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박사(총신대 명예교수)
장로교의 뿌리- 목회자와 설교자로서의 칼빈을 중심으로
한국의 장로교회는 아마 수백 개가 될 듯하다. 저마다 칼빈이나 칼빈주의, 개혁주의라는 말을 쓰고 있으나, 실제로 우리는 칼빈과 개혁자들이 생각했던 사상과 삶과 거리가 있다. 그리고 말끝마다 서로가 정통이니 보수니 하지만 그것이 칼빈주의 사상과 얼마나 가까운지도 의문이다. 우리 교회가 교리적으로는 옳다 해도 실제로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의 삶은 칼빈과 역사적 개혁주의자들이 깨닫고 이해했던 것과는 너무나 멀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장로교회의 강단의 설교나 행정은 칼빈과 개혁자들의 생각과는 달라지고 있다. 이 난에서는 특히 목회자와 설교자로서의 칼빈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봄으로 앞으로 우리 교회와 강단의 이정표로 삼고자 한다. 특히 필자는 이 논지를 폄에 있어서 종교개혁 500주년 고신대학교 개혁주의 학술관에 발표했던 필자의 글 <칼빈의 유산: 목회와 실천> 그리고 나의 저서 <교회의 개혁자 요한 칼빈>에 크게 의존했음을 밝혀 둔다.
종교 개혁자 요한 칼빈은 개혁 교회의 교리적 기초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삶은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신학 골격을 세웠을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삶의 전 영역에 미치지 아니한 곳이 없었다. 특히 한 목회자로의 그의 설교와 실천적인 삶은 오늘 한국교회의 모델과 귀감이 된다고 본다. 본 노고에서는 주로 칼빈의 목회적 사역 특히 그의 설교를 중심 해서 생각고자 한다.
1. 목사 칼빈
요한 칼빈은 목사이다. 그는 전형적인 목회자이다. 그런데 칼빈은 신학자, 특히 조직신학자로서 너무나 강조된 나머지 그가 진실한 목회자라는데 대해서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흔히들 많은 분들이 설교할 때 “칼빈 선생”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칼빈이 언제 목사 안수를 받았는지? 어디서 안수를 받았는지? 라고 하면서, 일본의 영향으로 전통적으로 그렇게 불러 온 듯하다. 하기는 칼빈이 언제 정식으로 목사가 되었는지는 기록에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늘의 시각으로 칼빈을 보면서 어느 신학교를 졸업했으며, 어느 노회에서 안수 받았느냐 하는 식으로 생각하면 잘못이다.
그때는 프로테스탄트 신학교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모든 신학교는 카톨릭의 신부를 길러 내기 위한 수도원 중심의 신학교뿐이었다. 루터는 카톨릭 신부 출신이고 수도원에서 신학 공부를 했었다. 그러나 칼빈은 본래 인문학을 공부하고, 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 그리고 당대의 고급 언어였던 라틴어의 대가였고, 수사학과 법학을 공부했으며, 교부신학을 공부했으며 성경 연구에 집중했다. 그래서 27세의 나이로 불후의 명작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고 일약 종교 개혁의 중심인물에 우뚝 섰다. 그러므로 그는 독학으로 그 자신이 위대한 개혁 신학의 기초를 놓았으니, 오늘의 잣대로 어느 신학교 출신인가라는 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더구나 칼빈이 어디서 안수를 받았느냐, 누구의 손을 올렸느냐 하는 것은 후일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체제와 규칙, 정치 제도가 정착된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목사 자격을 임명하는 것은 제네바 시의회였다. 제네바 시는 일찍이 파렐(W. Farel)의 종교 개혁의 지도로 프로테스탄트로 기울어져 있었고, 칼빈이 종교개혁이 가능하도록 터가 닦여져 있었다. 그러나 1536년에 칼빈은 제네바 시의회에서 목사로 임명받고, 제네바 교회 곧 제네바 셍 삐에레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었다. 그의 목회 사역은 예배 인도, 설교, 교육, 성례 집행, 행정 등 그의 일생은 목사로서의 삶이었다.
1578년 영국에서 출판된 요한 칼빈의 요나서 강의와 설교집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제네바의 하나님 교회 목회자, 신학 박사, 요한 칼빈 목사”로 소개 되었다. 이로 보건데 당시 유럽에서는 칼빈이 신학자로서 또는 종교 개혁자뿐 아니라 목회자요, 목사로서 더 잘 알려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칼빈은 제네바에서 2년간 목회하다가 반대파들에게 축출되어 스트라스부르그로 갔을 때, 마틴 부써(Martin Butzer)의 추천으로 불란서 피난민 교회의 담임 목사로서 청빙을 받았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칼빈은 목사로서 더욱 성숙 되어 갔다. 그리고 3년 후 제네바 교회에서 다시 청빙을 받아 그의 임종 때까지 27년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설교자로서 또는 목회자로서 사명을 다했다.
