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 임진왜란의 재조명.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특유의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 세상에 태어난다는게 참 놀랍다.  흔히 사람들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고 말하지만 그렇치 않다. 대 우주안에 모든 생물들의 놀이터를 마련하신 하나님이 하신 일들이 은혜롭지 않은 것이 뭐가 있을까? 동시대를 함께 살아 가고 있는 모든 삼라 만상들이 저절로 자연히 생겨난 것 같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저절로란 없다'. 이 세상 모든 만물들이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섭리에 의해 생성 명멸되는 것이지 자연히 스스로 우연이란 없기 때문이다. 이 땅의 삼라 만상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우주를 보라!  얼마나 신비로운가!  모든 것이 서로 엉켜있는듯 하지만 서로 하나로 맞물려 있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질서 정연하다. 그 누가 이 대우주를 설계했을까? 

어느 분야에서 한 평생 외 길을 걸어 온 사람을 가리켜 그 분야의 '달인'이라고 일컫는다.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천부적 자질이 있다. 그래서 이를 두고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도 한다. 분명한 것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자신이 타고난 자질대로 그 분야에 맘이 땡겨 몸에 익다 보면 그 분야에서 제일인자가 되기도 한다. 어찌 보면 세상에서 그 분야의 일인자로 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 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즉 '사는 가치' '사는 보람' '사는 맛이 있느냐' 다. 나는 죽는 날까지 내게 주어진 모든 삶의 희노애락을 맛보며 살고 싶다. 그러기에 살면서 중요한 말은 "Here & Now" 다. ​나는 이제 살 만큼 살았다. 살아 온 날 들을 되돌아 보면 내게도 까마득한 열아홉 젊은 나이가 있었다. 그때 청운의 꿈을 안고 처녀림같은 서울에 첫 발을 내 디뎠을 때를 나는 잊을수가 없다. 서울역에서 청구동을 오는데 택시 비가 3000원 그러니까 이를 지금 돈으로 계산 하면 쌀 한가마 값이다. 시골 촌놈 값을 톡톡히 치른 셈이다.   

지금도  눈 감으면 어제 일 같은데 어느 덧 젊은 날은 가고 팔십이 되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아마 나이 먹는 일 일게다. 나의 초등학교 은사이신 박찬원 대부님이 공부하고 싶어하는 내게 "올라 오라" 하셔서 아무 대책도 없이 서울로 온 나를 두고 얼마나 속앓이를 하셨을까! 그러나 청운의 꿈을 펴기도  전에 모진 세파와 함께 젊은 날의 꿈들이 모두 산산조각 나버리고 내 몸둥이마저 자살 후유증으로 수년동안 병마에 시달려 내 나이 서른 넷이 되기까지 천금같은 젊은 날들을 세월을 죽이며 방황하다가, 1980년 4월 20일 나는 무슨 일로 사람을 만나려고 잰 걸음으로 정신없이 가던 중에 주일을 알리는 종소리에 교회로 빨려들 듯 들어간 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이렇게 서른 셋에  주의 종으로 부름을 받고 이제 은퇴 했지만 큰 허물없이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온 것을 다함없는 은혜로 여기고 있다.  어찌보면 주의 종으로 사는 삶과 사회인으로 사는 삶이 딱히 다를 것이 없다. 사회인으로 살면서 그 삶을 나 아닌 섬김에 두면 그게 바로 종된 삶이기 때문이다. 부산 영도 교회를 끝으로 목회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 결정적 동기는 내 몸이 아직 젊었을 때에 '의지할 곳 없는 어른'을 섬기는 일'에 혼신을 다하고 싶어서 였다. 

