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 먼저 간 친구 인근에게!

 요양원에 입소한 어르신들 중에는, 손금이나 관상도 볼 줄 아는 분들이 계신다. 각 층에 있는 노인분들의 휴식처인 홀(Hall)로 나가면, 바로 어제 내 손금이나 관상을 봐 주고도, 금새 까맣게 잊고서 또 봐 주겠다 고 한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 주면, 하는 말이 어제와 똑 같다. "왕 손에다 손이 떡 두꺼비 같다."며, 일흔 일곱 된  늙은 나에게 앞으로 부자 될 상(像)이란다. 인간의 운명이 내 손바닥 안에 있다는거, 얼마나 기발하고 긍정적인 발상인가? 나는 관상이나 수상을 믿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굳이 마다하는 것도 아니다. 허지만 참 재밋잖은가? 삶의 희열이 되기도 하고, 또 덕담도 되기때문이다. 내가 언젠가 '얼 굴'에 대하여 얘기한 적이 있는데, '얼 굴'할 때 '얼'은, 얼 빠진 놈, '민족의 얼'할 때의 얼, 혼, 정신 또는 넋을 말한다. 그래서 '얼 굴' 할 때의 굴(窟)은, 얼이나 혼이 깃드는 '굴', 또는 '집'이란 뜻의 '얼 굴'을 말한다.  그래서 "얼굴 값을 한다."는 말처럼,  "얼굴 속에 그 사람의 됨됨이가 모두 나타나 있다. 성경에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본다." 하셨듯이, 관상보다 더 정확한 것이 心像이다. 마음의 그림자(image)가 바로 '얼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도 "무릇 지킬만한 모든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한 것이다.  이를 비유해서 말하면, "마음이 태양이면 얼굴은 달이다." 즉 "마음을 빗어낸 것이 얼굴"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맘(심성)을 곱게 쓰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칼을 대어 얼굴을 뜯어 고치는 사람은 많아도, 말씀의 칼로 마음을 고치려는 사람은 적다.  인생의 성패가 모두 마음에서 나오는 데도, 인생들은 그걸 모르고, 맘보다 얼굴만 뜯어 고치려 든다. 주객이 전도(顚倒)된 것이다.   

어제 나는 춘천 에막골에 있는,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영상을 통하여,현대 예술의 극치를 보는 듯했다. 그런데 첫 관문에 들어서자, 인간과 자연의 시원(始源)이, '다윈의 진화론'으로 시작되고 있어서 마음이 몹씨 상했다.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첫 출발이고 지향점인데, 창조론이 아닌 진화론으로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조선(朝鮮)을 세우기 전, 중국에서도 역성혁명이 일어났다. 주원장(朱元璋)에 의해 원(元)이 역사의 무대뒤로 사라지고, 명(明)이 건국(1368)된지 얼마 후, 한반도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원(元)을 멸하고 이제 막 건국한 명(明)을 치라는 고려 왕의 령(令)을 거스려, 회군한 이성계는, 결국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하였다(1392). 그럼 건국의 이념이 있어야 하는데, 야욕에 눈이 먼 이방원이 건국 이념의 틀을 세운 정도전을 죽이고, 나라의 권력을 한 손에 거머쥐고도, 무참한 철권통치로 일관하였다. 이 때, 중국 명(明)에서 사신이 와서, 무력으로 나라를 세운 조선의 근본(根本)을 살피러 온 것이다.   명(明)의 사신의 첫마디가, "재(災)로 꼰 새끼 줄을 가져 오라."는 것이었다.   만조백관이 이 말을 듣고, 모두 "아니 어떻게 재(災)로 새끼 줄을 꼬느냐?"는 것이었다. 발상의 전환을 모르기 때문이다.  명나라 사신 접대를 맡은 관원이, 자기 노모에게 이 사실을 얘기하자 노모가 웃으며, "명나라에서 조선의 지혜를 떠 보고자 그러는 것."이 라며,새끼 줄을 여러겹으로 꼬아서, 큰 놋 그릇에 가지런히 담아 놓고 태우면, 바로 그것이 재로 꼰 새끼 줄이다." 늙은 노모의 지혜!  얼마나 기막힌 순발력인가!  이처럼 문제의 해결은 바로 지혜에 있지, 무력이나 패꺼리 싸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경남 합천 가야산 자락에는, 서른 하나 본산(本山)중의 하나인 해인사(海印寺)가 있다. 이 사찰은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본산(本産)이요, '팔만대장경' 소장으로도 유명하다. 내가 이십대 젊은 날에 이곳에 무초라는 방장스님을 뵌 일이 있었다. 이 스님은 사찰을 찾은 행려객들이, 곳곳에 술판을 벌려 먹다 버린 음식 쓰레기를 치우면서, 버린 음식은 깨끗이 씻어 산새나 산짐승이 먹도록 바위 위에 올려 놓고, 남긴 술은 버릴수 없어, 스님이 곡차(穀茶)처럼 드셨다. 사람들은 해인사 어른인 방장스님이, 행려객들이 마시다 버린 술을 드시는 모습을 보며, 신기하게 여겼다. 그래서 종종 사찰을 찾은 중생들이, 무초 스님의 이런 모습을 보려고 일부러 소주를 한병 들고 와서, 무초스님께 드리면 무초 스님은, "곡식으로 빚은 술은 소중한 곡차이니 버리지 말라."며, 마치 차를 마시듯 드셨다.  왜 술을 마시지 말라 했을까? 그것은 "세상에 살되 세상에 취하지(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그는 산새들과도 교류하여, 무초 스님이 사찰 경내를 돌면, 영락없이 산새들이, 그의 머리 위에 혹은 어깨 위에 앉곤 했다.  이것이 범아일여(凡我一如)란다.   무초 스님은 학문으로 터득한 학승(學僧)이 아니라, '참선(參禪)' 즉 면벽기도로 득도한 선승(禪僧)이었다. 신앙이란 학문처럼 배워서 깨달을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땀방울 속에 스며있는 것이다. 이것은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시 어머니와, 대학원을 나온 며느리에 비견될수 있다. 학식 있는 며느리가 매사를 이론으로 시어머니를 가르치려 든다. 그러나 시 어머니는, 경험으로, 손 맛으로 며느리를 압도한다.

