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사에서 최고의 맞수는 누구일까? 인조때의 최명길과 김상헌, 그리고 임진왜란 직전의 황윤길과 김성일, 숙종때의 송시열과 허목이 맞수였지 싶다. 선조때의 명장 이순신과 원균을 맞수로 대비시키는 이도 있으나, 나는 이 주장에 전혀 동의할수 없지만, 오늘 나는 이 두 인물을 대비시켜 살펴 보고자 한다. 이순신과 원균 두사람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원균은 경상우수사로 부임하여,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남해바다에서 함께 왜군을 물리치며, 국가 존망의 난국에 힘을 같이 하였지만, 두사람은 사활을 건 전투를 거듭하면서, 지략과 전술에서 이순신에 크게 미치지 못했던 원균은, 이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나라를 적침으로 부터 구하는데 서로 힘을 합하지 않고, 개인적 명리를 좇다가, 나라를 돌이킬수 없는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처럼 이순신(1545~1598)은, 원균(1540~ 1597)의 시샘으로, 억울한 모함을 무수히 받았지만, 이순신의 연전 연승이 거듭될수록, 전술과 지략 에서 이순신에 훨씬 미치지 못한 원균은, 자신의 모자람을 채워 하나로 뭉쳐야 할 엄중한 전쟁터에서, 되려 이순신을 계속 모함하다가, 결국 경상우수사 자리에서 밀려나면서도, 이를 자기 탓이 아닌 이순신 탓으로 변명하며, 사활을 걸고 이순신을 모함한 것이 주효하여, 재기에 성공하였다. 이게 바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로인하여 이순신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투옥되고, 원균은 이순신 후임으로 삼도 수군 통제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속지마시라! 한 두번은 사람을 속일수는 있어도, 하늘과 자기자신을 아주 속일수는 없다. 지금, 제 일, 제 이의 여야 대선 후보들은, 이순신은 없고 원균들만 있어서, 자신의 모자람을 살피기는 고사하고, 서로 상대방을 헐뜯고 비방하고 깍아내리며, 온갖 술수로 국민들을 우롱하는, 망국의 비방들을 토해내고 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원균은 이후 절치부심 이순신을 뛰어 넘고자 전투에 임하지만, 그릇이 달라 전략 전술에 있어서 이순신에 크게 미치지 못했던 그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틀어, 유일무이하게 왜의 수군에게 참패한 '칠천량전투'로, 조선은 삽시간에 백척간두 절대절명의 위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반면교사다.
이에 반하여 이순신은, 수군을 비롯 모든 것이 왜의 수군에 비해 비교할수 없을만큼 열세였음에도, 임진왜란에서 정유재란에 이르기까지, 왜적을 상대로 23번 싸워 23번 모두 승리한, 이순신의 전략 · 전술은, 가히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전무후무한 압권이었다. 이순신 그는 조선을 사랑하신 하나님이 보낸, ‘전쟁의 신'이었다. 이처럼 조선의 역사에서 ‘이순신과 원균’하면, 특히 원균에게 있어서는, 홀로 짝사랑한 필생의 라이벌이었다. 둘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와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조선 수군의 핵심인 전라도와 경상도 수군을 나란히 지휘했다.
수군절도사란 오늘날의 해군 사령관이다. 전라도와 경상도는 조선 8도 중, 왜적이 쳐들어오는 남해 길목에 있었기에, 특별히 좌와 우로 나누어, 이곳에 수영(水營)기지를 두 개씩 두었던 것이다. 경상도는 부산(경상 좌수영)과 거제도(경상 우수영, 후에 충무시로 옮김)에,전라도는 여수(전라좌수영)와 해남(전라우수영)에 영이 있었고, 이곳을 책임진 관리가 수군절도사였다. 원균은 이때 이순신과 함께할 때 '승리'가 있었다.
이처럼 오늘을 사는 당신은 '하늘의 수'인 '신(神)의 한 수(뜻)'를 아시는가? 인간은 더불어사는 존재다. 개인도 사회와 국가도 함께 상생의 길을 걸을 때, '함께 사는 길'이 열리게 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할 무렵, 전라 좌수사는 이순신, 경상 우수사는 원균이었는데, 둘은 일본군 20만여명이 부산포로 쳐들어 오자, 전쟁초에는 서로 협력하여, 왜군의 전라도해상 진입을 막았다. 그런데 전투가 여러 차례 진행되면서, 원균의 열등감이 질투로 발작하기 시작하자, 둘 사이는 얼음골처럼 냉냉해져, 종국에는 돌이킬수 없는 국가 위난을 자초하게된다.
이순신은 154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기보다 세 살 위인 유성룡 등과 의기투합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기록에 의하면, 이순신은 어릴 적부터 무장으로서의 자질이 출중했다. 이순신은 말타기와 활쏘기에도 능해, 당시에 같이 놀던 사람들 중에,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는 기록이 전하는 걸로 보아, 젊은 시절부터 무예 솜씨가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여러분은 여기서 섬광처럼 떠오르는 것이 없는가? 하늘이 '제 일차 중일전쟁'을 대비하여 조선에 이순신을 보내셨던 것이다. 그가 무과에 합격한 것은 32세 때인 1576년으로, 이후 주로 북방에서 여진족을 상대로 군대 생활을 했다. 그는 천성이 강직하여, 상관에게 직언을 하다가 미움을 받아, 승진에서 밀려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런 그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발탁된 것은, 유성룡이, 그를 선조에게 적극 추천했기 때문이지만, 이는 바로 임진왜란을 대비하여, 하늘이 이순신을 이땅에 보내시고, 왜란 1년 전 바로 1591년에, 하늘이 이순신을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로 세우신 것이다. 이순신보다 다섯 살 위인 원균은, 경기도 평택 무인(武人)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무과에 합격하여,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우며, 젊은 시절부터 무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여진족이 그의 이름만 듣고도 공격을 멈추었다고 하니, 원균 또한 매우 용감한 장수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인화력이 부족하여, 주변 사람과 불화가 잦아 평판이 좋지 못했다. 그는 임진왜란 발발 두 달 전인 1592년에 경상 우수사가 되었다.
원균과 때를 같이하여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치밀하게 군사를 조련하여 왜적의 침입에 혼신을 다하여 대비하였다. 마침내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의 명을 받은 왜군이, 1592년 4월 14일 오후에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당시 조선은 명(明)의 제후국이었으므로, 세계사는 이 전란을 '제일차 중일전쟁'이라 부르고, 조선말 고종때 조선에서 청(淸)과 일본과의 전쟁을, '제2차 중일전쟁'이라 부른다. 이는 약소민족이 받아야 하는 오욕이다.)
이후 조선은 1598년까지 무려 7년여 동안,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 · 명 · 일본은, 서로 물고 물리는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왜군의 기본 전략은 '수륙병진 작전' 이었다. 이 작전은 왜의 육군이 부산포로 상륙하여, 충청도를 거쳐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신속히 점령한 후에, 계속 북상해 가면서 수군은 남해안에서 서해로 진입하여, 조선의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육군과 함께 합동으로 점령하는 전략이었다. 그러면서 호남에서 양곡을 약탈하여, 한강 · 대동강 · 압록강 같은 물줄기를 오르내리며, 북상하는 육군의 군량미를 조달하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 전략은 성공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남해에서 일본 수군을 연달아 물리치며, 왜군의 서해 진출을 처음부터 봉쇄하였기 때문이다.
종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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