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3월 19일 회갑연 감사예배
◆ 교회 지도자의 균형감각
◆ 우리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고 예수파다
◆탐화봉접(아2:1-2, 고후2:14-15)
2022년 3월 19일 회갑연 감사예배
오늘 저의 60년 생일, 사회적 용어로 표현하면 회갑기념 감사예배를 준비해 주시고 또 함께해 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 예배를 드릴까 말까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어제라도 당장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이미 준비를 다 해놔 버렸고, 포기하면 더 혼선이 빚어진다는 장로님들의 의견이 더 많았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엄밀하게 저의 태어난 나이로 말하면 작년이 회갑이었습니다. 그런데 작년은 코로나 상황 때문에 하지 못하고 호적 나이로 올해 하게 된 것입니다. 호적이 더 중요하다고 하더라고요. 올해 간단하게 이런 예배를 못 드리면 내년에는 정말 못 드린다고 하셔서 이렇게 간략한 예배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오늘 이건 잔치라기보다 감사예배니까요, 그렇게 아시면 좋겠습니다.
‘탐화봉접’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벌과 나비는 꽃을 찾아다닌다는 사자성어죠.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파리가 모여들게 하려면 집안에 있는 쓰레기통에 썩은 것들을 잔뜩 두면 된다고 말이에요. 그러나 벌과 나비를 끌어들이려면 마당에다가 온통 꽃밭을 만들어 놓으면 돼요. 그러면 벌과 나비가 어디선가 몰려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부족하지만 벌과 나비 같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결코 어느 한순간이라도 똥파리 같은 삶을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꽃을 찾아다니는 벌과 나비도 차이점이 있습니다. 벌은 꽃을 향하여 곧바로 날아갑니다. 가능하면 가능할수록 최단거리의 일직선을 택합니다.
그러나 나비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비는 곧장 꽃을 향해서 나는 법이 없습니다. 나비는 위아래로 혹은 좌우로 변화무쌍한 곡선을 그리며 춤을 추면서 날아갑니다. 저는 지금까지 꽃을 찾아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꽃은 어떤 꽃인 줄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샤론의 꽃을 찾아다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성도라는 꽃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왜냐면 샤론의 꽃이신 예수님의 향기가 넘쳐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벌처럼 찾아다닌다는 것은 저의 사역의 외적 스타일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지요. 제가 한 번 이거다 싶으면 벌처럼 날아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방향은 언제나 세상이 아니라 성도들을 향해서, 사명과 사역의 현장을 향하여 날아가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저는 일직선의 날갯짓이 아니라 나비의 아름다운 몸짓으로 춤을 추며 주님을 향해 날아가고 춤을 추며 성도들을 향해 날아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역을 하면서 나비처럼 꿈 없이 잠든 적이 없고 꿈 없이 일어난 적이 없어요.
나비처럼 언제나 아름다운 날갯짓을 하며 꿈을 꾸고 춤을 추며 사역을 해 왔어요. 그럴 때 깨달은 것이 있어요. 봄이 와서 꽃이 핀 것이 아니라 꽃송이 하나로 봄이 온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런데 그 꽃송이 하나를 누가 피우느냐, 꿈꾸는 나비가 꽃 한 송이를 피워낸다는 사실이에요. 언젠가 제가 쓴 책이 하나 있었죠. ‘꽃을 피우는 건 꿈꾸는 나비’라고요.
