 숙고해야 하지 않겠는가.
【장대선】‘믿음’ VS ‘존재’
통상적으로 개혁신학의 중심인물을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이라 여기는데, 이는 흔히 종교개혁의 심벌로 여기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신학이 전기와 후기에 있어서 거의 상반될 만큼 다른 것에 반해서 전기와 후기, 그리고 말기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고 통일성이 있는 신학체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제자들의 신학에 있어서도 루터의 신학과 루터파(lutheran)가 다른데 반해, 칼뱅과 베자(Théodore de Bèze, 1519-1605) 및 여러 칼뱅주의 신학자들의 신학은 여전히 일치하는 점에서의 차이를 보인다.
물론 이러한 견해에 대해 많은 신학자들이나, 그분들에게 사사를 받은 분들이 견해를 달리 하는 경우도 많다. 예컨대 칼뱅의 논문들이 성경의 다양한 가르침들과 요소들을 소개하여 다루는데 반해, 그의 제자였던 베자는 그것을 ‘예정론’(predestination, 더욱 특별히 double predestination)이라고 하는 카테고리로 지나치게 정리해버리는 것을 통해서 칼뱅주의의 다양성과 그 깊이를 제한해버리는 우를 범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주장에 따르면, 칼뱅주의 신학 또한 루터와 루터주의의 신학과 마찬가지로 연속성(continuity)과 불연속성(discontinuity)이 함께 내재하는 불완전하며 더욱 보완되어야 할 신학인 것이다.
사실 그러한 칼뱅주의와 그 연속성에 대한 비판은 결국 그 불연속성을 극복하는 또 다른 대안으로서의 신학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문제의식에 부합하는 신학은 다름 아닌 ‘경건주의’(Pietism)의 발흥과 진전이다. 그러므로 혹자들은 경건주의의 발흥을 가리켜서 제2의 종교개혁이라 칭하기도 하는데, 그러한 경건주의의 기저에는 어떠한 성경의 진리들을 믿는가가 아니라 어떠한 신앙으로 살아가는가의 전환이 전제되며, 바로 그러한 전환의 패러다임에서부터 17세기의 정통주의 신학과 이후의 계몽적인 신학들 사이의 가장 근원적인 구별이 시작된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구별의 양상은 이미 16세기와 17세기에까지도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인데, 그처럼 소급하여 바라볼 때에 눈에 들어오는 확연한 정통주의 신학과의 구별을 단적으로 ‘재세례파’(Anabaptism) 가운데서 확인할 수가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재세례파의 그러한 구별의 양상을 자료들로서 찾아보기는 쉽지가 않은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처럼 곤란하게 된 이유가 바로 그들 자신의 구별 양상 곧, 어떠한 성경의 진리들을 믿는가에 착념하기보다는 어떠한 신앙으로 살아가는가에 착념했었던 그들의 지향함과 태도로 말미암아서였다. 쉽게 말해서 그들은 성경을 상고하여보고 통찰한 진리를 잘 정리하여 기록하는 데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들이 확신하는 바를 따라 실천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과 사상에 관한 구체적이고도 깊이 있는 기록들을 거의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정통주의 신학자들과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인정하며 믿었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유익들에 관한 신학적 논의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실천과 삶에 착념했던 것이다. 또한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경건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그리고 웨슬레주의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현대적인 맥락들이 동일한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 신앙은 지식에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삶과 실천이라고 하는 존재론적 의미에 중심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현대에까지 이르게 된 존재와 실천으로서의 신학적 맥락은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로 널리 알려진 야코프 헤르만스존(Jakob Hermanszoon, 1560-1609)로부터 가장 기초적인 아이디어를 제공받는데, 그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 모든 개별적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Work of James Arminius (Buffalo: Derby, Miller & Orton, 1853), V.I., 216.)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구속하신 대상은, 칼뱅주의의 예정론에서 주장하는바 ‘택하신 자’들만을 포함하며, 그 택하심에 들지 않을 ‘유기자’들은 포함하지 않았다고 하는 이중예정론을 정면으로 반박했던 것이다.
