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노인문제
내 나이 이제 팔십으로 겨우 마당이나 밟고 요양원에서 늙은이들과 세월을 보내는 늙은이지만 나라가 되어가는 꼴을 보니 이 나라가 어쩌다가 이지경까지 왔는가 싶어 인생 말년에 비감이 서린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대통령이 그 막강한 권력을 쥐락펴락하고 있음에도 국민과 국회에 총 칼을 들이대는 반란을 일으킨 꼴을 보노라니 참 어이가 없다. 옛말에 "기만즉 일 인만즉 상 (器滿卽 溢 人滿卽喪)(그릇이 차면 넘치고 욕심이 지나치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했다. 나는 이처럼 한 사람의 지나친 과욕이나 망상이 이 나라에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 오는지를 똑똑히 보고 있다. 나라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숨 돌릴 틈도없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이 나라에 소속된 모든 이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감하게 된다. '대통령'이란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우리나라의 정치 구도가 삼권분립 이라고는 하나 그러나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된 국가 권력은 가히 무소 불위다. 이토록 실로 어마무시한 권력을 쥐고도 뭐가 성이 덜 차서, 지난 6월부터 계엄 음모를 획책하여 한 겨울 한 밤중에 전광석화처럼 계엄령을 발포 하였다니 정녕 그에게는 무한권력 말고는 눈에 뵈는게 없는가 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윤석열은 두주불사(斗酒不謝)로 이미 알콜 중독에 가까울 만큼 술을 좋아한다고 한다. 내 예단이지만 계엄령을 반포할 때도 술에 빠져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는 말이 있다. 원래 이 말은 미국 트루먼 전 대통령의 좌우명 인데, 이 말이 윤석렬님의 입에 술만 들어가면 입버릇 처럼 내 뱉는 말이란다. 나랏 일을 술 주정으로 해서야 되겠는가? 법치주의의 사회에서는 나랏 일이 예측가능하도록 지극히 합리적이어야 하는데 그는 나랏 일을 술기운으로 맘 내키는 대로 하시는가? 도무지 종잡을수 없는 그의 언행은 듣는 자의 마음을 섬뜩하게 한다.
무소 불위의 권력일수록 자기 스스로를 제어하는 '셀프 컨트롤'이 있어야 헌법에 주어진 엄혹하고 막중한 업무를 마치 도로 위의 차선(車線)을 지켜야 하듯 신중해야 할 대통령이 입에 술만 들어갔다 하면 쏟아내는 취중의 말이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고 했다니 어이가 없다. 옛말에 酒中不言 眞君子(주중불언 진군자) 丈夫一言 重千金(장부일언 중천금)이라는 말이 있다. 비록 나랏 일이 다수 야당의 발호나 비토가 대통령의 눈에 몹씨 거슬렀다 할지라도, "바쁠수록 돌아 가라"는 말처럼 아무리 야당이 쓴소리를 해도 되려 진중하게 어떻게 할까를 관용의 잣대를 가지고 헝클어진 난국을 풀어 나가려고 하면 대도무문(大道無門)처럼 확 뚤린 길이 보였을 것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무소불위의 권력도 잠시다. 잠시 맡고 있는 권력을 자기화 할 때 법치주의는 사라지고 자신을 향한 제동 장치가 없는 전제군주가 되는 것이다. 마치 유럽 근대사에서 산산히 널부러져 있던 독일을 통일한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를 보시라! 그는 임금 아래 수상으로써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을 조국 통일에 두고 최선을 다하여 사분 오열로 찢겨진 조국을 '통일 독일'이라는 과업을 위해 혼신을 다하여 마침내 통일 독일을 이루었다. 그런데 당신은 그런 지혜나 역량도 없으면서 잠시 주어진 권력을 망나니 헌 칼쓰듯 하시는가? 정치가 어려울수록 대통령의 언행은 진중해야 헝클어진 실타래가 풀리는 법이다. 그래야 단 한마디의 말도 거대한 태산처럼 큰 울림을 준다. 나는 이십4~ 5년 전에 한국일보 문화면 전면에 실린 경북 구미에 있는 금오산 정상의 바위산 모습이 영락없는 박정희 전 대통령 얼굴 인걸 보고 내 눈을 의심할만큼 깜짝 놀랬던 적이 있었다. 5.16 구테타로 이 나라를 무려 스무해 동안 철권 통치로 경제적 근대화를 이끈 고 박정희가 금오산 정상에 철옹성 처럼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바위가 5척 단구의 영락없는 고 박정희 얼굴이었다.
