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양형모 어르신을 추모하며!

예전과 달리 부모와 자식사이에, '부정 모혈'이라는 끈끈한 애정은 점점식어지고, 더구나 요즘처럼 살기가 팍팍해서, 내 한 몸둥이도 간수하기 힘든 세상에, 병들어 늙은 부모가 내겐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요즘 나라의 복지제도는 피부에 와 닿을만큼 잘되어 있다. 우선 65세 이상이면 노령연금이 나온다. 그럼 자녀의 부담도 줄어든다. 또 아들이 없고 딸만 있다든지 아예 자녀가  없으면, '생활보호대상자'가 되어, 요양원에 입소하게 되면 전액 헤택을 받을수 있다. 생각해 보라! 나를 낳아 주고 길러 준 부모가, 병이들어 수발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면, 어른이 되기까지 부모의 그늘에서 살다가, 정작 그 부모가 병들어 자식의 손길이 필요할 때, 요양원으로 모신다? 그럼 자식이 모시기를 마다한 그 부모를 요양원에서는 어떻게 모시기를 바라시는가?

돈 몇 푼 안들이고도, 내 손이 아닌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의 손으로, 병든 부모의 수발에서 해방 된다는 안일(安逸)한 생각에, 병든 부모를 맡겨 놓고 떠나는, 자식들을 보는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려는 보았는가? 나는 종종 요양원으로 모시겠다는 가족들과, 한사코 너희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부모를, 요양원에 떠밀다 시피 두고 떠나는, 자녀들 사이의 깊은 앙금들을 종종 보게 된다.지금 요양원으로 떠밀림을 받는 어르신은, 지난날 어린 자식들에게 생명의 젖을 물려, 온 맘으로 기른 그 자식들로부터, 정작 그들의 수발을 필요로 할 그때,   그 피붙이들로부터 손사래를 받게 되었을 때, 이제는 내 몸둥이마저 병들어, 나의 상전이 되어 있는 그때에, 늙은 부모의 아픔이 얼마나 클까? 내가 어르신들을 섬겨온지 반세기의 절반이 지나 갔다. 1990년대까지 20여년동안 홀어머님을 모시고, 서울, 하동, 부산 영도 등에서 일반 목회를 하면서, 어르신들과 정말 고락을 함께하며 살아 왔다.

그땐 나라에서도 노인복지에 대해서 태동기여서, 당시 노인들은 자식들 뒷바라지에 일생을 다 보냈기 때문에, 정작 자신을 위한 노후 준비는 아무 것도 준비 된게 없었다.   일반목회를 하고 있던 그때, 어머님을 모시고 있던 나는, 자연스럽게 노인분들의 노후에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수년 동안의 준비기간을 거쳐, 1999년에 청평에서 그렇게 시작한 것이 무의탁 양로원이다. 그로부터 만 11년의 세월은, 정말 힘든 나날이었다.  그리고 2009년부터 춘천에서 아흔 한분을 모시며, 이제 내 나이 일흔 일곱이 된 지금까지 섬김의 삶을 살고 있다. 무의탁 양로원부터 요양원까지 25년을, 하루같이 어르신들과 함께해 온 세월동안, 참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우리는 똑같은 사물을 보면서도, 보는 각도에따라 예를 들자면, 요양원을 운영하는자의 시각과, 부모님을 요양원에 모시고 있는 가족이 보는 입장과, 그리고 어르신을 섬기는 요양보호사와 복지사, 영양사와 요리사, 간호사와 물리치료사 등 각자의 입장에서 보는 시각이 서로 다를 것임은 너무도 자명하다. 