격랑의 시기였던 1980년대를 지나 1990년대에는 나라가 안정되고 살만하게 되었음에도 노인들에 대한 복지제도가 소걸음이어서 오갈 곳 없는 노인들마저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지낼수 있는 무의탁양로원이 전무한 상태였다. 나는 자비량으로 무의탁 양로원을 마련하여 내 인생 후반을 불태우고자 하는 맘이 불일듯 일어나 내겐 전혀 생소한 가평군 설악면을 찾았다. 설악면이 지금은 양양고속도로 등이 관통하여 사통 팔달의 교통 중심지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아스콘이 아닌 자갈도로 였다. 그때 이곳은 가평 중에서 가장 외진 곳이라 땅 값도 4~5만원 정도면 살 줄 알았다. 그런데 후에 알고 보니 땅 값이 내 예상치보다 훨씬 더 비쌌다. 내게 급선무가 무의탁양로원을 지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땅을 마련할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머물 곳을 설악면으로 정하고 나니 이젠 살 집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월세 50만원으로 계산해서 600만원을 일시불로 주고 1년 살 집을  마련하고 보니 온 세상을 다 얻은 듯 하였다. 그리고 바로 자동차도 프라이드 중고를 샀다. 이렇게 1년 살 집과 온 산야를 누비고 다닐 차를 구입하고 나니 벌써 무의탁 양로원이 눈앞에 보여 세상을 다 얻은듯 싶었다. 지금이야 설악면 가는 길이 사통 팔달이지만 1990년대엔 청평 땜을 지나 가는 외길 뿐이었다. 

청평에서 설악면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솔고개'라는 고갯마루가 있는데 나는 이 곳에 콘테이너 박스 하나를 세우고 '중개사 사무실'을 차렸다. 그리고는 춘천 법원, 의정부 법원을 다니며 경매로 나온 땅에 대해 직접 현장 답사를 하며 땅을 보는 안목을 넓혔다. 이렇게 6개월 쯤 지났을까? 땅이 있는 현장을 열심히 다니다 보니 점차 땅을 보는 안목이 열리기 시작했다. 법원 경매과에 들어가서 집달리들이 헌장 답사를 해서 수집한 경매 부동산들을 하나 하나 섭렵하면서 내게 눈이 가는 물건 몇개를 추려서 내가 직접 현장을 답사를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현장 경험이었다. 이렇게 현장 경험을 축적하다 보니 차츰 부동산에 대한 눈이 열렸다. 부동산에 관한한 전문가로서의 안목을 넓혀야 양질의 땅을 매입하거나 소개할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실효성 있는 현장 경험을 축적하여 실전에 올인한 결과  부동산을 시작한지 불과 1년여만에 마침내 무의탁 양로원을 지을수 있는 터 1200평을 가평군 청평면 삼회리에 마련할수 있게 되었다. 내가 열심히 발품을 팔아 만든 것이지만 뛰고 날 듯이 기뻤다. 그러나 이 땅은 폭 2m정도의 농로만 있는 사실상 맹지였다. 그래서 이후 이것이 기도의 제목이 되었다. 차가 다니는 도로에서 현장까지는 약 800m정도의 만만찮은 거리였다. 그런데 내가 구입한 1200평 외의 주변 임야가 모두 한 사람의 소유였다. 약 5만평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도 길을 뚫어야 땅이 제 구실을 할수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조용히 그가 움직일 때를 기다렸다.  땅을 구입한지 3년이 지나자 마침내 길이 열렸다. 무의탁양로원을 '허락하신 이'가 하나님이셨기에 이처럼 때가 되니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왜 기도가 필요한가?  "주님!  언제까지 니이까?"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이 허락하시는 때를 기다리면 된다. 의사라고 자기 몸 관리를 잘하는 것이 아니 듯 아무리 몸 관리를 잘해도 세월과 함께 찾아오는 늙음과 병마를 피할수는 없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젊은 날 병마를 끼고 살아선지 갱년기를 맞았어도 몸이 아파 자리에 누워 본 적이 없다.  강원도와  경기도 땅 온 산야를 누비지 않은 곳이 없을만큼 눈을 감으면 그곳 온 산야가 그려질만큼 땅에 올인을 했다. 그렇게 바쁘게 살면서도 아침이면 떠 오르는 해를 볼 수 있었고 칠흙처럼 어두운 밤에도 밤 하늘에  총총한 별을 볼 수 있었다.  대자연의 숨결이 내가 지쳐 파김치가 되어있을 때에 나의 힘이 되었다 온 몸이 파김치처럼 피로에 쩌려있을 때 에도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다시 가슴 벅찬 새 아침의 열정을 담을 수 있었고, 머잖은 날 그 꿈이 이루어져서 인생 말년을 쓸쓸하게 맞이할 오갈곳 없는 노인들과 더불어 아픔을 같이 할수 있는 영혼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를 떠오르면 모든 시름들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이렇게 나는 밤낮 없이  부동산 중개에 올인을 해서 마침내 무의탁 양로원을 지을수 있는 돈이 마련되자 꿈꾸던 집 어르신들이 여생을 평안히 지낼수있는 '240평의 아담한 집'을 마침내 완공하였다. 빈손으로 만 4년만에 꿈을 이룬 것이다. 