아르미니우스는 물론 그의 주장을 성경에 근거하여 펼쳐나갔다. 요 1:29절에 기록한바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은 “세상 [모든 자들의] 죄”를 지신 것이며, 더욱 요일 2:2절에 기록한바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성경 구절들을 보면서도 선택과 유기의 이중의 국면을 지닌 이중예정을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교만이요 그리스도의 능력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 아르미니우스는 그 때에 ‘보편구원론’(Apocatastasis 즉, Universalism)까지 전개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도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이 있으며, 이를 간과하거나 접하지 않은 자들은 구원과는 전혀 무관한 자들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르미니우스의 구원론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대속은 여전히 유효하며, 다만 그 대상에 있어서 확정된 수로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한 다수에게 개인적으로 제안된다는 점에서 불확정하며 무제한인 것이다.
이러한 아르미니우스의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곧장 존 웨슬레(John Wesley, 1703-1791)에 의해서 보편화와 대중화를 이루게 되었다. 그는 설교를 통해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께서 세상과 자기 자신을 화목하게 하셨다.”(John Wesley's Theology: A Collection From His Works (Nashville: Abingdon, 1982), 79.)고 강조했다. “한 사람[아담]의 죄와 저주를 온 인류에게 가져온 것처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에게 화목을 가져다 주셨”으니, 이제 다만 예수를 믿기로 결단한다면, 그러한 화목이 누구에게든 제공된다는 차원에서의 보편적인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한 것이다.
이처럼 ‘재세례파’에서부터 ‘경건주의’, 그리고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웨슬레주의’에 이르기까지, 종교개혁의 시대에서부터 근대와 현대에 이르는 전 프로테스탄트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큰 흐름을 이루는 것이 바로 ‘존재’(existence)로서의 실천신앙이라면, 그러나 그보다 더욱 근원적인 흐름은 바로 ‘믿음’으로서의 성경적 사고를 지향하는 소위 ‘정통주의’의 흐름이 상호간에 극적인 대립각을 이루는 것이 프로테스탄트 신학 가운데 흐르는 거대한 본줄기(Mainstream)의 전혀 다른 양상들인데, 우리는 과연 존재로서의 신앙 실천과 결단을 자기 스스로의 의지로서 수행할 수가 있는가? 혹은 선행하는 은총(prevenient grace)에 의해 그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인가? 라고 하는 질문과 결론의 맥락은, 정통주의의 바깥쪽 흐름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인 실천과 상당히 가깝게 연계되는 흐름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인간은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죽을병이라도]에 걸렸든지 낫게 됨”(요 5:4)에도 불구하고,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니이다.”(7절)라고 말하는 “서른여덟 해 된 병자”와 전혀 다르지 않지 않은가?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롬 7:22-23)을 보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다만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4-25절)라고 고백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마음속으로 고백하고, 또 고백하고, 또다시 고백하면서, 울며 고개를 떨군 음행중에 잡힌 여자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
바로 이 같은 우리들의 몰골 앞에서, ‘재세례파’에서부터 ‘경건주의’, 그리고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웨슬레주의’에 이르는 존재로서의 신앙을 지닌 자들이 보이는 삶과 실천이라고 하는 존재론적 의미 앞에서, 칼뱅과 베자에서부터 지금 나 자신에 이르기까지의 연속선상에 있는 신자들은 우리를 대속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모든 사역에 담긴 은총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계 21:16)가 얼마나 동일하게 무한한 것인지를, “금 갈대 자”를 가지고서 측량하고 측량하며, 재고 재는 믿음의 측량 가운데서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깨달으며, 찬양하고 찬미할 밖에 무엇이겠는가? 바로 그러한 자들에게 지금도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하신 예수께서는, 아무것도 예비할 수 없이 무능한 자들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는 명령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장대선】 어떻게 자기를 부인할 수 있을까?
