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종교개혁 500주념을 맞이하면서 한국 교회는 칭의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논쟁에서 최종 귀결점은 “구원의 탈락가능성”에 대한 논의였습니다. 김세윤 교수는 ‘유보적 칭의론’으로 구원의 탈락 가능성을 근거해서 성화 이해를 전개했습니다. 김세윤 교수의 주장에 최갑종 교수는 동의했습니다(참고, 최갑종, <칭의란 무엇인가?>, 새물결플러스, 2016). 이에 최덕성 교수는 “구원의 확실성”(성도의 견인교리)이 이신칭의 교리에 부합된 체계임을 밝혔습니다.
구원의 확실성은 신자의 삶에서 명료하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 이해의 출발점이 루터(Martin Luther)에게 있습니다.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루터에게, 1518년 당대 최고 수준의 신학자 추기경 카예탄(Cardinal Cajetan)과 아우구스부르크(Augsburg)에서 논쟁했는데, 주제 중 하나가 “믿음과 구원의 확실성(the nature of faith and certainty)”에 대한 것입니다. 면죄부(indulgences) 논쟁에서 믿음과 구원의 확실성 분야로 논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루터를 굴복시키려고 했지만 루터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믿음과 구원의 확실성을 주장했고, 로마 교회는 그러한 주장을 정죄했습니다. 이러한 패턴은 트렌트 회의에서 평행선으로 귀결되었습니다. 트렌트 회의에서 믿음의 확실성을 주장하는 것에 정죄(anathema, 저주)를 선언했습니다(참고, 최덕성, “트렌트공의회 칭의론과 칼빈의 해독문(解毒文): 김세윤의 칭의론과 관련하여”, <역사신학논총>30권, 2017년).
‘구원의 확실성’은 루터와 칼빈, 종교개혁 교회의 산물로 여겨진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개혁파 내부에서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도전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첫째 도전은 알미니우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알미니안’입니다. 후기 개혁파들은 알미니안을 배격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지만, 알미니안의 가르침은 ‘구원의 확실성’을 유지하는 것에서는 알미니안에 동조했습니다. 이것은 알미니안과 로마 카톨릭 교회가 동일한 기초에 있는 것입니다.
루터와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는 개혁파라면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서 의심하거나 도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 은혜(sola gratia)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인간이 개입하거나 간섭할 수 있다면 구원의 확실성은 세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이 전적 하나님의 사역이면 확실성을 갖추는 것입니다. 구원하신 하나님의 의지는 불변하기 때문이며, 또 십자가 구속의 은혜가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피, 십자가의 은혜로 성취됩니다. 개혁파는 하나님의 의지만을 강조하는 하이퍼 칼빈주의가 있고, 보편속죄를 허용하는 낮은 칼빈주의가 있습니다. 하이퍼 칼빈주의에서 구원의 확실성을 강조하고, 낮은 칼빈주의에서는 보편속죄를 근거로 전도와 생활에 열심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구원의 확실성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 하이퍼 칼빈주의로 매도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실성은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주의 자녀가 피할 수 없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인간의 의지나 열정이 개입되는 것을 우려해야 합니다.
루터가 초기부터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신학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루터에 따르면, 하나님의 뜻과 말씀(약속)에 대한 확고한 신뢰로서의 믿음은 개인적인 구원의 확신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구원의 근거이시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학에 따르면,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협력하여 이루고자 한다면, 개인적 구원의 확신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권진호, “‘구원의 확신’에 관한 루터와 카예탄의 논쟁-에큐메니칼 운동의 방향설정을 위한 제언-”, <한국교회사학회지>37권, 2014년). 참고로 권진호는 루터와 카예탄을 융화시키려는 의도로 연구했다.
한국 장로교회는 “청교도주의에 대한 이해”를 놓고 다시 토론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주제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언약(행위언약, 은혜언약),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수동적 순종, 회심준비론, 율법 이해 등입니다. 토론 주제가 방만하게 흩어지면 명료한 토론을 세우기 쉽지 않습니다.
필자는 먼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데로 장로교 세움을 제언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통합(세 왕국을 한 믿음으로)을 위한 문장입니다. 즉 여러 신학적 견해를 수용하며 한 믿음 체계의 교회를 이루려는 의도입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표준문서로 세우고 여러 신학적 주장이 발표하며 토론하면서 보다 엄선된 신학 개념이 산출될 수 있도록 정진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없는 어휘에 대해서, 없지만 있다고 주장합니다. 왜 없는 것을 있다고 주장하는지에 대해서 명료하게 밝히면 좋습니다. 또한 부당한 억측으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폄훼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충분히 수정이 가능한 문서이며, 교단마다 자체적으로 수정해서 채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표준문서로 세움도 합의가 되지 않는다면, 좀 더 포괄적 개념인 “구원의 확실성”으로 합의하는 것을 제언합니다. “구원의 확실성”을 갖고 있다면, 루터와 칼빈의 범주에 있는 개혁파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실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루터와 칼빈의 범주가 아닌 “알미니안 < 로마 카톨릭주의”가 될 것입니다.
루터는 예정론에 대해서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지만,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확고한 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송다니엘 목사는 루터가 예정론에 내포된 분쟁 요소를 알았기 때문에 예정 이해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고 제언했습니다. 에정론과 구원의 확실성은 한쌍으로 보아야 하는데, 구원의 확실성을 주장하면서 예정론에 대해서 소극적인 루터의 신학하는 방법의 독특성입니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을 신학의 주요 목표로 삼았습니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신자의 자기부정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을 목표한 것입니다. 중세 스콜라주의가 영광의 신학으로 진리를 질식시키려 한 것에 대한 변호적 방법입니다.
구원의 확실성, 개념은 종교개혁 초기부터 뜨거운 감자였고, 종교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그리고 종교개혁 500년 뒤에도 여전히 뜨거운 감자입니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은 구원의 확실성을 굳건하게 유지하고 있고, 칼빈은 예정 이해를 이중예정으로 구체화시켜 구원의 확실성을 더 체계적으로 구축시켰습니다. 개혁파라고 하면서 “구원의 확실성”을 부정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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