박정희의 구테타를 모방한 전두환 일당의 79년 12,12 사태로 1980년 5.18 민주화로 광주를 피바다로 물들이며 살벌하고 엄혹한 쳘권통치를 했던 소위 국가보위 조절위원장 전두환은 자기의 정권찬탈을 합리화 하기 위하여 '광주 혁명'을 일부 불순분자들의 사주에 놀아난 폭동이라고 폄하하였다. 지금도 찐 보수들은 이를 그대로 믿고 있다. 전두환 일당들은 자기들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댓가 즉 광주시민들의 무참한 학살도 전혀 주저하지 않는 후한 무치한 권력의 화신들이었다. 윤은 바로 권력의 화신 전두환 일당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악용한 무자비한 계엄령으로 5.18 민주화 운동을 불순분자 들의 폭동으로 몰아 무고한 광주시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피의 살육을 정당화한 군사 내란을 모방하려했던 것이 바로 금번 윤석열의 게엄령 발포의 단초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한강 작가가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한 '소년이 온다' 는 소설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것은 우리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대한민국의 엄청난 축복이자 경사임에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탐탁치 않게 여기는 찐 보수들은 이러한 경사를 되려 떨떠름 했다. 생각해 보니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 수상식에 스위스로 가는 그 날, 윤석열은 눈에 가시같은 정적들을 응징하고 국민들을 법치가 아닌 계엄정치로 독재자 박정희와 같은 영구집권을 도모하고자 한 밤중에 계엄령을 발포한 것이 아니냐 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계엄령은 우발적인 것이 아닌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이 야당에게 참패를 당하자 '총선이 부정선거 였다' 란 거짓 명분을 내세워 소위 선관위 의 투표함에까지 계엄군이 손을 대는 자충수를 획책한 것이다. 그럼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부정선거에서 예외였다는 것인가? 이런 아전인수가 어디 있는가? 또 엄연한 3권 분립의 체제에서 그 유례가 없는 대통령에게 부여된 막강한 권력도 윤석열은 성이 덜 차서 계엄령이라는 그런 어마무시한 발상으로 영구집권을 획책한 발상이 영락없는 '얼치기 전두환'이다. 전두환이 '국가 조절위원장'으로 있던 시절에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국가권력을 자기 맘대로 휘둘렀던 전두환 을 쏙 빼닮은 후안무치한 위인이다. 그는 이러한 일반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 일을 언제든지 저지르고도 남을 위험 인물인 것이다. 돌이켜 보면 굼벵이도 둥글 재주가 있다고 촛불집회를 앞세운 문재인은 최순실 장단에 놀아난 박근혜 대통령을 끌어 내리려고 어쩌면 만년 평 검사로 일생을 끝냈을 윤석렬을 앞세워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이후 문정권 때 에는 문재인은 없고 검찰총장 윤석열만 있었다. 함량미달의 문재인은 결국 윤석열에게 국가 권력을 고스란히 이양하는 양호우환의 우를 저질렀던 것이다.
절제와 정제 되지 못한 언행조차 손바닥 뒤집 듯한 윤석열은 지난 대선에서 국힘 당의 지지를 얻어 0.75%의 표차로 이재명을 이기고 대권을 거머쥐는 대이변을 만들었다. 집권 여당의 후보자를 누르고 대권을 거머 쥔 그가 언제부터 그런 무모한 '계엄'을 도모 했을까? 아마 대선에서 승리한 윤석열은 총선 패배 직후부터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듯 싶다. 여당인 국힘당이 총선에서 민주당에게 참패를 당하자 대선에서 승리한 승부욕이 강한 윤석열은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수가 없었고 그래서 북한을 주적으로 몰고 일본을 군사동맹국 으로 끌어 들인 꼼수가 바로 자신의 장기 집권의 포석으로 계엄령이란 자충수를 둔 것은 아닐까? 그가 그토록 은밀하게 도모했던 속내가 마침내 2024, 12, 3일 늦은 밤에 계엄령으로 발표된 것이다. 이번 구테타에 동원된 군사는 1500명 이라고 들린다. 이처럼 술에 취하듯 권력욕에 취한 그가 최우선적으로 장악하려 했던게 바로 국회였다. 국회가 계엄의 표적이 될수 없음에도 헬리콥터와 전차 그리고 완전무장한(실탄 9000발 소지) 군사 300명이 국회에 투입하여 전광석화처럼 일망타진 하려했는데 국회를 에워싼 성난 민중들 때문에 그의 음모가 좌절되고 말았다.