그런데 오늘 현대인도 그렇고 역사가들의 평도 그러하지만 칼빈에게는 목사로서의 사랑과 자애가 넘치는 면모는 찾을 수 없고, 엄숙하고 차디차고 냉혹하리만큼 반대편을 짓밟는 독재자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이유는 이렇다. 칼빈의 일생은 전투적인 삶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에게는 모두가 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로마 카톨릭 당국은 칼빈이 눈에 가시였고, 그를 저주의 인물로 보았다. 그뿐 아니라 같은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도 이른바 리버틴이란 자유주의자들도 칼빈의 적수였다. 뿐만 아니라 제네바 시의회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정치적 기득권 수호를 위해서 칼빈에게 저항 세력이었다. 이처럼 칼빈은 온통 적대자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그래서 칼빈의 초상이 약 80여 개나 있지만, 제네바에서 그린 것은 유별나게 눈이 날카롭고 눈에 흰자가 많고 차디차고 전투적인 모습을 띤다. 그러나 독일, 화란, 헝가리에서 그린 것은 그렇게도 유순하고 자비로운 목자의 모습이었다.
특별한 사건은 칼빈의 생존 시부터 칼빈을 괴롭히던 못된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1577년 본래는 카톨릭이었다가 칼빈을 추종하면서 개혁 교회 노선에 섰다가, 다시 카톨릭으로 복귀한 제롬 볼섹(Jerome Bolsec)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소위 칼빈 전기라는 책을 쓰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더러운 욕은 다 썼다. 볼섹은 칼빈을 따르다가 로마 카톨릭으로 간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칼빈을 제물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칼빈에게 저주에 저주를 퍼부었다. 후일 역사가나 카톨릭은 볼섹의 글을 근거로 칼빈을 욕하고 비판했다. 최근에는 심지어 장로교 목사들도 칼빈을 제대로 모르면서, 독재자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있다. 그러나 실상 칼빈은 전형적인 목사요, 설교자였다. 칼빈의 설교와 편지를 읽어보면, 그는 심방을 귀히 여기고 사랑과 자애가 넘치는 목사였다. 그리고 모범적인 강해 설교였다. 칼빈은 참 목자상을 우리에게 남겼다. 칼빈은 전형적인 개혁주의 목사였다. 왜냐하면 그는 천년 만에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해석해서 증거 하는 강해 설교자였다. 그는 카톨릭의 미신적 미사 행위에 말씀 중심의 예배로 개혁했다. 칼빈은 개혁주의 목사로서 교회의 개혁뿐 아니라, 예배의 개혁자가 되었다. 칼빈은 목사로서의 따뜻한 마음으로 양들을 위해서 기도를 멈추지 않았던 목사였다.
2. 사랑과 화해의 목사, 칼빈
칼빈은 가슴이 따뜻한 목회자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최우선으로 삼되 한 없이 동정심이 많고 사랑과 자애가 넘치는 목사였다. 그것은 칼빈의 설교와 편지를 읽으면 금방 알 수 있다. 칼빈을 비방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역사적인 문헌인 그의 방대한 설교집과 편지를 읽지도 않고, 의도적으로 칼빈을 반대하고 증오하도록 선동하는 사람의 말을 따른다. 심지어 장로교회 목사들까지도 칼빈에 대해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자도 있음을 보았다.
몇 가지 실례를 들면 목사로서 칼빈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 칼빈이 사랑과 화해의 사람인 것은 다음과 같다. 칼빈은 반대파에 의해서 제네바 교회에서 추방당했다. 이른바 교회의 기득권 세력 가운데는 칼빈의 철저한 개혁적 설교가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은밀히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칼빈은 제네바 시민이 볼 때는 불란서에서 온 외국인이었다. 그러나 칼빈이 제네바 교회에서 축출되어 스트라스부르그로 간 후에 제네바 교회는, 칼빈의 설교를 사모하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자연스럽게 그 성도들이 뭉쳐서 그룹이 만들어졌고 한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룹의 이름을 기에르멩(Guillermins)이라고 했다. 은혜를 사모하고 칼빈의 말씀을 그리워하는 그들은 후임자에게 순순히 따르지 아니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칼빈 목사가 교권에 의해서 물러나게 된 것을 가슴 아파했다. 그런데 그들은 신임 목사에게 성찬을 받아야 할 것인지에 고민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신임 목사에 대한 불신임을 하고 있었고, 교회가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 싸울 지경이었다. 그때 칼빈은 이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우리로서는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를 구성하는 교리가 제 위치를 갖고 보존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교회를 그토록 불행하게 흐트러뜨리고 또 거의 뒤집어 놓았던 그 사건이래, 우리 뒤를 이은 사역자들과 그대들 사이의 분쟁과 분규에 대해서 듣는 것보다 나를 슬프게 하지 않습니다...그대들은 기독교인으로서 행동하라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그대들에게 해야 할 것보다는, 그대들이 다른 이들에게 해야 할 것에 우선 몰두하라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런 편지들 가운데 “화해”라는 표현을 여러 번 썼다. 칼빈도 인간인지라 자기를 축출한 교회에 대해서 섭섭한 마음이 남았겠지만, 칼빈은 하나님의 교회의 화평과 성도들과 “화해”를 먼저 생각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이고 교회가 교회답게 성장하는 것이 우선이므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도리어 나무라고 성찬을 받으며 신임 목사를 도우라고 했다. 이런 칼빈의 목사로서의 마음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이른바 원로 목사와 담임 목사의 관계에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전임자는 후임자의 목회가 성공적으로 할 수 있도록 멀리서 도우며, 교회의 유익을 첫 번째로 생각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는다.
