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의강박에서 비롯된 한국의 질병
▶ 글쓰기 역량 향상법

한국엔 나름 특유의 미스테리가 있다. 선풍기 틀고 자면 죽나 안죽나, 아줌마들은 결혼을 하면 머리를 왜 뽀글뽀글하게 파마를 하나, 항문에서나는 냄새는 항문냄새인가 똥냄새인가라는 류의 다양한 미스테리들 말이다. 이런 대다수의 미스테리는 몰라도 그만, 알면 아는데로 넘기면 된다. 그러나 가장 악질적인 미스테리는 단연코 수학을 왜 배우는가가 된다. 이런 미스테리는 전국의 많은 젊은이들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악질적인 면모까지 지니고 있다.

sns에서 영어를 왜 배워야 하냐 주제로 어떤 사람은 당당하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 쓸모가 없는 수학 왜 배우는지 아는 사람 있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을 배웁니다. 그렇기에 영어가 쓸모없어도 배워야 합니다.'

일단 수학이 쓸모없다는 것부터가 헛소리고, 쓸모를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쓸모를 모른채 배워야 한다는 것도 헛소리다. 또한 영어와 수학을 등가로 놓는 것도 헛소리다. 이런 헛소리를 당당히 지껄일수 있는 이유는 정말로 수학을 왜배우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 환경적인 요인이 크다.

 

수학을 배우는 이유에 대해 수학은 연역적인 논리의 학문이고, 수학을 배움으로 연역논리를 키울수 있다는 암기 지식을 되뇌이는 인간도 있긴 하다. 허나 수학은 연역논리를 기반으로 생성되는 학문인 것은 맞으나, 수학으로 연역논리를 키운다는 건 헛소리다. 수학은 연역논리를 기반으로 생성되는 것일 뿐, 연역논리를 키우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공기없이는 살 수 없기에 공기로 숨쉬며 산다고 해도 사람이 공기를 만들어내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수학은 연역논리로 살아 숨쉴 수 있을 뿐, 연역논리를 키우는 것은 아니다. 연역논리는 언어범주의 정밀한 파악을 통해 향상되거나 성립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수학을 왜 배우는가? 간단히 말해 미래를 알기 위해서 배우는 거다. 물론 수학을 배운다고 모두가 노스트라다무스 같은 예언자가 되는 건 아니다. 다만 규칙이나 법칙이 있는 대상의 미래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법칙이 있는 현상에 대한 예측력을 제공해주는 것이 수학의 역할이며, 수학은 변화에 대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수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인변수와 종속변수에 대한 이해다. 수학에선 모든 현상은 인과율에 따른다고 본다. 인과율은 먼저 움직이는 것이 원인이고, 선행된 것에 영향을 받아 추후 움직이는 것이 결과다. 그렇기에 선행된 원인은 수학에서 원인변수라 하고, 추후의 결과는 종속변수라 한다. 먼저 움직이는 것에 따라서 결과가 나오니 그런 것이다. 그렇기에 수학은 간혹 신의 개념과도 연관되기도 했다. 나의 원인은 부모고, 부모의 원인은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원인은 증조할아버지, 이렇게 원인 결과를 거슬러 올라가면 첫 원인은 신으로 도달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에서 유를 낼 수 없으니 창조신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와 부모의 관계에선 부모가 엑스축, 나는 와이축이다. 부모님과 할아버지의 관계에선 할아버지가 엑스축 부모가 와이축이다.

 

그렇기에 이유도 잘 모른채 딸랑 엑스를 원인변수, 와이를 결과변수로 와닿지 않는 용어로 암기하면 수학이 쓸모 없어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물리에선 보통 엑스축이 시간이고, 와이축이 속도일때도 있고 에너지일 때도 기타등등 일 때가가 있다. 그것은 결국 시간이 증가함에 따라 속도가 증가하고, 에너지가 감소하고의 수식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수학자체가 기계적이니 만큼, 공대쪽에서 수학적 표현이 많이 나오는건 당연한 이치다.