오랫동안 은밀하고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계엄'으로도 결국 실패한 윤석열은 얼마나 낙담이 컷을까? 보도에 의하면 그는 국회 접수가 실패로 끝나자 곧 바로 제2의 계엄을 획책하려했으나 이것이 여의치 않아 패닝에 빠져있던 그는 "나라의 모든 일을 총리와 여당에게 일임하겠다."고 대 국민 약속을 해놓고 며칠 후 권력의 화신처럼 마음을 바꾸어 국민과의 엄혹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던져 버렸다. 나라를 백척간두의 벼랑속으로 몰아 넣고도 나라의 안위보다 오직 자신의 영달에 도취 된 위인을 우리는 어리석게도 대통령이라면 무조건 믿었던 것이다. 그는 대국민 약속 번복의 제 일성으로 "국민과 함께 싸우겠다"고 했다. 그와 함께할 국민은 이 시점에서 누가 있을까? 아! 열렬한 태극기 극우가 있네요. 하지만 현재 그의 지지도는 아주 미미하다. 성난 민심을 헤아리지 못하고 불리하다 싶으면 팔색조처럼 그때마다 말을 바꾸어 태극기 부대나 극우파들의 유투버 소리에만 귀를 그의 나이가 몇일까? 육십은 넘었을까?육십의 나이를 이순(耳順: 듣는 귀가 順해진다.)이라고 한다. 그 어떤 비판의 소리도 다 소화 시킬수 있는 '열린 귀'를 말한다.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네 번째 '대국민담화'는 한마디로 비상계엄 선포에 대한 자기변명이었다. 윤석열은 이번 비상계엄 핵심을 선거관리 위원회의 해킹 방어의 취약과 야당의 감사원장 탄핵 등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정치적 판단이었다고 강조했다. 특히 윤석열은 담화 말미에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국민 여러분과 함께 싸우겠다"고 했다. 정치평론가들은 일제히 윤석열의 이 발언에 주목했다. 지난 7일 윤석열의 사실상 '첫 사과' 였던 첫번 째 대국민 담화 내용을 불과 닷새 만에 뒤집은 것이며, 현 계엄에 대한 탄핵 정국의 성난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자가당착에 빠져 어리석게도 극우파 소수의 지지층만을 믿고 있는 모습을 어리석음이라고 낙제점을 내렸다.
앞서 윤 대통령은 지난 7일 담화에서 "나의 임기를 포함해 앞으로의 국정 운영 방안은 '국민의힘 당'에 일임하겠다. 향후 국정 운영은 당과 정부가 함께 책임지고 해 나갈 것이다"고 대국민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이러한 엄중한 대국민 약속조차 자신의 이해 불리에 의해서 며칠 후 말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무릇 대통령의 자리는 자신을 버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나라를 백척간두의 위기로 몰아 넣고도 나라의 위기를 읽는 감각이 이렇게 무딘자가 독재정권을 회책하고 계엄령을 선포했으니 참 어이가 없다. 이것은 자기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격이다. 이에 대해 어느 정치 평론가는 "오늘 윤 대통령 담화에서 '마지막까지 국민과 함께 싸우겠다'고 하는데 그와 함께할 국민이 도대체 누굴까?"라고 했다. 그는 지난 12. 7일 대국민 담화에서 "법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나의 임기를 당에 일임하겠다"는 국민에 대한 약속이 핵심이었다면, 오늘 국민과 함께 싸우겠다 는 발언은, 앞서 국민과의 약속을 깨고 원점으로 돌아가 지지층을 결집하겠다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박창환 장안대 특임교수는 "불과 닷새 전에 "나의 임기를 우리당에 위임하겠다."던 대통령 자신의 발언을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라며 이는 결국 지지층 결집을 위한 꼼수라고 했다.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 성향을 떠나서 윤석열이 현 정국에 대한 국민들과의 일방적 思考의 괴리를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본인의 거취와 권한을 당에 위임하겠다"고 해놓고 지난 10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안건을 재가하는 대통령 권한을 행사했다는 것 또한 대국민 약속을 팔색조처럼 뒤집는 자가당착이다. 법제처에 따르면 이날 오후 윤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통과한 법률안 21건과 대통령령(시행령)안건을 재가했다. 이는 법리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방어하는 소위 법꾸라지 같은 모습을 보여준 단적인 예다. 마음 속에 권력의 야욕이 꿈틀대면 그것이 비수가 되어 찌른다. 마치 무쇠에 생긴 녹이 그 무쇠를 파먹듯이 말이다. 혀는 세치밖에 안 되지만 그 세치 혀로 고려 서희(徐熙)는 '거란' 침입의 국난에서 나라를 살리기도 하고 윤석열처럼 국난을 자초하기도 한다.