칼빈이 사랑과 화해의 사람인 것은 또 다른 예에서 볼 수 있다.
1556년 베스트팔(Joachim Wesphal)과 논쟁이 한창일 때, 칼빈은 프랑스 교회를 분열시키는 한 싸움을 조정하기 위해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갔다. 거기서 칼빈은 교회의 연합과 화평을 도모하는 일 외에는 다른 어떤 의도가 없음을 선언했다. 또 자신은 그들의 입장과 반대되는 토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호소했다. 칼빈은 이단과 자유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냉철한 토론의 달인이었으나, 교회의 어려운 문제를 수습하는 일에는 겸양과 양보와 화해의 사람이었다. 그때 칼빈은 열린 대화와 우아한 태도를 통해서 양쪽을 화해하게 만들었다. 학자들 중에는 칼빈의 이러한 교회내의 화해를 조정하는 일을 가지고 칼빈은 에큐메니칼주의자라고 한다. 하지만 모든 종교는 똑같다는 식의 종교다원주의자의 발상이 아니고, 교리는 필요 없고 삶이 중요하다는 식의 에큐메니칼이 아니다. 칼빈은 같은 하나님, 같은 그리스도, 같은 성경을 믿는다면 다투고 싸우면 안 되고 서로 화해와 사랑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칼빈을 가리켜서 제네바의 설교자로 불러도 된다. 모든 인간에게는 명암이 있고, 칼빈이라고 해서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자료를 바탕으로 잘못된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된 경우가 칼빈이다. 칼빈은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인물이지만, 그것은 일생동안 적들과의 전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사랑과 화해의 목사였다.
3. 심방과 상담을 잘한 칼빈
칼빈은 비평가들의 일방적인 생각과는 달리 사랑과 화해의 목회자였다. 사람을 평가할 때는 바른 자료를 가지고 정직히 평가해야지 외모를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칼빈은 진실한 목회자요, 설교자일 뿐 아니라, 그는 심방과 상담을 잘 했다. 어떻게 그렇게 병약한 몸을 가지고 그토록 바쁜 일정 속에서 목사로서의 사명에 충실했는지 놀라움을 금할 길 없다. 1538년 칼빈이 바젤에 머물고 있을 때, 파렐의 조카가 방금 페스트에 걸렸다는 소식을 접한다. 당시로는 페스트 병은 곧 죽음을 의미하던 시대였다. 그리고 전염병이므로 격리시키던 때였다. 그러나 칼빈은 위험을 무릅쓰고 목사로서 성도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그 환자에게 달려가서 복음의 위로와 기도를 했다. 칼빈의 심방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으나, 영혼 사랑에 대한 그의 열정을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끝내 그 환자가 회생을 못하고 숨을 거두자, 칼빈 목사는 그의 장례비를 부담했다. 또 그가 한창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두고 간 자녀들을 전적으로 돌보아 주었다. 이 사실을 베자에게 편지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 특별한 친구를 기억하면서 그의 자녀들을 내 친자녀들처럼 사랑해야만 하오...그가 내게 준 신뢰를 저버리는 것은 내게 죄가 된다오” 라고 썼다.
칼빈의 헌신과 겸손한 봉사는 칼빈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악랄한 비판을 퍼 붓는 사람들과의 말과는 전혀 반대였다. 칼빈은 참 목자로서 사랑과 헌신을 엿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칼빈의 편지를 통해서 나타난 것은, 목사로서 얼마나 섬세하고 아름다운 상담자였나를 깨닫게 한다. 하기는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은 늘 설교와 상담과 심방을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 당시는 심방이나 상담이란 말조차 없던 시대에 칼빈은 마틴 부처(Martin Butzer)의 권면으로 심방의 귀중성을 알았고 실행했다. 그래서인가 칼빈은 자기 교회 노인들이 기호품까지 일일이 꿰고 있을 정도였으니, 목사로서의 섬세함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시각에서 보면 칼빈 목사의 하는 일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할지 몰라도 그는 저술과 설교 준비 주 5회 이상, 제네바 대학 강의, 시의회의 일, 각 나라 종교 개혁의 고문으로서 그 바쁜 일과 중에 특히 병든 육체를 가지고 자기 교회 성도들을 애틋하게 사랑했다. 칼빈의 목회적 돌봄(Pastoral Care)은 일반인들이 칼빈을 알고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그는 신학자로서는 날카롭고 냉정한 인물일지는 몰라도, 목사로서는 성도들의 영혼을 사랑하여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고통당하는 자와 고통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었다. 칼빈의 라틴어로 된 이사야 주석 서문에 보면 칼빈은 그를 잘 알았던 당대의 사람들을 놀라게 한 그런 목사였다. 칼빈의 친구인 니클라스 데 칼라르(Nicolas des Gallars)는 쓰기를,
“얼마나 많은 염려를 그는 감당했던가. 얼마나 날카롭게, 얼마나 민감하게 그는 위험을 예견했던가. 얼마나 신실하고 지성적으로 모든 이에게 관심을 가졌던가. 어떤 친절과 감사로 자기에게 말 걸어오는 자들을 영접했었던가. 얼마나 신속히 그리고 솔직히 그는 가장 중대한 질문을 자기에 해오는 자들에게 대답했던가...얼마나 능란하게 또 도약적으로 그가 하나님의 참되고 신실한 종의 모든 의무에 전념했던가. 나는 이 모든 것을 분명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 칼빈은 세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가슴 따뜻하고 여리고 다른 이의 영혼을 사랑하는 참 목자 상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칼빈의 편지와 설교를 읽어 보지도 않고, 도리어 오직 칼빈을 극렬히 비방하고 조소하고 악랄하게 저주하던 자들의 문헌을 기초로 해서 칼빈을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 칼빈은 말씀의 종으로서 목사의 사명을 감당했던 신앙과 겸손의 종이었다. 칼빈은 일생동안 자기를 들어내거나 자기를 변호하지 않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이 침해 당할 때는 누구든지 용서하지 않았다.
