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박사(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십수 년 전 미국 헤리스벍 장로교회 집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나는 강송중 목사님으로부터 펜실베니아주 랑케스트(Lancester) 대공연장에 「Noah」라는 연극이 무대에 오른다고 해서 함께 관람을 했다. 「노아」를 무대에 올린 공연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넘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은 내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공연장과는 전혀 달랐다. 무대는 노아의 8식구들의 생활이며, 「노아의 방주」 실제 크기로 무대 전면과 좌우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노아 방주에 모든 동물들이 뒤에서 무대 앞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연출했다. 무대 뒤에서 소, 양, 낙타, 말이 들어오고, 칸막이에 있는 모든 동물들의 움직임은 청중들의 눈과 귀를 뺏기에 충분했다. 나는 평생 이렇게 웅장하고 완벽한 무대는 처음 보았다.
사실 「노아」라는 무대는 몇 개월씩 공연하고 다시 「Moses」나 또 다른 것을 공연하기도 했었다. 물론 이 「노아」란 무대의 내용은 구약 성경 창6~9장에 나오는 <노아 대홍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지만, 화려한 조명과 아름다운 음악 그리고 배우들의 명연기에 관중들은 넋을 잃고, 노아의 홍수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노아의 대홍수 사건은 설화나 신화가 아니고, 역사적 사건(Historical Fact)이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그 내용을 옛날이야기쯤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성경에는 노아가 왜 산 꼭대기에 방주를 지어야 하는지, 그 의미와 노아의 살아가는 연대와 세 아들의 이름까지 정확히 기록되어 있고, 그 자부들이 함께 있었음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노아 시대의 대홍수 사건을 날짜별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오늘의 T.V 방송국에서 홍수와 장마를 그대로 생중계하듯 하다.
모든 사건은 기록되어야 역사(History)가 된다. 노아 시대의 대홍수 사건은 성경의 기록이자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으로, 인간의 부패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세상이 썩고 부패했어도 그래도 의(義)와 진실을 따라 사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사명(使命)을 주셨다. 대홍수로 모든 인간의 멸망 중에도 노아의 8식구와 동물들의 종을 보존키 위해서 암수 한 쌍 식 방주로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방주의 구체적 설계와 방주를 짓는데 재료까지 준비하도록 했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 기록이다. 그런데 노아는 산 위에 배를 만드는 어리석은 늙은이가 아니라, 그 시대의 선지자로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음란, 방탕하고 죄악을 물 마시듯 하는 인간들에게 끝까지 회개를 외쳤지만, 아무도 노아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는 마지막 때를 준비하라고 외쳤지만, 모두가 노아를 무시하고 빈정대고 코웃음을 쳤다.
드디어 대홍수가 터졌다. 40일 동안 하늘에서 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진 것뿐 아니라, 땅에서도 물이 솟는 현상이 나타났고 결국 온 천지는 물바다가 되었고, 방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과 동물들은 모두 물속에 수장되고 말았다. 드디어 물은 아라랏 산까지 집어삼키고 나서야 노아가 만든 배는 두둥실 떠올랐다. 대홍수 때 노아의 8식구와 거기 함께 탄 생물들은 살아서 종족을 잇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다시는 홍수로 인간을 멸하지 않겠다는 표로써 <무지개>를 보여 주셨다. 사실 노아는 공의가 없는 시대, 불의와 불법이 세상에 창궐할 당시에 그는 <의의 설교자 노아(Noah, Preacher of Righteousness, 벧후2:5)>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늙은이를 통해서 그 시대를 경고하고 있다. 나는 랑케스트의 <Noah> 극의 마지막 부분에 와서 청중들을 향해서 <오늘의 노아>가 된 배우가 뱃머리에 서서 뜨거운 가슴으로 오늘의 죄악을 질타하는 소름 돋는 메시지를 지금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인간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인생들은 들으라! 인간의 부패, 탐욕 즉 온갖 비리와 부정이 판을 세상이다. 만에 하나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회개하라! 죄악에서 돌아서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기후 변화로 지구는 갈수록 병들어가고 있다.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각 대륙 마다 옛날에는 생각지 못했던 폭염과 장마가 일어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은 가물어 영상 40도에 가까운 폭염으로 사람들도, 동물들도 푹푹 쓰러지고 있다. 한편 중국과 인도에는 온 나라가 물바다가 되어 수천 명이 죽고 수십 수백만 명의 이재민이 생겼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장마 전선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서울 경기는 말할 것도 없고, 충청도와 전라도와 경상도에 쏟아부은 폭우로 50여 명이 죽고 집과 재산과 농작물과 일터를 잃어버린 이재민들이 여기저기서 부르짖고 있으니 전 지구적 사건 중의 하나이다. 이번 사건으로 <귀촌>의 꿈도 사라지고, 지방도 어렵게 되고 지방대학도, 농촌교회도 버티기 어렵게 되었다. 물론 정부의 발 빠른 구호와 안정대책이 필요한 것도 맞지만, 수해를 맞은 어려운 이웃을 두고 이 기회에 무슨 정치적 꼼수를 부려 이득을 보려는 자들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이런 때, 목회자와 성도들은 <오늘의 노아가>가 되고, 한국교회는 부도덕하고 타락한 세상을 과감히 책망하는 <오늘의 구원의 방주>가 되었으면 한다.