흔히 요양원에서 어르신들을 애정없이, 목석처럼 딱딱하게 대하는 것으로만 인식하고 있지 싶다. 이 땅위에 부모없이 태어난 사람이 없듯, 어느 곳이건 사람들이 사는 사회 공동체다. 또한 복지사업에 종사하는 모든이들은, 다른 분야의 사람들보다는 정도의 치이는 있지만, 그럼에도 어른을 섬기려는 마음이 강해서, 요양원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 주시길 바란다. 정말 '요양보호사의 일' 아무나 할수 있는게 아니다. 먼저 요양보호사들은, 최소한 어른을 섬기려는 마음이 누구보다 강하다. 그래서 사랑없이 기계적으로 섬기지 않는다. 그러나 때론 너무 큰 스트레스를  받다 보면, 감정을 지닌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에, 한 순간 일시적으로 그 불만이 입소한 어르신들에게로 돌아갈 때도 있을 것이다. 꼬투리를 잡으려고만 말고 생각해 보시라. 처녀가 임신을 해도 변명할 말이 있듯이, 자녀가 병든 부모를 더 이상 부양하지 못하고, 요양원에 모실 때에도 다 그만한 이유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서로 헤아림이 있어야 하는데, 대개의 경우 이런 헤아림이 없다.  요양원 부담비용을 보험공단에서 80%, 개인부담이 20% 임에도, 가족의 입김은 실로 대단하다. 요양원은 대개의 경우 요양원 건물과 대지의 마련은 운영자의 몫이다.  허지만 운영자가 받는 급부는 매월 받는 월급이 전부다. 그럼에도 운영자는 항상 화재에 대해 신경을 곤두 세울뿐만 아니라, 의사도 아니면서 코로나에 대하여, 입소한 어르신들의 일상생활과 건강등 모든 안위에 대하여, 하루 24시간 불침번을 서야하는 긴장의 연속이다. 내가 거의 반평생을 노인복지에 종사해 왔지만 나 또한 자녀가 없다. 내가 일선에서 과연 몇년이나 더 일할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 또한 내 몸이 상전이 되면, 요양원에 입소할 것이다. 이것이 내 노후 준비다.

입소한 어르신 대부분은 독립생활이 불가능한 등급환자들이기 때문에, 인지능력에서부터 신체에 기능에 이르기까지, 안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수십년동안 어르신들을 섬겨오면서, 단 하루도 가슴펴고 잠을 자본 적이 없을만큼 긴장의 연속이었다. 다리가 아주 부실한데도 잠시도 앉아 있지 않고, 밤낮없이 돌아 다니는 어르신들이 있다. 잠시 한눈 판사이 일을 저지르고, 밖으로 나가고, 그러다 다치기도 하고, 다치면 그 귀책사유가 다 요양원에 있다고 아예 단정해 버린다. 어느 어르신이 몸을 다쳤다. 이때 가족들의 반응은 몇년전만해도, "내가 부모님을 모셨어도 이런 사고는 있었을 겁니다." 이렇게 안심을 주는 가족들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가족을 보기가 어렵다. 옛말에 "잔병에 효자없다."는 말처럼, 가족들과 진심이 소통됐으면 참 좋겠다. 요양원을 운영하는 대부분이, 그동안 사회에 봉사와 노인복지를 위해 일하던 분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요양원에서 일하고 있는 종사자들도, 수많은 직종 중에 노인복지에 일하고 있는 것은, 섬기는 일에 특별한 달란트가 있어서가 대부분이다.

대개 이런 심정으로 요양원에서, 대소변과 식사도움과, 온갖 수발들을 허리 펼사이 없이,  그리고 야간팀은 밤을 새워가며 불침번을 하고 있는데, 그리고 독립생활이 힘든 노인분들 수발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청 장년들은 아예 손사래를 치고,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칠십이 넘은 이들도 감당하기 힘든 노인들을 돌보고 있다. 이를 아시라! 사실 가정에서 케어가 가능한 어르신들은, 요양원에 아예 오시지도 않는다. 대개의 경우 집에서 수발하기 힘든 분들을 돌보고 있다.  그럼에도 인력 부족현상은 날이갈수록 점점 더 심화되어가고 있다. 요양원의 한 단면만 보고서,  그리고 또 나도 언젠가는 내 몸둥이가 내 상전이 되게될 때, 그때 자식들의 수발이 아니라, 요양원으로 등 떠밀려 가게 될런지도 모른다는, 아련한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안심하시라! 우리나라 요양원제도는, 세계 선진국에 비하여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어르신을 모시는 배려하는 마음에서나, 그 양과 질에 있어서 세계 최고라고 자부한다. "그런다 카더라" 하는, 남 말하기 좋아히는 무책임한 말에 염려 놓으시라! 어려움을 몰 이해하고 있는 이들이 너무 많아 이글을 올린다. 병든 어버이와 병든 어른에 대한 병 수발은, 모든 사랑 중에 가장 으뜸이다.