고로 지금처럼 수학을 왜 배우는지도 가르치지도 않고 x=y+2 이런 것만 가르키는건 엄연히 삽질이다. 가장 중요한것은 엑스축과 와이축의 관계라는 인과율이라는 개념적 이해고, 그런다음 알아야 할것은 각종 그래프들의 형태다. 선형적으로 원인이 변한만큼 비례해서 변한 결과가 도출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연법칙들이 꼭 선형적인 것만이 아닌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현상을 예측하기 위해서 직선방정식이 아닌 2차방정식을 배우고, 또한 주파수같은 현상은 주기를 갖게 되니 주기를 갖는 함수인 싸인함수, 코사인 함수등을 배운다는 것이다. 즉, 수학이란 것 자체가 패턴이 있는 자연현상들의 결과를 알기위한 것이므로, 원인변수와 결과변수라는 기본적인 개념이해 다음으론 각종 함수들의 개략적인 모양과 기본식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1차방정식은 직선이고 y=ax+b라는 기본식을 일단 알아야 하며, 2차방정식은 포물선형태에 그 기본식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인 즉 자연 어딘가엔 저런 패턴을 갖는 현상이 있고, 그 그래프 형태와 기본식의 변수들을 가공함으로 자연현상을 수식으로 묘사해서 결과값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싸인함수도 그렇고, 로그함수도 그렇고, 당장 쓸모없어 보이는 것도 각종 수식들이 자연 어딘가엔 저런 비슷한 패턴을 지닌 현상들로 존재하고 있기에 법칙이 있는 것들의 결과를 예측하기 위해 그 형태들을 배운다는 거다.

그렇기에 미분이 중요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이유인즉 수학자체가 변화의 학문이기 때문이고, 미분은 변화율을 다루기 때문이다. 미분이 결국 뭔가? 원인이 변한만큼 결과가 얼만큼 변하는가를 구하는게 미분이다. 기호에 현혹되지 말고 미분의 의미에 중점둘 필요가 있다. 따라서 초딩이 미분을 할줄아네 어쨌네 하는 것 자체가 웃긴거다. 초딩이 수학의 기본적인 개념을 이해할리도 없고, 미분의 개념도 이해할리 없을텐데, 무슨 엑스제곱은 이엑스로 바꾸는게 미분의 전부인줄 알고 있으니 말이다. 초딩이 미분할 줄 안다고 하는 것 자체가 현 교육의 행태가 수학의 껍데기밖에 모른다는 것과 같다. 그런데 미분할 줄 안다는 초딩뿐만이 아니라 일반 고딩들 조차 수학에서 중요한 엑스축과 와이축의 관계, 인과율의 개념, 그래프 형태 등을 배운다기보단 시작부터 y=x+2의 수식부터 주어주고 계산하는거나 배우지 않던가? 이렇게 접근하니 수학을 당연 왜 배우는지도 모르는 것이고 재미도 없는 것이다.

수학은 패턴의 학문이며, 패턴이 있는 현상에 대한 결과를 알기위해 배우는 것이고, 이는 결국 반쪽짜리나마 미래를 알 수 있는 힘을 부여해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수학을 배우는 것이므로, 수학에서 중요한 것은 수식이 아닌 그래프와 변수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그래프나 변수는 커녕 수식부터 들어가지 않던가? 계산기 몇번 뚜들기면 나오는걸 학교에서 가르치니 정말 시간낭비다. 물론 수학도 여러분야가 있는만큼 개략적인 것을 설명하기 위해 뭉틍그려 무리한 일반화를 시도한 것일수도 있다. 그런데 수학을 배우는 건 보통 패턴을 알고 패턴에 따른 결과를 알기위한 것임을 우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을 알지 못한채 수식에 따라 계산만 하는 한 수학교육은 왜 배우는지 모른채 미스테리로 남겨져 버릴 뿐이다.

 

 예의강박에서 비롯된 한국의 질병

한국을 표현하는 말은 여러가지가 있다. 대표적으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던가, 동방예의지국 등이 해당될 수 있는데, 대표성 측면에서 보면 동방예의지국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보다 강하다고 본다. 아닌게 아니라 동방예의지국은 좋은말같지만 고요한 아침의 나라란 말은 시적인 느낌은 있을지언정 저게 딱히 좋은 말이란 느낌은 안드는 게 사실이다. 뉘앙스가 왠지 잠에서 덜깬 어벙한 이미지인 것이 좋은 이미지까진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한가지 간과되고 있는 사실은 국가간 관계와 인간 간의 관계는 사실 좀 이야기가 많이 다르다는 점이다. 인간사이에서 싸움 잘한다고 으시대면 바보취급 받기 쉽지만 국가는 아니라는 것이다. 일반인이 싸움 잘한다고 내세워봤자 조폭에 건달일 뿐이지 자랑인 건 분명 아니다. 그런데 이게 국가 간의 관계에선 상당히 달라지는데, 국가간의 관계에선 싸움을 잘하는 게 거의 갑이라는 점이다. 역사에서 가장 추앙받는 왕도 결국 영토가 가장 넓고 가장 쌈질 잘했던 왕이 대왕 취급받지, 싸움못한 왕은 별로 취급 안해준다. 지금이야 국가간 관계에서도 싸움만 잘한다고 장땡은 아닌 시대로 왔다곤 하나 그래도 여전히 국가의 전투력은 한나라를 측정하는 주요 척도로는 유효하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즉 국가 간의 관계는 사람 사이에서의 관계와는 사뭇 다르다는 소리라는 것이다.