그런데 칼빈이 참 목자로서 살려고 애쓴 것은 말씀과 성령으로 살려고 노력한 때문이다. 칼빈은 목사의 자격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해하였다. 목사는 성령의 은사가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리고 날마다 배우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말씀을 끊임없이 연구하는 사람, 경건의 훈련, 불굴의 용기를 들었다. 특히 칼빈은 목사의 덕목으로 경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칼빈이 목사 자격에 대해서 언급한 몇 마디를 인용하면 이렇다.
“모든 경건한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영에 매달려 그들이 전혀 소유할 수 없는 것을 구해야 한다. 그들의 직무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것은 성령의 은사이다.” “하나님께서 그 영으로 다스리지 아니하는 사람은 진정한 목사가 아니다.”
“좋은 학자였던 자들 외에는 아무도 좋은 사역자가 아니다. 계속 배움으로써 끊임없이 진전하기를 멈추지 않는 자만이 학식 있는 자이다.”
“노력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과 그의 교회를 섬길 줄 모른다. 그리고 말씀의 교훈을 관리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라고 했다. 특히 칼빈은 목회를 “영적 전쟁”으로 생각했다. 목사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주님께서 감당할 수 있는 은혜와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칼빈의 목회 철학을 보았다. 그는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목회의 지침을 주면서, 영혼 사랑하는 목사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4. 설교자 칼빈
종교 개혁자 칼빈은 설교자이다. 교회사에 가장 걸출한 강해 설교자는 요한 칼빈이었다. 칼빈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깨달았을 뿐 아니라,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면서 삶의 현장에 적용시켰던 강해 설교의 왕이다. 특히 칼빈은 연속 강해설교의 대가이다. 칼빈은 목사로서 또는 설교자로서의 영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예컨대 그의 욥기서 설교는 159편이나 있고, 신명기 강해 설교는 200편이나 있다. 참으로 방대한 설교인데다 그 깊이에 있어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탁월한 영감을 가진 설교자가 분명하다.
그러면 칼빈의 설교자로서 생활을 잠시 살펴보자. 칼빈은 1536년 27세에 제네바 셍 삐에레 교회의 설교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설교자로 사명에 새로운 동기 부여는 제네바에서 축출되어 스트라스부르그로 가서, 그곳 피난민 교회의 목사가 됨으로 본격화 되었다. 거기서 칼빈은 설교자로서의 소명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제네바 교회의 2년간의 설교는 하나의 시도요 실험이라면, 스크라스부르그의 설교 생활은 보다 성경적이고, 신학적이고 그리고 체험적이었다. 칼빈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스트라스부르그까지 피난 온 모국의 형제, 자매들의 상한 마음을 감싸주기 위해서 설교했다. 그런데 그 자신 또한 제네바 교회로부터 말로 다 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왔기에 설교자와 성도들 사이에는 영적인 교감이 있었다. 그래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의 3년간의 피난민 목회가 그를 더욱 설교자로서 성숙한 자리에 이르게 했다. 그 후 제네바 교회로 복귀하여 본격적인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사실 칼빈의 설교는 오늘 우리 한국식의 은혜 충만, 성령 충만의 부흥 설교가 아니었다. 말하자면 칼빈의 설교는 인기 있는 설교도 아니고, 대중을 선동하는 설교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성경의 본뜻을 정확히 주해하고, 그것을 적용시키는 설교였다. 루터의 설교가 남성적이고 부흥적이라면, 칼빈의 설교는 해석적이고 의지적이었다. 이러한 칼빈의 설교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당시 성도들은 천년 만에 성경적인 설교를 듣게 된 셈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종교 개혁은 설교를 통해서였다. 신학은 학자들과의 논쟁이지만, 설교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거나 사람들의 욕구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늘 하나님 중심의 설교,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최우선으로 하는 성경적 설교였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설교보다는 사람의 지성과 감성을 만족시켜주는 설교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인지 칼빈의 설교는 세월이 갈수록 대중들의 호응이 떨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칼빈마저도 설교에 많은 부담을 갖고 낙심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초지일관 연속 강해설교를 고집했다. 특히 1554~