이 꿈이 이루어진 것이 엇그제 같은데 어느 덧 25년의 세월이 흘러 지금은 춘천 '행복이 가득한 요양원' 에서 마지막 인생 열차를 탄 어르신 들을 섬기며 내 인생을 갈무리하고 있다. 나는 금년 여름 어느 날 부터 '발'에 힘이 점차 약해 지더니 며칠 후에는 두 발로 걷기조차 힘들어져 "아! 이제 갈 때가 되었는가 보다" 했었는데, 어라? 다행히 며칠이 지나자 다시 걸을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 건강했을 때 '걷는다는 것'이 당연한 때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게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걸을 수 있다는게 엄청난 축복이었다. 이제 비록 다리에 힘이 없어 간신히 산책은 하지만  다행히 아직 눈은 쓸만해서 아직 이 글을 쓸수 있고 또 요양원 5층 옥상에 올라 춘천 시가지를 다 볼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지금 계절로는 초겨울임에도 지구 온난화 로 가을이 길어져 단풍 잎이 산마다 붉게 물들어 있어 가을이 주는 감흥에 흠뻑 젖어 든다. 우리 요양원엔 걷지 못하는 이도 있고 치매로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이도 있다. 알고 보면 인생이란 바로 '여기(here)'와 지금 (now)' 이다. 아름다운 시간과 행복을 느낄수 있는 시간도 바로 '지금'이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오늘'을 이 어르신들과 함께 어울려 한 번이라도 더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지금'이 바로 남은 여생에서 내게 가장 큰 축복이요 즐거움이다. 살아보니까 그렇다. 우리 인간에게 물질이 주는 즐거움은 크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영혼 속에서 즐거움을 만드는 물질은 엔도르핀이다. 엔도르핀은 과거의 행복한 추억때문에 생기는게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무엇으로건 마음이 즐거워야 엔도르핀이 형성된다. 사람이 어떻게 늘 행복하기만 할수 있겠느냐 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얼른 벗어나야 한다. 어제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이 하루라도 더 살기를 원했던 그 소중한 시간인 오늘을 나는 지금 살고 있다. 혹 '지금' 비록 괴롭고 슬프다 해도 한 가닥 희망을 만들어 보자!  지금 내가 살아 있음에 즐겁고  또 그리운 이들을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하자! 지나간 세월을 참 구차하게  살았을지라도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 때가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오랜 세월 만고풍상을 격으며 살아 온 사람들이 '살아 온 날들'을 그렇게 이야기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몸서리치는 고난속에서도 오로지 살아 있는 자들에게만 누릴수 있는 짜릿한 희열의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사람들은 미래지향적이면서도 즐거웠던 추억이나 보람된 일이 있었던 과거의 회상에 젖어 그 추억으로 살기도 한다.    자신이 인고의 세월을 겪어 봐야 행복이 뭔 줄 알고,  인생을 살면서 '오늘' 바로 '현재' '지금' '당장'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돌이켜 보면 나는 가장 소중한 순간들을 잊고 살 때가 참 많았다. 예를 들어 하루 중에 나는 내 마누라와 함께한 시간이 얼마나 될까?  이런 일도 있다.  내가 춘천에 온지 십여년 세월동안 매주 주 첫날이 되면 우리 내외는 춘천지역 친구 목사들 가족 들과 회동을 해왔다. 매주마다 심승남 목사님 내외가 주중에 볼만한 곳을 답사해서 월요일이면 이병서목사님 가정과 우리 내외를 포함한 세 가정이 어우러져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런데 작년 어느 때 부턴가 심목사님 건강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6인용 차를 5인용 승용차로 바꾸면서, 내 처가 그동안 요양원 안팍 일로 동행이 어려울 때가 더러 있어 내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함께 가다 말다 한 내 처가 결국 소외 되고 나만 합류하다 보니 모두 곤혹스러울 때가 있었다. 이유는 "두 가정이 가는데 내가 홀로 가는 것이 내 아내와 모두에게 참 난감한 일이었다.  내 아내는 강단이 있어 보이지만 속은 매우 여리다.   그래 이젠  두 가정이 편히 다니게 두고 나는 이제 빠져야지 하고 있다.  이처럼 나에게 주어진 형편대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모든 것이 다 보인다. 행복으로 가는 답은 바로 '내 영혼 속'에 담겨 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내게 주어진 오늘을 감사하자! 이미 지나간 어제도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이 아닌 바로 '오늘' '지금' '현재'에 감사하며 행복하자! 