이점을 상기하고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을 살펴보면, 갑자기 전혀 생각지 않았던 불쾌함이 스멀스멀 올라와야 정상이다. 국가 관계는 싸움 잘하는 게 자랑인데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건 표현만 좋은 빛좋은 개살구지 않는가. 예의를 지킨다는 말은 사람 사이에서나 좋은 말이지 국가간에서는 그닥 좋은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은 이미 국가간 굽신되는 동방호구지국이라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통하게 된다. 이 같은 점은 아래의 만화에서 보다 확인할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국가간에서의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은 좋은 소리가 아니었다. 둘째는 국가간에서나 예의지키는 게 문제지 대인관계에서 예의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런데 이 정도 수준이 전부가 아니라는 게 문제다. 더 나아가선 국가간 예의문제보단 대인관계 예의문제가 보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일단 한국에서 가르치는 예의 교육의 대표적 대상은 바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는 말이 될수 있을 것이다. 익은 벼는 고개를 숙이니깐 항상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고, 항상 자신을 낮추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교육 상태부터 애들을 바보로 만드는 지름길이라고 보고 있다. 이유인 즉 벼가 고개를 숙이는 건 대가리에 맺힌 열매 때문이지 스스로 허리를 굽히려는 노력으로 허리를 숙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이건 단지 일면적 현상을 설명하는 속담이 아니라 사실 사회 일반법칙이 담겨져 있는 속담이라는 것을 간과해선 안된다. 못 배운놈이 나대고 배운 놈이 정중한 건 배운 놈이 특별히 예의를 지키고자 하는 심리가 있다기보단 목적기준이 변동되어 나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못 배워서 아는거 없는 인간은 아는 거 한두개 있는게 자랑스러워 내세우지만, 많이 배운 인간은 기준이 어느새 '이미 있는 것'에서 '현재 없는 것'으로 변동하게 되서 외견상 굽힌 벼의 형상일 수 밖에 없다. 고로 많이 배운 놈이 부족함을 찾는 건 예의를 지키려는 무슨 본연의 자세라기보단 그냥 목적기준의 변동이 '있는 것'에서 '없는 것'으로 되어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봄이 옳다.

더 심각해지는 부분은 이런 교육으로 인해 음모론 령자들이 잔뜩 양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는 유독 뭔 일이 일어나면 음모론 타령하는 소리들이 판치기 십상인데, 음모론이라 불리우는 것을 보면 사실 앞서 나가는 견해의 다른 말과도 같다. 모든 음모론이 다 앞서나가는 견해인 건 아니지만 대부분 음모론이라 불리는 것들은 사회일반적 시각과는 궤를 달리한다.

한국에 인육사건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시기에 인육주장을 펼쳐 앞서나가면 이럴 때 듣는 게 음모론이고, 결국 한국에 유난히 음모론 타령이 판치는 이유는 이런 뿌리깊은 예의교육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계속 자신을 낮추는 게 예의인데 별로 본적도 없는 앞서나간 주장이 보이면 배알이 뒤틀리기 쉽지 않는가. 그러니 앞서 나갈줄 모르는 자들이 앞서나가는 행위를 재단하는 게 바로 음모론 타령이다. 이 음모론 타령병자의 심리를 비교하자면 집 밖에만 커온 개를 억지로 집안에 들여놓으면 화급히 놀라서 잽싸게 지가 살던 개집으로 튀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이 음모론 타령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항상 자신을 낮추고 뭔가 따를 무언가를 항상 갈구한다. 그가 따르고 있던 대상이 사기치면 속수무책 내장까지 털려도 모른다는 점에서 문제점이 더욱 크다. 실종 사건이 비일비재하고, 중국어선이 하룻밤에 4만척이 넘어와도 찍소리도 못하면 이미 국가가 비정상인 걸 알아야 한다. 허나 이들은 항상 자신의 눈보단 외부 대상과 대세를 따라 자기 뇌와 머리를 헌납하니 거대화된 사기극엔 속수무책인 현상이 발생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시급히 알려야 할 사실을 도무지 알리지 못하고 있는게 현실이고, 예의교육이 이런 음모론 타령자들을 잔뜩 유발시켰다는 것이다.