55년까지 1년 사이에 칼빈은 너무 낙심해서 설교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기는 한 교회에서 20여 년 동안 설교한 데다, 칼빈의 목회 행정 특히 종교회의(Consistoty) 를 통한 성도들의 윤리를 바로 세우려는 시도가 자유주의적 성도들에게 많은 반발을 일으키고, 그 반발이 칼빈의 설교에 제동을 걸었다. 더구나 칼빈은 육체적인 질병에 시달리면서 엄청난 내부적 반대에 부딪히면서 설교의 위기를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복음적 교회 건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뿐임을 확신하고, 끝까지 말씀 증거에 최선을 다했다. 만에 하나 칼빈이 교회의 어려움과 그리고 주변의 세력들을 의식하고 그들과 영합하고 대중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설교를 했다면, 오늘의 개혁 교회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칼빈은 그의 설교를 자신이 직접 원고를 작성한 일은 별로 없었고, 대개는 즉석 설교의 형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생각나는 대로가 아니고, 그는 깊은 성경 원어 연구와 신구약 전체에 흐르는 메시지를 깨닫고 성도들의 삶과 성경을 깊이 묵상한 후에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강단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설교할 때는 그의 설교를 속기하도록 했다. 칼빈은 속기 비서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에서 설교 속기는 주로 불란서에서 피난 온 데니스 라구니에(Danis Raguenier)였다. 그는 11년간이나 칼빈의 설교를 필기했다. 그래서인지 칼빈의 설교가 지금까지 보존된 설교만 2,025편에 달한다. 칼빈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주일 아침과 오후, 평일에는 월, 수, 금 등에 설교했다. 칼빈의 설교는 연속적 강해 설교로서 주일 오전에는 신약을, 주일 오후에는 시편을, 월, 수, 금에는 구약을 강해하였다. 이렇게 해서 욥기 159편, 신명기 200편의 강해설교를 했다. 칼빈은 부활절에서 10월 초까지는 아침 6~7시, 겨울에는 7~8시 모였다. 그러니 칼빈은 오늘날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초인적인 목회였다고 보여 진다. 물론 칼빈은 자기 설교를 출판하려고 하지 않았으나, 어떤 때는 논문 대신에 설교가 출판된 일도 있었다. 우리는 신학자, 주석가로서 칼빈 못지않게 설교자로서 칼빈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5. 강해 설교의 왕, 칼빈
칼빈은 강해 설교의 왕이다. 칼빈은 어거스틴과 크리소스톰 이후 천년 만에 나타난 가장 유능하고, 가장 건전하고, 가장 분명한 강해 설교자였다. 그 당시는 다른 종교 개혁자들도 설교에 있어서 비슷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성경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이 그 어느 때보다 가장 관심이 컸던 때였다. 그런데 칼빈처럼 건전한 해석에다 연속적 성경 강해가 위대한 열매를 맺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의 설교는 교부들의 강해 설교보다는 훨씬 질서 정연했다. 어떤 의미에서 종교 개혁은 곧 강해설교의 부활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칼빈의 강해 설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당대의 종교개혁의 쌍벽이었던 마틴 루터와 비교해서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마틴 루터는 어깨가 딱 벌어지고 얼굴이 넓고 솔직한 독일인이요, 활력이 넘치는 건강을 소유했었다. 그러나 요한 칼빈은 창백한 얼굴의 자그마한 불란서 사람으로 턱이 좁고, 체격이 가냘프며 연구 생활과 병약으로 등이 굽어 있었다. 루터는 그 많은 지식에다 감수성, 상상력, 불같은 열정의 사람이었다. 또 루터는 유머가 넘치고, 음악, 어린이, 애완동물을 사랑하였고, 자연과 함께 시적인 교향곡을 즐겼다. 그러나 칼빈은 유머가 별로 없었다. 칼빈의 편지에는 칼빈은 한없이 다정다감했으나, 그의 공적 생활에는 지성과 의지만이 가득 찼다. 칼빈은 하나님 앞에서는 양같이 겸손했으나, 사람들 앞에는 담대했다. 그래서 베자는 칼빈을 가리켜서 “그의 말은 마치 전쟁과 같았다”, “칼빈의 말은 한 근이나 되는 것 같았다” 라고 했다. 칼빈은 뛰어난 암기력으로 성경 연구와 신학 연구를 한 뒤, 성경만 가지고 강단에 올라가서도 강해 설교를 체계적으로 논리적으로 할 수 있는 천재성을 가졌다. 그래서 칼빈은 1년에 286회의 설교에 186회의 신학 강좌를 담당했다.
여기서 우리는 강해 설교자 칼빈의 지칠 줄 모르는 정열을 눈여겨볼 수 있다. 칼빈은 조직적이고 냉철한 의지에다 천재적인 암기력, 거기다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 하고자 한 그의 열정은 그를 강해 설교자로 세웠다. 여기서 교회사 학자 워커(W. Walker)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칼빈의 설교가 수사학(Rhetoric)적인 기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보통 그의 설교는 간단명료하고 단순하고 직접적이었다. 칼빈의 설교에는 그의 지적인 명석함과 논리적 강점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칼빈의 진지한 확신은 비록 그의 말이 조용함에도 불구하고 능력을 더해 갔다. 그는 천천히 말했음으로 설교를 기록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퍽 용이했다. 칼빈의 성경주석 중에는 청중들이 기록한 것을 종합해서 엮은 것도 있다. 어쨌든 칼빈의 설교와 강의들은 언제라도 청중을 사로 잡았다. 칼빈은 장시간 성경 연구에 몰두했었고, 잠은 거의 없었다. 칼빈은 아침 5시나 6시경에 그의 참고 서적들이 침대 곁에 놓여 있었고, 필기자가 옆에 대기하고 있었다.
