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빙크는 『개혁교의학 1권』(박태현 역, 부흥과개혁사) 5장 “교의학의 역사와 문헌” 54항부터 “개혁파 교의학”을 제시한다. 앞 부분에서는 루터파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바빙크 박사는 1536년 『기독교강요 초판』을 개혁파의 기원점으로 제시한다(1권 249쪽). 개혁파는 스코틀랜드 계열, 독일 하이델베르크, 네덜란드로 제시하였다.

“칼빈주의는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도 수용되었다. 거기서 칼빈주의는 로마교와 충돌했을 뿐만 아니라, 위로부터 헨리8세와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 수행된 개혁과 갈등을 빚었다”(1권 251쪽). 잉글랜드는 대륙의 쯔빙글리, 불링거, 버미글리의 사상을 수용하였다. 그것은 토마스 크랜머가 에드워드 6세 때에 초빙한 학자들이다. 거기에는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도 포함되어 있다. 메리 튜터 여왕(피의 메리) 시절에 잉글랜드에서 대륙으로 피신하였던 사역자들이 엘리자베스 통치에 귀환하였지만 개혁은 진전되지 않았다. 개혁을 추구하는 사역자들이 추구한 한 개혁의 모습은 의복 논쟁(the Vestarian Controversy, 혹은 vestments controversy, 1564년)이었다. 바빙크 박사는 청교도와 성공회의 교리가 일치했다고 제시했다(1권 251쪽). 잉글랜드가 칼빈주의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은 각 대학에서 『기독교강요』가 강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잉글랜드는 칼빈의 예정론에 집중된 경향이 있었다(단호한 칼빈주의).

개혁을 추구하려는 청교도주의자들은 예정론을 견지하였고, 고교회적인 사역자들은 펠라기우스적인 정서가 강했다(1권, 252쪽). 스코틀랜드에서는 1560년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가 채택되었고, 1581년 제임스 6세가 성년이 되자, 1560년에 채택한 신앙고백서 지지를 선언하는 왕의 언약(King's Covenant)에 서명했다.

“영국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영국 국교도와 마찬가지로 비국교도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와 나란히 프랑스에서 아미랄두스주의(소뮈르 학파, 4 point)가 영국에 전달되었다. en 조류는 종종 함께했고 중대하고도 오랜 논쟁을 불러일으킨 신율법주의 이론에서 연합했다. 신율법주의의 추종자들은 칭의의 근거를 신앙에 두었다”(1권 257-258쪽). 바빙크가 제시한 학자들은 존 굳윈, 리차드 백스터, 다니엘 윌리암스, 베자민 우드브릿지 등이다.

“이에 대항한 다른 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반율법주의자들이라고 잘못 호칭되었는데, 사실 그들은 반신율법주의자들(anti-neonomianen)이라 불려야 한다. 그들은 칭의의 근거를 오로지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에 둔다”(1권 258쪽).

“스코틀랜드의 교리적 상황은 상대적으로 더욱 풍부하고 왕성했다. 칼빈주의는 여기서 적절한 토양을 만나 강력하고 적극적인 정신으로 계속하여 발전했다”(1권 259쪽). 글래스고우 대학, 세인드 앤드류 대학 등을 중심으로 로버트 롤록(Robert Rollock, 1555-1599), 데이비드 캘리우드, 사무엘 러더포드, 조지 킬레스피 등이 활동했다. 바빙크는 이들에서 도르트 신조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정점으로 평가하였다(1권 260쪽).

“영국에서는 비국교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 장로교파는 웨스트민스터 총회 이후 수적으로나 영향력에 있어서 줄어들고, 독립주의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독립주의는 이미 16세기에 로버트 브라운, 프란시스 존슨, 헨리 아인스워드, 존 로빈스에 의해서 신봉되었고, 시민 전쟁 중 그 세력과 명성이 증가했다.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장로교파는 여전히 다수를 차지했고, 독립파는 단지 소수의 투표권을 가졌을 뿐이었다. 토마스 굳윈, 필립 나이, 예레미야스 버러우, 윌리암 브릿지, 윌리암 카터, 시드락 심슨, 조셉 카릴 등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1658년 10월 12일에 런던의 한 모임에서 백 개 이상의 독립교회의 대표자들이 참석했다. 거기서 사보이 선언이 채택되고, 요하네스 호오른베이크가 그것을 1659년 라틴어로 번역하여 자신의 독립주의에 관한 두아레우스에게 보내는 서신의 뒷면에 인쇄했다. 그들의 가장 저명한 신학자는 존 오웬 박사였는데, 그의 작품들은 1826년에 런던에서 전 21권으로 출판되었다”(1권 265-266쪽).

“1750년 경에 개혁파 신학은 사방에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콕케이우스가 승리를 거둔 뒤, 관용자들의 기간이 찾아왔다. 진리의 능력은 부인되고 사람들은 교회의 신앙 고백에서 성경으로 후퇴하여 독특한 개혁파 교리들, 즉 원죄, 행위언약, 제한속죄 등과 같은 것들을 포기했다”(1권 268쪽).

18세기 스코틀랜드 신학자들 가운데 유명한 자들은 토마스 보스톤이다. 1717년에 발생한 매로우 논쟁(marrow controversy)은 독립파의 에드워드 피셔의 [현대 신학의 정수]에 의해 발단되었다. 잉글랜드에서 있었던 신율법주의 투쟁이 스코틀랜드에서도 발생되었다. 총회는 매로우파를 반율법주의자로, 보스톤은 총회를 신율법주의로 규정하며 분리하였다.

개혁된 교회가 대적하는 사상은 재세례파, 알미니안, 소시니안(유니테리언), 로마 카톨릭주의이다. 그런데 개혁파 진영 안에서 신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로 규정하면서 분쟁할 때에는 토론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반대함(논박함)으로 자기 신학을 지킨 경우는 없다. 네덜란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에서도 그러했고, 미국에서도 그러했다. 그런데 대한민국 신학계에서도 여전히 반박하는 것으로 신학을 구성하려고 한다. 반박은 상대방을 명확하게 아는 것 같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다. 칼빈은 간결하고 명료한(Brevitas et Facilitas) 글쓰기를 추구했다. 자기가 믿고 이해하는 바를 간결하고 명료하게 제시하는 훈련을 한다면 복음이 제시되고, 제시된 복음으로 진리가 보존되고 계승되고 확장될 것이다.

고경태 목사(주님의교회, 형람서원)
고경태 목사(주님의교회, 형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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