기독교 신앙을 일컬어서 종종 ‘자기부인’(self-denial)의 종교라 칭하곤 한다. 그에 반하여 현대의 기독교는 현대주의의 큰 흐름에 편승하여 자기애(Self-love)의 종교로 갈수록 퇴행하고 있지만, 마 16:2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제자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기에, 기독교 신앙을 일컬어서 자기부인의 종교라 칭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한 것이자 마땅히 따라야 할 신앙의 맥락임에 분명한 것이다. 특별히 마 16:2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르시기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시어서,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부인하며 따르는 길 가운데 있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셨다.
그렇다면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더욱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마 16:25절 말씀을 문자적으로 적용하여,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살지 않으며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라는 것일까? 사실 마 16:24-25절 말씀을 직접적으로 실천한 사람은 정작,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예수께서야말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친히 지신 분이시며, 무엇보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요 15:13) 분이시다. 바로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서 그의 제자인 사도들은, 마 16:24-25절의 말씀대로 각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인생길을 걸어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사도들의 모범이 우리들의 자기 부인에 관한 본이 되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보다 더욱 인간적인(?) 길을 걸었던 사도들의 행실과 권면들 즉, 신약성경의 말씀들이야말로 우리가 취할 자기 부인의 실천적 모범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칼뱅의 기독교 강요는 훨씬 상세하고 구체적인 지침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칼뱅은 자기부인에 관하여서 이르기를 “우리 자신에 대한 부정이 부분적으로는 사람들과 관계하나 부분적으로는, 그리고 주로 하나님과 관계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면서, 그러한 자기부인의 실천으로서 ‘이웃사랑’을 연계하여 설명한다. “우리는 너무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에 눈이 멀고 그 사랑으로 치달아서, 다른 이들보다 자신을 높이고 자신과 비교해 모든 사람을 멸시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빌 2:3)과 정반대인 타락하고 부패한 우리 자신의 본성을 경계토록 하고 있다.
사실 율법은 ‘도덕법’(moral law)으로써의 보편성 즉,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요구로써의 전 인류에 대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지만, 영원한 도덕법으로써의 십계명의 두 가지 분류 곧,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와 더불어서 어떻게 이웃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가에 관련한 ‘중생’(regeneration)의 요구가 전제되어 있다. 그런즉 첫 사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고전 15:22) 사람의 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삶을 얻”는 중생의 적용이 이뤄지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사랑함에 관한 계명들뿐 아니라 이웃한 사람들을 사랑함에 관한 계명들조차도 결코 온전하게 실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 16:24절에 기록한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단순히 수행과 고행(Ascetic)의 삶을 제시하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 근본적인 중생 곧,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 되는 중생자의 삶을 제시하고 있는 말씀이다.
사실 ‘율법주의’(Legalism)란 단순히 율법에 관련한 형식주의를 일컫는 것일 뿐만 아니라 더욱, 중생하지 않은 자가 억지로 율법의 형식을 따르려고 하는 것으로서의 지극히 부자연스러움이다. 그러한 율법주의의 삶이란, 그야말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의 삶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삶 가운데 계셨을 때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바로 그처럼 지고 있었던 무거운 짐이, 지금도 중생하지 않은 자로서 이웃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또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행하는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러운 종교적 열심이라는 무게로 여전히 메어져 있는 것이다.
단언컨대 영원한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의 계명들 즉, 십계명의 조항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폐기되어버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의 모든 계명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관한 계명들로 분류되는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순종으로서 성취되었으니,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결코 지킬 수가 없었던 그 무거운 짐을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구속된 자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순종을 따라 적극적으로 율법에 순종하기를 힘쓰는 자들이 된 것이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는 마 11:30절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은 사람들(고전 15:22)에게야 비로소 이해가 되며 공감이 되는 참으로 중생의 신비를 전제하고 있는 구절인 것이다.