전북 남원 지리산 자락에 우리나라 구산사(九山寺)중 하나인  실상사(實相寺)가 있는데, 이에 방장산이 있고, 이 산 정상에는 비구니들만 있는 삼불주가 있다. 나는 이십대 초 젊은 날, 그러니까 50여 년전  이곳에 올라, 점심을 얻어 먹은 적이 있다. 
비구니들이 수행하는 산사라서, 젊은 이에게는 식사대접을 해 줄수없다는 것을, 굳이 뻐팅기고 앉아 있었더니, 꽁보리 밥 한 그릇과,수박 껍떼기를 잘게 썰어 고추장으로 버무린 김치가 전부였는데, '시장이 반찬'이란 말처럼, 오십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그 맛을 잊을수 없다.  '진리의 진국이 바로 배고픔에 있다'는 생각이 미치니, 옛날 삼국시대 때, 신라의 원효와 의상이 중국으로 구도하러 가던 중, 날이 저물어 산중에서 웅덩이처럼, 움푹 패인 곳에다 여장을 풀고, 깊은 잠에 빠져 자다가, 목이 몹씨 말라 물을 찾던 중에, 바가지에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본 원효는, 그 물을 꿀물처럼 달게 마신 후, 다시 잠에 골아 떨어졌다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지난 밤에 꿀물처럼 마셨던 물이, 바로 해골 바가지에 고인 물이었다. 원효는 여기서 큰 깨달음을 얻고 중국으로 유학가는 것을 포기했다. "진리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

1950년대 후반 내가 코흘리개였을 때, 군에 입대한 고향 형아가, 군대 얘기를 실감나게 들려주던 기억이 난다. 그가 군에 있을 때, 군량미를 가지고 부대의 윗 사람들이 장난 질을 해서, 사병들이 배가 고파 고생들을 많이 했단다. 허기진 배를 움켜 쥐고, 주방에서 나온 음식 쓰레기를 담은 꾸정물 통에 손을 넣어, 손에 건져지는 밥 찌꺼기를 먹었단다. 시어서 냄새 나는 꾸정물통의 밥 찌꺼기가 꿀맛이었단다. 때론 꾸정물 통에 빠져 죽은 쥐를 건져내가며 먹었단다.
이것이 인생이다. 오십년 전 보리밥에다, 수박껍질에 고추장을 버무려 만든 반찬으로, 나를 대접하신 그 비구승 좌장 스님이, 그 당시 지혜롭다고 입소문이 자자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말을 들은 제법 똘똘한 소년이, 손에 작은 새 한 마리를 쥐고 스님을 찾아와 물었다. "스님 이 새가 죽었을까요? 살았을까요?" 소년은 맘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스님이 새가 살아 있다고 하면 손가락으로 목졸라 죽여버리고, 죽었다고 하면 날려 보내야지, 이렇게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비구스님이 웃으면서 말했다.  "얘야 그 새의 죽고 사는 것은 네 손에 달렸지. 내 입에 달린 것이 아니란다." 손 안의 것은 물론이고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는 스님의 혜안에, 꼬마는 새를 날려 보내며 말했다.   "스님은 어떻게 이토록 지혜로우신 가요?" 