불란서 출신의 대 칼빈 연구가인 두메르그(Emile Doumergue, 1844~1937)는 칼빈 탄생 400주년에 기념 강연을 했다. 그의 강연 중에 몇 가지 요점을 정리하면 이렇다. 즉 칼빈은 말씀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말씀으로 그 개혁 운동을 성취했다. 칼빈은 때로 히브리민족을 일으켰던 모세와 선지자들처럼 말씀을 증거 하는 일을 했다. 때로는 밀란과 콘스탄티노플의 군중을 그리스도의 강단 아래로 붙들어 매었던 위대한 감독들인 암부로스와 크리소스톰처럼 설교했다. 때로는 2년간 플로렌스를 개혁시켰던 개혁자 사보나롤라(Savonarola)처럼 칼빈은 말씀을 선포했다. 칼빈은 목사로서 또는 교수로서 강단에서 몇 달간 매일 말씀을 증거 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하루에 두 번 설교하기도 했다. 그는 계속해서 장로회에서 권고의 말씀을 하는가 하면, 금요일 모임에서는 시의회에서 말씀을 증거 했다. 한마디로 하면 칼빈은 16세기의 개혁파 정신을 주조한 제네바의 설교자 칼빈이라 할 수 있다.
루터를 성경 번역의 왕이라고 지칭한다면, 칼빈은 성경 주석의 왕이요, 강해 설교의 왕이라고 해도 좋다. 참된 복음의 증거가 없어진 지 천 년 만에 가냘프고 연약한 칼빈이 제네바 교회에서 진지하게 성경을 강해하면서 설교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개혁이다. 16세기의 한 그림 중에는 칼빈 주의자와 교황 주의자를 각각 저울에 다는 그림이 있다. 칼빈주의자는 신구약 성경 한 권을 올려놓았고, 교황주의자 곧 로마카톨릭 주의자는 그 저울에다 천국 열쇠, 교황의 칙령, 교화의 왕권에다 여러 명의 사제가 저울에 올라갔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한 권에 교황 주의자들의 것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것은 말씀이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한다는 것이다. 칼빈에게서는 물론 성경 주해와 설교가 항상 병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칼빈의 강해설교의 특징인데, 그는 성경을 해석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항상 실재적으로 적용하여 신앙에 유익이 되고 결단하도록 하였다.
미국의 대 설교역사 학자인 찰스 다간(Charles Dargan)의 말이 인상적이다. “베자가 어디엔가 지적했듯이 만약 칼빈의 자질에다 파렐의 열정, 비레(P. Viret)의 쾌활성이 첨가되었다면 아마 거의 완전에 가까운 설교자였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칼빈도 완벽한 설교자는 아니었다’라는 뜻이다.
6. 이상적인 목사 상을 세운 칼빈
칼빈은 오늘의 참 목사 상을 세웠다. 칼빈은 이론적이면서 또 실제로 그렇게 했다. 칼빈이 참 목사 상을 세우려고 평생 노력한 것은, 당시 로마 카톨릭 조직이 얼마나 비성경적이고 잘못됐는지를 지적하는 데서 출발했다. 말하자면 로마 카톨릭 조직은 성경에 없는 잘못된 교회라는 것이다. 칼빈의 입장은 이렇다.
“교황의 신학 전체에 대한 저주를 안심하고 비난해도 좋다. 이는 참 빛을 어둡게 하기 때문이다.”
“교황 주의자들은 성경의 참된 의미를 제쳐놓고 그들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하나님의 신비를 망쳐 놓고 있다.”
“교황 주의자들과 연합하고 하나님을 거슬려 불경건하고 사악한 연합을 이루는 것보다 그들과 갈라진 것은 백번 잘한 일이다”
칼빈의 참된 <교회관>은 엡4:11~13에 있는 그대로였다. 칼빈은 목사의 의무와 사명이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고, 섬김의 직분임을 강조했다. 칼빈은 생각하기를 목회자의 결함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함과 능력과 효용이 파괴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주께서는 사랑하는 사역자들이 입을 원하실 때는 입을, 입술을 원하실 때는 입술을 쓰는 식으로 사역자를 통해서 활동하신다. 말씀의 사역자들의 가장 큰 임무는 곤고한 심령을 위로하고 참된 안식과 마음의 평온이 무엇인지를 지적하는 것이다. 가르치는 직무는 오직 하나님만 전파하도록 할 목적으로 목사들에게 위임되었다고 했다. 이상이 칼빈의 여러 주석들에 나타난 목사 상이었다.
그런데 칼빈은 목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소명(召命)인데, 목사가 영웅주의나 허영으로 한다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장애물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칼빈은 목사를 부패하게 하고 타락하게 하는 것은, 바로 “야망”이라고 지적했다. 칼빈은 말하기를,
“탐욕과 야망은 모든 성직의 부패가 시작되는 두 근원이다.”
“사역자들에게 야망이란 것보다 더 가공할 전염병은 없다.”