        종그니가

【종그니칼럼】양형모 어르신을 추모하며!

지난 달 이태원의 할로윈 (Halloween)데이즈의 어처구니 없는 참사로, 생떼같은 젊은이들이 비명에 갔다. 충분히 예방할수 있었던 비극을, 오만으로 해이해진 국가기강이 화를 자초한 것이다. 젊은 날에 나는, 나이 많은 늙은이와 죽음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들로 알았지 싶다. 그러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그후 십여 성상을 지나면서 우여곡절을 격고 난 후, 하나님의 종으로 일선 목회를 시작하고서야, 그리고 삼십년 가까이 나이 많은 어르신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해 오는 동안, 늙고 병들고, 그리고 임종의 현장을 목도하면서, 죽음을 앞둔 노년의 외로운 삶을 좀 더 알게 되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정한 이치임에도, 누구나 가야 하는 이 길을 모두 다 두려워 한다. 늙으면, 병들고, 외롭고, 가난하고, 할 일이 없다는 사고(四孤)가 있다. 젊은 날엔 왜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을까 ? 젊은 기백으로 이 모두를 물리칠수 있다는 만용때문 이었을까?   
 
아주 먼 옛날 인간들은 힘(완력)으로 세상을 제압했다. 그리고 늙어지면 지 몸하나도 추스리지 못하는게 인간임에도, '썩어도 준치'라고 오늘 날 인간사회에 적용되고 있는 법치주의 또한, '가진 자(힘)의 논리'위에 서 있다. 늙으면 왜 서러운가?  인생의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다. 그래서 늙으면 지는 해가 서럽다. 힘의 상징인 젊음은 멀어지고, 이제 잊혀져 가는 자리에 서 있기 때문이다. 세월은 물과 같아서 손으로 아무리 쥐고 있어도 흘러나간다. 옛말에 여생지락(餘生之樂)이란 말이 있다. 살아 온 날들이 고난의 세월이었어도, 남아 있는 세월을 즐기라는 말이다. 공자도 "남은 여생을 즐길 줄 아는 자가 가장 지혜로운 자."라 했고. 로마의 석학 키케로는, "여생을 젊은이 처럼 사는 노인이야 말로 인생의 달인"이라 했다. '인생의 풍경'을 아시는가? 지금은 11월 초 사흘 가을의 끝자락에 서 있다. 엇그제 기동이 가능한 어르신들 스무분을 모시고 단풍 나들이를 갔다. 점심은 설악에서 중국 요리의 달인이 만든  짜장면을 맛있게들 드셨고, 단풍으로 붉게 물든 나무숲 사이에서 하나같이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은 모습을 사진에 담아 왔다.  오늘 갈 바람에 지는 낙엽을 보며, 인생의 길위에 풍경을 달고 온 것이다.

사오십년을 일반목회와 특수 목회로 어르신들을 섬겨 오면서, 주마등처럼 기억에 떠오르는 수많은 분들이 계시지만, 며칠전 갑자기 소천하신 양 형모(91세) 어르신과의 사별은, 내겐 너무도 뜻밖이어서 충격이 컸다.  만년청년처럼 정정하시던 분이, 갑자기 폐에 물이 차 있다는 진단을 받고, 춘천 한림대 병원에 입원하신 후, 첨엔 치료의 예후가 좋다고 해서 기다렸더니,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끝내 중환자실에서 소천하셨다.   고 양형모 어르신 내외분은, 평소 내가 존경하는 양승국 변호사님의 부모님으로, 두 분을 내가 모시고 싶다고 해서,  지난 해 12월 12일에 입소 하셨는데, 모신지 일년이 못되어 돌아가시니, (나는 평소 '아버님'이라 불렀다.) 정말이지 지금도 여상히 살아 계신 것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살아 계실 때, 좀 더 함께 하는 시간을 자주 갖지 못한 것이 한없이 죄스럽기만 하다. 

