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가복음 15: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시편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가상칠언(架上七言, Seven Words from the Cross) 중 네 번째 말씀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더욱 이해할 수 없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당시에 듣던 유태인들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가상칠언을 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있을까? 공관복음에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에 제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을 직접 증언할 제자는 없을 것 같은데, 요한복음에서 사도 요한이 십자가 밑에서 있었던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요 19, 26-27, 28, 30, 셋째 말씀, 다섯째 말씀, 여섯째 말씀).
예수께서 십자가에 오르는 년도는 AD 30년(33세) 4월로 추정하고 있으며,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쳤을 때에, 십자가 주변에 있던 유태인들은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마 27:47, 막 15:35) 하였다. 즉 당시 유태인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 소리를 들은 사도 요한도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후일에 그 해석을 알았기 때문에, 바로 그 말씀 뒤에 해석을 부가하였다. 그러나 그 해석을 듣지 못한 유태인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하였다. 먼저 역사적 예수의 발언을 들은 당시 유태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였다면 결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 관용을 외쳤는데, 관용의 시대가 된 우리시대에는 이해가 되지 않은 십자가 복음에 대한 관용이 전혀 없다.
“인간 언어는 해석될 수 있다(language universality)”는 기본 전제가 성립될 수 있을까? 신비 언어, 계시 언어는 인간 이성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인간 이성으로 계시 언어는 해석할 수 없다. 게르하르트 마이어 박사는 성경해석에 특수 해석학을 제언하였다. 인간이 계시로 습득된 언어를 전달할 때에 계시를 받은 자 외에 자연 이성으로 그 내용을 해석할 수 없다. 그것은 1세기에도 그러하였고, 지금도 그렇다. 아무리 언어학이나 기술이 발달해도 계시 언어를 해석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사실과 진술(주장)이 일치하지 않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실을 진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 인간은 사실을 진술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다. 인간이 사실을 습득하여, 그것을 전달할 때에는 그 사실을 사실대로 전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론에서는 사실과 진술의 일치를 결정할 때가 있는데, 그러한 해석이 문자 계승이다. 문자를 그대로 습득하는 방식을 성경 해석에서는 많은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해석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뜻이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예수께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그대로 진술하셨다고 평가하는 것은 매우 무서운 접근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고, 우리가 얻은 임마누엘도 결코 떨어지지 않은 관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사실(아버지께서 버리지 않으심)과 다른 진술(버리셨나이까?=버리셨음)을 하셨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신 것인가? 인간 언어의 신비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언어는 사실을 전달하는 기능이 아니라, 진리와 감동을 전달하는 기능이다. 예수께서 자기가 버림받으심을 전달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죽음이 속죄제물이 되심을 알리시는 것이다. 칼빈은 예수께서 어린양으로 속죄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아버지의 도움을 구하지 않음으로 주해하였다. 예수께서 속죄제물이 되시는 단독의 형태는 구주는 오직 주 예수라는 것을 강조하는 문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예수를 AD 1-30년까지로 제정하였다. AD 1-30년은 쉬운 정의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30년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AD 30년으로 십자가를 규정하지만, 탄생년도는 BC 4년이기 때문이다. AD 1-30년으로 신학을 할 때에는 복음서의 90%는 해당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원리는 라이마루스(Hermann Samuel Reimarus, 1694-1768)가 진짜 예수 탐구를 위해서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는 선언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예수의 유기를 위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인용하는데(막 15:34, 『교회 교의학』 IV/1(화해론), §. 57)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성경(마가복음 15:34) 진술을 사실로 수용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 진술을 사실보다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증거하는 진리로 수용한다.
사실에 근거한 진술이 진리를 증거할 수 있다. 허구를 근거한 진리 전달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성경 진술을 사실 묘사로 보지 않고 계시로 평가한다. 계시에 근거하지 않은 진리 체계에는 가변성을 두지만, 진리에 근거한 진리에는 불변성을 둔다. 즉 우리는 사실에 근거하여 진리를 증거하지 않고, 계시에 근거하여 진리를 증거한다. 사실에 근거해서 전달한다는 주장은 선한 양심에 근거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전달할 능력은 더더욱 없다. 우리가 사실, 선한 양심이라는 것은 타인을 해칠 목적이나 자기의 탐욕을 충족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술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뜻은 십자가에 달리신 어린양께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심을 외치는 시편 22편의 말씀의 성취를 선언하신 것이다. 죽음에 임박한 백성들이 하나님께 자기를 버리심을 신원하는 것을 위로하시며, 결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시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웅변하신 복음이다. 그 일을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직접 죽음에 직면하셔서 유태인에게 외치셨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엘리야를 부른다고 잘못 이해하였다. 지금은 예수께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다고 오해한다. 속죄제물이신 어린양께서 처참하게 죽으심은 하나님께서 죄를 향해서 진노하심의 엄중함을 처절하게 느껴야 하며, 그 죄인인 당사자를 구원한 구주의 이름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선언하는 말씀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읽고 들은 사람은 자기 구주의 이름을 알며, 구주께서 십자가에서 속죄제물로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오직 주의 십자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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