예의강박으로 인한 문제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데 대표적 병폐가 바로 비리의 만연이다. 천상 비리는 높은 새끼가 큰 비리 저지르고, 낮은 새끼는 하찮은 비리를 저지르기 쉽다. 그러다보니 이 한국사회는 뇌리 깊숙히 코딩된 예의 강박으로 인해 높은 지위의 큰 비리는 눈을 쉽게 감는데, 낮은 지위의 하찮은 지위는 철저히 잡으려 애를 쓰고 있게 되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 자체가 뿌리 깊은 예의 문화로 인해 상위권에게 대드는 것이 심리적으로 일단 어렵기 때문에 발생한다 보고 있다.

 

오죽하면 전철에서 자리양보하란 소리로 자리강탈이나 행하며 그 행위를 예의로 포장하는 세력까지 등장하는 사회가 되었을까? 자신의 행패를 가리고자 강조하는게 예의고, 자신의 구린점을 가리고자 예의를 철저히 강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리양보는 사실 왠만한 긴급한 상황아니면 자기 입으로 양보를 요구하는게 이상한 행위다. 다리가 아프면 택시를 타던가 외출을 삼가던가 왜 알지도 못하는 젊은이에게 행패부려 자리 뺏고 그 행위를 예의로 포장하는가? 결국 이런 쓰레기같은 정신들이 모여 자발적 예의가 아닌 억지 예의를 만드는데 일조하게 되고, 가장 크게 악용되는 분야가 바로 비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국가 내부적으로 미치는 폐해가 극악한데, 이것이 국가간 관계로 가면 더욱 심각해진다. 국가간에도 예의를 지킨답시고 불법체류자도 존중하고, 장기적출 조선족에게도 예의차리라고 사단난게 바로 다문화다. 결국 중국은 큰나라고, 작은나라인 한국은 몸을 낮춘다. 그러다보니 큰 나라의 비리에는 자연히 눈감게 되고, 결국 글로벌 호구가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예의에서 비롯된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예의를 지키지 말란 말은 아니다. 예의를 지키기 이전에 가장 중요한 건 진심이고, 진짜 공경하는 마음을 오해없이 표현하게 하는 형식적 기법이 예의인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이건 마치 태국에선 악의가 없어도 머리를 만지면 결례가 되듯, 오해가 없도록 진심어린 선의를 표시하는 형식적 기법이 예의다. 진심도 없이 형식만 강조하는 건 예의가 아닌 병폐만 양산하는 병균시스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고로 어른은 끝없이 존중받을 행동을 하고, 젊은이는 그 예의라는 형식에 맞춰 진심어린 공경을 표해야 할 일이지, 진심도 없는데 형식만 강조하면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한국은 이게 거꾸로 되서 윗선들은 젊은이가 굽신거려주니 자기계발은 커녕 속물 그 자체가 되고 있다. 젊은이 나름대로 노인들에게 억지로 허리를 굽히는 게 예의인 줄 아는 현실로 오게 되었다. 그러니 젊은이들 사이에서 예의는 이미 진심을 담은 형식보단 진심을 억누르는 억지로 돌변한지 오래되었다. 이런 게 왜곡되어 결국 글로벌 호구의 완성판이 되었다.

예의란 진심을 오해없이 표현하는 형식이다. 이것을 넘으면 병균이 되고, 쓰레기가 되고 국제 호구가 된다. 그것을 부정하는 자는 지금 현실이 어떤지도 잘 모르는 자라 확신한다. 한국에 이런 비정상적이고 병균같은 예의가 사라지고 진심이 담긴 형식이 예의로 바로 서는 그날을 고대한다. 

글쓰기 역량 향상법

글쓰기와 논술능력에 가장 도움되는 것은 첫째도 둘째도 바로 토론이다.

머리 속에 들어있는 지식이라고 죄다 즉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전 가본 적 없는 곳의 길을 미리 습득한 정보를 통해 안다 해도, 바로 그 정보대로 능수능란하게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듯이. 정보를 통해 길을 알고 있는 것과, 몸에 익어 아는 길을 가는 것과의 차이는 당연하다.

이런 현상을 '형식지'와 '암묵지'의 차이라고 한다. 보통 지식의 전달과정은 개인의 암묵지가 형식지가 되고, 이런 형식지가 타인에게 형식지로 전달되며 타인의 형식지는 다시 암묵지로 되어야 완전한 전달 과정을 거친다. 암묵지는 말로 표시되지 않는 몸에 체화된 기술이나 앎이고, 문자나 언어로 된 앎이 형식지라는 것이다. 개인의 스킬인 암묵지가 형식지화 되어 언어로 타인에게 형식지로 전달되고, 이렇게 타인에게 전달된 형식지는 또다시 암묵지로 되어 내면화되어야 완전한 전달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지금 교육은 학생들에게 형식지를 쌓는 것까지로 종결날 뿐, 그 형식지를 다시 내면화하려는데는 관심이 없다. 그 대표적 근거가 바로 객관식 시험위주의 현 교육실태이다. 객관식 시험은 형식지만 측정할수 있다. 흐릿한 기억으로 답과 답이 아닌 것을 고를 수 있기만 하면 되고, 그 답과 답이 아닌 것의 선택은 전적으로 보기에 의존해야지만 가능하다.

