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 마음의 창, 눈
우리 인간들이 사회를 이루어 살면서 명심해야 할 것이, 人間이란 본래의 의미가 '더불어 살아야 할 존재'라는 것이다. '人間'이란 뜻속에는 '서로' 혹은 '함께' 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人間은 홀로서가 아닌 '함께로서의 존재'인 것이다. '人間'은 천부적(天賦的)으로 짐승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기에 이미 人間이란 이름속에는 '함께'로의 존재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창세기 1장에서 나오는 '금단의 열매'에 대한 말씀에서 보듯 '원죄(原罪 original sin)'의 인간은 태생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자유의지 (自由意志)'와, '사탄의 형상'을 동시에 지닌 이중인격자 (二重人格者)여서 그 속내를 가늠키 어려울 때가 있다. 그래서 옛말에 "열길 물속은 알수 있어도 한길 사람 속은 알수 없다."고 했다. 창세기에 보면 분명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다고 했다. 그런데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말씀처럼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심에 "에덴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너희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한 명령을 마음속에 있는 욕망의 사탄이 "먹어라 네가 그 열매를 먹는 날 너는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한 속삭임을 '하나님 말씀 위에 두고' 먹었다. 하나님의 인격은 탐심으로 얻어지는게 아니기에, 이 탐심으로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 할 '유한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후 人間의 모든 삶과 그 바탕 위에 만들어진 현대의 모든 문명까지도 오로지 '육신의 소욕'을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 성공의 가늠치도 세상적인 욕망의 잣대로 잰다. 그 결과로 물질 문명의 꽃을 피우게 된 현대문명의 틀속에서의 인간은, 문명을 창출한 인간 본연의 모습인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는 사라지고, 어느 순간 인간은 물질문명의 노예로 전락된 모습을 보게 된다. 몇해 전 일본 아베수상이 자객에 의해 살해된 것처럼 엇그제는 부산에서 야당 대표를 살해하려는 확신범에 의해 살인범이 찌른 비수가 그의 목에 꼿히는 순간 "이젠 죽었구나" 했을 것이나, 그는 예리한 칼끗이 목에 꽂히고도 살아 났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생명이 살인자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 장중에 있다는 이 신앙이 이제 퇴락의 길을 걷고 있다. 이제는 "하나님이 예비해 두셨다."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중심의 '모리아 신앙'은 사라지고, 오늘의 신앙은 육신의 욕망의 산물인 기복신앙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어,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 본연의 자리를 잃어가는 위기 앞에서 인간은 이제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오늘의 대한민국 정권이 左에서 右클릭하면서 남과 북이 혼돈을 낳고 있다.
우리나라 속담에 "긁어서 부스럼 낸다."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 정권이 문재인 정권에서 윤석열 정권으로 우클릭되면서 앞뒤 사리지 않고 북한을 주적으로 몰아가니, 북한도 대남 노선을 대대적으로 방향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이처럼 북한 김정은이 강경 노선의 카드를 들고 나온 이유가 무엇인가? 그동안 남과 북은 서로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로 규정해 왔었다. 하지만 북한은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북 노선을 주적의 적성국가로 천명하자, 북한 또한 지난 해에 '남측' '남조선' 이란 호칭 대신 '대한민국'이란 호칭을 쓰기 시작하며 대남 인식의 전환을 시사했고, 이번 전원회의에서 南이 먼저 북한을 주적국가로 표명하면서 북한이 남한에 대해 적대적인 '국가' 라고 공식 선언 했다.
현 정권이 문정권과 달리 북한에게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서방이 밉다고 서방질을 해서야 되겠는가? 지난 날 보수 정권이었던 이명박 정권도 실용주의 노선을 걸었다. 박근혜 보수정권은 한술 더 떠 당선되자 중국을 먼저 방문했었고, 북한을 '대박' 이라 말하곤 개성에 수출공단을 세우기도 했다. 이처럼 나라건 개인이건 앞을 내다보고 말과 행동을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하물며 남 북관계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똥을 더러워서 피하지 어디 무서위서 피하는 가? 그리고 똥을 거름으로 써야지 왜 버리나?