언제나 그러하듯 살아 곁에 계실 때, "좀 더 살피고 잘해 드릴 걸"하는 때 늦은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 온다. 금년 봄엔 벚꽃 나들이도 하셨고, 지난 9월 초엔 둘이서 추곡 약수터를 다녀오기도 했다. 시월 초에는 케이불카를 타고 삼악산 정상까지 걸어  오르시기도 하셨다. 케이불카를 타고 삼악산을 오를땐,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셨었다.  그리고 얼마전엔 외곽도로를 타고 춘천시내를 한바퀴 돌 때에도, 어린아이처럼 좋아 하셨다. 언제 뵈어도 웃는 모습이셨고,  항상 건강하게 보이셨는데! 졸지에 이렇게 유명을 달리하시다니!  폐질환이 있어 춘천 성심병원에 입원하셨지만, 외관상 그렇게 정정하시던 어르신이, 이렇게 갑자기 한 생애를 마감하신 것이, 모두 내 잘못인양 싶어 가슴 아프다. 

어르신의 큰 아드님 양승국 변호사님은, 아버님에대해 이렇게 술회하였다. "아버님을 동화경모 공원의 황해도 묘역에 안장하고 돌아오면서, 91년동안 살아오신 아버님의 생애가, 제 눈앞에 주마등처럼 흘러가더군요. 6.25가 터졌을 때, 아버님은 당시 19살이셨지요. 북 조선 평양에서 훈련 받던 아버님은,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인민군으로 '마포 전투'에 투입되시고, 그 전투에서 아버님은, 총 3발을 맞으시고 포로가 되셨지요. 그리고 자유 대한을 선택하시어, 반공 포로로 남한에 남으셨지요. 남북전쟁의 참화로, 전 국토가 초토화된 그 때에, 아무런 연고가 없던 남한 땅에서, 아버님의 치열한 삶이 시작되셨다. 그리고 어머님과 결혼하여 저희 3형제를 낳으셨지요.

비록 아버님이 자유대한을 선택하셨지만, 이북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뼈에 사무치셔서, 남한 땅에서 아버님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아버님은 한가위 때면 저희 가족을 데리시고, 임진각, 애기봉, 강화도 북쪽 해안 등으로 가셔서, 북쪽 하늘을 쳐다 보시며, 가슴 져미도록 고향을 그리워 하셨다. 그리고 아버님은, 북쪽을 향해 소리치셨다. “아버지! 어머니! 내가 돌아갈 때까지 살아계시라 우요!” 그런데 아버님의 아버님과 어머님, 그러니까 제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이제는 더 이상 살아계시리 라는 희망도 점차 사라지게 되자, 아버님의 한에 맺힌 외침도 점점 잦아 드셨다.

그렇지만 아버님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마저 잦아든 것은 아니었다. 제가 아버님을 모시고 백령도에 갔을 때, 해안에서 불과 13km 떨어진 황해도를, 뚫어져라 쳐다보시던 아버님의 눈물어린,한 맺힌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이제 아버님은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땅과 마주 보는 동화경모공원에 묻히셨다. 아버님을 안장하고 임진강변의 자유로로 들어서는데, 새 떼가 강을 건너 북한 땅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순간 아버님의 혼이, 저 새떼에 합류하여 북한 땅으로 건너 가시는 듯한 환상에 젖어 들었다. 아! 살아서는 결코 넘어갈 수 없던 분단의 벽을, 이제 아버님은 한 마리 새가 되시어, 훨훨 날아 넘어 가시는가! 아버지! 평생동안 그토록 가시고 싶었던 고향으로, 넋으로 나마 훨훨 날아 가시옵소서!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종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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