고 했다. 당시 카톨릭이 성직매매가 노골화되고 사제가 되는 것이 신분 상승의 기회가 되던 시대에, 칼빈은 목사의 소명은 단지 자기 욕망을 이루려는 헛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소명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개혁주의 목회자들이 걸어가야 할 참 목사 상을 세웠다. 그것은 초대 교회적인 목사 상이요, 그것이 종교 개혁이었다.
첫째로, 개혁주의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27년 동안 말씀의 종으로서 모범을 보였다. 사실 칼빈은 연속 강해 설교의 달인이었다. 그래서 칼빈은 매주 6~7회의 강해 설교를 통해서 어두워졌던 사람들의 영적인 눈을 뜨게 했다. 사실 천 년 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했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전파되고, <성례>가 잘 시행되는 곳이라면 거기에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한다고 했다. 칼빈은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강조할 뿐 아니라, 성경을 너무나 사랑했다. 그리고 성경만이 신학과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흔히 칼빈을 가리켜서 “한 권의 사람”“성경의 사람”으로서 성경을 정확히 해석하려고 했을 뿐 아니라, 성경 말씀을 구체적인 삶 가운데 적용하려고 했다. 칼빈은 말하기를 “말씀의 선포로 교회를 다스리는 것은 사람이 고안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한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둘째로, 칼빈이 말한 이상적 목회자 상은 <기도의 사람>이어야 한다.
실제로 칼빈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성경주석, 설교 등에서 수없이 기도를 강조했고, 「기독교 강요」 3권 20장에는 아예 기도론을 별도로 썼다. 칼빈은 기도란 믿음의 주요한 실천이며, 매일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는 매체라고 했으며, 기도 없는 신앙은 죽은 상태라고 했다. 칼빈은 기도까지도 신앙의 훈련으로 보았다. 그런데 무조건 기도가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기초로 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서 칼빈은 기도는 힘쓰고 애써야 할 것을 권고했다. 칼빈은 목사가 기도해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도 열광주의를 경고하고 진실로 말씀 위에, 말씀을 믿는 믿음 위에 기도할 것을 강조했다. 개혁자 칼빈의 권면과 경고는 바로 우리 시대에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셋째는, 칼빈은 이상적인 목사 상으로 <다른 사역자들과의 화합>을 강조했고, <성직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주의 종들은 자기의 명성에 집착하면 안되고, 항상 교회의 유익이 무엇인지를 우선해야 한다고 했다.
교역자는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관심 둘 것이 아니라, 잃은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가까이 가야 한다고 했다. 칼빈은 목사가 다른 사역자들과 화합할 때 교회를 유익 되게 하고, 주님의 나라가 확장된다고 했다. 칼빈은 말하기를 “무엇보다 사역자들 중에 상호 사랑이 요구된다. 이는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고 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 나가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면, 서로 이해하고 협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사가 낮은 자리에 있을 때 도리어 말씀의 능력이 나타날 뿐 아니라, 쓸데없는 야망을 가지고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기주의를 질병으로 보았다. 목회자가 서로 화합해야 할 이유는 야망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유일한 목표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면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중심이 되면 자기의 연약을 고백하고 서로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이다.
7. 목회의 원리를 제시한 칼빈
칼빈은 목사였다. 그리고 그는 성경 주석가요, 탁월한 조직신학자였다. 그런데 칼빈의 일생동안 가장 힘써 일한 것 중에 하나는 목회였다. 그는 평생 목회자로 살았기에 그의 책에는 목회 원리가 잘 표현되어 있다. 실은 제네바 교회 즉 제네바의 셍 삐에레 교회에 칼빈이 설교자로 또는 목회자로 부임하기 전에는, 오늘 우리식의 프로테스탄트 예배가 없었고 목회도 없었다. 물론 제네바에는 칼빈이 도착하기 전인 1532년에 파렐(W. Farel)이 와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드디어 1536년 5월 21일 제네바 전 시민이 모여 투표를 하고 복음을 따라 살겠다는 선언을 했다. 하지만 이때 시민들의 의식은 꼭 카톨릭을 떠나 성경의 뜻을 따라서 살겠다는 것보다 다분히 정치적이었다.
그러므로 제네바는 강력한 리더십과 체계적인 성경 교육이 필요하던 때였다. 때마침 당시 27세의 나이로 걸출한 신학의 대전이었던 「기독교 강요」를 집필한 청년 학자인 칼빈이 제네바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파렐은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파렐은 끝까지 칼빈을 설득하다가 안 되니, “만약 칼빈이 제네바의 종교 개혁을 회피한다면 하나님의 저주가 있을 것이다”라는 말에 칼빈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의 지도자가 되고 목회자가 된다.
그런데 신학자, 성경 주석가, 종교 개혁가, 교회 조직가로서의 칼빈의 모든 사상은 실제로 그의 목회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의 목회 원리를 보면 그의 신학의 핵심을 알 수 있고, 그의 목회 철학을 보면 그의 삶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자서전을 쓴 일도 없고, 자기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살았던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 경외와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의 생애를 이어갔다. 칼빈에게 있어서 목회(牧會)란 영혼을 돌보는 일이었다. 흔히 잘못 인식된 것 중의 하나는 목회는 목사가 긴 막대기를 가지고 어리석은 양을 모는 것으로 인상 지어지지만, 실은 목회란 칼빈이 정의한 대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영혼들을 돌보는 것이다. 돌보되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돌보듯이, 간호사가 환자를 돌보듯이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칼빈의 목회 원리는 무엇이었을까?