옛말에 "예쁜 자식에게는 매를 많이 주고 미운 자식에게는 밥을 많이 준다."고 했다. 여기서 매는 두말할 것도 없이 사랑의 매다. 북한은 이제 '한 민족' 이라는 특수성을 부정하고 남북 관계의 근간을 흔들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북한이 강조해 온 '우리민족끼리'를 바탕으로 한 통일 전략도 사실상 포기해버리겠다는 것이다. 이념으로 든 북한 정권의 바탕으로든 그러한 이기적 욕심을 버리야 민족통일이 보일 것이다. 이같은 북한의 노선 전환은 정권이 바뀔때마다 말이 바뀌는 남한에 대한 미련을 끊고 대남 압박 수위를 높여, 핵무기 고도화와 북한을 주적으로 낙인을 찍은 윤석렬정권에 대한 미련도, 남한의 차기 정권에대한 기대도 버리고, my way 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이젠 "적대적 교전 국가로 상대하겠다." 고 선언 함으로써, 근린 동포국으로 인정했던 '남 조선'이란 호칭도 버리고 대한민국을 적성국가로 간주함으로써, "사실상 핵무기를 사용할 수있는 길을 열어 명실공히 눈에 가시같던 장애물들을 제거하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북한은 한반도에서 의 핵무기 반대문제로 명분을 찾고있다가 윤석열정권이 들어서면서, 한미일 군사동맹이 체결되고, 중국과 러시아에 등거리를 두고, 북한을 적성국가로 낙인을 찍고, 또 한술 더 나아가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를 두고, '9.19남북 군사합의의 일부 조항을 효력정지' 함으로 북한에 대해 핑계의 빌미를 준것이, '불감청 고소원(不敢請 告所願)'이 되고 말았다.
북한은 또 9.19선언을 먼저 깨뜨린 것은 남한이라며, '강 대 강', '정면 승부'라는 말로 대외 강경 노선을 재 천명했는데 한반도 긴장 고조의 원인을 미국과 남측에 돌려,도발의 명분을 쌓으려는 분명한 의도인 것이다. 말이란 한번 뱉으면 쓸어 담을수 없다. 입은 음식을 먹고 삼키기도 하지만 잘못 씹은 것은 내 뱉기도 한다. 또 입은 마음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처지에따라 말을 바꾸기도 한다. 한 우물에서 단물과 쓴물이 같이 나온다. 이 입으로 먹기도 하고 먹은 것을 다시 내 뱉기도 한다. 북한은 먼저 이를 분명히 알아야 했다. 남과 북이 이념에 의해 서로 갈라선 후 북은 민족통일이라는 명분으로 6, 25라는 이념전쟁을 일으켰다. 현재 수년째 계속되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시라! 나라든 개인이든 모두 상대가 있는 법이다. 서로를 높이고 존중하는 마음이 없으면 욕심에 의한 권모술수가 종내는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기에 때론 당하고 속아도 정직해야 한다.
북한이 왜 이렇게 시퍼렇게 날이선 강경의 칼을 뽑았을까? 그들만이 안고 있는 내부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일부러 외부 긴장을 부풀림으로 내부의 어려움을 돌파하고 내부의 통제를 강화하려는 의중때문일수도 있다. 옛말에 "예쁜 놈에게는 매를 많이 주고 미운 놈에게는 밥을 많이주라." 고 했다. 남과 북이 서로 으르렁대서 좋을게 뭐가 있을까?
나는 내 동생이 술주정뱅이로 평생을 술독에 빠져 살았다. 내 동생은 맑은 정신으론 내게 전화 한통없다가 입에 술이 들어가면 전화를 했다. 내가 혹 "건강을 생각해서 술 좀 덜 마시거라."하면 형이 내게 언제 술을 사줘 봤냐?"고 했다. 그러던 내 동생이 지금은 없다. 술 주정뱅이 동생이라도 있는게 열배 백배 더 났다. 북한이 무력통일을 주창한다고 해서 우리도 무력으로 맛 대응을 해야 하나? 힘이 약한 생쥐도 코너에 몰리면 이빨을 드러 낸다. 저들이 믿을수 있는 것은 핵무기밖에 더 있는가? 북한에는 남한에 비해 훨씬 가난하지만 북한 젊은이들이 사는게 힘들만큼 가난해서 '출산 율이 낮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북한에서는 전혀 걱정없는 '심각한 출산율 저하'로 남한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하나님은 참으로 공평하신 분이시다. 북한에는 염려 없는 것이 왜 남한에는 골 때리는 발등의 불이 되고 있는가?
북한의 일거수 일투족에 눈에 쌍심지를 켜기보다 내치와 국제문제에 균형감각을 잃지 말고 민심을 잘 읽어서, 남한만 이라도 국론을 하나로 결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라! 통일이 되면 혹여 우리가 북한 이념에 먹히거나 사로 잡힐 염려는 어림없는 추측이다. 술주정뱅이였던 내 동생을 다시는 볼수없어 잃어버린 통한에 내 가슴이 시리듯, 이제는 지난 날 격었던 통곡의 민족전쟁은 한번으로 족하다. 그럼에도 북한은 새해들어 남한을 향한 새로 세운 기조 아래 핵 무력 증강에 더 힘을 쏟을 것이 확실하다.