【종그니칼럼】노인문제
“노년(老年)은, ‘인생의 연약함을 일깨워 주는 최고의 스승이다"라는 어느 목회자의 삶으로 체득한 멧세지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므로 늙어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 늙어가면서 자연히 몸안에 질병도 들어와 같이 산다. 우리 요양원엔, 부정모혈(父情母血)의 가족들도 감당이 안되는,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독립이 어려운 노인, 아흔 한분을 모시고 있다. 내가 이러한 노인분들과 함께 살아 온지가 25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러나 아직도 '숙련된 케어자'가 아니라, 언제나 미숙한 '초보자'다. 이제 우리는 당면한 '출산률저하'라는 불가항력적인 시대의 흐름으로, 가정과 사회는 걷잡을수 없는 속도로 늙어 가고 있다. 그래서 해가 갈수록 늙은이가 늙은이를 케어하는 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젠 어딜가나 늙은이들 뿐이다. 자기 앞가림이라도 하는 늙은이는 괜찮지만, 홀로서기조차 어려운 이는, 어디에서나 인간의 존엄문제가 대두된다.
그러나 출산은 않하면서 노인은 싫어하여 가정과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려는 발상은, 마땅히 사라져야만 하겠지만, 나라의 장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이, 가정과 자녀에대한 선호도가 낮아져가고 있으니 문제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은, 되려 답을 더 어렵게 한다. 동남 아시아와는 달리, 우리사회는 급속도로 늙어가고 있다. 일본처럼 초고령사회의 꼭지점에 와 있는 것이다. 사람도 사십이 넘으면 새로 생성되는 세포보다, 소멸되는 세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어 가듯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도, 지금 급전직하로 초고령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노인들 서로가, 섬기고 돌보는 일에, 자기 자신을 내어 놓는 방법을 배우는 자세가 아주 시급하다.
흘러가는 세월과 함께 두발로 걷던 것이, 세발이 되고 네발이 되는 노년의 때에 들어서서, 나 또한 몸 뿐만아니라 맘도 같이 늙어, 무력함과 쓸쓸함이 함께 묻어나고 있다. 이제 늙어 인생의 석양을 바라보는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부르짖는다. "하나님이여! 이제 늙어 기운이 다한 지금의 나를 버리지 마시옵소서!"(시편 71장 9절.) 주님에게 간청할 수밖에 없는 노인이 된 시편 기자는, 이 늙어가는 과정이, 때로는 노인들을 삼켜버리는, 버림과, 기만과, 배신과, 주림이라는 시련이 될수 있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고백한다. 우리는 냉엄한 사회에서 이러한 비겁함을 익히 알고 있다.
쓸모가 다하면 버리는 소비문화 사회, 이렇게 버리는 문화에서 노인들은 소외되고, 그로 인해 버림받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노인의 나이를 이용하여 그들을 속이고, 무수한 방법으로 그들을 위협하는 사례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심신이 미약하거나,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들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노인들을 속이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고 있다. 도대체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되거나, 그 누구로부터도 어떠한 보살핌도 받을수 없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노인들도 헤아릴수 없이 많다. 갖가지 형태로 무시당하고 상처를 입으면서, 가족이나 이해당사자들로부터, 재산권 포기의 위협을 받는 노인들도 많다. 이러한 재산권 박탈 또는 신체적 정신적 학대가, 가정은 물론이고 사회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요양원에 입소한 노인들은, 대개 성격장애라든지 치매등으로 홀로서기가 어려워지게 되면, 가정에서 '없어서는 안될 자리'에서, 졸지에 가족들로부터 '짐덩어리' 혹은 '애물단지'로, 입지가 완전히 바뀌는 처지에 놓이게 되어, 한 순간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늙은이들은 실존의 후미진 모퉁이에 버려지고 있다. 이러한 비정한 일들이 오늘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일상처럼 일어나고 있다. 이제는 사회 전체가 지킴이가되어, 눈을 크게 열고 노인을 돌봐야 한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어 보면, 누구나 다 늙어가는데, 노인 없는 사회가 어떻게 있을수 있겠는가! 생명없는 금은보화와 돈이, 시대를 초월하여 그 희소성 때문에, 인간들을 가정에서 사회에서 거리로 몰아내고 있다. 돈이 황금만능의 사회에서 지존자로 사랑받고 있는 반면, 일 할수 있는 날 동안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자리매김되던 부모가, 건강을 잃는 한 순간에 가정에서 사회에서 소외되어, 마치 똥친 막대기같은 천덕꾸리가 되어가고 있다.
