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어린 아이의 마음.

옛말에 "미꾸라지 한마리가 온 연못을 흐려놓는다."고 했다. 오늘 날 극소수의 사람들이, 급물살을 타고 달리는 현대사회와의 적응에 점차 괴리가 일어나, 이성적 판단이나 숙고에 의한 결단과는 아주 거리가 먼, 찰라적으로  육신의 소욕을 따라, 아님 그때의 기분이나 충동에 따라, 해서는 안될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를 때가 있다. 술에 만취된 상태가 되었으면 운전을 포기해야 하는데, 일파만파의 사고를 저지르게 된다. 또한 '안전 불감증'도 그러하다. 뿐만아니라 육욕이나 물질에대한 감각적 충동에의해 돌이킬수 없는,  그래서 성경에도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자는 성을 빼앗는 용사보다 낫다."라고 했다. '풍요속의 빈곤'이란 말은, 이 풍요의 시대에 나홀로 나목처럼 서있는 나를 발견했을때의 초라함 일 것이다. 양(羊)은 목자없이 이 거친 세상을 살수 없다. 그러나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듯, 생명을 가진 피조물은 모두 지구의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라!  이것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과 하나됨의 문제다. 내가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정작 갖추어야 할 덕목이 없으면, 어떠한 사물이나 재물에 대하여, 순간의 탐욕이나 육체적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그리고 당사자에게 단 하나 뿐인 생명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야수(野獸)들과, 우리는 종종 호흡을 같이하며  살고 있다. 

어쩌다 홀로 밤길을 걸어갈 때, 가장 무서운게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다. 요즘 연속적으로 터지는 엽기사건들을 보면, 너무도 끔찍해서 소름이 돋는다. 상속 재산을 놓고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면 될 것을, 탐욕의 평행선을 달리다 집안끼리 다투고 앙숙이 된다. 결국 가족이 깨지고, 인격이 망가지고 다 망가진 후에야, 철장 신세를 지거나, 창살없는 감옥에 자신을 가둔 후에야 후회한다.이러한 단면들은, 더불어 사는 사회 일원으로서의 인간(人間)이기 보다는, 환경의 지배보다 더 무서운 정욕의 노예나 탐욕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단독자로서의 내 영혼의 자유의지를 가로 막는, 육욕이나 소유욕의 감옥에서 탈출하려면, 우리는 어찌 해야 할까?
1.감옥의 간수를 매수해서 탈옥을 하면 어떨까?
2. 실력 있는 변호사를 선임해서 감옥에서 벗어 날 수는 없을까?  
이중 첫번째의 해답은 공동사회를 훼손하는 탈법적이므로 두 번째를 선택하여야 할 것이다. ‘법대로 해보자’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반드시 먼저 알아야할 것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만은, 꼭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감옥에 투옥되어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자신의 자유를 가로막는 창살없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자기 스스로 염려 근심을 만들어서, 즉 걱정거리를 사서 그 틀속에 갇혀 살 때가 있다. 내 것이 아닌 엄연히 남의 것에 탐욕에 꽂혀, 인면수심의 손이 되어, 무고한 생명까지 빼앗는 순간, 그는 천길 나락으로 떨어지고, 공동체사회까지 망가뜨리는 암적존재가 되고 만다. 이것은 더불어 사는 존재로서의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人間)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 하신 이의 뜻과는 전혀 다른, 사회적인 암적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또한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지 못하도록, 스스로 나를 가둬 놓고 있을 때도 있다. 특히 돈, 명예, 탐욕, 등 세상적인 모든 것들에게, 우리의 마음이 빼앗겨 있을 때가 특히 그러하다.  