그와 동시에 북한은 "전술 핵 공격 잠수함을 추가적으로 진수하고 또 원자력 추진 잠수함 개발도 2024년에는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 대선을 앞둔 미국과 총선이 예정된 남한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군사 도발 수위도 높여갈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인간들이 어찌 그리도 어리석은지 이는 세계 역사상 크고 작은 수많은 살륙 전쟁을 치르면서, 아니 지금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 의 끝없는 보복내지 살륙전쟁에서 얻은 것이 과연 무엇인가? 찬송가에 '어려울때 주님의 얼굴 보라' 는 찬송가 가사처럼, 북한의 도발에 과민하게 일일히 응대하려 하지 말고 인간을 다스리시고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 보시라!
[종그니 칼럼] 마음의 창, 눈
나는 본래 천성이 좀 띨띨하다. 그래서 주의 종이 된 이후 목사라는 직함 외에, 다른 직함을 가져 본 적이 없다. 나는, 교단 총회에 참석해 본 적도 없고, 노회에는 불가불 몇 번 참석해 보았는데, 회의 전에 성만 찬 예배를 한 후에, 곧바로 `노회 회의`를 진행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주의 종들의 성만 찬 예배 때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이중성에 놀랐다 예배 때의 주의 종들의 숙연한 모습은 간곳없고, 그들의 언행이 마치 시정인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입만 열면 교회법이 어떻고 하며, 말씀이 아닌 법조문을 앞세웠다. 주의 종들 대부분이, 말씀보다 법이 몸에 배어있는 듯 싶었다. 나는 젊은 날 몸에 밴 법의 모양까지 버리려고 애써 왔는데, 목사님들은 모든 사안을 법의 잣대로만 보시니,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웠다. 주의 종들에게 말씀이 아닌 法이 금과 옥조 라면, 본말(本末)이 전도된 것이 아닌가?
그럼 애시당초 법조인들이 되시지, 왜 종의 길을 택했을까 싶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라."하신 말씀이 있음을 기억하시라. 바울이 아직 사울이었을 때와 그가 주님을 만난 이후의 그의 언행을 보시라! 마음에 담고 있는 표현이, 곧 언어요, 그 사람의 인격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종에게 있어서랴!
23세에 혼자 되신 어머니의 유복녀로 태어난 딸이 있었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로, 미국 유학까지 마치고 돌아와, 우리나라 명문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고등학교 이후 교회를 등졌던 딸은, 어머니의 권면으로 어머니가 다니시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대 예배를 마친 후 잠시 교회를 둘러 보는데, 여인네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남정네들 험담을 하고, 장로가 다가와서는 처음 본 자신에게, 아들 대학 입학 청탁을 하고, 당 회의실에서는 다투는 소리가 문밖에까지 새어 나왔다.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나온 첫날, 너무 마음이 상한 딸은, 어머니에게 미주알고주알 보고 들은 대로 얘기하고는 엄마 손을 끌고, 인제 그만 집으로 가자고 재촉했다.
그때 조용하기만 하시던 어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평생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만 보았는데, 너는 딱 하루 교회에 나와서, 만나야 할 주님은 만나지도 못하고서, 득 되지 못한 이들의 허물만 참 많이도 봤구나."
어머니의 이 말 한마디에 딸 교수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홀로 살아오신 어머니가, 위로받고 싶어 교회 다니신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머니의 은혜의 눈으로 보시는 수준과 자기의 소위 세상의 잣대로 보는 수준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고 다르게 느껴졌다.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사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 누구든 자기의 눈높이 만큼만 보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내 눈에 보이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요양원에서 종사하고 있지만, 인지능력이 가물가물 하시는 어르신들과의 대화는, 어르신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한다.
독심술이란 다른 게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내 몸에 배어 있는 대로만 보이는 것이다. 세속에 물들여져 있으면 그 허상만 보일 뿐, 본래 보아야 할 것이 보이겠는가! 진실이 왜곡되어 보인다면, 내가 그 거짓에 가까이가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섬김이 몸에 배어 있다면, 섬김의 대상만 보일 것이고, 기도하는 사람은, 그 심성이 주님을 향하여 있으므로, 모든 게 은혜로만 보일 것이다. 인격의 변화는 믿음의 발걸음에 있다. 사랑은 자신을 녹여서 세상을 밝히는 촛불과 같다. 만일 촛불이 녹지 않는다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촛불처럼 나를 녹여서 어둠을 밝히는 삶! 이 또한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어렵다 마시라! 행함이 없는 삶은 변화되지 못한 삶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경우에 처해도 겸손한 자세를 갖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다. 행복은 감사와 비례하는 것이기에, 행복은 감사하는 사람의 전유물이다. 인도의 시성 타골이 "감사의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이다"라고 했듯이, 감사한 만큼 사람은 사람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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