그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삶을 살아가는 자는 이제 그야말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는 말씀의 의미와 맥락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자다.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기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 사랑하고 챙기려는 본성을 거슬러서 나보다는 남을 나은 사람들로 여기고 먼저 챙기려는 자기부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남을 깎아내려서 나를 돋보이도록 하려는 선천적인 본성, 앞서 나온 놈의 발뒤꿈치를 움켜쥐던 그 본성을 거스르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 마음과 다르지 않거나 훨씬 나은 선한 마음이라 여기는 자기부인이 없이는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함으로 결국에는 오히려 잃고 마는 것(마 16:25)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한 시라도 성령님께 사로잡히지 않으면, 본성을 따라서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며, 중상하고 모욕하여서라도 나를 높이고 끝내 그 높이만큼의 추락을 경험하는 버러지 같은 인생이 아닌가! 트리나 폴러스(Trina Paulus, 1931-)가 나비가 되어 꽃들 사이를 날아다니게 될 애벌레들을 통해 통찰했던 그 희망에도 못 미치는 헤픈 은총을 남발하는 체플(chapel)들에 모인 회중들에게 꽃과 나비, 무엇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람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신 뒤에 몸소 그리 행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자기 목숨을 건지려고 남을 싫어하며 밟고, 모욕하며 중상하여 아득바득 살아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그 무거운 짐이 자기 스스로의 욕심과 본성으로 진 것이라는 사실은 가맣게 잊은 채, 자기애와 자기연민의 눈물로 자위하며 죽어가는 거듭나지 못한 자들의 심령에, 지금도 세미한 소리로 메아리치고 있지 않은가!
◆‘할로윈’(Halloween)에 관한 상념
어느새 우리 사회의 한 세대의 문화를 잠식한 이방의 풍습인 할로윈 데이.
매년 10월이면 당연한 듯이 행하는 할로윈 데이 풍습은 그 기원이 워낙에 오래되어서 정확하게 단언하지는 않지만, 대략 500년 전 쯤에 아일랜드 켈트족의 ‘Samhain 축제’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켈트족들의 새해 첫날인 11월 1일 이전인 10월 31일에 죽은 자들의 영혼이 자신들을 택하지 않도록 하고자, 귀신과 같은 옷차림과 분장을 하고 집안에도 사람이 사는 기운이 느껴지지 않도록 치장하던 풍습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켈트족의 풍습이었던 Samhain 축제가 크게 확장되어 퍼져나간 것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미신적인 신앙의 역할로 말미암았다. 주후 4세기에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었을 때로부터 점차 퇴행한 기독교 신앙은, 마침내 로마 가톨릭의 종교 가운데서 온갖 미신적이고 세속적인 문화들과 융화되어 확산되는 현상들이 일어났으니, 켈트족을 정복한 로마제국의 갈수록 퇴행하던 기독교는 마침내 11월 1일을 ‘모든 성인들의 날’(All Hallow Day)라 칭하는 축제일로 선포함으로써, 마침내 켈트족의 풍습이 자연스럽게 기독교 풍습으로 융화될 수 있도록 하는 고도의 토착화(Indigenization) 전략을 실행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들은 나중에 스페인 제국의 확장과 더불어서 제국의 종교인 로마 가톨릭교회의 토착화 전략의 실천으로서 행해진 각종 축제일과 페스티벌의 제정을 통해 여전히 중요한 선교의 전략으로 자리매김 했었다. 마찬가지로 신대륙 아메리카 역시도 그러한 로마 가톨릭의 토착화 선교방식이 펼쳐졌었으니, 로마 가톨릭과 아일랜드의 종교풍습이 처음부터 다종교와 다문화의 풍토 가운데서 시작된 식민지 종교의 상황과 형편을 자연스럽게 물들였던 것이다.