그러자 스님이 대답하기를,  "얘야 나도 예전엔 너처럼 무조건 이기려고만 했단다. 그러나 매일 열심히 기도하고, 모든 사물에 대하여 애정을 가지고 대하다 보니, 새로운 지혜가 생기더구나!" 그리고 스님은  아이의 손을 당겨 잡고, "얘야, 네 손금을 좀 보여다오." 소년이 손을 내밀자, 스님이 소년의 편 손을 보며, 이것은 감정선, 이것은 사업선, 이것은 생명선, 자 이제는 주먹을 꼭 쥐어 보렴." 아이는 주먹을 꼭 쥐고 스님을 바라 보자, 스님이 입을 열어 "얘야, 너의 감정선, 사업선, 생명선이 어디 있느냐?"   "그야 내 손안에 있지요."   "그렇지, 바로 네 운명은 네 손안에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입에나 운명에 달린 것이 아니란다."  

이런 시가 있다. "명예를 탐내고 이익을 좇는 사람들은, 누더기 헤진 옷에, 유유 자적하는 민초(民草)만도 못하다네. 닭장 속에 갇혀 사는 닭은 비록 모이는 많지만, 끓는 솥이 가깝고, 산야의 두루미는 먹을 것은 적지만, 천지간에 자유롭다네!"  어느 것에도 매일 것이 없는 삶!  자연을 벗 삼아 산과 하늘과 일체가 되는 삶! 몸을 움직여 일하고 땀 흘리는 건강한 노년의 삶! 참으로 정겹지 아니한가! 역지사지(易之思之)보다 더 깊숙한 관계가 역지감지(易之感之)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치 사자가 구유의 여물을 먹듯, 강자가 약자의 처지가 되어 보는 것이다. "치리 자가 섬기는 자의 자리에 서는 것"이 것이 
진정한 통치자 다.      
           
         종그니가

【종그니칼럼】 먼저 간 친구 인근에게!

고난 주간인 엇그제 나는 좀 쌩뚱맞게, 문득 오래 전 유명을 달리한, 임실 땅 두메 산골에서 같이 자란, 이 인근이가 떠올라 이글을 쓴다. 여러 불알 친구들 중에, 특히 '이 인근'과  '김 인택'두 친구는 타향에서도 언제나 애환을 같이했다. 이들은 내가 공부하러 서울로 올라 온 몇년 후, 생업을 위해 내 뒤를 따라 서울로 와서, 시작한 것이 고물상이었다. 처음엔 서울 외곽 변두리지역에서 하다가, 인근이는 경기도 수원으로 옮겨 고물상을 계속하고, 인택이는 고물상을 그만 두고 개인택시운전을  하였다. 두 친구는 머리 회전도 빠르고 사업수완도 있었는데, 웬지 돈 모르고 사는 나와 달리 모습들은 항상 구차하였다. 

내가 서른이 되던 해에, 서울 용산 이촌동 소재의 사십 평도 채 안되는 아주 작은 교회에서, 머리로 믿던 신앙이, 처음으로 주님을, 가슴으로 혼으로 만나는 중생의 체험을 받은 후, 나의 인생관이 완전히 변했다. 지난 날 카도릭에 몸 담고 있을때 품고 있던, 이성적 고정관념의 틀이 완전히 깨져버렸다. 이 날 나는 이전에 지녔던 세상적인 안목이나 가치를 모두 지워버리고, 원천적으로 다시 태어나, 지난 날의 모든 삶을 환골탈태 하고,  지금 여기서 부터 새 삶의 길, 주의 종된 길, 섬김의 길을 시작으로, 첫발을 서울에서 경상도 하동에서, 그리고 부산 영도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종의 길을 걸어 오면서, 촛점을 잃은 늙은 어르신들의 눈으로 다가가, 어르신들에게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경상도 하동에서, 그곳 어르신들을 만 3년 동안 섬겼던 삶이, 이 후 나의 남은 생애를, 의지할 곳 없는 어르신들과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하는 결정적인 모멘트가 되었다.