앞으로도 저는 벌처럼 일직선으로 꽃을 향해 찾아다닐 겁니다. 벌은 꽃을 찾아다니며 꽃가루를 옮기고 꽃술에서 꿀을 따다가 꿀을 만들어내지 않습니까? 저는 남은 여생을 벌처럼 꾸준히 노동하고 사역을 하여서 말씀의 꿀단지에 꿀을 채우고 꿀 같은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비처럼 우아한 날갯짓을 하며 춤을 추고 꿈을 꾸며 꽃과 꽃 사이를 오가며 또 다른 꽃을 피울 것입니다. 아니, 나비의 그 날갯짓으로 한 송이의 꽃을 피우게 하고 그 한 송이의 꽃은 온통 들녘에 봄이 오게 하는 나비 효과를 이루는 삶을 살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벌과 나비처럼 꽃에 중독되어 살아갈 것입니다. 주님 자신에게 중독이 되고 주님의 향기에 중독이 되고 성도들에게 중독이 되어 벌이 꿀을 만들 듯 꿀 같은 말씀을 전하고 나비의 거대한 향기의 파문을 일으키는 삶을 살겠습니다. 앞으로도 저와 함께 해주시고 저의 사역에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다시 한번 영광을 돌리며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소강석】 투지와 절제가 조화를 이루는 지혜(3월5일)
원래는 지난주에 제주도에 가서 쉬려는 계획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월요일에 총회 선관위 워크숍이 있고 저녁에는 오산리기도원에서 집회를 인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오전에 비행기로 제주도로 가서 목요일 저녁에 크루즈로 인천으로 오려고 했습니다. 사실은 오산리 집회만 아니었으면 월요일에 크루즈로 갔다가 목요일에 크루즈로 오는 것이 계획이었는데요, 월요일에 종일토록 총회 선관위 워크숍을 인도하고 저녁에 오산리 집회를 인도한 후, 돌아오는 길에 이어령 전 장관님의 조문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날 무리를 해서 그런지 이상하게 몸이 으슬으슬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오니까 식은땀도 나고 몸살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이거 혹시 오미크론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자가진단키트를 해 보았더니 음성으로 나온 것입니다. 다음날, 선 목사님에게 “산이나 갈까?”라고 물었더니 가자는 것입니다. “몸살 기운이 있으시면 쉬시죠” 했으면 쉬었을 텐데 가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시간이 좀 여유가 있어서 교회 뒷산인 한성산이 아니라 불곡산으로 간 것입니다.
산을 오르는데 땀이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땀을 닦으면서 올라갔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쉬는 게 훨씬 더 좋았던 것 같은데, 그래도 산이 좋아서 올라갔습니다. 몸살 기운이 오는데도 산에 올라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기 때문이고 등반가 엄홍길 씨의 말마따나 산이 허락했기 때문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몸이 좀 부대끼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땀을 비 오듯 쏟으며 올라갔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와의 싸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불곡산 중턱까지만 갔다 오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무르면 저와의 싸움에서 스스로 포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숨이 차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가고자하는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목적을 달성했다는 보람과 무언가를 해냈다고 하는 성취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은 수요일인데 오전에 온몸이 땅 속으로 들어가는 듯했습니다. 정신력으로 이기고 수요오전예배를 인도했습니다. 그리고나서 드디어 꿈나라로 가 버렸습니다. 일어나니까 저녁 9시 반이었습니다. 제 평생에 이런 적은 없었습니다. 그만큼 저는 무리하게 살고 고단한 삶을 연속해 왔다는 증거죠. 제가 워낙 곤히 자고 있으니까 비서실에서 저를 깨우지도 않고 오전에 했던 설교를 영상으로 방영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서실 직원들에게 “이 사람들아 왜 나를 깨우지 안 깨웠느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너무 곤하게 주무셔서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수면제도 안 먹었는데 이렇게 깊은 잠을 잔 것입니다. 아마 화요일에 등산을 했기 때문에 수요일 오후에 깊은 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날 수요저녁예배에 나가지 못한 것을 생각하니 너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비서실 직원들에게 “이놈, 저놈”하면서 “왜 나를 깨우지 않았냐”고 했습니다. 그렇게 나무랐던 모습도 일종의 저의 투지였을 것입니다. 투지가 없었으면 산에도 안 올라갔을 것이고 엄살이나 부리며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누워 있었겠지요. 그러나 저는 몸살 중에도 산행을 하였고 계획된 일정을 소화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월요일에 하루종일 선관위 워크숍을 하고 오산리에서 너무 진을 뺐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산리기도원에 가서 그렇게 진을 빼며 말씀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거기 모인 목사님들이 엄청나게 은혜를 받고 말씀에 꼬꾸라지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깨달은 것은, 투지도 중요하지만 절제도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제가 그날 임계점을 넘을 정도로 체력을 소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또 하나 깨달은 것은, 투지와 절제가 조화를 이루는 지혜도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지도자의 균형감각
지난 주일 8월3일 새에덴교회 3부예배에 박지원 신임 국정원장이 참석했다. 그리고 광고 시간에 잠깐 단상에 올라와서 인사하고 내려갔다. 필자는 온라인 중계 영상으로 이를 지켜보았다.