【종그니칼럼】 임진왜란의 재조명.

"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같은 대한 독립만세!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 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아!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바로 오늘이 1919년, 3월, 1일. 3.1절이다. 백년 하고도 만 3년이 되는 그 날이다. 그럼에도 내 귀엔 그 날의 그 함성이, 지금도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삼천리 강산이 소리쳐 울리는 듯하다! 한치앞을 볼수 없는 칠흙처럼 어두웠던 그 긴긴 세월! 나라 잃고 글도 잃고 언어도 잃고, 역사까지 민족의 혼까지 잃어버렸던 암울했던 그 세월!  아! 빼앗긴 들에도 정녕 봄은 온 것인가!

부산포에 왜적이 침입하자 이순신은, 1592년 5월 4일 함대를 이끌고 거제도로 향하고, 경상우수사 원균도  이순신 군대와 합류하여, 5월 7일 합동으로 거제도 옥포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을 공격했다. 이순신은 전투로 돌입하며 군사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강한 어조로 당부하기를, “함부로 움직여 우왕 좌왕하지 말라! 무겁기를 태산같이 하라! 단 한 번에 명중시켜라!” 이렇게 이순신과 원균의 합동 부대는, 당포에서 왜군을 물리쳤다. 이 최초의 전투가 바로, 조선 수군 최대의 승리를 거둔 '한산도 대첩'이다. 