우리는 이러한 육신의 소유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서, 정작 내가 그러한 육신의 소유욕의 틀에  갇혀 있다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 만든 그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갇혀 있는 감옥, 나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감옥은 과연 무엇가?  우리가 만일 "자유가 아니라 ‘돈’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면, 이때 우리는 이미 육신의 노예가 되어,우리의 심령이 창살없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다.  또한 ‘명품’만을 생각하고 있다면, 이 또한 ‘명품’이라는 틀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 마음이 누군가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하다면, 그 순간 나는 이미, ‘미움’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다. 세상의 자랑, 세상의 안목, 육신의 소욕이나 명예와  권세 등 나에게 있어서, 분수에 넘치는 헛된 허욕에 물들게 되면, 우리의 욕망은 마치 바람 들어간 고무 풍선처럼, 공허가 점점 더 커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무릇 지킬만한 모든 것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라 하신 것이다.   "나에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절규한 뭉크 처럼,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여기서의 참 자유는 "영혼 내면을 더럽히는 모든 정서적 오염으로부터의 참 자유."를 말한다. 주님도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안목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울수 있기를 바라신다. 오로지 육신의 소유욕으로 가득한 이 세상의 안목으로 부터 진정 자유로워야, 내가 가난해도 풍요로워도 이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매임으로부터 참 자유로울수 있다. 

사도 요한은 육신의 소욕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말한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가 무엇인가? 흔히 우리는 육신의 소욕을 충족시키면, 자아실현의 유토피아에 이를 것으로 착각한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아니 어쩜 우주 보다 더 광활할지도 모른다. 욕심은 채워도 채워도, 더 더 할뿐 지평처럼 끝이 없다. 그런데 이런 헛된 허욕을 내려놓으면 다 보인다. 허욕의 망상이 보이고, 망상의 끝이 보인다. 이것은 죽어서 천당이 아니라, 육신의 소욕을 하나님 손에 내려놓고,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시려고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을 바라보면, 새로운 영안(靈眼)이 열려 그 망상의 헛됨이 다 보이게 된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으로 부터,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이다. 그는 오로지 주님 안에서만 머물러 있기를 소원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예수님 곁에 있었고, 주님께서 정작 우리가 져야 할 죄악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에 이르는 질곡의 순간에도, 사도 요한은, 여상히 십자가 고난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예수님 부활 소식을 듣고서, 제일 먼저 주님의 무덤으로 뛰어 갔던 제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보면, 무덤 안에 먼저 들어 가는 것을 베드로에게 양보하는 겸손을 볼 수 있다. 주님이 살아계실 때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제자이니, 마땅히 무덤에 먼저 들어갈 수 있다고 자만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교회의 반석으로 삼은 베드로를 존중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 나는 참 모습을 보여준다. 사도 요한은 유일하게 가장  오래 살았고, 설교할 때 '사랑'만을 얘기했지만, 많은 초대 교인들은 사도 요한이, '사랑'이란 말만 반복하여도 큰 울림을 받았다.  왜?  '사랑'은 말에 있지 않고 행함에 있기 때문이다. 새해에는 당신보다 나은 자에게 받고 싶은 사랑이 있으면, 당신에게 가시같은 이를 먼저 사랑하시라! 내게 주어진 순간 순간들을 내게 다시 없는 마지막 순간처럼 불꽃을 태우자!

           종그니가         

 【종그니칼럼】어린 아이의 마음.