이 날 설교 후에 소강석 목사가 박원장이 참석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면서 존경한다며 그를 소개했다. 지난 7월 저녁예배 시에 박원장의 특강이 예정되었는데, 갑자기 국정원장에 임명되고나니, 청문회를 마치고 정식으로 취임 후에 예배에 참석하겠다고 일정을 변경하였다. 그래서 이날 박원장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새에덴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소목사는 개인적으로 박원장을 존경하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이유를 3가지 언급했다. 첫째로 그는 자신의 주군(主君)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바칠 위대한 충신 중에 충신이라고 했다. 주군을 위해서 감옥도 갔던 면에서 인간적으로 아주 매력을 느끼고 존경한다고 했다.
두 번째로 박원장은 정치적으로 진보적인데도 불구하고 국가안보에 있어서 만큼은 한미관계를 매우 중요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한미공조 가운데 남북관계를 펼쳐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소목사의 신념과 안보관에도 일치한다고 했다.
세 번째로 박원장이 국회 법사위에서 헌법재판관과 대법관 청문회 때 매번 반동성애적 입장에서 앞으로 절대로 동성애를 조장하지 말라고 일침을 가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또 몇 년 전에는 종교인과세 문제를 잘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소목사는 이런 면에서 한국교회가 박지원 원장에게 어느 정도 빚을 졌다고 했다.
진보진영에 있어도 한국교회를 대변해주고,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박원장을 박수쳐주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또 앞으로도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한미관계, 남북관계를 합리적으로 잘 풀어갈 거라고 믿는다고 했다.
그런데 이를두고 전광훈씨를 추종하는 인사가 쌍욕을 하며 비난하는 영상이 돌아다닌다. 모욕죄로 처벌받을 수 있는 짓거리다. 목사에게 좌파우파가 어디있는가? 오직 예수파가 있을 뿐이다. 좌파우파 보수진보는 정치인들이 만든 프래임이다. 이걸 교회나 목사들에게 적용하여 좌파니 우파니 하는 것은 정치를 빙자한 양아치들의 망동이다. 교회 내부를 향한 총질을 해대는 좀비같은 인생들이 그들이 정작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작태를 벌이고 있다. 과연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지 의심스럽다.
전광훈씨가 정치해서 기독당이 한 석이라도 국회진출했는가? 오히려 야당을 분열시켜 거대여당을 만들어준 일등공신이 전광훈씨 아닌가? 어찌 감히 그런 자들이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에게 쌍욕을 하는 추태를 보이는가? 직통계시 운운하는 이단적 언행으로 혹세무민하는 그들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가? 다행스럽게도 지난 8월 10일 전광훈 목사가 소강석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와 사과하면서 자신은 전혀 몰랐다. 조나단의 동영상을 즉시 내리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조나단을 엄히 꾸짖었다. 또 이에 대한 사과영상이 나갈 것이라고 했다니 병주고 약주는 꼴이다.
대통령조찬기도회나 지자체장과의 면담, 심지어 관할 경찰서장과의 만남의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지금깥이 교회가 급속하게 퇴락하는 시기에 연착륙할 수 있도록 애쓰는 지도자 그리고 5년 이나 10년 후에는 다시 부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려는 지도자를 한국의 목사 성도들은 기도 성원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박원장은 의원시절 목포의 목사님들과 쉼 없이 소통하고 서로 격려해 왔다고 한다. 그래서 전국으로 TV 중계되는 청문회에서 목포 목사님들이 반동성애를 주문을 하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목사는 특히 교회지도자는 균형감각이 있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예배에 참석한다면 그를 쫓아낼 것인가?
한국의 사도바울 오방 최흥종 목사는 해방후 여운형ㆍ이승만ㆍ김구 선생이 찾아와서 함께 정치하자고 애걸복걸 했지만 목사가 무슨 정치냐고 거절했다. 특히 김구 선생이 일주일 간이나 광주에 머물면서 같이 정치하자고 눈물로 호소했던 일화가 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자 최흥종 목사는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했고, 미국 대통령 캐네디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하룻동안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목사는 자고로 정치는 안해도 정치인을 인간적으로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다. 예수파는 사랑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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