이렇게 뜻을 굳힌 1995년 5월 어느 날, 일반 목회 사역을 접고,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경기도 가평 '설악'이라는 청정지역으로 들어와, 무의탁 노인시설을 짓겠다는 일념으로, 3년에 걸친 절치부심끝에, 청평에, 1200평의 대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그곳은 당장 집을 지을수 없는 맹지였다. 도로와 무려 700m이상 떨어진 길이 없는 맹지였지만, 어르신들이 살 터로는 그야말로 딱이었다. 당시의 나는 하루라도 빨리, 오갈 곳 없는 어르신들을 모시는  것을, 최대의 이슈로 삼았기 때문에, 서둘러 700m 정도의 길을 내는데, 무려 만 3년의 세월이 소요 되었다. 숱한 우여곡절끝에 마침내 길이 뚫리자, 그해 봄에 토목공사를 마치고, 마침내 그해 가을 240평 규모의 무의탁 양로원 건물을 완공했다. 이는 오로지 주님의 은혜로 이루어 진 기적이었다. 그때의 그 감동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마치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쁨으로 가득차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일반목회를 그만 둘 때의 내 호주머니엔, 돈 일백 오십만원이 전부였었다. 무의탁 양로원을 짓겠다는 마음만 있었을 뿐, 사실 나에게 현실은, 가평 설악면에 방한칸 얻을 돈도 없었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평생을 기대고 살아 온 내 여동생에게 600만원을 빌려, 보증금 없이 월세 오십만원으로, 일년분 600만원을 선납하여, 일년  살집을 마련하였다.  옛말에 '시작이 반이라'했던가! 일년 살 집을 마련하고 나니, 천하를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당시 내가 얼마나 무모하고 또 얼마나 당찼던가! 돈 한푼없는 주제에, 그것도 오갈데 없는 노인들의 안식처를 짓겠다고했으니, 얼마나 꿈이 야무졌던가!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말처럼, 이를 위한 나의 계획은 차질없이 이루어져, IMF라는 엄중한 때였지만, 1999년 5월에 건물은 완공되었다.  당시 나는, 내가 오갈데 없는 어르신들을 섬길수 있는 요람지를 만들면, 이 땅에는 이들에 대하여 관심있는 많은 이들이 호응하리라 믿었었다. 그러나 세상은 기대와는 달리 엄혹했고, 사회에대해 어두었던 나는,  무의탁 양로원의 안정적인 운영자금 수입원을 찾기위해 동분서주 물색하다가, 소위 거짓 목사 장로들에게 사기를 당하여,  은행(축협)빚만 늘어, 종내는 이자 지급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이무렵 친구 인근이가, 내 어려운 사정을 알고 한 달이 멀다하고 찾아 왔다. 내 어려운 처지를 속속드리 안 친구는, 어느 날 그동안 고물상으로 피땀흘려 모은 3천만원을 들고 와서, "좋은 일 하다가 이렇게 된 너를 외면하는 것은  친구로서의 도리가 아니다."라며, 내 손에 쥐어 주었다.   피 같은 돈을 내게 준 것이다. 그때 나는 친구를 붙들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돈을 도저히 쓸수가 없었기에, 그돈으로 땅을 샀다. 그리고는 백방으로 뛰며 경매처분을 막으려 온 몸으로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무위로 돌아가고, 무의탁양로원은 경매처분 되고 말았다.  인근이가 준 돈으로 산 땅마저도,  정신없는 와중에, 함께 경매처분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의 망연자실했던 심경을 어찌 몇마디 말로 표현하랴!  

순수한 맘으로 무의탁 양로원을 십년 세월 동안 운영해오면서, 나는 수많은 지인들로부터 크고 작은 빚들을 지게 되었다. 그후 나는 축협에 원금 3억때문에, 5억 8천에 경매처분이 되었음에도, 연체이자를 들먹이는 축협으로부터 수없는 압박을 받아야 했다.  아주 나쁜 흡혈귀들이었다. 이때 나는 신용회복을 위해 법원에 파산신청을 하면서, 축협 외에 무의탁 양로원 운영문제로, 개인에게서 진 채무에 대해서는, 단 한 건도 법원에 채무면제 신청을 하지 않고,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최소한 모든 원금은 매월 나누어서 갚고 있다. 아마 아직도 줄 잡아 5년은 더 갚아야 할 것같다. 

지금 친구 인근이는 그 어간에 유명을 달리하였다. 늦었지만 2021년 초 친구 인근이의 큰 아들 '이 윤섭'과 전화로, 이 사실을 얘기하고, 2021년 1월부터, 월 90만원씩 이 윤섭군의 부탁대로 이 인근의 부인이자 이윤섭의 모친인 '홍은숙 통장'에 입급해 주고 있다. (그동안 이윤섭이가 본인의 채무 문제로 입금통장을 여러번 변경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친구 큰 아들 윤섭이가, 지난 날의 나처럼 가장 어려운 시기에 조금이나마 친구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을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다만 친구 인근이와 나와의 이런 관계를 전혀 모르는 이들이, 사실을 잘 알지도 못하고, 이에 대한 여러 억측의 말들이 있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세상이란 본래 그런거 아닌가!  다만 친구의 아들 윤섭이가, 어서 빨리 이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길, 부활절 날 간절히 두 손 모아 빌 뿐이다. 먼저 간 친구야! 나도 머잖은 날 나그네 세월을 끝내고,  네게 갈 거다. 그때 보자!  친구야!

      종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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