무위(無爲), 가난, 고독, 질병, 이를 말년 인생의 사고(四苦)라 한다. 자율성, 안전, 심지어 주거지까지 박탈당한 노인들에 대해, 서글픈 소식을 들을 때마다, 노인을 바라보는 양면적인 사회에서, 가끔씩 일어나는 노인들의 '독고사 문제'에 다다르게 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병들게 하는, ‘이러한 노인들의 홀대 풍조와, 물신주의와 개인주의가 가져온, 아니 어찌보면 물질중심으로 오염된 오늘의 인간사회는, 점차 적자생존의 본능으로 정글화 되어 가고 있다.
노년에 이른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께 자신의 절망을 고백한다. “나의 원수들이 나를 헐뜯고 내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서로 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저를 버리셨은즉 구해 줄 사람이 없다 하나이다.”(시편71,10-11) 이처럼 노년의 존엄은 점차 땅바닥으로 떨어져 간다. 심지어 "이제 늙어 정신 줄을 놓아 버렸으니, 늙은 나에게 과연 누가 나의 의지가 되어줄까?" 하는 체념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늙고 연약해져서, 모든 것들에 대하여 너무도 쉽게 체념해 버린다. 그리고는 늙음으로 일어나는 심신의 연약을 감추고자 하는, 불안한 마음이 늘상 깔려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존엄을 실추시키는 조짐이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이러한 감정이 드는 것이 과연 인간적인 것인가? 이토록 선진화되고 효율적인 현대 문명이, 왜 이토록 질병과 늙음을 불편하게 여기고 숨막히는 것일까?
존엄한 존재의 한계를 규정하는데, 왜 병든 노인과의 다정한 공존의 존엄성에서는, 이 사회가 왜 이토록 인색하고 무감각한 것일까? 오늘 시편 기자는, 자신의 늙음을 자연의 순리로 여겼었기에 ‘하나님을 향하여 무하한 신뢰’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 선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시편을 해설하면서, 노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노년에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라. 주님께서 여러분을 버리실까, 노년에 기력이 다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실까 두려워 하지 마시라! 진실로 여러분이 기운을 다하는 바로 그때, 여러분 안에 주님의 능력이 있음을 알라." 그래서 시편 저자는 이렇게 외친다. “주님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주님은 언제나 나의 피할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산성이심이니이다." 시편71,2~3)
이 기도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어서 나를 도우소서. 나를 적대하는 자들이 부끄러워하며 사라지게 하소서. 나의 불행을 꾀하는 자들이 모욕과 수치를 당하게 하소서”(시편 71,12-13). 늙어 홀로서기가 어려운 연약한 이들을 이용하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해야 한다. 노인들은 나약하기 때문에 차세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우리 모두 자신을 주님께 내어 맡기고 그분의 도움을 청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는 노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렇다. 노년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에, 자기 자신을 내어 놓는 은사가 있어야 한다.
나의 연약함을 숨기지 마시라! 연약함은 현실이요 당연한 것이다. 늙음을 숨기지 말고, 늙음의 연약함 또한 숨기지 마시라! 이는 우리 모두를 위한 가르침이고,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새로운 '문명의 개혁을 위한 지평'을 열어준다. '노인의 소외'는 그것이 개념이든 실제이든, 노인 뿐만 아니라 인생의 모든 계절을 부패하게 만든다. 오늘 우리는 우리 가족 중에 계시는 노인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나는 그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가? 나는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나는 그들을 자주 살피고 있는가? 나는 그들을 존중하는가?" 내 가족이나 내가 섬기고 있는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을,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려 하지는 않는가? 여러분도 늙는다는 걸 기억하시라. 노년은 예외없이 누구에게나 찾아 온다. 여러분이 노후에 대접받고 싶은 것처럼, 오늘 노인을 대접하시라.
때 저물어 날 어두우니, 내 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
내 친구도 날 위로 못할때, 내 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
이 육신 쇠약해 눈을 감을때, 생명의 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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