우리나라는, 중국인들의 비하(卑下)대로, '녹두(綠荳)국가'라할 만큼, 중국에 비해 땅덩이가 아주 작은 나라다. 그렇지만 작은 고추가 맵듯이, 이 작은 나라의 대한민국인이, 오늘 날 세계가 좁다하고, 저 양양한 대 우주에까지 우주선을 쏘아올릴만큼, 그 어느 국가도, 우리를 비하할수 없는, 세계와 우주를 주름잡는, 당당한 대국이 된 것이다. 그러나 빛이 밝으면 어둠의 그림자도 크듯이,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가 우리나라 인구 비율문제이다. 불과 몇십년전만해도, 대한인이 단일민족이라는 그 명성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 옛부터 단일민족이었던 대한민국이, 인구 급감으로 볼과 몇십년 사이에 다문화국가가 되었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irony)다. 또 하나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는, 대한민국인의 인구가 줄어들면서, 나라의 장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은, 나날이 줄어들고, 늙은이들은 가파르게 증가하는, 가분수 세모꼴의 폭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져서, 눈 깜짝할 사이에 초 고령 사회가 이미 들어서 버렸다는 것이다. 불과 70여년전에 최 극빈의 저개발국가에서, 경제대국의 피라밋 꼭지점에 오르기까지, 초 고속으로 비상(飛上)했던 대한민국이, 이젠 초고속으로 추락할 분기점에 서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초급을 다투는 위기에 서 있다. 위정자들은 이를 아는가? 모르는가? 서로 물고 물리는 그 지긋 지긋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전투구와 같은 진흙탕 싸움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서로 손을 맞잡고 이 난국을 뚫을 지혜를 모아야할 때다. 누구 좋으라고 허구헌 날 서로 쌈박질만 하는가? 좀 부끄러워할 줄들 아시라! 현대사회에서 가장 소중한 자본이 무엇인가?  그 것은 오늘 이라는 기회다. 어제는 지나간 날이요,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날이다. 그래서 오늘 바로 지금이, 가장 소중한 것이다. 허구헌 날 국민을 볼모로 정쟁만 일삼는 정치행각에 이젠 신물이 난다. 모든 정쟁을 판단중지하고, 겹겹히 쌓인 이 위기를 기회로 반등시킬수 있도록, 반드시 국론이 하나가 되어야 할 때다. 마음들을 비우시라!

속을 비운 대나무는 비바람 몰아치는 태풍에도 유연하다.  이제 우리는 권모술수로 얼룩진 아귀다툼의 정쟁을 끊고,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돌아가려면, 어린 아이들의 상상의 세계속으로 들어가 보아야 한다.  어린 아이들은 어른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생각하는 바가 진순무구하다. 그래서 아주 새로운 것만 보아도 호기심이 일어나서, 장난감끼리 서로 부딪치기만해도 너무나도 재미있어 한다.  생각해 보라! 장난감끼리 부딪치는 것뿐인데 그게 뭐가 재미있을까? 생명 없는 장난감 자체에만 놓고 피상적으로만 보면, 무미건조하게 보여도, 어린아이는 그 장난감에 생명을 불어 넣고, 거기에 집중하고 있으니,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어 하는 것이다. 

나이든 우리도 그 무언가에 집중하다 보면, 재미와 흥미를 느끼게 되지만, 만약 집중하지 못하게 되면, 바로 흥미를 잃고 지루하게 여겨진다. 기도하는 것도 이와 같다. 많은 이가 기도를 지루하게 여기고, 또 시간 낭비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면 시간 낭비일 뿐이다.  무엇에든지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집중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쓸데없는 것에 집중할 때가 많다, 세상 일에 몰입하면서 행복하지 않은 자신에 대하여, 불평을 말할 때가 많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자입니까?” 라고 묻는다. 제자들의 이 질문에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인가?  주님은 제자들의 이 질문에 어린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시고, “누구든지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는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여긴다.  주님의 이 말씀은 어린이처럼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에게서만 찾아볼수 있는, 순전하고 순수한 집중력을 배우라는 것이다. 이 순수한 마음이 바로 순진, 순박, 겸손하신 예수님 마음이다.

누구나 하늘 나라에 들어가고 싶을 것이다. 그 하늘 나라는, 우리가 꼭 죽어야만 갈수 있는게 아니다. 우리가 이땅에 살면서도 얼마든지 누구나 다 하늘 나라에 이를수 있다. 바로 어린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이다.    우리가 온전한 사랑안에 즉 하나님 뜻 안에 머물러 있을 때, 그 곳이 바로 마음의 천국인 것이다.  설혹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고 있다 할지라도, 슬퍼하지 말자!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이, 바로 주님께서 너무나도 기뻐하시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갖게될 때, 비로소 하늘은 그를 향하여 축복의 문을 여실 것이다. 늙었다고 치부하거나 기죽지 말자! 늙어도, 언제나 새 아침이 있고, 새 봄이 있고, 새 여름이 있고, 지금처럼 결실의 가을이 있다. 

        종그니가

 

<저작권자 © 리폼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리폼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