첫째로, 칼빈의 목회의 원리는 <말씀>의 순수한 전파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전파되고 성례가 바로 시행되는 곳이라면, 거기에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건물이 중심이 아니고, 말씀이 중심이란 말이다. 칼빈은 말씀의 사역과 설교의 사역이 중요하기 때문에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를 식별하는 표준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도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을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칼빈의 목회는 강해 설교를 통해서 성경을 정확히 해석하고, 성경을 실제에 적용시키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칼빈은 생각하기를 성경은 인간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는 거울이며, 하나님 자신을 보여 주는 보다 나은 조력자로 보았다. 그러므로 칼빈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떠나서는 신학도 없으며, 진리도 없고, 성경 말씀 앞에는 인간의 어떤 사상도 경험도 이에 대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로, 칼빈의 목회 원리는 <성례>를 강조했다.
칼빈의 신학은 성례의 신학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칼빈은 교회를 본질적으로 성례전적 교제로 보았다. 그런데 말씀이 없다면 성례의 요소들은 단순히 물이요, 떡과 포도주일 뿐이다. 성례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서 자비의 약속을 우리의 양심에 인쳐 주시는 표현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은 세례의 세 가지 유익을 이렇게 말했다. 세례는 사죄는 표이고,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례는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의 모든 축복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찬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울로 이해했다.
셋째로, 칼빈의 목회 원리는 <권징>과 <훈련>이었다.
칼빈은 주장하기를 권징은 말씀을 순수하게 유지하며 성례를 거룩하게 지키는 데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하여 교회가 모든 오류에서 피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자기반성이 필요하고 때에 따라 권징이 시행되어야 할 때가 있게 된다. 1536년 칼빈은 권징의 목적을 셋으로 나누었다. 즉 권징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데 있다. 권징은 선량한 사람들이 악인들과 교제함으로 부패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데 있다. 또 권징은 파문당한 자가 회개하여 마침내는 회복되도록 하는 데 있다고 했다.
넷째로, 칼빈의 목회 원리는 <교육>에 힘쓴 것이다.
칼빈은 예배를 통해 신자들을 바로 교육했다. 칼빈은 어린이 교육을 중요시한 나머지 저 유명한 「제네바 요리 문답서」(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y)를 만들었는데 이는 「기독교 강요」를 쉽게 개요한 것이다. 칼빈은 16세 이하의 어린이는 예배 외에 교육시간을 정하여 성경과 요리 문답의 철저한 교육을 받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칼빈은 어린이의 가정 교육을 강조했다. 1559년에는 제네바 대학을 세워서 사도 시대 이후에 가장 이상적인 학교로 만들었다.
다섯째, 칼빈의 목회 원리는 <예배>가 교회의 중심이 되도록 했다.
칼빈의 예배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예배였다. 그리고 예배의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이 홀로 높임을 받으시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여야 한다고 했다. 칼빈의 목회의 원리는 오늘 우리가 다시 새겨들어야 할 교회 부흥의 원리이다.
결언
오늘의 한국교회의 위기는 여러 가지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일반인들로부터 비호감 종교의 첫 번째가 되고 말았다. 그만큼 오늘의 교회는 세상의 빛 노릇, 소금 노릇도 못하고 있으며,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목회자가 목회자 답지 못하다는 소리가 높다. 그동안 우리 교회는 부흥에만 안주하면서 교회가 세상에 희망의 메시지를 주지도 못했고, 성도들에게 복음의 내용을 제대로 증거 하지 못했다.
또한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인해 정부로부터 예배가 통제되고, 정권이 교권을 다스려도 교회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발버둥도 없었다. 목회자들은 오직 성도들에게 이 세상에서 마음의 위로를 받고, 행복하게 잘 사는 메시지만을 남발해 왔다. 이러한 때에 옛날 종교 개혁시대에 가졌던 <본질로 돌아가자!>(Ad Fontes)는 취지를 가지고, 칼빈의 사상 즉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주권>을 바로 깨닫고, 목회자요 설교자로서의 칼빈을 다시 깨우쳐 우리 장로교회의 롤 모델로 삼고자 하는 취지는 옳다고 본다.
사실 오늘 우리 교회 강단은 지나치게 실용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요소가 교회 안에 많이 들어와 버렸다. 교회가 성장만 할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속주의가 되든, 인본주의가 되든, 포스트모더니즘이 되든 상관하지 않고, 백인 백색의 방법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다.
16세기 교회의 개혁자 요한 칼빈은 흘러간 역사의 잔재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개혁 교회의 목회자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적어도 역사적 장로교회, 곧 개혁 교회의 견인차로 자부한다면, 칼빈의 교리도 중요하고, 돌트 총회의 칼빈주의 5대 교리도 귀하고, 19세기 칼빈주의 부흥 운동의 견인차를 감당했던 아브라함 카이퍼도 귀하다. 하지만 우리 장로교회의 <근본적인 구조 조정>과 <혁신>이 없이는 21세기의 정통신앙을 지키는 교회로는 어려울 것이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lo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에 대한 구호만 외칠 것이 아니라, 칼빈이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교회의 개혁은 강단의 개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칼빈의 목회와 설교의 원리를 제대로 배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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