놀랍게도 그러한 토착화는 현재 대한민국에까지 확장되기에 이르렀는데, 주로 영어 학원이나 어린이 집의 영어교육 프로그램 등에서 영어권 문화를 대표하는 미국의 문화로써 소개된 할로윈 축제가, 어느새 그러한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인 지금의 20대 세대들에게 자연스러운 문화요 풍습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물론 대한민국의 할로윈은 고대 켈트족의 Samhain 축제와도 다르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All Hallow Day와도 다르게, 젊음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전형적인 축제로서만 자리매김한 실정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2022년 10월 30일에 대한민국 이태원에서 벌어지고 만 압사사고의 참사에는, 이러한 할로윈 축제의 역사와 그 양상에 담긴 미묘한 의미들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었다. 켈트족의 풍습인 Samhain 축제가 죽은 후에 1년 동안 이승을 떠도는 영혼들이 기거할 육신을 찾아다닌다는 속설처럼, 150명이 넘는 아까운 젊은이들의 육신이 죽음의 선택을 받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마치 그들의 영혼이 이승에 1년 동안 머무르는 것을 인정이라도 하듯이, 대통령 내외의 이마에 칠해진 시커먼 칠이 그 의미를 새삼 떠올리게 했다(※ 이 언급은 사실이 아닌 가짜뉴스의 내용이라는 해명이 있음을 밝힌다). 적어도 그 칠이 악귀를 쫓는 숯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번 할로윈 참사 가운데서 떠오른 상념은, 진리로 채워지지 않은 사람의 심령에는 반드시 비진리가 채워지기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마치 참되고 순수한 기독교 신앙에서 이탈하기 시작한 로마제국의 종교가 로마 가톨릭 교회로 채워지고, 또한 진리가 아니라 온갖 인간적인 문화와 야망들로 가득했었던 로마 가톨릭의 종교에 다시금 켈트족의 이방 풍습이 축제일로 탈바꿈하여 들어왔었던 것처럼, 자녀들에게 남들보다 유리한 경쟁력을 갖추도록 영어를 가르치고자, 고액의 돈을 지급할 수 있는 능력은 갖췄지만 그 정신과 영혼에는 그 풍요만을 누리고 전수하고자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밖에 남지 않은 기성세대의 배려 가운데서, 왠지 모를 공허에 처한 젊은 세대들을 사로잡은 할로윈 축제의 망령은, 심지어 한 정권의 수장과 그의 부인의 이마에까지 시커먼 칠로 변형하여 자리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 언급은 사실이 아닌 가짜뉴스의 내용이라는 해명이 있음을 밝힌다). 그러므로 어쩌면 고대 켈트족의 풍습에서부터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일, 그리고 식민지 아메리카의 축제일과 그 아메리카 문화에 사로잡혀버린 한국의 할로윈 축제에는 공히, 죽은 자의 망령이 아니라 사실은 산 자들의 욕망과 욕심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무엇보다 그러한 사회, 켈트족과 그 족속을 지배한 로마제국, 또한 아메리카 대륙을 집어삼킨 미국의 기독교 문화와 급기야 한국에까지 이른 기독교 신앙이야말로, 사실은 인간 자신의 욕망과 야망을 살짝 가려둔 거창한 포장이 아닐지? 그 이마의 시커먼 칠을 보고서도 예배당에까지 그들을 불러들일 만큼 지극히 세속적인 작금의 기독교의 모습이야말로, 참되고 순전한 복음의 진리가 사라져 버린 거창한 껍데기만 남은 기독교 종교의 실상을 까발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사실 기독교 신앙은 항상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세속 사회에 대해서도 무한한 책임을 지닌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하나님께서 명하신 진리에서 스스로 타락해 나간 인간이 다시 회복해야 할 진리가 무엇인지를 제시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순수하고 참된 진리 외에는 결코 행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러한 능력과 역할, 그리고 책임을 지닌 교회와 기독교 신앙의 책임은 언제든지 무한한 것이다. 교회와 교회 안의 기독교 신앙 말고는 그 어디에서도, 그리고 참되고 순수한 복음의 신앙 말고 그 어떤 그럴싸하고 유용한 듯 보이는 종교심이라 할지라도, 한낱 할로윈의 기괴한 복장들과 이마 위의 시커먼 칠에 다름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한민국의 모든 기독교 신앙과 그 가운데 세워진 교회들이 새삼 숙고해야 마땅한 것이다. 바로 그러한 능력과 책임감이 결여되었을 때에, 우리 사회는 더욱 기괴한 복장과 더욱 음흉한 검은 칠을 하고서 죽음을 기다리는 망령들이 출몰하는 고대의 야만족들의 사회로 전락하고 말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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