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설교, 신학, 성경 강의를 들을 때에 “예수님께서 죽기 위해서 오셨다”라는 문장을 듣습니다. 맞는 말처럼 느껴지지지만 사실은 맞지 않습니다. 기독론에서 그렇게 배우지 않았고, 성경도 그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독론(그리스도론)에서는 “예수님께서 오신 원인(motive)”은 “성육신의 동인(motive)”으로 배웁니다. 성육신의 동인은 신학자마다 많은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서철원 박사의 [그리스도론]을 참고하겠습니다. 성육신에서 등장한 문장은 어거스틴의 O felix culpa mea!(오 나의 죄가 복되다)입니다. 그것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구주 예수를 찬송하는 문장입니다. 서철원 박사는 "죄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을 성육신의 동인으로 제시하였습니다(서철원, 그리스도론, 46-47쪽, .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예수님께서 오신 원인을 “죽기 위해서 왔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오신 원인(motive)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여 임마누엘”을 이루시기 위함으로 말씀합니다. ‘구원’ 앞에 ‘죄인’이 있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인류 구원”이 아닌 “죄인 구원”입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다른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직접 화법으로 오신 목적은 “전도(preaching)”입니다.
첫째, 전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막 1: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눅 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둘째,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오셨습니다(눅 19:10).
(눅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셋째, 인자의 오신 목적은 많은 사람
요한복음은 전도할 내용을 제시하였습니다.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고 기록된 말씀에 부착해서 전도하도록 당부하였습니다.
(요 21: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요 21: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인자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도와 제자를 보내어 사역하셨습니다.
가면서 전파하여(마 10:7)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21:2) 사거리 길에 가서(22:9) 성안 아무에게 가서(26:18) 세상 끝날까지 제자를 삼으라(마 28:20).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눅 10:3).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눅17:14).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너희는 땅끝까지 나(예수)의 증인이 되라(행 1:8).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을까요? 성육신의 원인(죄된 인류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을 이루시기 위해서 속죄, 구속이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독재자처럼 칼의 정의가 아니고, 간신배처럼 위록지마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부당한 법관처럼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는 거룩과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죽으셔서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단순한 죽음이 아닌 자기몸을 속전으로 드림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앞 문장(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이 선행되어야 하고, 앞 문장이 없이 뒤 문장(죽으셨습니다)만 말하게 된다면 본의미(죄에서 구원됨)가 왜곡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구주의 속죄제사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습니다. 메이천 박사는 사실(죽음)이 아닌 의미(죄에서 구원함)가 복음이라고 제시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통합적 사고를 한다고 합니다. 저는 비빔밥 문화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다른 음식 문화에서 섞어 먹는 문화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볶음밥과 비빔밥은 같지 않습니다. 비빔밥은 열이 필요하지 않고, 변화가 무쌍합니다. 다른 재료를 배합해서 같은 즐거운 맛을 낼 수 있는 것이 비빔밥입니다. 그러나 진리 문제에서는 그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진리에는 반드시 예(禮)가 등장합니다. 기독교는 성령의 내주하심(임마누엘)의 종교입니다. 비가시적인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에, 가시적인 예(禮)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예법(禮法)은 명확한 순서를 갖고 있습니다(ritual). 성령과 진리가 있으니 비빔밥처럼 예배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엄격한 사고와 유연한 사고의 두 축이 있어야 합니다. 진리에는 되도록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과 진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증거할 때에 허리를 동아리고 수 만 번 생각하고 말을 해도 부족합니다. 우리는 구약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을 경외하여 전혀 침묵한 것처럼 침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솔하게 표현하고 부르는 것도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출 20: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사랑하고 흠모할 그 이름, 땅끝가지 증거할 그 이름, 주 예수는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만 전파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 구주 예수를 고백하며 전파하길 기대합니다.
<저작권자 © 리폼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