【정성구칼럼】핵심(核心)이 빠졌다
1960년대 초였다. 필자가 신학대학원 시절, 교수님으로부터 배운 영어 한 문장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Don’t beat around bush”란 말이었다. 그 뜻은 ‘빙빙 돌려서 말하지 마라!’는 것이다. 즉 <핵심>을 말하라는 뜻이다. 이런 문장이 생기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잔디 가운데 방귀벌레 한 마리가 있는 것을 쫓아내기 위해서 주인이 막대기를 가지고 잔디 주변을 계속 두들기고 있으니, 지나가던 사람이 말하기를 “Don’t beat around bush”라고 했다. 즉 직접 그 방귀벌레를 잡아서 처리하면 될 것을 그 주변을 자꾸 두들긴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뜻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핵심>이다. 우선 국회 청문회만 보더라도, <핵심>은 빠지고 불필요하고 시시콜콜한 언설로 상대에게 무안을 주고, 기를 꺾고, 말문을 막고, 말 같지도 않는 말을 하면서 공격한다. 그래서 상대가 당황하면 마치 대단한 것을 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하는 것을 거의 매일 보고 있다. 상대 당이나 국무위원들을 말로써 제압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약점을 조사해서 언성을 높이지만, 정작 내용도 알맹이도 없는, 즉 <핵심>은 말하지 못하고 시간 때우기 일쑤다. 언론들도 야당과 한통속이 되어 국익에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것을 사건화 하고 기사화 해서 정부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을 언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언론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상대방의 약점 캐기에 올인하는 듯하다. 세상에 중립이란 없다. 모두가 자기의 이데올로기와 세계관에 따라서 달라질 수가 있으며, 그것을 요즘은 SNS에 얼마나 동원되는가를 선악의 표준으로 삼는 모양이다.
이태원 압사 사고가 일어난 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나고 있고, 추모의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있는데 정작 문제의 핵심은 없다. 각 종교단체에서는 아까운 목숨을 위해서 애도하는 것은 많지만, 사건의 원인 규명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어떤 이는 관계 기관장을 처벌하라는 사람도 있고, 야당에서는 이 사건의 원인을 대통령에게 덮어씌워 탄핵에 불을 지피려고 하고 있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사람의 말을 빌리자면, ‘그 숨쉴 수도 없는 밀집 공간에 무슨 기름을 뿌렸다’는 사람도 있고, 어떤 증인들은 ‘마약을 섞은 알사탕을 나누어 주어서 의도적으로 살해 했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 이태원 압사 사고는 누군가의 기획에 의해서 일어났다는 설도 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으나, 철저히 수사를 통해서 아까운 1020세대들의 죽음과 유가족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야 할 것이다. 만약 덮어놓고 정치 공세를 한다거나, 탄핵을 들먹인다면 사건의 <핵심>은 오간 대 없고, 혼란의 변죽만 울리는 꼴이 된다.
제도권 언론에서 감추고 있는 것이 있다. 이번 사건에서 언론들은 <핵심>은 빼놓고, 변죽만 울리고, 정작 경찰서장의 이름과 용산 경찰서의 이름마저 빠져있다. 그러니 참으로 의도적인 언론 플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언론은 상인들의 장사속은 말도 안하고 있고, 마약 사탕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고 있다. 또 언론이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고, 행안장관과 대통령 탄핵만을 주장하는 것을 보면 사건의 핵심은 빼버리고 변죽만 울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사건의 본질은 없어지고 야당과 언론의 충동질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MBC는 <국가가 왜 있나?>라고 부추기고 선동함으로써 대통령을 가해자로 프레임을 만들어 과거 촛불시위나 세월호를 재현하려고 시동을 걸고 있다. 언론이 조명해야 할 것은 안하고 오히려 정부를 공격하고 있다. 언론은 국가의 재난을 중립적으로 보도해야 하는데, 지금의 언론은 좌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할로윈데이를 부추긴 것도 언론이고, 심지어 몇 주 전 어떤 방송사는 방송내용은 좋았으나, 성조기를 불태우는 배경을 끝까지 방영하고 있었고, 금 년 초 음악회의 배경에는 인공기와 비슷한 영상을 띄워서 시청자를 오도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기자가 되려면 먼저 좌파가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이 설득력이 있다.
사건, 사고는 언제라도 날 수 있다. 9·11테러 사건 때 나는 캐나다와 미국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끔찍한 장면을 T.V로 보았다. 그때 그 사고로 죽은 사람은 3000명이 넘었다. 그럼에도 당시 미국 시민들은 아무도 부시 대통령을 탄핵하자는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양키스타디움에 모여 기도하는 대통령에게 힘을 모았고, 국가적 재난 중에도 대통령을 위로함으로써, 미국의 단결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역시 미국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북한과 대치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일어난 불행한 사건을 정권탈취와 혁명으로 나라를 뒤집어엎으려는 자(者)들과 언론의 행태는, 사건의 <핵심>을 벗어나고 본질을 벗어난 비애국적 사건임에는 분명하다. 특히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메시지도 <핵심>보다는, 변죽만 자꾸 두들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역사적 기독교 교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있는 대로 그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 건설과 세계선교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 성경의 <핵심>이다. 그럼에도 오늘의 목회자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잘 살고, 어떻게 하면 물질의 축복을 받는지, 그리고 신앙보다는 삶의 윤리를 설교한다. 사실 이런 종류의 설교를 윤리적 설교(Ethical Preaching) 또는 도덕적 설교(Moralistic Preaching)라고 한다.
이 칼럼의 <핵심>은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종교이든 간에 핵심을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핵심은 곧 <본질>이요, <노른자>이고 <뼈대>이다.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 <핵심>을 놓쳐버리면 모든 것이 허공이고 걷잡을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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