이로부터 약 3개월이 지난 7월 8일이었다. 이순신은 물살이 빠른 곳에 정박해 있는 왜적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마치 학이 날개를 펼친 것 같은 형상으로 군함을 배치하고, 몰려오는 적을 대포로 공격 하여, 함선 66척을 모조리 침몰시켰다. 이 전술을 ‘학익진법’이라한다.
이때부터 이순신과 원균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선조는 '한산 대첩'의 공을 이순신 장군에게 돌려 전라도 · 경상도 · 충청도 수군을 모두 통제하는 '3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자, 원균이 이에 발끈하여 이순신이 하는 일에 어깃장을 놓기 시작했다. 조정에서도 이를 알고  원균을 충청도 육군을 총괄하는, 충청절도사로 발령을 냈다가, 얼마후 전라좌병사로 임명, 이순신과의 갈등을 줄이려 했지만, 그러나 이 앙금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두 사람 사이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배 열두 척을 남긴 자,  열두 척으로 맞선 자.
전쟁이 그치는가 싶자 원균의 앙심으로,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 할때에, 결국 이순신이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원균의 사주로 조정에서는 아예 이순신을 죽이려 들었다. 이를 토사구팽이라 하던가. 만약 이 당시 유성룡이 없었다면, 이순신은 모함을 받아 처형 되었을 것을, 다행히 이순신의 충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유성룡이, 조정에서 적극 구명운동을 하여, 처형 직전에 구제되었다.  이 사건으로 삼도 수군통제사는 원균이 차지했다. 하지만 원균은 이 막중한 위기에서 수군 최고 사령관으로서는 역량이 부족했다. 정유재란 첫 전투인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은 비록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왜군에게 돌이킬수 없은 참패를 당하여, 조선 함대가 겨우 열두 척만 남기고, 모두 박살 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그 자신도 전사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간신히 죽을 목숨이 살아나 백의종군하고 있었다. 하늘이 조선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원균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선조는, 멘붕 상태가 되었다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자기가 죽이려 했던 이 순신을 다시 발탁,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조선 수군에 남겨진 함선은 겨우 열두 척뿐이었다. 이를 선조에게 보고하니, 선조는 바다를 버리고 육지에서 왜군을 막으라고 했을때, 이순신은 임금에게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있어, 나아가 죽기로 싸운다면 능히 적을 이길 수 있나이다." 이순신은 겨우 남은 배 열두 척을 이끌고, 진도 울돌목(명량)으로 가서, 서해안으로 넘어가려는 왜군 함선 133척을 상대로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웠다.

이때 이순신은 장병들에게,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으니, 단 한 사람이라도 죽을 각오로 이 울돌목을 지킨다면, 일천척 함선이 몰려와도 두렵지않다! 무릇 살려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기를 한하고 싸우는 자는 살리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자는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윗 글은 '명량 해전'을 하루 앞두고 이순신이 눈물로 쓴 일기다. 필사적으로 싸울 것, 잔꾀 부리지 말 것을 강조하는 말 속에,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진도와 해남 사이에 있는 '울돌목'은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넘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으로, 물살이 워낙 험하여 배를 잘 부리는 자라도, 지나가기가 무척 힘든 곳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 장소를 최후 결전 장소로 선택하고, 죽기 살기로 싸워 6천여 명의 적을 전몰시킨, 세계 해전 역사상 전무후무한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바로 이 전투가 그 유명한 ‘명량 해전’이다. 이제 왜군은, 더 이상 이순신을 상대로 싸움을 벌일 생각을 하지 못했으며, 이후 왜적은 남해 해안가와 섬 지역에 거주하며, 방어에만 신경을  썼다. 임진왜란의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철수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자, 왜군은 철수를 시작했다. 조선에 침략군을 파병한 지 장장 7년여 만의 승리다. 왜적이 물러간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이순신은, 조선 땅을 쳐들어온 왜적을 모두 섬멸하고자, 노량에서 최후의 일전을 치렀다. 이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은, 적함에서 쏜 유탄에 맞아 임진란의 종전과 함께 숨을 거두었다.
 
그대는 대영제국의 넬슨 제독(1758~1805)을 아시는가? 그는 1793년 이래 프랑스 나폴레옹함대와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오른 손 오른 눈을 잃었다. 그리고 1805년 프랑스 이스파니아 연합함대와의 그 유명한 트라팔카해전에서 프랑스 연합함대를 궤멸시키고, 이후 영국은 모든 제해권을 모두 장악하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넬슨제독은 이 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어쩌면 이렇게 이순신의 죽음과 넬슨제독의 죽음은 닮은 꼴인가! 세계 해전사상 영원히 빛나는, 하늘이 낸 두 영웅의 진면목을 본다. 

*지난 날 일제가 조선을 병탄했듯이, 그리고 세계 2차대전의 주범이었듯이, 오늘, 제 2의 조선(朝鮮) 우크라이나를 병탄하려는, 무법자 러시아를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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