토론상황은 객관식 시험처럼 보기에 의존하는 지식은 말할 수 없다. 보기에 대한 반응적 지식이 아닌 자기자신과 체화되어 능동적으로 발출할 수 있는 지식만 활용 가능하다는 것이고, 토론의 더 큰 장점은 형식지로 쌓인 지식을 체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어, 아무것도 의존함 없이 자기 스스로 말할 수 있는 대상의 범주를 넓혀준다는 것이다.

고로 과거의 사실들을 정리해서 글쓰기 능력의 향상은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 같다.

1. 토론을 통해 일단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범주를 늘려야 한다.

2. 토론을 통해 기본적으로 쓰기 능력이 갖춰지면, 일차적으로 비판적 글쓰기는 쉽게 가능해진다.

그런데 비판적 글쓰기의 한계는 타인의 주장에 반응적인 글쓰기라는 것이다. 처음 글을 쓸땐 헛 점있는 글들의 논박을 통해 글쓰기를 시작하는 것이 글쓰기 능력의 향상에 보탬을 주고, 반응적 글쓰기는 다른 글쓰기보다 비교적 수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고로 돌아다니면서 헛 점이 보이는 글들에 집요하게 달라붙어 헛점을 파악하고 그 헛점을 지적하면서 자신이 그 지적사항에 해당되는 짓을 저질렀던 것을 반성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절차다. 타인의 바보 짓은 쉽게 보이는데, 자신의 바보 짓은 잘 안 보이기 때문에 필요한 절차이다. 그러므로 초창기엔 굳이 어려운 상대의 글을 논박하려할 필요 없이 자신보다 한 두 단계 수준이 떨어져 보이는 자들을 상대하는 것이 이로움이 크다는 게 개인적 생각이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교사가 아닌 반면교사이기 때문이다.

3. 토론을 하다 보면 필수적으로 국어사전이 많이 필요함을 느껴야 정상이다.

이유인 즉 그냥 썼던 말들 하나하나가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다르고, 개념차이가 있는 경우가 허다하며, 일상적으로 흔히 쓰는 말의 정의를 내리려면 막상 난감해지는 경우가 많고, 의미를 몰랐는데 사용하기만 했던 말들도 많기 때문이다.

4. 토론과 반응적 글쓰기의 과정을 거친 후엔 철학서적을 반드시 접해야 일반적 상식수준을 넘을 수가 있다.

철학이 공허한 학문이기도 하나 많은 학문의 원류가 되는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떤 테크트리를 탈진 모르겠으나 기본적으로 구조주의, 합리주의, 칸트, 플라톤, 그리스로마신화 정도의 맥을 잡을 필요는 있다보고, 각 사상들의 기본적인 뼈대만 추려서 얻으려면 진중권의 미학 오딧세이가 적격으로 보인다.

5. 고전적인 서적들을 읽었으면, 다시 한번 토론상황에서 그 서적들을 통해 얻은 지식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지만 형식지가 암묵지로 다시 새롭게 다가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전서적 읽고 논쟁한답시고 상대에게 비트겐슈타인이나 읽어라 이딴 말로 책 이름의 권위에 의지하려면 논쟁하지 말고 책이나 다시 읽는 게 좋다. 학자이름, 이론이름은 최대한 거론하지 않고, 그 책에 담긴 원리들만 글에 적용해서 쓸려고 해야 된다.

6. 고전 서적들 속에 담긴 지식을 체화시켰으면, 이젠 그 책들에서 다룬 대상들을 이론을 빌리지 말고 직접적으로 고찰해본다.

가령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었다면 마르크스의 자본이론은 잊고, 자본을 대상으로 자신이 직접 생각하는 것이다.

실용적인 글이나 논리적인 글을 쓰려면 5번이후 헌법, 민법관련의 법학책과 주요 판례 등을 이해해 보는 것을 추천하고, 창의적인 글을 쓰려면 6번까지 가는 게 합당해 보인다. 물론 가장 어려운 건 6번임에는 두말할 필요 없으나 가장 중요한 건 1번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끝으로 이 글은 정석이 아닌 한 개인의 사담 정도로 받아들이길 당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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